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도 널리 알려져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 워낙 유명한 책이라 작품 내용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두 판본의 번역을 비교해보려고 한다.
원제목은 'ノルウェイの森', 글자 그대로 '노르웨이의 숲'이고 1987년작이다. 우리나라에는 1989년에 '상실의 시대'라는 번안제목으로 나오면서 대박이 났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문학사상사판으로 이 작품을 처음 접했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당시 대학생때 이 책을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번역가는 유유정씨라는 분이고 여자 이름같지만 사실은 남자분이라고 하며 1922년생이면 아마도 지금은 작고하셨을 것 같은데 검색을 해봐도 이 분에 대해서 더이상 자세한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다.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작품이었고 어느덧 고전으로 자리잡은 만큼 2013년에 스타급 번역가인 양억관씨를 내세운 민음사판이 나오면서 비로소 지금의 양강구도가 이루어졌다. 양억관씨는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너무나 친숙한 이름이고 역시 유명 번역가인 김난주씨와 부부지간이기도 하다.
현재 이 작품을 구매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틀림없이 문학사상사의 '상실의 시대'와 민음사의 '노르웨이의 숲', 이 두 가지 번역본 가운데 하나의 선택을 놓고 고민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그전부터 품어왔던 개인적인 궁금증도 해소할 목적으로 겸사겸사해서 시작한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별 고민할 가치도 없는 싱거운 결과가 나와버렸다.
이번 번역 비교를 위해 거의 30년전에 읽었던 '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은 다음, 그 느낌을 그대로 간직한 채 새로 구매한 '노르웨이의 숲'을 한번 더 꼼꼼하게 읽어나갔다.
먼저 두 출판사의 인쇄 스타일부터 체크하고 넘어가자. 번역 외적인 요소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독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라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마도 본인이 중간중간 특별히 포인트를 주고싶은 단어나 문장은 다른 활자와 구분이 되도록 원서에서도 간단하게 어떤 표시를 해두었던 것 같다. '상실의 시대'에서는 이것을 글자 위에 점을 찍어서 구분이 되도록 했고, '노르웨이의 숲'은 명조체에서 고딕체로 글자체를 바꾸는 것으로 처리했다. 당연히 점을 찍은게 눈에 바로 띄고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잠깐이라도 생각해보게 된다. 그에 비해 글자체 변경은 정말 눈여겨보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무심코 그냥 지나칠 것 같다.
또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쓴 편지를 그대로 옮겨놓은 부분이 자주 등장하는데 '상실의 시대'에서는 글자체와 굵기를 모두 다르게 해서 확실히 구분이 된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숲'은 글자 크기만 살짝 줄인 정도라서 역시나 뚜렷하게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주석 부분도 확실히 '상실의 시대' 쪽이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필요한 부분을 잘 찾아서 과하거나 부족함없이 적절하게 들어가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쯤되면 본론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감이 왔을 지도 모르겠다. 이제 본격적으로 본문 번역에 대한 비교에 들어가면...
각각 굵은 글씨와 글자체의 변경으로 특별히 강조를 하고있을 정도로 화자인 주인공의 심정을 표현한 초반부의 중요한 문장이다. 한눈에 봐도 '삶의 반대편'이라고 풀어서 해석한 유유정씨의 번역이 월등히 매끄러운 가독성과 함께 그 의미심장한 느낌까지 즉각적으로 다가온다. 양억관씨가 사용한 '대극'이라는 단어는 아마도 원문에 쓰여진 '対極'라는 일본어를 그대로 가져온 것 같다. 일본에서는 '반대편에 위치하다'라는 뜻의 이 단어를 흔하게 쓰는 지는 몰라도 우리는 살면서 거의 쓰지않는 단어라 어색하고 입에 잘 붙지를 않는다.
