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도 널리 알려져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 워낙 유명한 책이라 작품 내용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두 판본의 번역을 비교해보려고 한다.


원제목은 'ノルウェイの森', 글자 그대로 '노르웨이의 숲'이고 1987년작이다. 우리나라에는 1989년에 '상실의 시대'라는 번안제목으로 나오면서 대박이 났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문학사상사판으로 이 작품을 처음 접했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당시 대학생때 이 책을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번역가는 유유정씨라는 분이고 여자 이름같지만 사실은 남자분이라고 하며 1922년생이면 아마도 지금은 작고하셨을 것 같은데 검색을 해봐도 이 분에 대해서 더이상 자세한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다.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작품이었고 어느덧 고전으로 자리잡은 만큼 2013년에 스타급 번역가인 양억관씨를 내세운 민음사판이 나오면서 비로소 지금의 양강구도가 이루어졌다. 양억관씨는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너무나 친숙한 이름이고 역시 유명 번역가인 김난주씨와 부부지간이기도 하다.



현재 이 작품을 구매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틀림없이 문학사상사의 '상실의 시대'와 민음사의 '노르웨이의 숲', 이 두 가지 번역본 가운데 하나의 선택을 놓고 고민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그전부터 품어왔던 개인적인 궁금증도 해소할 목적으로 겸사겸사해서 시작한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별 고민할 가치도 없는 싱거운 결과가 나와버렸다.


이번 번역 비교를 위해 거의 30년전에 읽었던 '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은 다음, 그 느낌을 그대로 간직한 채 새로 구매한 '노르웨이의 숲'을 한번 더 꼼꼼하게 읽어나갔다. 


먼저 두 출판사의 인쇄 스타일부터 체크하고 넘어가자. 번역 외적인 요소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독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라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마도 본인이 중간중간 특별히 포인트를 주고싶은 단어나 문장은 다른 활자와 구분이 되도록 원서에서도 간단하게 어떤 표시를 해두었던 것 같다. '상실의 시대'에서는 이것을 글자 위에 점을 찍어서 구분이 되도록 했고, '노르웨이의 숲'은 명조체에서 고딕체로 글자체를 바꾸는 것으로 처리했다. 당연히 점을 찍은게 눈에 바로 띄고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잠깐이라도 생각해보게 된다. 그에 비해 글자체 변경은 정말 눈여겨보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무심코 그냥 지나칠 것 같다.



또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쓴 편지를 그대로 옮겨놓은 부분이 자주 등장하는데 '상실의 시대'에서는 글자체와 굵기를 모두 다르게 해서 확실히 구분이 된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숲'은 글자 크기만 살짝 줄인 정도라서 역시나 뚜렷하게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주석 부분도 확실히 '상실의 시대' 쪽이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필요한 부분을 잘 찾아서 과하거나 부족함없이 적절하게 들어가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쯤되면 본론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감이 왔을 지도 모르겠다. 이제 본격적으로 본문 번역에 대한 비교에 들어가면...



각각 굵은 글씨와 글자체의 변경으로 특별히 강조를 하고있을 정도로 화자인 주인공의 심정을 표현한 초반부의 중요한 문장이다. 한눈에 봐도 '삶의 반대편'이라고 풀어서 해석한 유유정씨의 번역이 월등히 매끄러운 가독성과 함께 그 의미심장한 느낌까지 즉각적으로 다가온다. 양억관씨가 사용한 '대극'이라는 단어는 아마도 원문에 쓰여진 '対極'라는 일본어를 그대로 가져온 것 같다. 일본에서는 '반대편에 위치하다'라는 뜻의 이 단어를 흔하게 쓰는 지는 몰라도 우리는 살면서 거의 쓰지않는 단어라 어색하고 입에 잘 붙지를 않는다.


아무리 직역이 원본에 가장 충실한 번역이라는 의견이 많다고 해도, 원작자가 특별히 강조까지 한 문장인데 이렇게 딱딱한 느낌으로 다가온다면 작가가 원래 의도했던 느낌에서 오히려 벗어난 것일 수도 있다고 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물론 일부러 좀 난해한 표현방식을 구사한 책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작품 만큼은 매우 쉽고 대중적인 화법을 사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양억관씨도 직역보다는 의역을 많이 사용하는 스타일로 알고있는데 굳이 이렇게 딱딱하고 어색한 문장의 직역을 사용한 것은 기존의 번역과 차별성을 주기 위한 의도가 강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 부분은 작가만의 섬세한 감성이 느껴져서 참 인상적으로 와닿았던 문장인데 열여덟 살 다음에는 열아홉 살, 다음에는 또 열여덟 살로 돌아가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순수한 마음을 아름답게 전달하는 유유정 번역과는 달리, 양억관 번역은 '이해가 간다'는 전혀 맥락에 맞지않는 생뚱맞은 표현으로 독자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포인트를 허무하게 그냥 날려버리고 있다. 이것은 작품이 가진 정서를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야할 문제다.



