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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3
우타노 쇼고 지음, 현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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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가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
여기 소년 탐정 김정일, 아니 김전일이 그런 인물이다. 우리의 전일 씨는 <데스노트>라도 품고 다니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족족 죽어넘어간다. 친구, 친구의 친구, 아는 사람, 그 누구든 관계없다. 김전일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걸 <북두의 권>의 명대사를 빌어 표현하자면 "넌 이미 죽어있다!"쯤 되시겠다. 죽는 순서 1번이냐 2번이냐의 차이일 뿐. 아파트 청약 순위도 아니고 이 무슨!
죽는 것도 억울한데 곱게 죽는 사람은 또 아무도 없다. 도끼 살인마 쯤은 애교. 게다가 죽는 사람은 하나같이 '밀실'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어쩜 그토록 지조있게 '완벽한 밀실'에서 시체로 발견되는지. 침입의 흔적, 탈출의 흔적, 그 딴 거 없다. 이러니 무능한 경찰은 맨날 '소년'인 김전일에게 죽는 소릴하고, 아직 '소년'이라 경제관념도 없고, 직장도 없고, 여친도 없는 김전일은 마음씨 착하게 사건을 척척 해결해준다. 노동이 없으면 임금도 없는 게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의 진리인데, 전일 씨는 노동만 있고 임금은 없다. 고용주 또는 부르주아 입장에서 정말 착하기 그지없는 노동자 전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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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 짝퉁 너훈아. <중년탐정 김정일>은 <소년탐정 김전일>의 앗쌀한 개그버전 -_-;;;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이 말은 소년 김전일이 자주 읊조리는 말이다. 명탐정이었던 할아버지 '긴다이치 코스케'의 이름을 걸고 사건을 해결하겠단 소린데, 아니 무슨 할아버지 명의의 통장에 사건 해결 찬조금이 입금되는 것도 아니고, 할아버지의 이름이 뭐? 할아버지가 명탐정이었는데 할아버지의 아들인 전일 씨 아버지는 '탐정'이 왜 안 되었겠는가. 밥벌이가 시원찮으니까 아버지가 명탐정이건 말건 생업과 살길을 찾아 떠난 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깊은 뜻도 모르고 왜 전일 씨는 탐정놀이에 빠지는지. 전일 씨 발자국마다 피가 뚝뚝 떨어진다. 온통 피칠갑이다. 도끼에 찍힌 머리만 봐도 트라우마가 장난 아닐텐데, 우리의 전일 씨는 매일매일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피바다 속으로 돌격 앞으로! 인데도 정신이 멀쩡하다.
(참고: 전일 씨 할아버지의 활약상은 요코미조 세이시의 책을 잘 살펴보시라)
그런데 나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는 명탐정이 한 명 더 있다해서 찾아보았다.
그를 만났더니 생업 유지가 안 되는 푼돈 수입의 탐정일로 스트레스를 받아 슬슬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하는, 그래서 버섯머리 가발을 쓰고 다니는 탐정이시더라.
어떻게 해야 돈 좀 만져보나 고민하는, 그런 현실 속 명탐정이더라. 그분 말 빌어보면 ''다잉 메시지'는 무슨 얼어죽을 다잉메시지? 칼에 찔리면 얼마나 아픈데 자신의 피로 암호같은 다잉메시지를 남기겠는가? 그럴 시간이면 문밖으로 기어서라도 도망가야지 않느냐'는 것. 게다가 뭔놈의 밀실 살인이더냐. 그냥 문닫고 지가 자살한거지. 아아, 솔직한 리얼 생계형 명탐정 되시겠다. 그런 분 어디가면 볼 수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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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다, 여기.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를 쓴 우타노 쇼고는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로 국내 추리물 매니아들에게 꽤 알려진 작가이다. 그런데 갑자기 웬 밀실? 더구나 '밀실트릭 3부작?' 이거이거, 밀실은 우리 전일 씨 덕분에 물리도록 봐왔는데, 뚜껑 열어봤자 시시한 거 아닌가 싶다. 완벽한 밀실 운운하며, 피칠갑 시체들, 정말 손에서 피비린내가 날 정도로 전일 씨 책에서 봐왔는데 21세기에 왜 또 밀실?