아무리 직역이 원본에 가장 충실한 번역이라는 의견이 많다고 해도, 원작자가 특별히 강조까지 한 문장인데 이렇게 딱딱한 느낌으로 다가온다면 작가가 원래 의도했던 느낌에서 오히려 벗어난 것일 수도 있다고 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물론 일부러 좀 난해한 표현방식을 구사한 책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작품 만큼은 매우 쉽고 대중적인 화법을 사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양억관씨도 직역보다는 의역을 많이 사용하는 스타일로 알고있는데 굳이 이렇게 딱딱하고 어색한 문장의 직역을 사용한 것은 기존의 번역과 차별성을 주기 위한 의도가 강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 부분은 작가만의 섬세한 감성이 느껴져서 참 인상적으로 와닿았던 문장인데 열여덟 살 다음에는 열아홉 살, 다음에는 또 열여덟 살로 돌아가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순수한 마음을 아름답게 전달하는 유유정 번역과는 달리, 양억관 번역은 '이해가 간다'는 전혀 맥락에 맞지않는 생뚱맞은 표현으로 독자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포인트를 허무하게 그냥 날려버리고 있다. 이것은 작품이 가진 정서를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야할 문제다.
초반부 주인공이 기거하던 대학교 기숙사의 모습을 묘사한 장면이다. 역시 유유정 번역의 '상실의 시대'가 노래가사와 맞물려 국기가 올라가는 모습을 훨씬 매끄럽게 잘 다듬어서 번역하고 있어서 가독성이 좋다.
1인칭 화자이면서 와타나베라는 이름을 가진 이 책의 주인공은 단 몇마디로는 정의하기 힘든 다양한 면을 보여주는 복합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작가 스스로가 자전적인 소설이라 했으니 하루키 본인의 성격과 거의 비슷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내성적이면서 조용하고 냉소적이지만 때론 따뜻함과 유머가 있고, 상대방을 충분히 배려하면서도 눈치 보지않고 할 말은 똑바로 하는 단호함도 있고... 책을 읽다보면 이런 주인공의 다양한 측면에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것은 행동보다는 주로 대사와 말투에서 대부분 표현이 되고있다.
이 대사는 주인공이 자신의 룸메이트에 대해 다른 친구들에게 하는 농담이다. 유유정에 비해 양억관의 번역이 좀더 거칠고 천박한 표현을 쓰고있다. 분명히 같은 내용의 문장임에도 인물의 성격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전체적으로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주인공이 좀 싸가지없는 말투를 쓴다는 느낌이다. 이렇게되면 주인공에 대한 호감도나 감정이입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오코에 대한 마음을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내가 얼마나 너를 '그리워하는지' 알게되었다는 유유정의 번역에 비해 내가 얼마나 너를 '갈구하는지' 알게되었다는 양억관의 번역은 주인공을 다소 자기중심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 이렇게 특정 단어의 선택에 따라 전혀 다른 뉘앙스로 다가오는게 번역의 위력이다.
나가사와라는 학교 선배와 나누는 대화인데 각각 '이상한 사람'과 '색다른 사람', 그리고 '제대로 된 인간'과 '인간다운 인간'이라는 단어의 차이가 있다. 대화의 전후 맥락을 고려하면 '상실의 시대' 쪽의 티키타카가 더 자연스럽다.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쓴소리한 것을 들킨 장면인데 유유정의 '당연하잖아요'는 약간 미안한 마음을 섞은 능청스러움이 들어간 표현이라면 양억관의 '당연하죠'는 거리낄 것 없는 단호함과 냉정함이 묻어나온다. 주인공의 성격과 그전까지 쌓아온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역시 유유정의 번역이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는 매끄러운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이 부분은 '내겐 아까운 여자'보다 '나한테 과분한 여자'가 더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어지는 문장인 '지당하신 말씀이다'가 완전히 망쳐버렸다. 작품의 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촐싹대는 느낌인데 왜 이렇게 번역했는지 모르겠다.
이 작품에서 정말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등장하는 미도리는 주인공 와타나베의 특이한 말투나 유머감각에 매력을 느끼고 호감을 표시한다. 말투가 험프리 보가트를 닮았다는 둥 '호밀밭의 파수꾼' 주인공 같다는 둥 구체적인 예까지 들어가며 얘기하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그 특이하다는 말투의 느낌이 어느 정도 와닿아야 한다.
