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구판절판


나는 고깃집에서 쌈을 싸먹지 않는다. 쌈을 싸먹는 경우는 하나다. 바다건너 온 고기들, 수입산이라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듯 네모 반듯하게 잘린데다 겨울철 주공아파트 베란다 유리창에 성에 끼듯 살얼음이 살짝 낀, 동물성 단백질이라는 것 정도로 만족해야하는 고기를 먹을 때 뿐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고기맛이 없다면 풀맛으로. 고기가 맛있는 집에선 그저 고기만 주워먹는다. 내 이와 혀와 눈이 고기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다. 기름장도 사양이다. 쇠고기는 약간의 소금만 있어도 충분하다. 진짜 참기름도 아닌 것에다 소금 풀어봤자 뭐하나. 진짜 참기름은 그것 자체로 맛나고, 쇠고기는 쇠고기의 기름 자체로도 만족스럽다.

나는 조용히 까탈스러운 편이지만, 우리 아버지는 대놓고 까탈스러운 미식가시다. 자가용 없이 지금도 대중교통을 이용하시고, 좋은 집으로 이사 한번 가보자는 어머니 말씀에도 그저 "됐어." 한마디로 끝내시는 분이지만, 입에 들어가는 음식 하나만큼은 '인정'과 '관용'이 허락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맛없는 식당에서는 화를 내시고 밥 대신 쏘주만 자신다.

언젠가 여자친구를 인사시켜 드린다고 시골에 내려간 적이 있다. 아버지는 보수적인 시골 양반이라 그 앞에선 둘이 손도 잡지 못하고, 그저 긴장한 채 아버지 낯빛을 살폈다. 당시 내 여자친구는 아버지 마음에 탐탁치 않은 사람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좋다 싫다 왜왔냐 괜히 왔다, 이런 말 한마디 없이 어딘가로 전화를 거셨다. 그러고는 식당 이름을 알려주시며 택시타고 얼른 가란다. 뭘 먹겠느냐, 뭐 그런 물음도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등돌려 나가는 나를 불러 십만 원짜리 수표를 한장 쥐어주셨다. 도착한 곳은 복어집. 나나 여친이나 복어는 처음이었던지라 비교 대상이 없으니 그집이 맛있었는지 없는지 평가할 깜냥도 되지 못했다. 다만 밑반찬의 하나로 북어국이 나왔는데, 평생 먹어본 북어국 중 그집의 맛이 최고였다는 것만큼은 똑똑하게 기억한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시다. 밉든 좋든 일단 찾아온 손님은 맛있는 걸 먹여 보내야한다. 먹는 게 자신에게 있어 큰 즐거움이므로, 상대에게도 최고의 즐거움을 대접하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나는 회를 좋아한다. 한점 먹어보고서 이게 무슨 생선이다, 생선 대가리만 봐도 이놈은 고놈이다, 라고 말할 수준은 물론 아니다만, 회는 사양치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나고자란 곳이 전북 군산이다. 군산하면 부산과 함께 회 하나로 유명한 곳 아니던가. 봄철의 군산 주꾸미도 최고이고. 그런데 군산에서는 여름에 횟집들이 일시에 문을 닫는다. '내부수리' 명목이지만 군산에선 여름에 회를 먹는 이도 적고, 횟집도 굳이 팔 생각을 않는다. 여름은 어종, 어획량 모두 적고 제철 생선이라 할만한 게 그닥 없기 때문인데다 먹고 탈이 나는 것도 우려해서다. 여름에도 문을 연 집이 있다면 수도권에서 역풍으로 내려온 '광어 한 마리 9,900원', 뭐 그런 횟집들이다.

회가 그리운데 여름이라 그저 참고 살았는데, 어젯밤 몹쓸 책을 한 권 읽고 말았다. 진실로 땅을 치며 후회했다. 첩첩산중 달도 안 뜬 어둔 밤 오솔길에서 삼 일 굶은 호랑이를 만난 선비가 흘린 땀을 종지로 받아본다 한들, 내가 어젯밤 이 책을 읽으며 흘린 침보다 양이 적을 것이다. 아, 이놈의 몹쓸 책, 모 일간지에서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라고 연재되었던 것을 엮은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이다.

이런 망할 책 같으니라고. 감칠맛 나는 글만으로도 간장게장마냥 맨밥 한 끼 뚝딱이지 싶은데, 사진까지도 침을 돋게 만든다. 사진속 횟감으로 쓸만한 갈치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무림고수의 번쩍이는 검처럼 은빛찬란 물 좋은 갈치를 엊그제 마트에서 봤다. 아, 물좋다! 하며 다가갔더니 한 마리 5만 원. 쓸쓸한 발길 돌리는 것을 보니 나도 아버지를 닮았다.

그러고보니 갈치회와 고등어회도 복어회 여친과 처음으로 먹었구나.

