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워 문 - 거대한 부패와 비열한 폭력, 그리고 FBI의 탄생
데이비드 그랜 지음, 김승욱 옮김 / 프시케의숲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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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오는 10월에 개봉할 예정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플라워 킬링 문'이란 영화의 원작이다. 디카프리오와 드 니로가 주연인데 두 명 모두 스콜세지 감독의 페르소나이고 이 신,구 페르소나가 함께 출연한 영화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서 기대를 많이 하고있다. (애플에서 만든 영화라 나중에 애플TV+를 통해 스트리밍 서비스될 것 같은데 넷플릭스가 아니라서 못내 아쉽다)



작가 데이비드 그랜은 1967년생으로 현재 50대 중반이고 주로 역사 속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이야기나 모험담들을 발굴해서 취재하고 글을 쓰는 저널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는 뉴욕타임즈 No.1 베스트셀링 작가로 이미 유명한 모양이다. 국내에는 이 책 외에 역시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잃어버린 도시 Z', 그리고 남극 탐험가의 일대기를 담은 '궁극의 탐험'이 번역되어 나와있다.



이 책의 원제는 'Killers of the Flower Moon'이고 2017년에 발표되었으니까 나온지 이미 5년이 넘은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바로 다음해인 2018년에 빠르게 번역되어 나왔다.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첫페이지 도입부에 바로 설명을 해주면서 시작한다. 오클라호마의 오세이지족 인디언들이 커다란 달빛 아래 꽃들이 죽어가는 시기인 5월을 가리켜 '꽃을 죽이는 달 (Flower Killing Moon)'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인디언의 고유한 표현을 쓴 제목답게 미국에 남아있던 한 인디언 부족을 둘러싼 이야기가 펼쳐진다.


오클라호마 주는 그동안 고전 서부영화에서 참 많이도 등장했던 지역인 것 같다. 말과 소떼들... 그리고 먼지 풀풀 날리는 황량한 들판의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미국 중남부에 위치하면서 아무래도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의 강제 이주지역이다보니 카우보이와 인디언들이 함께 등장했던 서부영화의 단골 배경지역으로 나왔던 것 같다.



이 책에 등장하는 오세이지 원주민 보호구역은 북쪽 캔자스 주와 인접한 변두리 지역이고 구글지도에는 '오시지 레저베이션'라고 표기되어 있는데(흔히 '예약'을 뜻하는 'Reservation'은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뜻도 있었다) 아뭏든 편의상 나는 '오시지'가 아니라 그냥 책에서 번역한대로 '오세이지'라고 쓰겠다.



바로 아래에는 '털사'라는 도시도 보이는데 최근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털사 킹'이라는 미국드라마 때문에 친숙해진 이름이고 책에 많이 언급되는 '포허스카'와 '그레이호스'의 위치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작품은 실제 사건을 추적한 르포 형식의 논픽션이다보니 아무래도 오클라호마와 인디언의 역사에 관련한 기본적인 상식을 미리 습득하고 읽는다면 훨씬 재미있게 다가오는 부분이 많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런거 몰라도 이해하는데 전혀 지장은 없고 오히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에서 읽어서 그런지 모든 내용들이 훨씬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어두운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흥미진진함을 제대로 즐겼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오세이지족 인디언들이 살고있는 보호구역에서 유전이 터지면서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원주민들과 그들을 노리는 백인들의 탐욕과 잔인함으로 얼룩진 가슴아픈 역사를 다루고 있다.


오클라호마가 석유 생산지로 유명하다는 사실도 이 책 덕분에 새롭게 알게되었는데 어쨌든 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인디언과 석유를 연관지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석유 때문에 부자가 된 인디언이라는 소재 자체가 너무너무 신선했고 흥미로웠다.


사실 나는 인디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감정이 비록 남의 나라 이야기지만 항상 짠하고 좀 미안한... 그런 느낌이 강했던 것 같다. 분명히 아메리카 대륙의 원래 주인이었음에도 항상 야만인 취급을 받아온 것도 모자라서 지금도 마치 난민처럼 척박한 변두리의 보호구역에 내몰려 있는데... 도대체 왜 저런 대접을 받아야만 하는가 하면서...


그래서 이 책 초반부에 석유의 수혜로 부를 누리는 인디언들의 모습이 그려질 때는 속으로 약간의 통쾌함과 함께 그나마 이렇게라도 자본의 달콤함을 누렸던 인디언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그들의 아픔이 조금이나마 보상받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가슴뭉클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안도감은 역시나 잠깐 뿐이었고 언제나 그렇듯 역사는 그렇게 공정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자기보다 하등한 존재라 생각했던 인디언들이 막대한 부를 가져가는게 못마땅했던 백인들이 가만있을리 없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만큼 인간의 원초적인 면을 잘 드러내는 말도 없을 것이다. 갑자기 운좋게 큰 돈이 생긴 사람이 설령 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더라도 세상이 불공평한게 아니냐며 괜한 심술을 부리는게 인간의 보편적 심리일 텐데, 하물며 그 사람이 나보다 못한 존재라는 판단을 해버리면 기어코 숨어있던 최악의 심보가 올라와서 본능이 이성을 잡아먹게 되는 것이 아닐까... 질투와 불만를 넘어 아예 뺏어서 내것으로 만들겠다는 범죄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묘사되는 인디언과 백인들의 역사는 바로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빚어진 어쩌면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던 비극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얼만큼 뻔뻔하고 비열해질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허구가 아니라 역사에 있었던 사실 그대로 낱낱이 보여주기 때문에 충격도 충격이지만, 한편으론 그 추악함의 본질이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있는 것이어서 더 고통스러웠고 또한 부끄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본능이 주도하는 그러한 무질서과 공포 속에서도 정의로운 신념으로 법을 수호하고 집행하려는 의로운 사람들 역시 함께 존재했다는 점이었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미국이라는 나라가 왜 아직까지 세계최고로 군림하고 있는 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 특히 톰 화이트라는 연방수사관의 강건하면서도 집념어린 수사과정은 읽는 내내 진심으로 응원하게되는 숭고함이 느껴졌던 것 같다.


이 작가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위해 굳이 상상을 덧붙여서 양념을 치지 않고 오로지 재판기록을 비롯한 문서화된 증언과 실제 취재를 통한 팩트만 나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순서가 절묘하게 배치되어 웬만한 추리소설은 저리가라 할 정도의 재미와 긴장감이 살아있다. 게다가 자료조사가 워낙 치밀해서 미국역사의 한 부분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느낌과 함께 그동안 몰랐던 지식과 상식을 새롭게 얻는 듯한 성취감도 만만치 않다.