두 번역판을 가만히 비교해보면 굉장히 미묘한 차이이긴 하지만 '상실의 시대'는 주인공 말투의 특이한 느낌을 살리기위해 분명히 신경을 쓰고있으나, '노르웨이의 숲'은 그런 디테일한 부분까지는 미처 고려하지 않은 것처럼 일반적인 말투와 거의 차이가 없는 느낌으로 평범하게 처리하고 있다. 심지어 미도리가 주인공의 말투를 따라하는 대사라는 점도 유유정은 '되뇌었다'라고 확실하게 알려주고있는 반면, 양억관은 그냥 '말했다'로 처리해버리니 이 장면의 잔재미를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여기도 역시 미도리가 주인공 말투를 따라하며 호감을 표시하는 장면이다. 미묘하지만 유유정의 번역이 말투의 특이함과 함께 두 사람의 귀여운 티키타카를 훨씬 따뜻하게 살려내고 있다.
이런 부분도 번역에 따른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어서 두 사람의 성격이나 캐릭터를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게 다가온다. 하루키가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관계묘사를 정말 섬세하게 그리고있기 때문에 번역이 이런 부분을 잘 살려주지 않으면 숨어있는 잔잔한 감동을 느끼기 힘들다.
나오코의 편지에 쓰여진 표현도 양억관이 선택한 '뒤틀림'이라는 단어보다는 유유정의 '일그러짐'이나 '비뚤어짐'이라는 단어가 더 부드럽게 다가온다.
나가사와 선배에 대해 나오코와 나누는 대화에서도 '특이한 사람인 모양이야' '이상한 사람이지' '그렇지만 좋아하는 거지?'라는 마치 상대방의 말에 호응을 안해주고 자기 할 말만 하는 듯한 다소 맥이 끊기는 느낌의 양억관 번역에 비해 '좀 이상한 사람 같네' '그래, 좀 이상한 남자야' '그래도 좋아?'라는 유유정이 번역한 대화의 흐름이 훨씬 자연스럽고 매끄럽다.
그리고 여기는 나오코와 연락이 끊겨 마음이 심란한 시기를 묘사한 부분인데 '상실의 시대'는 각각의 행동에 쉼표를 넣어서 당시 주인공의 행동 패턴이 반복적으로 줄곧 그런 식이었음을 보여주고있는데 반해 '노르웨이의 숲'은 한 문장으로 이어져있어 마치 일회성 행동처럼 느껴진다. 쉼표가 있고없음으로 인해서 그 의미가 상당히 달라지는 느낌이다. 띄어쓰기가 없는 일본어문장의 특성상 아마도 원문에는 쉼표가 없었을 거다. 바로 이런 부분이 번역가의 재량이자 센스가 발휘된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 나는 당연히 쉼표가 들어간 것이 원작의 의도와 일치하는 해석이라 생각한다.
또 선배에게 인생의 행동규범이 뭐냐고 물었을 때 신사여야 한다고 대답하자 '상실의 시대'는 '신사 숙녀 할 때의 그 신사'냐고 정확하게 이해를 돕는데 반해 '노르웨이의 숲'은 막연하게 '그 신사'라고만 하니 바로 알아듣기가 힘들다. 물론 이것도 '신사 숙녀' 부분은 원문에 없었는데 유유정 번역가가 임의로 추가한 문장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라면 양억관씨가 원래 있었던 단어를 삭제했다는 말인데 그럴 리는 없겠지... 어쨌든 결과적으로 신사 숙녀라는 말이 들어가는게 훨씬 가독성이 높다.
여기에도 양억관은 그냥 한명이라고 갑작스럽게 앞뒤 맥락없이 말을 던지지만, 유유정은 한사람 밖에 자본 적이 없다는 식으로 바로 이해가 되도록 표현하고 있다. 이것 역시 매끄러운 가독성을 위해 임의로 보강한 문장이라 짐작한다.