소설가 한창훈 작가님의 글은 이전에도 맛깔나게 보아온 터였다. 소설집 <나는 여기가 좋다>의 경우, 책장을 넘길 때 바닷바람과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듯했고, 뭍보다도 바다가 더 좋은 갯놈의 처연함이 온몸을 휘감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새로 나온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는 음식만화인 <식객>으로 유명한 만화가 허영만 선생이 먼저 읽고 빠져들었다 하고, 섬에서 나고 자란 배우 고두심 님 역시 좋다 말하니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 그저 구미가 당기고 말았어야 했다. 딱 그선에서 끝내야 했다. 선을 넘듯 책장 넘긴 게 잘못이다. 차라리 야쿠자 오야붕의 애인을 집적거리다 선을 넘는 바람에 일본도를 피해 도망다니는 게 낫지, 늦은밤 책 읽다 새벽녘에 미친 듯 회가 먹고싶어지는데 어쩌란 말인가! 스탠드 하나 켜놓고 책 읽다가 앉질 못하고 거실을 서성였다. 아, 생선! 아, 바닷것! 뭐 없을까, 뭐 없을까? 비린 것 뭐 없을까? 정말 우리집에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일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쏘주는 한 병 있는데 물고기는 어디에서! 어디에서!

시간 보니 횟집 문 다 닫았을 시간이다. 이런 망할, 이런 젠장할! 왜 이런 책을 쓰고 만들어서 이 쌩난리냐고!

아, 저기... 작가님 맞으시죠? 글 쓰는 분 맞으시죠? 그러나 사진 속 한창훈 작가님은 영락없는 뱃사람, 어부의 모습이다. 아마도 작가님 만나뵈러 내려갔다가도 회 써는 모습 보면 그저 동네 뱃꾼이려니 해서 "거 아저씨, 담배 한 가치만 꿉시다!"라고 말하고 넘어갈지도......

물론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는 결코 요리책이 아니다.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라는 신문 연재 당시의 제목에서 잘 보이듯, 1814년 손암 정약전 선생이 쓰신 <자산어보>를 200년 후의 '생계형 낚시꾼' 한창훈 작가님이 현세와 연결시켜 밥상으로 끌어올렸다 보면 맞겠다. 월척이다. 흑산도 바다 동식물에 관한 사전쯤 되는 <자산어보>, 가치는 높다만 "그래서 뭐?"하게 되는 옛날 책을 이렇게 맛깔스럽게 밥상으로 끌어올리다니 월척 낚은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이 몹쓸 책에는 친절하게도 이런 장면까지 풀컬러 사진으로 지원해 주신다. 이 책, 공포영화의 공식과 똑같다.

1. 절대 밤에 읽지 말것! (공포영화에선 밤에 꼭 당한다.)

2. 절대 혼자 읽지 말것! (바보같이 혼자 나가는 금발 글래머 여자부터 먼저 죽는다.)

그러니까 낮에 여럿이 읽다가 마음 동해 횟집가서 쏘주 한 잔 하면 완벽하단 소리다.

책은 자산어보에서 손암 정약전 선생이 언급한 바다 동식물의 옛이름과 설명을 소개하고, 그에 따르는 21c 생계형 낚시꾼 한창훈 작가님의 추억과, 손맛과, 인생과, 바다내음을 열거한다. 글 자체로도 충분히 맛깔스럽고 눈물겹고, 사람들 부대끼는 땀내와 바닷내가 어우러져 있다. 요즘 인기를 얻는 만화 중에서 비슷한 느낌의 작품이 있는데 바로 <심야식당> 되시겠다. <심야식당>도 무척 훌륭한 작품이다만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는 흑백의 밤식당에 비해 으리번쩍 눈이황홀 컬러 사진으로 바다를 생생하게 옮겨왔으니 훨씬 더 씹는맛, 읽는맛이 좋다 하겠다.

읽으면서 이렇게 포만감이 느껴지고 만족스러웠던 적이 별로 없었다. 바다도 좋고, 바다에서 나는 '사는 것'과 '먹는 것'도 좋고, 그안에 얽힌 사람 이야기, 사람의 생 이야기도 참 좋더라. 몰랐던 것은 새로 알게되니 좋고, 알았으나 정확히 몰랐던 것은 더 깊이 알게되니 더욱 좋다. 글만으로도 맛있으나 사진과 정보와 뒷이야기 또한 메인메뉴 못잖은 깜찍하고 맛깔난 요리로 충분하다.

그러니 요즘 환절기라고 입맛 없는 양반들, 맛깔난 책 있으니 한번 맛볼 것을 추천한다. 책 모양새부터가 다르지 않은가? 앞표지에 물좋은 생선의 프로필 사진이 자리하고 있는 자태 하나로도, 충분히 황홀하다 하겠다. 그러니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허기진 속과 인생을 달래는데는 바다가 최고다.



갈치, 삼치, 모자반, 숭어, 문어, 고등어, 군소, 볼락, 홍합, 노래미, 병어, 날치, 김, 농어, 붕장어, 고둥, 거북손, 미역, 참돔, 소라, 돌돔, 학꽁치, 감성돔, 성게, 우럭, 검복, 톳, 가자미, 해삼. 그리고 마지막 하나의 바다 생물은..... 비밀이다. 다만 놀랄 준비만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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