그렇지만 다른건 몰라도 '존 에드거 후버'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정도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미연방수사국 즉, FBI를 창설하고 무려 50년 가까이 국장으로 역임했던 FBI의 상징이다. (FBI 본부청사를 그의 이름을 따서 후버빌딩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이 책에서는 후버가 FBI의 초석을 다져가던 시기에 인디언 보호구역의 사건에 개입하면서 톰 화이트를 고용하여 문제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초창기 연방수사국의 뒷얘기와 함께 후버의 성격도 엿볼 수 있어서 너무 흥미로웠고 덕분에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벌어지는 중범죄는 FBI 관할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테일러 쉐리던 감독의 '윈드 리버'라는 영화를 보면 배경이 인디언 보호구역이기 때문에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그 지역경찰이 아닌 FBI요원이 담당으로 파견된다. 확실히 어떤 상식이든 알면 알수록 그만큼 디테일을 즐길 수가 있는 것 같다.



'플라워 문'은 끔찍한 범죄와 범인을 찾아가는 미스터리 스릴러적인 요소와 반전의 재미까지 갖추면서도, 진실을 밝히려 고군분투하는 한 남자의 감동적인 일대기도 있고, 추악하고 잔인하거나 또는 나약한 인간 본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너무나 매력적인 작품이었던 것 같다.


특히 우리가 잘 몰랐던 미국역사의 이면을 통해 여러가지 의미있는 상식을 얻은 점도 좋았다. 엄청난 자료조사를 비롯하여 작가가 이 책을 쓰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다.


책을 직접 읽어보니까 스콜세지 감독이 욕심을 낸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다. 나는 첫페이지 펼친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정말 쉬지않고 단숨에 다 읽었다. 몰입도가 대단하고 김승욱씨의 번역 또한 믿었던 만큼 안정적이어서 더할 나위가 없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uPJJk87QAyk&t=553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198833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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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끝이야
콜린 후버 지음, 박지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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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생으로 43세인 여류작가 콜린 후버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면서도 영향력이 높은 스타작가 중의 하나임이 분명한 것 같다. 작가 홈페이지를 보면 주로 청소년을 비롯한 젊은층을 겨냥한 로맨스 장르가 주종목인 걸로 소개되어 있다.



'로맨스소설' 분야에서 지금까지 화제가 되거나 성공한 케이스라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나 '트와일라잇' 시리즈 같은 작품들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되는데, 아무래도 남녀간의 닭살돋는 애정행각이나 성적인 묘사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호불호가 좀 심하게 갈리는 장르라 할 수도 있겠다.


나같은 경우는 불호 쪽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로맨스 장르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영화만 하더라도 '노팅힐' '세렌디피티' '어바웃타임' 같은 로코물 정말 좋아하고, 특히 '노팅힐'은 나의 인생영화 10편을 뽑는다면 반드시 넣고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런 쪽의 책은 글쎄... 오래전에 읽었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로맨스물에 들어가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책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읽어본 작품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로맨스 소설을 기피하는 이유는 작품의 주제나 소재 때문이 아니라 정말 처참한 수준의 글솜씨를 보여주는 저급한 작품들이 거의 대부분이라는 선입견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금도 질 떨어지는 글쓰기가 가장 심하게 몰려있는 장르가 바로 '무협지'와 '로맨스'... 이 두 분야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래서 이 책도 로맨스물이라는 사전정보 딱 한 가지만 접한 상황에서 읽기도 전에 대충 지레짐작하고 혹시 지뢰를 밟는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가졌던 것이다.


이 작품은 2016년작으로 나온지 이미 꽤 오래되었는데, 최근 2021년에 젊은층이 많이 이용하는 TikTok이라는 어플에서 이 책을 읽고 감동받았다는 영상들이 챌린지 형식으로 퍼지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단숨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상당히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TikTok을 하지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BookTok이라는 카테고리가 있어서 책을 읽고난 느낌을 짧은 영상으로 공유하는 그러한 문화가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요즘 세대들이 워낙 책을 안 읽는데다가 진지하고 지루한 거 극도로 싫어하는 경향이라 생각해서 이것도 책 내용의 질과 완성도와는 별개로 그냥 또래들끼리 즐기는 밈(Meme)문화와 같은... 한때 가볍게 반짝 즐길거리로 어쩌다보니 그냥 얻어걸린 케이스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비슷하다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지만 예전에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라는 일본소설이 난리난 적 있었다. 2000년대 초에 일본의 어떤 유명 여배우가 그 책을 울면서 단숨에 다 읽었다느니 하는 소감이 화제가 되면서 갑자기 슈퍼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여파가 우리나라까지 덮쳐서 굉장히 많이 팔렸던 책이다. 일본어로는 '世界の中心で、愛をさけぶ'인데 이걸 줄여서 짧게 'セカチュー'라고 불렀고, 일본 현지에서는 'セカチュー신드롬'이라고까지 했을 정도였다.



당시에 나도 사서 읽었고 그때 썼던 리뷰가 블로그에 남아있는데, 어이없는 졸작이었고 차라리 황순원의 '소나기'가 열배는 낫다... 라고 썼던 기억이 난다. 프로작가가 썼다고는 도무지 믿기지않는 평범한 필력의 소유자가 분에 넘치는 성공과 함께 대단한 작가로 포장되는 현상이 씁쓸하게 느껴졌었다. 나는 그 이후로 일본의 호들갑은 절대 믿지 않는다.


아뭏든 그래서 이 책도 그냥 관종기 가득한 젊은이들의 놀이문화에 이용되었을 뿐인 그야말로 건질거 하나도 없는 흔하디흔한 로맨스소설일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의심을 안고 정말 별 기대없이 읽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이 책은 좀 대박이다.



도입부 몇페이지 읽자마자 이 작가가 글을 정말 잘 쓴다는 건 대번에 파악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가면 갈수록 그 잘 쓰는 정도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어서 깜짝 놀랐다. 바로 전에 읽었던 프리다 맥파든도 필력이 상당히 좋은 작가라고 판단했는데 이 콜린 후버는 그보다 한수 위의 글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스피디하고 감각적인 상황묘사와 빈틈없는 캐릭터 구축력에 통통 튀는 대사 모두가 한차원 높다. 이 정도면 장르 소설가로서는 거의 최상급의 필력이다.


같은 이야기라도 말을 조리있고 재미있게 할 줄 아는 사람이 들려주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훨씬 더 즐겁게 몰입하게 된다. 책도 마찬가지다. 일단 작가가 글을 잘 쓰면 스토리의 재미도 재미지만 문장 자체를 읽는 즐거움이 추가되는 것이다.


이 작가의 글은 뭐랄까... 한마디로 너무 사랑스럽다. 프로다운 문장의 기교가 살아있으면서도 쉬운 단어와 간결한 구성으로 풀어내기 때문에 실제로는 상당히 무겁고 깊이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모든 상황과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가 완벽하게 이해되고 쉽게 다가오는 한편, 별거없는 자잘한 일상사가 묘사되는 와중에도 뭔가 모를 품격이 느껴진다.


특히 나는 개인적으로 품위있는 서양식 유머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를테면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사회자나 배우들이 한번씩 던지는 농담같은... 그런 유머를 좋아한다.