초반부 주인공이 기거하던 대학교 기숙사의 모습을 묘사한 장면이다. 역시 유유정 번역의 '상실의 시대'가 노래가사와 맞물려 국기가 올라가는 모습을 훨씬 매끄럽게 잘 다듬어서 번역하고 있어서 가독성이 좋다.


1인칭 화자이면서 와타나베라는 이름을 가진 이 책의 주인공은 단 몇마디로는 정의하기 힘든 다양한 면을 보여주는 복합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작가 스스로가 자전적인 소설이라 했으니 하루키 본인의 성격과 거의 비슷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내성적이면서 조용하고 냉소적이지만 때론 따뜻함과 유머가 있고, 상대방을 충분히 배려하면서도 눈치 보지않고 할 말은 똑바로 하는 단호함도 있고... 책을 읽다보면 이런 주인공의 다양한 측면에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것은 행동보다는 주로 대사와 말투에서 대부분 표현이 되고있다.



이 대사는 주인공이 자신의 룸메이트에 대해 다른 친구들에게 하는 농담이다. 유유정에 비해 양억관의 번역이 좀더 거칠고 천박한 표현을 쓰고있다. 분명히 같은 내용의 문장임에도 인물의 성격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전체적으로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주인공이 좀 싸가지없는 말투를 쓴다는 느낌이다. 이렇게되면 주인공에 대한 호감도나 감정이입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오코에 대한 마음을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내가 얼마나 너를 '그리워하는지' 알게되었다는 유유정의 번역에 비해 내가 얼마나 너를 '갈구하는지' 알게되었다는 양억관의 번역은 주인공을 다소 자기중심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 이렇게 특정 단어의 선택에 따라 전혀 다른 뉘앙스로 다가오는게 번역의 위력이다.



나가사와라는 학교 선배와 나누는 대화인데 각각 '이상한 사람'과 '색다른 사람', 그리고 '제대로 된 인간'과 '인간다운 인간'이라는 단어의 차이가 있다. 대화의 전후 맥락을 고려하면 '상실의 시대' 쪽의 티키타카가 더 자연스럽다.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쓴소리한 것을 들킨 장면인데 유유정의 '당연하잖아요'는 약간 미안한 마음을 섞은 능청스러움이 들어간 표현이라면 양억관의 '당연하죠'는 거리낄 것 없는 단호함과 냉정함이 묻어나온다. 주인공의 성격과 그전까지 쌓아온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역시 유유정의 번역이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는 매끄러운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이 부분은 '내겐 아까운 여자'보다 '나한테 과분한 여자'가 더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어지는 문장인 '지당하신 말씀이다'가 완전히 망쳐버렸다. 작품의 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촐싹대는 느낌인데 왜 이렇게 번역했는지 모르겠다. 


이 작품에서 정말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등장하는 미도리는 주인공 와타나베의 특이한 말투나 유머감각에 매력을 느끼고 호감을 표시한다. 말투가 험프리 보가트를 닮았다는 둥 '호밀밭의 파수꾼' 주인공 같다는 둥 구체적인 예까지 들어가며 얘기하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그 특이하다는 말투의 느낌이 어느 정도 와닿아야 한다.



두 번역판을 가만히 비교해보면 굉장히 미묘한 차이이긴 하지만 '상실의 시대'는 주인공 말투의 특이한 느낌을 살리기위해 분명히 신경을 쓰고있으나, '노르웨이의 숲'은 그런 디테일한 부분까지는 미처 고려하지 않은 것처럼 일반적인 말투와 거의 차이가 없는 느낌으로 평범하게 처리하고 있다. 심지어 미도리가 주인공의 말투를 따라하는 대사라는 점도 유유정은 '되뇌었다'라고 확실하게 알려주고있는 반면, 양억관은 그냥 '말했다'로 처리해버리니 이 장면의 잔재미를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여기도 역시 미도리가 주인공 말투를 따라하며 호감을 표시하는 장면이다. 미묘하지만 유유정의 번역이 말투의 특이함과 함께 두 사람의 귀여운 티키타카를 훨씬 따뜻하게 살려내고 있다.



이런 부분도 번역에 따른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어서 두 사람의 성격이나 캐릭터를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게 다가온다. 하루키가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관계묘사를 정말 섬세하게 그리고있기 때문에 번역이 이런 부분을 잘 살려주지 않으면 숨어있는 잔잔한 감동을 느끼기 힘들다.



나오코의 편지에 쓰여진 표현도 양억관이 선택한 '뒤틀림'이라는 단어보다는 유유정의 '일그러짐'이나 '비뚤어짐'이라는 단어가 더 부드럽게 다가온다.



