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컵을 위하여
윌리엄 랜데이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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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딱 10년전인 2012년에 발표되었던 작품이고 우리나라에는 그 다음해인 2013년에 곧바로 번역되어 나왔는데, 생소했던 작가의 지명도에 비해서는 상당히 빠르게 소개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만큼 당시 현지에서는 출간 즉시 각종 상을 휩쓸면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했고 영화 판권까지 팔리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작품이다.


결국 재작년인 2020년 애플TV+의 8부작 미니시리즈 드라마 형식으로 나왔고 캡틴 아메리카 크리스 에반스가 주연을 맡아서 상당히 보고싶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넷플릭스만 이용하는 나로선 그냥 책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원제가 'Defending Jacob'이다. '제이컵을 위하여'로 번역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For'가 아니라 'Defending'이라는 단어를 쓰고있다는 점에서 뉘앙스가 살짝 다르다. 아들 제이컵을 '지키기' 위한 부모의 필사적인 노력이 주된 내용이기 때문에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Defending'이 주는 제목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작가 윌리엄 랜데이는 1963년생으로 미국의 지방검사보를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매사추세츠주의 미들섹스 카운티와 지방검찰청, 그리고 지방검사라는 주인공의 직업 등이 모두 작가 자신의 경력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 자신이 오랜기간 몸담았던 지역과 직업에 대한 경험과 전문성이 그대로 녹아있어서 이 작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법정씬 등에서 사실감 높은 장면을 연출한다.



작가의 필력이 기대이상으로 좋아서 잔잔한 분위기임에도 몰입도가 엄청 높다. 확실히 검사나 변호사 출신 작가들의 작품은 이런 법정공방을 통해 대사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디테일을 즐기는 재미가 있다. 변호사같은 법조인들은 일단 말투에서 일반인들과는 다른 독특한 화법을 쓴다. 예를들면 그냥 '난 싫다'라고 쉽고 간단하게 말하면 될 것을 '저라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을 것 같군요'라는 식으로 에둘러서 점잖게 표현한다. 어떻게보면 현학적이지만 어쨌든 뭔가 고상하고 품위있는 표현들이 많아서 대사 자체에서 오는 지적허영심이랄까 지적만족감을 즐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해리슨 포드 주연의 '의혹'이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법정스릴러의 걸작 '스콧 터로'의 '무죄추정'이라는 작품이 많이 생각났다. 일단 두 작품 모두 검사 출신의 작가가 썼다는 동질성도 결코 무시할 수 없겠지만,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어가는 플롯과 설정에서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직업이 검사인 주인공이 화자로 등장하는 1인칭 시점을 택하고 있으며, 본인이 사건을 맡았다가 오히려 피고인의 입장에 서게 된다는 설정과, 전에는 적수로 만났던 유능한 변호사에게 변호를 의뢰하는 과정을 거쳐, 그동안 밥맛이었던 동료 검사에 맞서 법정공방을 펼쳐나간다는 플롯이 완전히 똑같다. 아이와 어른이라는 피해자의 차이에 따른 핵심 주제만 다를뿐 거의 동일한 구성과 방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나는 작가가 '무죄추정'을 레퍼런스로 해서 이 작품을 썼을거라고 100% 확신한다.



하지만 다루고있는 주제가 전혀 다르기때문에 이 작품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과 매력 또한 충분히 차별적으로 다가온다. 비록 '무죄추정'에서 가져온 법정스릴러의 외피를 두르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가족에 관한 휴먼드라마에 집중하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주인공 가족이 살고있는 뉴턴이라는 도시는 책에서도 상세히 묘사하고 있듯이 하버드 대학교가 인접해있는 미국 최고의 교육도시로 손꼽히는 곳이다. 바로 옆에 보스턴도 있고... 하여튼 덕분에 몰랐던 지리적 상식을 또 하나 얻게되었다.



인터넷과 SNS가 사람들의 생활 깊숙히 침투하며 발생하기 시작한 여러가지 부작용은 미국 역시 예외는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다보면 범인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미스터리적 요소도 흥미를 끌지만 어느덧 주인공을 통해 가족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게 된다.


자신의 비정상적 성장과정을 되물림하지 않겠다는 신념이 낳은 기이한 집착과 함께 점점 심각해져가는 부모 자식간의 소통단절과 무너져가는 부부간의 신뢰 등, 이 책은 당시 미국 중산층 가정의 혼란과 불안을 풍자하며 파고드는 면이 있다. 또한 실제 판례를 통해 법의학 분야에서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른 MAOA 즉, 폭력유전자라는 요소에 대해서도 비중있게 다루면서 경각심을 주기도 한다.



번역은 중간중간 대사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몇군데 보이기도 하고 보편적으로 잘 쓰지않는 단어 때문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었지만, 고급스러운 어휘와 법정 전문용어가 많이 등장하는 까다로운 작품임을 고려한다면 딱히 나무랄 데가 없는 매우 준수한 번역이라 생각한다.


가족드라마와 법정공방의 비중이 크다보니 상대적으로 범죄 행위는 거의 상징적인 요소 정도로 대충 처리된 느낌이 강해서 범죄스릴러적인 재미는 조금 약한 것도 사실이다. 후반부 다소 뜬금없는 한니발 렉터가 연상되는 아버지와 해결사의 등장 또한 너무 헐리우드식으로 안일하게 처리한 듯한 느낌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몇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를 통해 급변하는 시대와 가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좋은 인상을 준다. 특히 가족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 서서히 추락해가는 마지막 장면은 많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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