옛날 영화 중에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감독 주연에 닉 놀테가 나오는 'The Prince of Tides'라는 영화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사랑과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있는데 당시에 별 생각없이 비디오테이프로 빌려보다가 어느 틈에 흠뻑 빠져서 감상했던 영화다. 그 영화를 보다보면 중간중간 주로 대사로 묘사된 수준높은 유머가 나오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그래도 너무 내 취향이어서 좋았던 기억이 나고, 아직도 '사랑과 추억'하면 고급스런 유머가 제일 인상깊었던 영화로 남아있다.



이 작품에는 내가 좋아하는 그런 스타일의 유머들이 마치 융단폭격하듯이 이어져서 책을 읽는 내내 미소를 머금거나 킥킥거리면서 웃었던 시간이 많았다. 책 읽다가 하도 혼자서 킥킥거리니까 집사람이 한심하게 쳐다보긴 했지만서도... 하여튼 이 작가의 유머감각은 정말 취향저격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로맨스물이라고 하기에는 성적인 묘사의 수위가 한참 약하다. 켄 폴리트의 작품들에 비하면 거의 애들 수준이고 영화로 치면 15세 관람가 정도여서 이 책이 과연 로맨스 장르가 맞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물론 그래도 나름 로맨스물다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표현법이 눈길을 끄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제는 어쨌거나 '가정폭력'이다. 어린 시절 가정폭력에 의한 트라우마와 이를 극복하려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진지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있는 것처럼 작품 전반에 항상 조마조마한 긴장감이 깔려있는 스릴러적인 요소가 오히려 강한 편이다.


TikTok 영상을 보면 업로드한 사람이 거의 여성인데 이것은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대부분 여성들이란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여성들에게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강력하게 어필하는 메세지가 있다. 거기에 작가의 출중한 필력이 더해져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있는 것이라 본다. 과연 무엇이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는 책을 읽어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한편으로는 작가가 페미니즘 성향이 좀 강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이 책에는 '그녀(She)'라는 3인칭 대명사가 없다. 남자든 여자든 무조건 '그'라고 지칭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번역가가 실수를 했나 싶었는데 나중에는 작가의 의도적인 표현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도 원문에는 'He'나 'She'의 구분없이 모두 'They'로 통일해서 쓰지않았나 싶다. 작가의 성향이 그렇다면 존중해줄 필요는 있다. (엉뚱하게도 설마 번역가가 페미니스트라서 자기 마음대로 '그녀'를 지워버린 거라면 정말 낭패지만...) 내 직감이 맞다면 이런 디테일까지 세심하게 살릴 정도로 번역 역시 너무나 훌륭하다. 앞서 '하우스 메이드'도 그렇지만 장르소설에서 이 정도로 좋은 번역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이번에 운 좋게도 두 작품 연속으로 번역이 너무 고퀄리티라 웬일인가 싶다.


한가지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우리나라 독자들이 미리 알아두면 좋은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엘런 드제너러스'라는 인물이다. 미국에서 '오프라 윈프리'에 버금가는 어마어마한 셀럽이고 아카데미 시상식의 사회도 몇번 맡았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릴리가 멋있어서 오줌 쌀 뻔했다고 표현했던 대목은 바로 아래 장면이다.



이 책에서 그녀는 릴리가 어린 시절 심적으로 의지하는 동경의 대상으로서 그냥 실명으로 언급이 된다. '니모를 찾아서'라는 애니메이션 영화에 사용된 도리의 대사가 인상깊게 활용되는데, 그 도리의 성우가 바로 엘런 드제너러스이기도 하다. 이런 부분은 번역가가 주석을 달아주었으면 훨씬 더 좋았을텐데 살짝 아쉽다.



후반부 엘런 드제너러스의 사인을 받은 걸로 등장하는 책도 'Seriously...I'm Kidding'이 원제목이고 실제로 그녀가 쓴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만약 엘런 드제너러스가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나라면 정말로 영광스럽고 고마운 마음과 함께 감동을 많이 받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혹시나 엘런 드제너러스가 콜린 후버를 자신의 쇼에 초대한 적이 있는지 구글로 찾아봤는데 아쉽게도 두 사람이 직접 만난 흔적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이 이 정도로 인기있는 베스트셀러라면 그녀가 모를 리는 없을텐데 그 흔한 SNS의 언급조차도 없다는 건 너무 이상해서 좀더 살펴보니... 엘런 드제너러스는 이 책이 TikTok에 의해 역주행하기 전인 2020년부터 여러가지 부정적인 구설수와 논란에 휩싸이면서 커리어가 완전히 무너지는 시기를 보냈다고 나온다. 그러니 이런데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지도... 거기에 생각보다 인성이 별로 좋지않은 사람이란 것도 덤으로 알게되면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진실은 저 너머에...


어쨌든 만약 작가가 이 책에서 엘런 드제너러스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쯤 분명히 훈훈하고 감동적인 에피소드가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작가 후기에 절대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고는 했지만 그건 너무 떨릴 것 같아서 오히려 장난스럽게 반어법으로 쓴 것 같은데... 어쩌면 지금은 진심으로 만나지 않기를 바랄 지도 모르겠다.



아뭏든 나는 이번에 이 책을 읽고 지금 현재 미국에서 가장 핫한 작가의 실력이 과연 어느 정도이고 어떤 스타일로 글을 쓰는지 한번 제대로 느껴본 것 같다. 요즘 젊은이들이 책을 안읽는 세대라고 멋대로 넘겨짚었던 내 모습을 반성하기도 했고, 편견은 무조건 버려야 한다는 것도 또한번 깨달았다.


이 작가는 어떤 작품이든 기본 이상은 할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겨서 나중에 그녀의 다른 작품도 꼭 읽어볼 계획이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6po4J1dZcak&t=52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185206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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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메이드
프리다 맥파든 지음, 김은영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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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맥파든은 출판사의 소개에 의하면 뇌손상 전문의 출신이라고 한다. 구글을 검색해도 프로필이 더이상 자세히 나오지는 않고 심지어 나이도 알 수가 없는데 홈페이지 사진을 보면 생각보다 젊어보이긴 한다. 많아봐야 한 40대 초중반? 어쨌든 뇌손상 전문의라는 프로필에서 벌써 이 작가의 스타일은 대충 짐작이 된다. 주로 정신분열이나 사이코패스 같은 이상심리자를 다룰 것 같은 느낌이 딱 오는 것이다. 홈페이지 대문에도 Psychological Thriller 즉, 심리 스릴러 작가라는 타이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건 그다지 특별할 건 없다. 2010년대 초반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가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후 제2의 길리언 플린을 꿈꾸는 여류작가들이 우후죽순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영미권에서는 이런 류의 소설이 거의 대세로 자리잡은 분위기인데다가 우리나라에도 무슨 아마존 1위 또는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 따위의 홍보문구를 앞세운 생소한 여류작가들의 작품이 그동안 심심찮게 소개되면서 나도 그중에 상당수를 광고만 믿고 사서 읽기도 했으니까...