나가사와 선배에 대해 나오코와 나누는 대화에서도 '특이한 사람인 모양이야' '이상한 사람이지' '그렇지만 좋아하는 거지?'라는 마치 상대방의 말에 호응을 안해주고 자기 할 말만 하는 듯한 다소 맥이 끊기는 느낌의 양억관 번역에 비해 '좀 이상한 사람 같네' '그래, 좀 이상한 남자야' '그래도 좋아?'라는 유유정이 번역한 대화의 흐름이 훨씬 자연스럽고 매끄럽다.



그리고 여기는 나오코와 연락이 끊겨 마음이 심란한 시기를 묘사한 부분인데 '상실의 시대'는 각각의 행동에 쉼표를 넣어서 당시 주인공의 행동 패턴이 반복적으로 줄곧 그런 식이었음을 보여주고있는데 반해 '노르웨이의 숲'은 한 문장으로 이어져있어 마치 일회성 행동처럼 느껴진다. 쉼표가 있고없음으로 인해서 그 의미가 상당히 달라지는 느낌이다. 띄어쓰기가 없는 일본어문장의 특성상 아마도 원문에는 쉼표가 없었을 거다. 바로 이런 부분이 번역가의 재량이자 센스가 발휘된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 나는 당연히 쉼표가 들어간 것이 원작의 의도와 일치하는 해석이라 생각한다.



또 선배에게 인생의 행동규범이 뭐냐고 물었을 때 신사여야 한다고 대답하자 '상실의 시대'는 '신사 숙녀 할 때의 그 신사'냐고 정확하게 이해를 돕는데 반해 '노르웨이의 숲'은 막연하게 '그 신사'라고만 하니 바로 알아듣기가 힘들다. 물론 이것도 '신사 숙녀' 부분은 원문에 없었는데 유유정 번역가가 임의로 추가한 문장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라면 양억관씨가 원래 있었던 단어를 삭제했다는 말인데 그럴 리는 없겠지... 어쨌든 결과적으로 신사 숙녀라는 말이 들어가는게 훨씬 가독성이 높다.



여기에도 양억관은 그냥 한명이라고 갑작스럽게 앞뒤 맥락없이 말을 던지지만, 유유정은 한사람 밖에 자본 적이 없다는 식으로 바로 이해가 되도록 표현하고 있다. 이것 역시 매끄러운 가독성을 위해 임의로 보강한 문장이라 짐작한다.


필요에 따라 원문에 없는 단어나 문장, 또는 쉼표나 부호를 만들어 넣는 것도 분명히 의역에 해당하고 독자의 입장에선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다. 오로지 직역만이 원본에 충실한 번역이라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이렇게 직접 비교해보니 의역이 단순히 가독성만 높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직역보다 훨씬 더 작가가 원래 의도했던 느낌에 가까운 결과물이 될 수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끝으로 이건 내가 오역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인데 앞선 대화에서 죽은지 30년이 지난 작가만 인정하겠다는 언급이 있었기 때문에 2년 정도의 오차가 되려면 28년이 맞다. 양억관 번역의 '스물두 해'는 명백한 오역이다.



이 부분도 누구 올 사람 있냐는 질문에 없다고 답하는 장면이기 때문에 정황상 '고개를 저었다'가 맞는 번역일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무도 안 와'라는 부정의 대답은 이상하지 않나... 양억관씨는 '앉아도 될까?'라는 앞의 질문 때문에 끄덕였다고 한 것 같은데, 나는 이런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오역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번역판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답은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분량관계상 특정 부분만 발췌해서 비교했지만 작품 전체를 놓고봤을 때 정말 비교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가 난다. 양억관의 번역이 낫다고 느껴진 부분은 단 한 군데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고, 게다가 유유정이 번역한 '상실의 시대'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아주 미묘하고 잔잔한 재미와 감동 포인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좀 충격적이었고 그만큼 답이 너무 쉽게 나와버려서 약간 허무하기도 했다.


번역에 대해서만 얘기하려고 했는데 작품에 대해서 조금만 첨언하자면... 이 작품은 읽다보면 인상깊은 문장들이 너무 많이 나온다.



인생은 비스킷 통이어서 좋아하는 것만 먼저 먹어버리면 나중에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된다는 대사도 기억에 남고...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초콜릿 통에 관한 대사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참고로 이 책이 훨씬 먼저 나왔다.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 구분과 판단은 과연 누가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에 스스로 고민해보는 시간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봄날의 곰만큼 좋다'고 표현하는 와타나베의 유머감각도 미도리와 같은 마음으로 미소짓게 만든다.



이 작가는 또 성적인 표현에 주저함이 없다. 섹스가 젊은 날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인 점은 틀림없지만 의외로 작품에서 이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큰 편이다. 책을 읽다보면 공교롭게도 주인공의 전공과목과 관련해서 '데우스엑스마키나'라는 말도 나오는데 농담을 살짝 섞어서 표현하자면 이 작품에서는 작가가 마치 섹스를 데우스엑스마키나로 사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유일하게 호불호가 갈릴 부분이기도 한데, 역시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리라...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를 비롯하여 하루키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책과 작가들... 그리고 팝, 재즈, 클래식을 망라하는 다양한 음악적 취향을 엿볼 수 있는데 책에 나오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과 헨리 맨시니의 '디어 하트'를 한번 들어보려고 유튜브에서 검색해보다가 이 곡의 댓글들에서 '나오코가 좋아하는 곡'이라든지 무라카미 하루키와 관련해서 언급하는 서양인들이 너무나 많아서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훨씬 더 세계적인 작가였구나...하고...