필요에 따라 원문에 없는 단어나 문장, 또는 쉼표나 부호를 만들어 넣는 것도 분명히 의역에 해당하고 독자의 입장에선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다. 오로지 직역만이 원본에 충실한 번역이라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이렇게 직접 비교해보니 의역이 단순히 가독성만 높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직역보다 훨씬 더 작가가 원래 의도했던 느낌에 가까운 결과물이 될 수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끝으로 이건 내가 오역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인데 앞선 대화에서 죽은지 30년이 지난 작가만 인정하겠다는 언급이 있었기 때문에 2년 정도의 오차가 되려면 28년이 맞다. 양억관 번역의 '스물두 해'는 명백한 오역이다.
이 부분도 누구 올 사람 있냐는 질문에 없다고 답하는 장면이기 때문에 정황상 '고개를 저었다'가 맞는 번역일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무도 안 와'라는 부정의 대답은 이상하지 않나... 양억관씨는 '앉아도 될까?'라는 앞의 질문 때문에 끄덕였다고 한 것 같은데, 나는 이런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오역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번역판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답은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분량관계상 특정 부분만 발췌해서 비교했지만 작품 전체를 놓고봤을 때 정말 비교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가 난다. 양억관의 번역이 낫다고 느껴진 부분은 단 한 군데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고, 게다가 유유정이 번역한 '상실의 시대'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아주 미묘하고 잔잔한 재미와 감동 포인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좀 충격적이었고 그만큼 답이 너무 쉽게 나와버려서 약간 허무하기도 했다.
번역에 대해서만 얘기하려고 했는데 작품에 대해서 조금만 첨언하자면... 이 작품은 읽다보면 인상깊은 문장들이 너무 많이 나온다.
인생은 비스킷 통이어서 좋아하는 것만 먼저 먹어버리면 나중에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된다는 대사도 기억에 남고...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초콜릿 통에 관한 대사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참고로 이 책이 훨씬 먼저 나왔다.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 구분과 판단은 과연 누가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에 스스로 고민해보는 시간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봄날의 곰만큼 좋다'고 표현하는 와타나베의 유머감각도 미도리와 같은 마음으로 미소짓게 만든다.
이 작가는 또 성적인 표현에 주저함이 없다. 섹스가 젊은 날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인 점은 틀림없지만 의외로 작품에서 이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큰 편이다. 책을 읽다보면 공교롭게도 주인공의 전공과목과 관련해서 '데우스엑스마키나'라는 말도 나오는데 농담을 살짝 섞어서 표현하자면 이 작품에서는 작가가 마치 섹스를 데우스엑스마키나로 사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유일하게 호불호가 갈릴 부분이기도 한데, 역시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리라...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를 비롯하여 하루키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책과 작가들... 그리고 팝, 재즈, 클래식을 망라하는 다양한 음악적 취향을 엿볼 수 있는데 책에 나오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과 헨리 맨시니의 '디어 하트'를 한번 들어보려고 유튜브에서 검색해보다가 이 곡의 댓글들에서 '나오코가 좋아하는 곡'이라든지 무라카미 하루키와 관련해서 언급하는 서양인들이 너무나 많아서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훨씬 더 세계적인 작가였구나...하고...
어쨌거나 번역을 비교해본다는 핑계로 거의 30년만에 이 작품을 다시 읽어봤는데 참 좋았다. 나이를 많이 먹어서인지 더 좋게 다가왔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정말 글 잘 쓴다. 명불허전이다. 잃어버린 젊은 시절의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여러가지 감정들을 떠올릴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좋은 작품은 당연히 좋은 번역으로 읽어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다. 민음사에서 명성있는 번역가와 함께 심혈을 기울여 내놓은 듯 해서 당연히 최신 번역이 더 낫겠지 하는 마음과 함께 개인적으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가 나와서 충격적이었고 어떻게보면 성의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여서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양억관이라는 번역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고 덕분에 기존의 유유정 번역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던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작가의 개인적 취향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깊은 사유가 한가득 들어있고 탁월한 필력으로 인물들의 복잡미묘한 감정선을 아주 섬세한 터치로 그리고 있어서 대사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읽는 재미가 정말 남다른데, 결론은 그런 잔잔한 감동과 디테일한 재미를 제대로 맛보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유유정 번역의 '상실의 시대'를 선택하면 되겠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8iAO6Nxh-2Q&t=1103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2826745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