나의 경험상 이런 류의 소설은 대부분 몇가지 비슷한 특징들을 보였던 것 같다. 등장인물들이 주로 부부, 가족, 친구 또는 이웃으로 한정된 소수인원이고, 사건이 벌어지는 무대도 그들이 사는 집이나 근처 술집, 식당 등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FBI나 경찰 같은 공권력의 개입도 거의 없이 보통은 그냥 등장인물들끼리 사건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마무리짓는 패턴이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은 스케일도 작고 전문성까지 떨어지는 약점 때문에 특출난 아이디어나 매력포인트가 없는 한 그저그렇다는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별다른 사회경험이나 전문지식도 없이 전업주부로 있다가 특정 영화나 드라마에서 어떤 영감을 얻어서 살짝 변형시킨 아이디어만 가지고 마치 나도 한번 도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자감에 글을 쓴 것 같은... 그런 의심이 드는 함량미달의 작품도 적지 않았다.


이 작품 역시 '하우스 메이드'라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짐작이 되는 스케일과 분위기 등, 여성작가의 심리 스릴러에 흔히 나타나는 여러 지표들이 너무 뻔하게 보여서 사실 아마존의 인기를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전혀 살 생각이 없었던 책이었다.


요즘 영화값이 예전에 비해 너무 올라서 말들이 많은데 이런 장르소설류의 책값도 그동안 알게모르게 야금야금 인상을 거듭해왔다. 이 책만 하더라도 정가 16,500원에 10% 할인해도 15,000원돈이다. 나중에 중고로 반값 정도로 떨어지면 모를까 한번 읽고 말 장르소설을 새책으로 이 돈 주고 산다는 건 너무 아깝다. (참고로 중고책은 출판심의위원회 규정때문에 출간된지 6개월이 넘어야 풀린다.)


어쨌든 부담스러운 책값 때문에 제발 재미있어라... 재미있어라...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초반 몇페이지 딱 읽자마자 이번에 제대로 골랐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일단 이 작가는 필력이 상당히 좋고 인상적이다. 비록 오랜 세월동안 글을 써온 베테랑 작가들에게서 보여지는 문장의 고급스런 테크닉 같은 것은 부족하지만 요즘 세대들에게 확실하게 어필이 되는 개성있고 스피디한 스타일이 살아있어서 자신의 약점을 커버함과 동시에 엄청난 가독성을 자랑한다.


특히 인물들간의 대화에서 이 작가는 아주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것 같다. 여기에 쓰여진 대사들은 별다른 수정없이 그대로 영화 시나리오로 바꾼다해도 전혀 위화감을 못 느낄 정도로 생생한 현장감과 함께 정말 깔끔하게 잘 짜여져 있다.


'당신에게 고백할 게 있어요'라는 대사에 '네?'라고 되물으면서 고백이라고? 당신을 사랑해요 라는 독백이 바로 이어지는 식의... 말과 생각이 뒤섞이면서 간결하고 감각적으로 상황을 묘사하는 연출력이 일품이다.



모든 시퀀스가 딱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선에서 끊고 연결해주는 리듬감과 호흡도 좋고, 센스있는 유머감각과 개성있는 캐릭터 구축력도 수준급이다. 2023년 현재 최신 장르소설의 트렌드는 과연 어떤 스타일인가 하는 질문에 이 작품이 그 정점을 보여주고 있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번역도 최근 장르소설의 경우 워낙 수준이하가 많아서 거의 운에 맡겨야 될 정도인데, 이 작품은 고맙게도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게 처리되어 있어서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적절한 어투설정과 표현법으로 원작의 맛깔스러운 대사를 굉장히 잘 살려내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책의 중반부가 넘어가면서 '히든 페이스'라는 스페인 영화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현재 넷플릭스에도 올라와 있고 충격적인 반전 영화로 제법 많이 알려져있는 영화다.) 작가가 정말로 그 영화에서 영감을 얻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중심이 되는 설정이 유사하다는 점에서는 약간 김이 새는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었다. 후반부에 '그건 옳지 않아요'라는 대사가 몇번 나오는데 나는 혹시 그 영화의 결말에 빗대어 쓴 대사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리고 마지막 결말부에서 전형적인 헐리우드 스타일로 두루뭉술하게 너무 클리셰적으로 대충 덮고 넘어가는 점도 역시나 좀 아쉬운 부분이다.


이렇게 후반부로 갈수록 점수를 깍아먹는 지점들이 몇군데 존재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군더더기없고 스피디한 전개와 실감나고 흡인력있는 대사들이 그러한 단점들을 충분히 덮고도 남을 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아마존 No.1 베스트셀링 작가라는 호칭에 걸맞는 정도의 읽는 재미는 확실히 보장해준다.


그동안 숱하게 접해오던 이런 류의 심리 스릴러 작가들 중에 이 프리다 맥파든은 자신의 색깔과 존재감을 확실하게 어필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신작이 나오면 또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요즘 15,000원 주고 그저그런 영화 한편 보느니 차라리 같은 돈 주고 이 책 사서 읽는게 훨씬 즐거운 시간이 되리라 장담한다.


내 생각에 이 작가는 길리언 플린처럼 차후에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약을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대사를 워낙 맛깔나게 잘 쓰니까... 이 작품 역시 조만간 영화화될 예정이라고 한다. 하긴 저예산 영화로 만들기 딱 좋은데 안 만들 이유가 없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8VKKGpNF3BI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176296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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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 미친 반전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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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어보는 최신작 추리소설이다. 일본에서는 바로 지난해인 22년에 발표되었고 우리나라에는 지난달 번역출간되어 아직 나온지 채 한달도 지나지않은 책인데 나오자마자 추리소설 부문에서 현재 1위를 달리고 있다.


아마도 일본 현지의 각종 미스터리 관련 차트를 석권했다는 정보와 더불어 '스포 절대 금지'라든지 '미친 반전'같은 자극적인 광고문구가 독자들의 호기심을 많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반전'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작년에 발표된 최신작이라는 점에서 최근 일본 추리물의 수준과 트렌드를 대충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구매를 결정했다.


혹시나해서 구글로 검색을 좀 해봤는데, 일본 미스터리 무슨 차트 1위니 4위니 하는 수상 결과라든지 동료 작가나 평론가들의 추천사는 과장없이 비교적 있는 그대로 옮겨온 것 같았다. 물론 이런 것들이 절대로 작품의 완성도를 보증하는 바로미터는 아니다. 사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지만 일본의 호들갑은 워낙 유별나서...


작가는 유키 하루오인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고 1993년생이니까 지금 딱 30살이다. 노련미보다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도전정신이 더 많이 발휘될 나이로 보이는데 이건 어차피 글을 읽어보면 답이 나오는 부분이다.