어쨌거나 번역을 비교해본다는 핑계로 거의 30년만에 이 작품을 다시 읽어봤는데 참 좋았다. 나이를 많이 먹어서인지 더 좋게 다가왔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정말 글 잘 쓴다. 명불허전이다. 잃어버린 젊은 시절의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여러가지 감정들을 떠올릴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좋은 작품은 당연히 좋은 번역으로 읽어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다. 민음사에서 명성있는 번역가와 함께 심혈을 기울여 내놓은 듯 해서 당연히 최신 번역이 더 낫겠지 하는 마음과 함께 개인적으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가 나와서 충격적이었고 어떻게보면 성의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여서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양억관이라는 번역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고 덕분에 기존의 유유정 번역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던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작가의 개인적 취향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깊은 사유가 한가득 들어있고 탁월한 필력으로 인물들의 복잡미묘한 감정선을 아주 섬세한 터치로 그리고 있어서 대사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읽는 재미가 정말 남다른데, 결론은 그런 잔잔한 감동과 디테일한 재미를 제대로 맛보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유유정 번역의 '상실의 시대'를 선택하면 되겠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8iAO6Nxh-2Q&t=1103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28267451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읽어보는 해리 홀레 시리즈인데 이번에 나온 이 책이 어느덧 시리즈 12번째 작품이었다. 1997년에 첫작품이 나온 이후 지금까지 평균 2년에 1편 꼴로 꾸준히 발표된 셈인데, 세어보니까 나는 이 책까지 포함하면 그 중에 8편을 읽었더라... 노진선씨가 번역한 작품들은 다 사서 읽었지만 중간에 번역가가 바뀐 이후로는 읽는 재미가 급격히 떨어지는 바람에 신작이 나와도 영 땡기지가 않아서 안 샀더랬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은 제목이 주는 임팩트가 워낙 강해서 호기심에 구매를 해봤다. 우리는 또 이런 '칼' 같은... 짧고 강하고 뭔가 느낌있는 이런 단어에 약하지 않나... 출간 기념으로 천원만 추가하면 작가의 사인이 들어간 버터나이프를 준다고 해서 또 얼른 신청해서 받았다. 천원짜리 치고는 괜찮은 것 같다. 덕분에 최근 마트에서 장볼 때 일부러 버터도 한 덩어리 사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시리즈 9탄에서 11탄에 해당하는 이 작품의 전작들을 안 읽었기 때문에 그동안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래서 기왕이면 이 시리즈의 세계관을 잘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읽어도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으로서 완성도와 재미를 충분히 보장하는지 또는 내용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는지 하는 점에도 괜한 오지랖을 부려가면서 읽어보았다.


결론적으로는 전작들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어도 한 편의 추리 스릴러로서 이 작품을 즐기는데 있어 그다지 큰 지장은 없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작가가 이미 그런 부분 정도는 당연히 고려해가면서 쓰는 레벨이라서...


하지만 이 노련한 작가는 기존의 시리즈를 잘 알고 좋아하는 팬들을 위해서도 특별하고 차별된 만족감을 주는 설정들을 확실하게 마련해 놓았다. 주인공 해리에게 라켈이라는 여성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이번 작품을 받아들이는 느낌은 그야말로 천지차이일 수 밖에 없다. 전작들을 읽어왔던 독자라면 당연히 해리 못지않은 충격과 상실감에 함께 아파하면서 디테일한 감정선을 따라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레드브레스트'라는 작품에서 요 네스뵈가 소중한 사람을 잃은 아픔을 어떤 방식으로 묘사하는지 보면서 정말 탄복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라켈의 죽음을 수사하는 과정을 꿈이라 생각하면서 꿈에서 깨지 않으려 애쓰는 해리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명불허전의 필력과 함께 캐릭터를 구축하는 일관성까지도 놓치지않는 치밀함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  