그런데 책장을 열어보니 전일 씨와는 완전 딴판인 리얼 생계형 찌질이 탐정 나와주신다. 명품 정장 걸치고 사건을 즐기듯 농락하듯 멋진 폼으로 유유자적 "범인은 너지!"하는 건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흐름과 똑같다. 그런데 이 탐정, 방에 올라와서 한다는 소리는 '내가 왜 이짓을 하고 있지? 그러니까 첫단추가 중요한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돈도 안 벌리고 머리는 빠지고 여친도 없고 이런 우울한 짓을 내가 왜 하고 있지? 경찰놈들, 공무원놈들의 사례비는 쥐꼬리만하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돼? 한방 뭐 없을까?' 그러고 앉아있다. 아, 이쯤은 되어야 현실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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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는 두 번의 의미심장한 반전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너희는 안 돼. 걔는 너의 이복동생이야!'라는 상투적인 반전 따윈 결코 아니다. 적당히 때에 찌든 세속적인 명탐정과, 그를 좇는 정의감이 투철한 '소년' 같은 조수, 이 둘의 화음은 허탈하고 어이없으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반전 또한 그렇다. 그러나 더는 말 못하겠다. 더 말하면 스포를 날리는 게 되므로.
장르문학이나 추리물, 연재와 단행본이 발달한 일본은 우리를 길들여왔다. <소년탐정 김전일>을 비롯한 일본만화들은 '산을 넘으면 또 산이 있다!'는 식으로 강한 적을 쓰러뜨리면 또다시 더 강한 적이 나오는 점입가경 식 구성으로 만화팬들의 주머니를 털어왔다. 저 유명한 <드래곤볼>부터 <슬램덩크>까지, 적과 맞서 싸우며 더 강해지고 성장하는 주인공들의 눈물겨운 스토리를 보여왔다. 하나의 성공 공식이기도 하고. 하지만 뼈대를 살펴보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반복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다 알면서도 그 무한반복에 긴장하고, 또 기다리고, 다시한번 주인공이 통쾌하게 승리하길 기대한다. 그렇다. 주인공은 결코 죽지 않으니까. 이번 적도 충분히 무시무시하지만 충분히 더 강한 적이 또 나올 것이고, 또 이기리라는 것을 안다. 주인공이니까.
그런데 그런 공식,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에는 없다. 이불 속 개그랄까? 아닛, 뭐야? 이건 뭐야? 했는데 집에가서 자려고 누워 이불을 덮으면 그때서야 웃음이 터지는, 아니면 그 때서야 무서운 이야기였다는 걸 알고 온몸에 솜털이 곤두서며 소름이 돋는.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에는 상투적인 반전, 반전을 위한 반전 따윈 없다. 분명 밀실이 있고 트릭이 있지만, 설득되는 현실과 때묻은 정의, 그리고 앞만 보며 달려가는 정의가 공존한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 째 단편인 <생존자, 1명>이 인상깊었다. 반전도 자연스럽고, 이야기의 흐름도 물 흐르듯한다. 깔끔하게 잘 짜인 작품이다. 고립상황의 사람 심리를 적절히 묘사했다는 인상! 조금씩 조여와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만드는 구성과 엮여있는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심리가 좋다.
마지막 세 번째 작품인 <관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는,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쓸쓸하게 저무는 이의 마지막 꿈을 노래한듯하다. 질펀한 피바다도 없고 이렇다할 사건도 없지만 쓸쓸한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홀로 존재하여 빛을 낼 보석 같은 단편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관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야말로 추리물을 읽는 순간, 바로 그 시간과 공간을 '낙원'처럼 여기는 추리소설의 진정한 팬들에게 헌화하듯 띄우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장르문학과 추리소설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수년간 추리소설의 내공을 쌓아온 정통 추리독자들은 아마도 이 작품을 읽으며 깊게 공감하고 위로를 얻을 게 분명하다. 이런 글을 쓴다는 건, 저자 자신의 '추리소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없다면 구상조차 못할 작품이니까. 쓸쓸하고 처연하나 작가의 마음이 엿보여 좋았다. 이렇게 죽는 것도 아주 나쁘지만은 않겠지. 자신이 평생 품어왔던 꿈을 풀고나서 맞이하는 그런 죽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