이렇게 반전에 올인하는 작품들이 의외로 속빈 강정인 경우가 많아서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하도 미친 반전이니 뭐니 하면서 새책은 비닐로 밀봉까지 되어있길래 혹시 작은 단서 하나라도 놓칠까봐 처음부터 정말 신중하게 읽어나갔는데...


일단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럴 필요도 없었고, 여러가지 의미로 참 대단한 작품이었다.



작가가 필력이 뛰어나면 어떤 환경이라도 저절로 집중이 되고 잡생각 따위는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책은 처음부터 마음을 가다듬고 집중해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갈수록 정신이 산만해지는 희한한 체험을 안겨주었다. 이유는 다른거 없다. 그냥 작가의 필력이 형편없고 개연성이 엉망진창이라서 그렇다.


이 작품은 아가사 크리스티와 엘러리 퀸이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지금으로부터 무려 약 100년전인 1930~40년대의 고전추리 작법을 그대로 차용했다. 특히 크리스티의 작품 중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제목으로도 잘 알려진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을 레퍼런스로 한 흔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전체적인 구성과 진행 등이 크리스티의 스타일과 너무나 유사하다. 심지어 마지막에 탐정 역할을 하던 인물이 용의자들 쭉 불러 모아놓고 사건개요를 구구절절 설명한 후에 범인지목하는 것도 딱 엘큘 포와로가 하던 방식 그대로다. 물론 크리스티의 창작 스타일을 따라하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게 없다.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거나 응용해서 더 나은 작품을 만들면 된다.


개인적으로 고전 추리물들에 단점이 있다면 바로 '문학성'이라고 생각한다. 범인찾기와 범행수법에 골몰하느라 캐릭터와 서사가 거의 죽어있으며 등장인물 대부분이 희생자 아니면 용의자 역할이기 때문에 사건을 구성하는 필수요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극도로 기능적이고 제한적인 용도로만 소모되는 특징이 있다. 이렇게 캐릭터의 서사와 생명력이 약하다보니까 감정이입 또한 약해지고, 그래서 누군가가 잔인하게 살해되어도 끔찍하다는 느낌이 별로 없고, 누가 어떻게 죽였을까 하는 퍼즐게임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고전 추리물의 단점을 아주 극한까지 끌어올린 결정체에 가깝다. 이 작가는 그저 장기판의 장기말에 불과한 용도로 캐릭터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 책에 등장하는 10명의 등장인물들은 캐릭터가 아예 완전히 죽어있다.


각각의 캐릭터에 서사가 전혀 없으니까 어떤 인물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웬만한 소설들은 읽다보면 주인공이든 조연이든 외모가 대충이라도 그려지고 특정 배우를 떠올리기도 하면서 감정이입이라는 것을 하게되는데,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심지어 외모조차도 전혀 짐작이 안된다.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각자의 이름과 직업 뿐이다. 그래서 중간에 누가 목이 잘려 죽는 끔찍한 상황이 발생했음에도 어차피 생명력이 없던 인물이라 독자의 입장에선 별다른 느낌을 가질 수가 없다. 퍼즐 진행을 위해 다음 장기말이 쓰러졌구나 하는 딱 그 정도의 느낌일 뿐... 


사실 아가사 크리스티도 장르 특성상 어쩔 수 없이 퍼즐 위주의 스토리를 보여주지만 이 정도까지 캐릭터를 허술하게 다루진 않았다. 그런데 이 작가는 제한된 공간이라는 밀실과 그 안에 갇힌 한정된 인원의 사람들... 그리고 한정된 시간 안에 누군가의 희생으로 빠져나갈 수 밖에 없는 특수한 조건과 그 와중에 살인이 벌어지고 살인자를 찾아야만 하는 더 특수한 조건... 이런 기본적인 설정들과 마지막 반전만 구상한 채 나머지는 모조리 여기에 억지로 끼워맞춰 그야말로 간신히 '소설'의 형태를 만들었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솔직히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그냥 '시놉시스'에 불과하다. 이러이러한 설정에 이러이러한 캐릭터로 이런 상황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면서 대충 뼈대가 되는 줄거리에 약간의 근육 정도만 붙인 수준인 것이다.



도입부 창세기의 구절은 제목이 방주니까 뭔가 있어보이려고 넣은 것일 뿐, 산속의 방주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당연히 성서와의 연결고리 따위도 없다. 작가에겐 그저 출입구가 두 군데 존재하는 밀실 구조물이 필요했을 뿐이다.


지진이라는 천재지변의 우연적 상황부터 현실성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주먹구구식 설정인데, 개연성 없고 말도 안되는 살인동기와 살해방식이 납득될 리가 없다. 그냥 그 타이밍에 살인사건이 필요해서 집어넣은 작가의 진행수순에 불과하다. 게다가 등산동아리 대학 동기란 설정이면 오랜기간 친구처럼 알고지낸 사이일텐데 좀전까지 바로 옆에 있던 친구가 살해당해도 별로 놀라거나 슬퍼하지도 않는다. 명색이 소설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서사와 설득력도 없는 것이다.


문장들은 인물들의 행동과 배경이 되는 지형지물만 기계적으로 묘사하고, 대사들도 영혼이 거의 없이 사건 브리핑 위주로 너무나 재미없게 이루어져 있다. 프로작가다운 문학적인 감성이나 문장의 테크닉은 눈씻고 찾아봐도 단 한군데도 없다.


그 와중에 일본소설 특유의 고질적인 나쁜 버릇은 어디서 또 충실하게 배웠는지 분명히 1인칭 주인공 시점을 택하고 있으면서도 전지적 작가 시점의 부연설명 모드가 수시로 끼어들어 시점이 애매모호하게 오락가락하는 것도 상당히 거슬리는데... 이것 역시 작가의 필력이 수준 이하라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책은 약 350페이지 분량이니까 명목상으로는 분명히 장편소설이 맞지만, 실제 체감상으로는 200페이지도 안되는 중편으로 느껴질 정도로 내용이 빈약하다. 판형과 활자의 크기도 페이지수를 늘리기 위해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데 거기에다 이 책은 상당히 기이하고 신박한 방식을 쓴 꼼수로 페이지를 굉장히 많이 부풀렸다.



문단의 줄바꿈을 아예 기준이 없을 정도로 무진장 집어넣은 것이다. 이렇게 줄을 계속 바꾸게 되면 여백이 늘어나고 페이지도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더 황당한건 대사 지문에도 줄바꿈을 수시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인데, 나는 대사에서까지 이렇게 줄바꿈을 쓴 편집 방식은 난생 처음 봤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이 책을 순식간에 읽었다면, 그 이유는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실제로 분량이 적어서 빨리 읽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소설 자체의 완성도가 이렇게 형편없는데... 헛웃음 나오는 그 미친 반전이란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일까 싶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NQcGPzOB9UQ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045452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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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무소유'라는 책을 읽으면서 다시한번 주목하게 된 사실이 있었다. 법정 스님은 '어린 왕자'를 너무너무 사랑하셨던 분이라는 거... 살아생전 가까운 지인들에게 기꺼이 책을 사서 나눠주기도 하셨고, 심지어 이 책을 읽고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당신 자신과는 결이 맞지않는 사람이라고까지 단호하게 말씀하셨을 정도로 사람의 성품을 판단하는 본인만의 척도이자 관문의 역할로 활용하셨던 것 같다.