요 네스뵈의 이 해리 홀레 시리즈는 '후더닛'과 '하우더닛', 그리고 '와이더닛'이 골고루 잘 섞여있고, 의외의 범인이라는 반전이 있으면서도 범인은 무조건 초중반부터 등장해서 독자들이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정통 추리소설의 규칙 또한 철저히 따르고 있는 등, 기본기에 충실하다는 점이 굉장히 큰 매력이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주인공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피해자라는 것 자체가 허탈함마저 느껴질 정도의 워낙 충격적인 설정이어서 이 정도 비중의 피해자라면 웬만한 범인으로는 그 상실감을 채울 수가 없다는게 문제였다. 중반부가 넘어가면서부터는 범인 후보라고 해봐야 불과 서너명 뿐인데다가 그 중에 누가 범인으로 밝혀지든지 간에 아무래도 좀 미흡하고 찜찜할 것 같은 느낌이어서 작가가 도대체 어떻게 마무리를 할 생각인지 슬슬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역시 이 작가는 소잡는데 소잡는 칼을 쓰는 무서운 저력을 보여준다. 피해자의 중요도에 걸맞는 범인을 만들기 위한 작가의 고뇌가 느껴질 정도로 어떻게보면 거의 막장 수준으로 억지스러운 설정의 반전이기도 해서 이 시리즈를 사랑해온 팬들이라면 충격이 상당히 클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은 긴 세월을 이어져 온 시리즈의 마지막을 고하는 듯 하기도 하고 어쩌면 세대교체와 함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 하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작품의 희생자와 범인, 그리고 주인공의 행보를 보면서 왠지 이것으로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내린 듯한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마치 팬들을 위한 가슴 먹먹한 선물같은 작품이라고나 할까...


특히 '성민'이라는 한국계 형사의 등장은 사실 좀 뜬금없고 의외인데 작가가 한국 팬들에게 남다른 감사의 마음을 담은 나름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처럼 이 작가도 유독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걸까... 어쨌든 만약 이 시리즈가 계속된다면 점점 더 비중있게 나올 것 같기는 하다.


번역은 우려했던 것에 비해서는 무난했던 것 같다. 하지만 딱히 좋다는 느낌도 없어서 번역가가 바뀐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만이다.


참고로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의 순위를 매겨본다면 '레드브레스트'와 '레오파드'가 우열을 가리기 힘든 1,2등이다. 3등으로는 '스노우맨'... 그 다음으로 이번 작품 '칼'을 넣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제는 'Eight Perfect Murders'이고 현지에서는 재작년인 2020년에 나왔던 소설이다. 이 작가는 2014년 데뷔작 이후 거의 매년 한 작품씩 발표하는 왕성한 활동과 함께 지금까지 모두 8편의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그러니까 이 책 이후에도 작년과 올해 각각 1편씩 벌써 2편의 신작을 순식간에 썼다는 것이고, 우리나라에는 이번에 나온 이 책까지 포함하면 그 중 5편이 번역 소개된 상태다.


개인적으로 이 작가를 좋아하는 팬도 아니고 또 실력을 그리 높게 평가하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보니 국내에 출간된 이 작가의 책은 모두 다 사서 읽었다. 아무래도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던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임팩트가 컸던 모양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이 사람 작품 중에서는 그 책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2015년에 발표했던 작가의 2번째 작품인데 외국 사이트를 둘러봐도 피터 스완슨은 대부분 'The Kind Worth Killing'의 작가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많아서 현지에서도 확실히 그 작품을 그의 대표작으로 인정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 사람 신작을 나올때마다 읽다보니까 지금껏 꽤 많은 리뷰를 했는데, 전에도 언급했듯이 나는 이 사람이 결코 필력이 뛰어난 작가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아이디어가 좋은 작가라 생각할 뿐...


그가 소설을 창작하는 패턴은 이제까지 읽거나 보았던 책과 영화 등 다른 작품들에서 소재나 플롯에 대한 영감을 얻고 거기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살짝 더해서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하는 스타일일 것이라고 이전 리뷰에서 얘기한 바 있는데, 이번 신작은 그런 그의 창작 패턴을 아예 대놓고 노골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매니아라면 누구나 알만한 8편의 유명한 고전 추리소설 리스트를 제시하고 각각의 작품들에서 사용한 범행수법을 모방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는 플롯인데, 어떻게보면 참신하지만 또 의외로 상당히 안일한 기획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리스트에 있는 작품들이 최소 30년에서 무려 100년전에 나온 책이라는 사실에서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이 작품은 범행 동기나 개연성 등에서 흥미로운 도입부에 비해 갈수록 현실성이 급격히 떨어지는 문제점을 보여준다.


고전 속 범행수법의 결과물만 대충 가져와서 모방범죄라고 억지만 쓰고있지 작가만의 창의적 아이디어나 고민한 흔적 같은 것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오마주라는 그럴듯한 핑계로 선배 작가들이 창조한 아이디어를 그대로 가져와서 너무 편하게 날로 먹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읽다보면 은연중에 자기도 모르게 속내를 살짝 드러낸 것 같은 문장들이 나와서 재밌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좀 황당하게 느껴진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소설가가 직업인 등장인물을 묘사하면서 자료조사를 싫어하는 터라 최근작을 쓰기 위한 준비라고는 영화 두편을 본 것이 전부일 거라는 얘기를 하는데, 이것이 내게는 마치 작가 자신의 농담 속 진담이자 자학개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를 언급하면서 소규모의 가정 스릴러가 유행하는 요즘 트렌드를 분석하기도 하는데, 웃기는건 이렇게 분석하고있는 작가 본인도 결국 이 부류에 해당이 된다는 거다.



