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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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Eight Perfect Murders'이고 현지에서는 재작년인 2020년에 나왔던 소설이다. 이 작가는 2014년 데뷔작 이후 거의 매년 한 작품씩 발표하는 왕성한 활동과 함께 지금까지 모두 8편의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그러니까 이 책 이후에도 작년과 올해 각각 1편씩 벌써 2편의 신작을 순식간에 썼다는 것이고, 우리나라에는 이번에 나온 이 책까지 포함하면 그 중 5편이 번역 소개된 상태다.


개인적으로 이 작가를 좋아하는 팬도 아니고 또 실력을 그리 높게 평가하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보니 국내에 출간된 이 작가의 책은 모두 다 사서 읽었다. 아무래도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던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임팩트가 컸던 모양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이 사람 작품 중에서는 그 책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2015년에 발표했던 작가의 2번째 작품인데 외국 사이트를 둘러봐도 피터 스완슨은 대부분 'The Kind Worth Killing'의 작가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많아서 현지에서도 확실히 그 작품을 그의 대표작으로 인정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 사람 신작을 나올때마다 읽다보니까 지금껏 꽤 많은 리뷰를 했는데, 전에도 언급했듯이 나는 이 사람이 결코 필력이 뛰어난 작가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아이디어가 좋은 작가라 생각할 뿐...


그가 소설을 창작하는 패턴은 이제까지 읽거나 보았던 책과 영화 등 다른 작품들에서 소재나 플롯에 대한 영감을 얻고 거기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살짝 더해서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하는 스타일일 것이라고 이전 리뷰에서 얘기한 바 있는데, 이번 신작은 그런 그의 창작 패턴을 아예 대놓고 노골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매니아라면 누구나 알만한 8편의 유명한 고전 추리소설 리스트를 제시하고 각각의 작품들에서 사용한 범행수법을 모방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는 플롯인데, 어떻게보면 참신하지만 또 의외로 상당히 안일한 기획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리스트에 있는 작품들이 최소 30년에서 무려 100년전에 나온 책이라는 사실에서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이 작품은 범행 동기나 개연성 등에서 흥미로운 도입부에 비해 갈수록 현실성이 급격히 떨어지는 문제점을 보여준다.


고전 속 범행수법의 결과물만 대충 가져와서 모방범죄라고 억지만 쓰고있지 작가만의 창의적 아이디어나 고민한 흔적 같은 것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오마주라는 그럴듯한 핑계로 선배 작가들이 창조한 아이디어를 그대로 가져와서 너무 편하게 날로 먹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읽다보면 은연중에 자기도 모르게 속내를 살짝 드러낸 것 같은 문장들이 나와서 재밌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좀 황당하게 느껴진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소설가가 직업인 등장인물을 묘사하면서 자료조사를 싫어하는 터라 최근작을 쓰기 위한 준비라고는 영화 두편을 본 것이 전부일 거라는 얘기를 하는데, 이것이 내게는 마치 작가 자신의 농담 속 진담이자 자학개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를 언급하면서 소규모의 가정 스릴러가 유행하는 요즘 트렌드를 분석하기도 하는데, 웃기는건 이렇게 분석하고있는 작가 본인도 결국 이 부류에 해당이 된다는 거다.



다른 소설이나 영화를 통한 간접 경험을 밑천삼아 창작활동을 하는 이런 작가들은 확실히 스토리를 전개함에 있어 깊이감과 스케일이 떨어지는 약점이 있다. 취약한 전문지식을 굳이 수고스럽게 취재 등을 통해 보강하기 보다는 1인칭 시점 따위의 서술 테크닉과 같은 잔재주로 커버하는게 훨씬 편하기는 하겠지... 


그래서 등장인물도 주로 부부나 가족에 주변 이웃 또는 친구 몇명 해서 매우 단촐하고, 장소도 집과 근처 음식점, 카페 정도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수준으로 처리한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이즈로 판을 짜야하니까 스케일이 작을 수 밖에 없다. 사법시스템이나 관련 기관의 행정절차에 대해서도 전문지식이 딸리니까 경찰같은 법집행 공무원들이 나와도 딱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수준의 모습으로 겨우 등장해서는 대부분 기능적인 역할로 생색만 내다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만다. 


이렇게 어설픈 작품들을 읽다가 예를들어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 도입부 정도만 읽어보더라도 이제 막 FBI 신참요원이 된 스탈링과 상관이 나누는 디테일하고 수준높은 대화들과 사건을 맡음에 따라 펼쳐지는 전문적인 수사과정에서 비교 자체가 민망할 정도의 실로 엄청난 수준차이와 함께 그야말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서 소재로 삼고있는 8편의 고전 추리소설들 중에 나는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과 하이스미스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읽었다. 특히 ABC 살인사건은 내가 중학생 때 아가사 크리스티로 추리소설에 입문하면서 최초로 읽었던 작품이라 감회가 남달랐고 잠시 추억에 젖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각 작품들의 간략한 줄거리와 핵심 트릭을 모두 언급하고 있기때문에 꼭 읽고싶었던 작품이라면 스포일러를 당하기 전에 미리 읽어두는게 정신건강에 좋다. 그리고 비록 8편의 리스트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크리스티의 또다른 대표작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도 스토리의 기본 뼈대로 삼고 있으니 혹시나 그 책을 읽을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먼저 읽어야 할 것이다.


이 작가의 모든 작품을 전담해온 노진선씨의 번역은 여전히 믿음직했지만 이번에는 원작의 완성도와 비슷한 수준으로 그냥 좀 쉽게 처리한 것 같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영화까지 똑같은 제목으로 이미 잘 알려져있는데 굳이 '장미의 이름으로'라고 번역한 부분은 좀 성의가 부족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포와로라는 발음이 훨씬 보편적일 터인데 또 굳이 푸아로라고 한 것도 좀... 



여담으로 많은 사람들이 벨기에 하면 와플이나 초콜릿을 떠올리겠지만, 나는 무조건 '엘큘 포와로'다. 스웨덴 하면 ABBA이듯이 벨기에 하면 포와로가 아니겠는가...


이 작품은 전설적인 고전 추리소설들에 대한 오마주의 컨셉으로 작가의 개인적인 덕력을 아낌없이 과시한 점에서는 흥미로웠으나 작가의 한계 또한 여실히 드러났던 시간이어서 아쉬움이 컸다. 아마도 이변이 없는한 이 작가의 책은 더이상 찾아 읽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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