나야 법정 스님이 지금 살아계신다 해도 각자 살아가는 세계가 달라서 굳이 그 분께 좋은 이미지로 비춰져야할 이유가 전혀 없는 입장임에도 그 구절을 읽었을 때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살짝 찔리는 느낌을 받긴 했다. 사실 내게 있어 어린 왕자는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된 책이라는 핑계가 있다고 해도 겨우 초반부 보아뱀 모자 그림에 관한 에피소드 부분만 기억에 남아있는 정도의 솔직히 그렇게 특별하고 강렬한 감동이 있었던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님에게 인정받을 정도의 감흥을 간직하지 못한 것이 무슨 죄는 아니겠지만 이게 뭐라고... 나 자신에 대한 약간의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좀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무소유' 덕분에 '어린 왕자'를 다시 읽으려고 마음먹게 되었는데, 이번 기회에 마음에 드는 번역본을 딱 한 권만 골라서 책장에 나란히 함께 소장하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국내 인터넷 서점에서 어린 왕자를 검색하면 거의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출판사의 다양한 번역본이 나온다. 외국소설들 중에 이만큼 많은 번역본이 존재하는 책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이고 심지어는 경상도 사투리 버전의 '애린 왕자'라는 희한한 번역도 나와있는 상태다. 그래도 출판사의 지명도와 번역가의 명성에 의한 독자들의 선호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판매량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나는 인기도와 판매량에서 종합 10위권 이내에 올라있는 번역본들 중에서 미리보기 서비스의 도움도 받으면서 심사숙고한 끝에 총 4권을 최종 선택하여 구매했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어린 왕자'하면 가장 먼저 거론이 되고 압도적인 선호도로 제일 높은 판매량을 자랑하는 판본은 황현산 번역의 열린책들 버전이라고 판단이 되고, 그 다음은 문학동네의 김화영 번역판이 많이 팔리는 것 같다. 열린책들과 문학동네 이 두 버전이 전통있는 빅2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래서 별 고민없이 이 2권은 제일 먼저 골랐고... 오리지널 초판본의 표지디자인을 사용한 더스토리 버전은 최근 KBS 방송프로그램에 노출되면서 갑자기 판매량이 급증한 것 같은데 어쨌든 검증해볼 가치가 있을 것 같아서 그 다음으로 포함을 시켰다. 마지막으로 고른 책은 문예출판사의 전성자 번역판이다. 이 책은 부동의 1위를 지키고있는 황현산 번역가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번역이라는 추천사에 이끌려서 선택을 하게 되었다.


그 외에 새움출판사의 이정서 번역판도 구매여부를 살짝 고민했었는데 미리보기 서비스로 앞부분을 읽어보니까 바로 판단이 되어서 제외시켰다. 이정서씨는 카뮈의 '이방인' 논란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번역가인데 기존의 번역이 심각한 오역이니 뭐니 하면서 온갖 어그로를 끄는 것에 비해 그에 걸맞는 결과물은 전혀 제시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사람 번역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른 리뷰에서 하게 될 지도 모르겠지만 비록 판매량이 높다고 해도 이번 시간에는 포함시킬 가치가 전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몇년 전에 애들 보라고 별 생각없이 골라서 급하게 샀던 책이 있는데 더클래식에서 나온 한글 영문 합본판이다. 이미 가지고있던 책이라 이번 번역비교에 당연히 포함시키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이 책은 번역가가 베스트트랜스라는 번역팀이라서 번역가 개인의 개성과 특징을 논할 수 없기에 역시 제외시켰다. 그래도 내친 김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읽기는 다 읽었고 함께 포함된 영문판도 이번 기회에 의외로 아주 요긴하게 활용을 했다.



일단 책의 제본 스타일은 문예출판사를 제외한 나머지 3권 모두 하드커버 양장본이며, 열린책들의 판형만 어린이용으로 좀 큼직하게 제작한 신국판 사이즈이고 나머지는 4X6판의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사이즈이다. 작품설명이나 후기, 작가연표를 제외한 본문 페이지는 각각 열린책들 120페이지, 문학동네 140페이지, 더스토리 140페이지, 문예출판사 123페이지로 거의 비슷한데 삽화의 크기와 배치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이 작품은 원작자인 생텍쥐페리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 중간중간 적절한 타이밍에 삽입되어 내용을 구체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 중에서 다른건 몰라도 초반부 1장의 보아뱀 그림과 2장의 양 그림 만큼은 이 작품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해서 극적인 효과를 위해 그림배치에 신경을 쓴 쪽에 좀 더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1장에서 '나의 제1호 그림은 이것이다' '제2호 그림은 이것이다' 하는 장면에서 각각의 그림으로 딱 끝내는 페이지 구성을 보여주는 방식이 가장 바람직한데 이 부분에서 의외로 더스토리 버전만이 아주 정확하게 편집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머지 책들은 모두 페이지 구분없이 그림을 배치해서 극적 효과가 떨어진다.



2장에서도 마지막에 아무렇게나 그려서 툭 던져주었다는 문장을 끝으로 페이지가 바뀌면서 상자 그림이 딱 나와야 극적 효과가 가장 극대화된다. 역시 이 부분도 더스토리의 버전만 정확하게 살려주고 있고 나머지 책들은 신경을 전혀 쓰지않은 모습이다.



나는 원작자 역시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그림이 삽입되길 원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혹시나해서 영문판도 살펴봤는데 페이지에 여백이 생기는 것에 상관없이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극적 효과를 살리는 구성으로 삽화를 배치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삽화의 배치 만큼은 뜻밖에도 더스토리 출판사의 완승이다.


본격적으로 번역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보면...


지난번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비교편을 보면 짐작하겠지만, 나는 번역을 평가할 때 외국어 원문과 대조하면서 분석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어차피 외국어 실력이 안되기 때문에 그렇게 할 능력도 없고... 그래서 오로지 한국어로 번역된 최종 결과물만 놓고 판단을 한다. 나는 번역가의 능력을 가늠하는데 있어서 외국어보다 한글 구사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는 쪽이기 때문에 단어의 적절한 선택과 어휘의 기교, 문장의 문학적 감성 등에 포커스를 맞추고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흐름, 그리고 작가의 의도를 잘 구현하고 있는 지에 집중한다.