다른 소설이나 영화를 통한 간접 경험을 밑천삼아 창작활동을 하는 이런 작가들은 확실히 스토리를 전개함에 있어 깊이감과 스케일이 떨어지는 약점이 있다. 취약한 전문지식을 굳이 수고스럽게 취재 등을 통해 보강하기 보다는 1인칭 시점 따위의 서술 테크닉과 같은 잔재주로 커버하는게 훨씬 편하기는 하겠지... 


그래서 등장인물도 주로 부부나 가족에 주변 이웃 또는 친구 몇명 해서 매우 단촐하고, 장소도 집과 근처 음식점, 카페 정도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수준으로 처리한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이즈로 판을 짜야하니까 스케일이 작을 수 밖에 없다. 사법시스템이나 관련 기관의 행정절차에 대해서도 전문지식이 딸리니까 경찰같은 법집행 공무원들이 나와도 딱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수준의 모습으로 겨우 등장해서는 대부분 기능적인 역할로 생색만 내다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만다. 


이렇게 어설픈 작품들을 읽다가 예를들어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 도입부 정도만 읽어보더라도 이제 막 FBI 신참요원이 된 스탈링과 상관이 나누는 디테일하고 수준높은 대화들과 사건을 맡음에 따라 펼쳐지는 전문적인 수사과정에서 비교 자체가 민망할 정도의 실로 엄청난 수준차이와 함께 그야말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서 소재로 삼고있는 8편의 고전 추리소설들 중에 나는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과 하이스미스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읽었다. 특히 ABC 살인사건은 내가 중학생 때 아가사 크리스티로 추리소설에 입문하면서 최초로 읽었던 작품이라 감회가 남달랐고 잠시 추억에 젖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각 작품들의 간략한 줄거리와 핵심 트릭을 모두 언급하고 있기때문에 꼭 읽고싶었던 작품이라면 스포일러를 당하기 전에 미리 읽어두는게 정신건강에 좋다. 그리고 비록 8편의 리스트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크리스티의 또다른 대표작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도 스토리의 기본 뼈대로 삼고 있으니 혹시나 그 책을 읽을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먼저 읽어야 할 것이다.


이 작가의 모든 작품을 전담해온 노진선씨의 번역은 여전히 믿음직했지만 이번에는 원작의 완성도와 비슷한 수준으로 그냥 좀 쉽게 처리한 것 같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영화까지 똑같은 제목으로 이미 잘 알려져있는데 굳이 '장미의 이름으로'라고 번역한 부분은 좀 성의가 부족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포와로라는 발음이 훨씬 보편적일 터인데 또 굳이 푸아로라고 한 것도 좀... 



여담으로 많은 사람들이 벨기에 하면 와플이나 초콜릿을 떠올리겠지만, 나는 무조건 '엘큘 포와로'다. 스웨덴 하면 ABBA이듯이 벨기에 하면 포와로가 아니겠는가...


이 작품은 전설적인 고전 추리소설들에 대한 오마주의 컨셉으로 작가의 개인적인 덕력을 아낌없이 과시한 점에서는 흥미로웠으나 작가의 한계 또한 여실히 드러났던 시간이어서 아쉬움이 컸다. 아마도 이변이 없는한 이 작가의 책은 더이상 찾아 읽지는 않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이컵을 위하여
윌리엄 랜데이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으로부터 딱 10년전인 2012년에 발표되었던 작품이고 우리나라에는 그 다음해인 2013년에 곧바로 번역되어 나왔는데, 생소했던 작가의 지명도에 비해서는 상당히 빠르게 소개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만큼 당시 현지에서는 출간 즉시 각종 상을 휩쓸면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했고 영화 판권까지 팔리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작품이다.


결국 재작년인 2020년 애플TV+의 8부작 미니시리즈 드라마 형식으로 나왔고 캡틴 아메리카 크리스 에반스가 주연을 맡아서 상당히 보고싶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넷플릭스만 이용하는 나로선 그냥 책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원제가 'Defending Jacob'이다. '제이컵을 위하여'로 번역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For'가 아니라 'Defending'이라는 단어를 쓰고있다는 점에서 뉘앙스가 살짝 다르다. 아들 제이컵을 '지키기' 위한 부모의 필사적인 노력이 주된 내용이기 때문에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Defending'이 주는 제목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작가 윌리엄 랜데이는 1963년생으로 미국의 지방검사보를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매사추세츠주의 미들섹스 카운티와 지방검찰청, 그리고 지방검사라는 주인공의 직업 등이 모두 작가 자신의 경력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 자신이 오랜기간 몸담았던 지역과 직업에 대한 경험과 전문성이 그대로 녹아있어서 이 작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법정씬 등에서 사실감 높은 장면을 연출한다.