이번 어린 왕자 역시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과 정서에 포인트를 두고 읽었다. 이 작품은 총 27장의 단락으로 구성된 100여페이지 분량의 중편소설 수준인데 페이지당 활자의 수가 적고 삽입된 삽화들이 많아서 실제 내용은 훨씬 더 짧다. 그만큼 문장 하나하나가 빠짐없이 독자의 감성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기때문에 사소한 단어 선택 하나에도 번역가의 고심이 많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판매량에서 부동의 1위인 열린책들의 황현산 번역가는 1945년생으로 2018년에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셨으며 고려대 불문과를 나오셨고 교수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셨던 분으로 나온다. 보들레르를 비롯한 프랑스 문학의 번역서들이 꽤 많다. 이 책은 2015년에 처음 나왔으니까 돌아가시기 3년전인 70세에 번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학동네의 김화영 번역가는 1941년생이니까 현재 80세로 가장 원로이시다. 서울대 불문과 출신이고 알베르 카뮈의 독보적인 권위자로 명성이 자자하신 분이다. 번역가의 경력과 지명도에서 거의 넘사벽 수준이라 가장 기대를 많이 했던 책이다. 2007년에 처음 발매되었으니까 역시 60대 중후반에 번역을 하신 걸로 보인다.



더스토리의 김미정 번역가는 이화여대 불문과 출신이란 점 이외에는 출판사의 소개란에도 별다른 정보가 없고 인터넷 검색을 해도 나오는게 없다. TV 노출을 통해 버프를 받는 이런 책들은 그냥 직접 읽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문예출판사의 전성자 번역가 역시 서울대 불문과 출신인 점을 제외하면 별다른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는데 몇몇 기사를 통해 겨우 짐작할 수 있었던 점은 현재 이 분도 70대 이상의 원로 번역가란 점이었다.



이 작품은 분량이 짧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고있기 때문에 사실상 기본적인 의미전달에 있어 번역에 따른 변별력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아무리 개떡같이 번역한다 해도 정말 심각한 오역이 아닌 이상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오직 마음으로 봐야한다는 여우의 입을 통해 아예 대놓고 얘기해주는 이 작품의 가장 큰 메세지를 비롯하여 중간중간 마음을 울리는 굵직굵직한 포인트들은 절대로 놓칠 수가 없는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어떤 번역판을 읽어도 별로 큰 차이가 없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는 것인데 막상 따지고보면 또 그런 의견에 일견 수긍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따뜻한 느낌을 준다고 해도 그 따뜻함에는 엄연히 온도차이가 존재하듯이 4권의 똑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번역에 따른 각각의 느낌은 미묘하게 달랐다. 지구 외딴 곳에서 절대순수를 상징하는 미지의 아이와 조우하는 설정이기 때문에 작품 전반에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항상 은은하게 깔려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이유로 어린 왕자의 말투는 기본적으로 반말을 쓰는게 어울린다. 중간에 다른 별에 사는 왕을 만나서 얘기할 때 등 몇몇 장면은 어쩔 수 없지만 사람들과 전혀 어울린 적이 없는 순진무구함은 반말로 표현해야 느낌이 산다. 그런 면에서 앞서 언급했던 더클래식의 베스트트랜스 번역판은 어린 왕자가 시종일관 높임말을 쓰고있기 때문에 어차피 탈락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4장에 보면 화자인 내가 이 이야기를 동화처럼 쓰지않은 것은 내 글이 가볍게 읽히는게 싫어서였다고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스토리 진행에 사용되는 문체도 경어체보다 평어체가 어울린다. 잠깐 고민했던 새움출판사의 이정서 번역을 바로 탈락시켰던 이유도 이것이다. 이정서씨는 어른이 아이에게 동화책 읽어주듯 경어체로 번역하고 있는데 원작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이번 번역비교에 선택된 4종류의 책들은 모두 평어체를 쓰면서 어린 왕자의 말투도 반말을 기본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합격이다.



이 작품은 어린 왕자가 양을 그려달라고 하는 첫 대사와 함께 화자 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설렘 가득한 여정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를 주도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먼저 비교해보겠다.



황현산은 뭔가 모르게 좀 무뚝뚝한 느낌이 들고 너무 간결해서 삭막한 느낌도 살짝 드는 반면, 김화영의 번역은 가장 따뜻한 느낌이 강한 번역이고 기대감과 호기심을 갖게 만든다. 더스토리의 김미정은 역시 너무 불쑥 들어오는 듯한 느낌에 표현이 딱딱하고, 전성자는 유일하게 양 한마리'만'이 아니고 양 한마리'를'이라고 했는데 어감상 '를'보다는 '만'이 더 낫고 역시나 좀 삭막한 느낌이다. 사실 여기에서 벌써 김화영의 번역에 개인적으로 호감도가 많이 올라가버렸다.


4장에서 터키의 천문학자가 어린 왕자가 사는 별을 발견했는데 그가 입은 옷 때문에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도 문학동네의 김화영만 유일하게 그냥 옷이 아니라 '민속의상'이라고 표기해서 바로 이해되도록 번역하고 있다. 이런 작은 디테일들이 쌓여서 번역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5장 초반부에는 어린 왕자가 양이 작은 나무를 먹느냐고 질문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작은 나무를 황현산과 김미정은 '작은 떨기나무'라고 번역했고 김화영과 전성자는 그냥 '작은 나무'라고만 표현했다. 떨기나무라는 명칭이 생소해서 사전을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특정 나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역시나 작은 관목류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내가 판단하기에 이 부분은 굳이 떨기나무라는 고유명사로 표현해서 불필요하게 주목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에는 장미꽃과 바오바브나무에 대한 이야기만 있으면 된다. 참고로 바오바브와 바오밥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마치 자장면과 짜장면 정도의 차이라서...



어쨌든 별 의미없는 단어를 떨기나무라고 특정지으니까 괜한 혼란을 불러온다. 떨기나무는 성경에서 모세와 하나님이 만나는 장면에 등장해서 제법 알려졌을 뿐 일반인들은 대부분 모르고 실생활에서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명칭이다. 영문판에서도 little bushes라고 되어있고 bush는 그냥 덤불이나 관목을 의미한다. 황현산씨가 그냥 잡목을 왜 굳이 떨기나무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이 단어 때문에 어린 왕자를 괜히 성경과 연관지어서 확대해석하거나 상징 운운하며 엉터리 의미부여를 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떨기나무가 결코 좋은 번역이 아님에도 김미정씨가 똑같이 번역한 것이 재미있는데, 내 생각에는 황현산의 번역이 1등이니까 별 생각없이 그냥 따라간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bush를 무난한 선택지인 덤불, 관목, 잡목 다 놔두고 굳이 떨기나무로 번역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화자가 독자를 향해 경험담을 얘기해주는 형식인데 유일하게 독자가 아닌 어린 왕자에게 직접 편지하듯이 말하는 단락이 있다. 바로 6장인데 화자가 회상을 하면서 혼잣말을 하는 느낌이 강하다.


어린 왕자가 지금 지구라는 사실을 깜빡하고 착각해서 말한 부분에 대해서 황현산은 '그렇다' 하면서 문장을 이어간다. 어린 왕자가 아닌 화자 스스로를 향한 독백에 가깝고 역시나 톤이 좀 딱딱하다.



김화영은 '그럴 수 있겠지'라고 또 한번 가장 매끄러운 흐름을 보여준다. 어린 왕자를 향한 독백으로 6장 전체의 서술 형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김미정은 '그 말은 사실이었다'로 여전히 독자에게 말하는 화법 그대로여서 6장 전체가 화자가 얘기하는 대상이 다르다는 걸 아예 인지하지 못한 느낌이다. 김미정의 번역은 여기서 점수를 굉장히 많이 깍아먹었다.



전성자도 '실제로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로 번역했는데 역시나 독자를 향한 말이고 그 전까지 어린 왕자를 향해 잘 말해오다가 갑자기 방향을 선회하니 일관성이 무너지면서 다소 매끄럽지 못한 연결을 보인다.



7장에서는 반복되는 질문에 대답이 귀찮다는 반응에 어린 왕자가 대응하는 장면인데 중요한 일을 하느라 바쁘다고 하자 그 말을 한번 따라한다.



황현산은 '중요한 일이라고!' 하면서 느낌표를 넣었는데 여기서는 분위기상 되묻는 식으로 물음표를 넣는게 훨씬 깔끔하고 자연스럽다. 김미정과 전성자의 번역은 모두 물음표로 처리했다. 하지만 김화영은 갑자기 '심각한 일이라고!' 하면서 이상한 번역을 했다. 되묻는 물음표도 아닌 느낌표를 쓰면서 상대방 대사와 전혀 호응이 안되는 엉뚱한 단어를 사용한 대답인데 아마도 착각이나 실수를 심각하게 한 것 같다.


10장에서 13장에 걸쳐서 어린 왕자는 어른들과 헤어지면서 한 마다씩 던진다. 어른들은 이상하다는 식의 푸념인데 반복되면서 표현의 강도도 점점 강해지고 미묘하게 조금씩 강해지는 표현에서 잔잔한 유머가 느껴진다. 



황현산은 뭔가 일관성이나 점진적인 느낌이 좀 떨어지는데 반해, 김화영은 비슷한 느낌으로 점차 강도를 올려준다. 이 부분의 포인트를 가장 잘 이해하고 센스있게 살려내려는 시도를 했다고 느꼈다. 김미정은 역시나 점진적 반복 따위에는 별로 신경 안 쓴 모습이고 전성자는 약간 애매하면서도 가장 어색한 단어의 조합으로 처리하고 있다.


13장 사업가 에피소드에서는 숫자들이 계속 나오는데 황현산과 김미정 번역에서는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했고 김화영과 전성자는 그냥 한글로 처리했다.



여기에서는 사업가가 그저 숫자에 집착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숫자 자체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눈에 잘 띄는 아라비아 숫자보다는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한글로 표현하는게 작가의 의도에 부합하는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장미꽃은 어린 왕자와 8장에서 처음 만나고 9장에서는 이별을 하게된다.


황현산, 김화영, 전성자 이 3명의 번역에서는 모두 8장에서 서로 존댓말을 하지만 9장에서는 갑자기 서로 말을 놓는다. 8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어린 왕자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인데, 이것을 존댓말과 반말이라는 디테일한 설정으로 처리한 점이 돋보인다. 그런데 더스토리의 김미정만 8장과 9장 모두 변화없이 서로에게 반말을 한다.



확실히 이 부분은 번역가의 연륜에 의한 관록의 차이라 느껴진다. 세 분 모두 60대를 훌쩍 넘긴 나이에 번역을 하신 거라 너무 올드하면 어쩌나 하고 처음에는 약간 우려를 했던 것도 사실인데 이 부분을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이렇게 섬세하고 노련하게 처리하신 것을 보고 과연 '프로는 프로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정말 감탄을 많이 했다.


하나하나 따지자면 너무 길어지니 이쯤에서 전체적인 총평을 해보자면...


먼저 열린책들의 황현산 번역은 의외로 문장이 좀 딱딱하다는 느낌과 함께 단어의 선택에 있어서도 확실히 약간 올드하면서도 튀는 느낌이 있다. 떨기나무도 그렇지만 해가 지는 걸 좋아하는 어린 왕자를 묘사함에 있어서도 이 분은 유일하게 '해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소설에서 해넘이라는 순우리말은 입에 잘 붙지도 않고 어색하다. 그리고 다른 번역가들은 모두 꽃을 위한 울타리나 보호막 정도로 처리한 것을 이 분은 또 굳이 '갑옷'이라는 생뚱맞고 튀는 단어로 선택했다. 여우와 길들인다는 것에 관해 얘기할 때에도 다른 번역가들은 모두 '의식'이라고 했지만 이 분만 유독 '의례'라고 한다. 바오바브나무에 관련한 에피소드에서도 '도덕 선생 같은 말투'라고 한 걸 보면 이 분의 번역은 확실히 나이가 어린 연령층를 겨냥한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완전히 어린이용 번역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해서 좀 혼란스럽다. 어쨌든 판매량과 인기도 1등이라는 점의 기대감에 비해서는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문학동네의 김화영 번역가는 확실히 이름값을 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어의 선택이나 대사를 포함한 문장을 구성하는 테크닉에서 깊은 내공이 묻어나오고 원작자의 의도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물론 중간중간 아쉽거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부분도 더러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가장 밸런스가 좋으면서 일관된 톤을 유지하고 있는데 특히 작품의 분위기를 시종일관 따뜻한 느낌으로 감싸고 있는 점이 좋았다.


더스토리의 김미정 번역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무난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전형적인 패턴이다. 음식점으로 비유하자면 본인만의 노하우를 가진 수십년 전통의 맛집이 아니라 그때 그때 유행에 따라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매장 같은 느낌...


마지막으로 문예출판사의 전성자 번역은 역시 연륜에서 오는 내공이 느껴진다. 이번 리뷰를 위해 가장 먼저 읽은 책이 더스토리 버전이고 그 다음 두번째 읽은 책이 이 분 번역인데 딱 초반부 읽자마자 수준이 다르다는 걸 바로 느꼈다. 너무 미묘한 느낌적인 부분이라 말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고 애매하기는 한데 오랜 경력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어떤 깊이감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다만 중반부 이후에는 왠지 모르게 몰입감이 떨어져서 점수를 많이 잃었다. 



이번 번역 비교를 통해 '어린 왕자'라는 너무나 훌륭한 책을 다시 알게되었고 문장 하나하나 정말 제대로 음미하고 즐기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특히 노장 번역가들의 관록이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던 점도 의미가 있었고... 각각의 번역판들은 장점과 단점들이 모두 다 골고루 들어있기 때문에 특정한 책이 월등하게 훌륭하다고 평가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이번에 읽으면서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많이 받았던 문학동네의 김화영 번역판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최종적으로 이 한 권만 소장하려고 한다. 양장본에 사이즈도 딱 맞아서 법정 스님 옆에 나란히 진열하니 보기도 좋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Bp9teHgFAck&t=151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290369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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