작가의 필력이 기대이상으로 좋아서 잔잔한 분위기임에도 몰입도가 엄청 높다. 확실히 검사나 변호사 출신 작가들의 작품은 이런 법정공방을 통해 대사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디테일을 즐기는 재미가 있다. 변호사같은 법조인들은 일단 말투에서 일반인들과는 다른 독특한 화법을 쓴다. 예를들면 그냥 '난 싫다'라고 쉽고 간단하게 말하면 될 것을 '저라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을 것 같군요'라는 식으로 에둘러서 점잖게 표현한다. 어떻게보면 현학적이지만 어쨌든 뭔가 고상하고 품위있는 표현들이 많아서 대사 자체에서 오는 지적허영심이랄까 지적만족감을 즐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해리슨 포드 주연의 '의혹'이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법정스릴러의 걸작 '스콧 터로'의 '무죄추정'이라는 작품이 많이 생각났다. 일단 두 작품 모두 검사 출신의 작가가 썼다는 동질성도 결코 무시할 수 없겠지만,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어가는 플롯과 설정에서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직업이 검사인 주인공이 화자로 등장하는 1인칭 시점을 택하고 있으며, 본인이 사건을 맡았다가 오히려 피고인의 입장에 서게 된다는 설정과, 전에는 적수로 만났던 유능한 변호사에게 변호를 의뢰하는 과정을 거쳐, 그동안 밥맛이었던 동료 검사에 맞서 법정공방을 펼쳐나간다는 플롯이 완전히 똑같다. 아이와 어른이라는 피해자의 차이에 따른 핵심 주제만 다를뿐 거의 동일한 구성과 방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나는 작가가 '무죄추정'을 레퍼런스로 해서 이 작품을 썼을거라고 100% 확신한다.



하지만 다루고있는 주제가 전혀 다르기때문에 이 작품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과 매력 또한 충분히 차별적으로 다가온다. 비록 '무죄추정'에서 가져온 법정스릴러의 외피를 두르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가족에 관한 휴먼드라마에 집중하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주인공 가족이 살고있는 뉴턴이라는 도시는 책에서도 상세히 묘사하고 있듯이 하버드 대학교가 인접해있는 미국 최고의 교육도시로 손꼽히는 곳이다. 바로 옆에 보스턴도 있고... 하여튼 덕분에 몰랐던 지리적 상식을 또 하나 얻게되었다.



인터넷과 SNS가 사람들의 생활 깊숙히 침투하며 발생하기 시작한 여러가지 부작용은 미국 역시 예외는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다보면 범인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미스터리적 요소도 흥미를 끌지만 어느덧 주인공을 통해 가족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게 된다.


자신의 비정상적 성장과정을 되물림하지 않겠다는 신념이 낳은 기이한 집착과 함께 점점 심각해져가는 부모 자식간의 소통단절과 무너져가는 부부간의 신뢰 등, 이 책은 당시 미국 중산층 가정의 혼란과 불안을 풍자하며 파고드는 면이 있다. 또한 실제 판례를 통해 법의학 분야에서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른 MAOA 즉, 폭력유전자라는 요소에 대해서도 비중있게 다루면서 경각심을 주기도 한다.



번역은 중간중간 대사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몇군데 보이기도 하고 보편적으로 잘 쓰지않는 단어 때문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었지만, 고급스러운 어휘와 법정 전문용어가 많이 등장하는 까다로운 작품임을 고려한다면 딱히 나무랄 데가 없는 매우 준수한 번역이라 생각한다.


가족드라마와 법정공방의 비중이 크다보니 상대적으로 범죄 행위는 거의 상징적인 요소 정도로 대충 처리된 느낌이 강해서 범죄스릴러적인 재미는 조금 약한 것도 사실이다. 후반부 다소 뜬금없는 한니발 렉터가 연상되는 아버지와 해결사의 등장 또한 너무 헐리우드식으로 안일하게 처리한 듯한 느낌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몇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를 통해 급변하는 시대와 가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좋은 인상을 준다. 특히 가족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 서서히 추락해가는 마지막 장면은 많은 여운을 남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지금으로부터 약 10년전인 2011년에 이스라엘에서 처음 발표되었던 책인데, 2014년에 영문판이 나오면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우리나라에는 다음해인 2015년에 번역 소개되어 당시 서점가를 휩쓸었던 책이다.


저자 유발 노아 하라리는 1976년생으로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이자 대학교수이다. 현재 40대 중반이니까 이 책은 겨우 30대 중반에 썼다는 얘기인데... 대단하다. 원제 역시 'Sapiens'이고 'A Brief History of Humankind'라는 부제가 붙어있는데, 제목에서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거시적 관점으로 간략하게 정리한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에서 가장 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 책이 총균쇠의 아류작 수준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총균쇠에서 검증했던 인류의 차별적 성장이라는 역사적 흐름에 관한 통찰력이 이 책에서 다루고있는 내용을 지탱하는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훨씬 폭넓은 관점에서 날카롭고 새로운 시각으로 완성도를 높였다는 점에서 마치 '대부1'을 뛰어넘은 '대부2'를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그동안 무수히 나왔던 다른 역사책들이나 리처드 도킨스로 대표되는 진화생물학 관련 책들에서 이미 수없이 다루었던 다윈의 진화론을 기반으로 한 보편적인 이야기들의 반복에 불과할 수도 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에 관한 에피소드는 벌써 몇번째 읽는 이야기인지도 모를 정도다. 하지만 최초에 인류가 생성된 이후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이만큼 깔끔하고 흥미롭게 정리한 책은 처음인 것 같다.


인간의 역사는 마치 '라쇼몽'처럼 특정 사건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여러 전문가들의 책을 읽으면서 객관적인 시각을 넓혀가려고 한다. 이 책의 저자는 멀리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의 큰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 중간중간 필요할 때마다 살짝 깊이 들어갔다 다시 빠져나오는 방식으로 독자들이 흐름에 집중하면서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잘 유도하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일 수도 있는 저자의 주장들이 굉장한 설득력을 가지면서 강력하게 다가오는 점이 아주 큰 매력이다.


초반부에 저자가 농업혁명으로 인해 과연 인간들의 삶이 예전 수렵채집의 시절보다 나아졌는가? 라고 강력하게 의문을 제기한 부분이 재미있었다. 편하게 살아간 줄 알았는데 사실상 더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아갔다는 것이다.



자기계발서를 비롯한 많은 베스트셀러들 중에 초반부 강한 충격요법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서술법을 쓰는 책들이 많다. 예를들어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 같은 경우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라는 말은 알고보니 엉터리였다...라고 시작한다. 그리고 '일본은 없다'라는 책에서는 일본인들은 지하철에서도 대부분 책을 읽을 정도로 근면하다고 알고있었는데 막상 가보니 웬걸 전부 눈감고 자고있더라... 우리랑 다를바 없더라...라고 시작했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일반적인 통념을 정반대로 깨면서 관심을 확 끌어들이고 그 여세를 몰아서 서서히 본인의 주장에 동조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물론 이런 전략은 책이든 강연이든 매우 효과적인 수법이긴 하다. 다만 그 주장에는 명확한 근거와 충분한 자료조사가 뒷바침되어야만 할 것이다. 단순히 관심을 끌기위한 목적으로 어설픈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선 안된다.


다행히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저자가 결코 허술하게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 중간중간 기존의 통념을 다른 시각에서 새롭게 설명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과학적 증거나 통계자료들을 제시함으로써 설득력을 충분히 실어주고 있다. 그래서 이야기가 흥미로우면서도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는 듯한 만족감도 높다.



일단 저자가 글을 정말 재미있게 잘 쓴다. 흡인력이 대단하다. 그리고 어떻게보면 딱딱하고 지루한 내용임에도 너무나 쉽게 읽히는 장점이 있다. 총균쇠를 읽을 때는 그런 생각까지는 안들었는데, 이 책은 읽으면서 고등학생인 내 딸아이도 꼭 읽어봤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알기쉽고 재미있게 쓰여진 책이다.


번역도 아주 좋다. 군데군데 오래된 인용문들의 말투라든지 센스있는 주석들이 가독성을 높여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이 책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지금 현재 나의 삶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가치있는 삶, 그리고 행복한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것 말이다. 역사책을 읽었는데 마치 훌륭한 자기계발서를 읽은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 책이 쓰여진 후 또다시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세상은 엄청나게 빠르게 변했고 계속 예측불허의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 저자도 결국 어디로 흘러갈지는 모른다고 했다. 다만 현 시점의 우리가 어디에 서있는지 역사를 통해 되돌아봄으로써 삶의 가치와 행복에 대해 색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봤던 것 같다. 


저자가 지적한대로 어쩌면 근미래에는 국가라는 개념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야말로 스마트폰과 인터넷, 스트리밍, 전기차의 시대가 아닌가... 구글, 애플, 아마존, 넷플릭스, 그리고 테슬라... 이런 거대기업들이 합병을 거듭해서 나중에는 '구글 유니버스'같은 미지의 존재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를 일이다.


아뭏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을때마다 유익하고 재미있는 정보들이 가득하며 저자가 제시하는 화두 덕분에 여러가지 생각들과 뒤늦은 깨달음이 따라온다는 점에서 분명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독서가 되리라 확신하면서 특히 앞으로 세상을 이끌어갈 젊은 세대들이 많이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큰 딸한테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기는 할텐데 과연 읽을지는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책 열심히 읽어도 아이들은 여가시간에 스마트폰밖에 안보니까... 어른이 모범을 보이면 아이들은 자연스레 따라온다는 말도 이젠 옛말이 되어버렸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말 그대로 이것 또한 슬기롭게 헤쳐나가야 할 과제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