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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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어보는 최신작 추리소설이다. 일본에서는 바로 지난해인 22년에 발표되었고 우리나라에는 지난달 번역출간되어 아직 나온지 채 한달도 지나지않은 책인데 나오자마자 추리소설 부문에서 현재 1위를 달리고 있다.


아마도 일본 현지의 각종 미스터리 관련 차트를 석권했다는 정보와 더불어 '스포 절대 금지'라든지 '미친 반전'같은 자극적인 광고문구가 독자들의 호기심을 많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반전'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작년에 발표된 최신작이라는 점에서 최근 일본 추리물의 수준과 트렌드를 대충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구매를 결정했다.


혹시나해서 구글로 검색을 좀 해봤는데, 일본 미스터리 무슨 차트 1위니 4위니 하는 수상 결과라든지 동료 작가나 평론가들의 추천사도 과장없이 비교적 있는 그대로 옮겨온 것 같았다.


물론 이런 것들이 절대로 작품의 완성도를 보증하는 바로미터는 아니다. 사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지만 일본의 호들갑은 워낙 유별나서...


작가는 유키 하루오인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고 1993년생이니까 지금 딱 30살이다. 노련미보다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도전정신이 더 많이 발휘될 나이로 보이는데 이건 어차피 글을 읽어보면 답이 나오는 부분이다.


이렇게 반전에 올인하는 작품들이 의외로 속빈 강정인 경우가 많아서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하도 미친 반전이니 뭐니 하면서 새책은 비닐로 밀봉까지 되어있길래 혹시 작은 단서 하나라도 놓칠까봐 처음부터 정말 신중하게 읽어나갔는데...


일단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럴 필요도 없었고, 여러가지 의미로 참 대단한 작품이었다.



작가가 필력이 뛰어나면 어떤 환경이라도 저절로 집중이 되고 잡생각 따위는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책은 처음부터 마음을 가다듬고 집중해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갈수록 정신이 산만해지는 희한한 체험을 안겨주었다. 이유는 다른거 없다. 그냥 작가의 필력이 형편없고 개연성이 엉망진창이라서 그렇다.


이 작품은 아가사 크리스티와 엘러리 퀸이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지금으로부터 무려 약 100년전인 1930~40년대의 고전추리 작법을 그대로 차용했다.


특히 크리스티의 작품 중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제목으로도 잘 알려진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을 레퍼런스로 한 흔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전체적인 구성과 진행 등이 크리스티의 스타일과 너무나 유사하다. 심지어 마지막에 탐정 역할을 하던 인물이 용의자들 쭉 불러 모아놓고 사건개요를 구구절절 설명한 후에 범인지목하는 것도 딱 엘큘 포와로가 하던 방식 그대로다.


물론 크리스티의 창작 스타일을 따라하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게 없다.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거나 응용해서 더 나은 작품을 만들면 된다.


개인적으로 고전 추리물들에 단점이 있다면 바로 '문학성'이라고 생각한다. 범인찾기와 범행수법에 골몰하느라 캐릭터와 서사가 거의 죽어있으며 등장인물 대부분이 희생자 아니면 용의자 역할이기 때문에 사건을 구성하는 필수요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극도로 기능적이고 제한적인 용도로만 소모되는 특징이 있다.


이렇게 캐릭터의 서사와 생명력이 약하다보니까 감정이입 또한 약해지고, 그래서 누군가가 잔인하게 살해되어도 끔찍하다는 느낌이 별로 없고, 누가 어떻게 죽였을까 하는 퍼즐게임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고전 추리물의 단점을 아주 극한까지 끌어올린 결정체에 가깝다. 이 작가는 그저 장기판의 장기말에 불과한 용도로 캐릭터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 책에 등장하는 10명의 등장인물들은 캐릭터가 아예 완전히 죽어있다.


각각의 캐릭터에 서사가 전혀 없으니까 어떤 인물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웬만한 소설들은 읽다보면 주인공이든 조연이든 외모가 대충이라도 그려지고 특정 배우를 떠올리기도 하면서 감정이입이라는 것을 하게되는데,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심지어 외모조차도 전혀 짐작이 안된다.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각자의 이름과 직업 뿐이다.


그래서 중간에 누가 목이 잘려 죽는 끔찍한 상황이 발생했음에도 어차피 생명력이 없던 인물이라 독자의 입장에선 별다른 느낌을 가질 수가 없다. 퍼즐 진행을 위해 다음 장기말이 쓰러졌구나 하는 딱 그 정도의 느낌일 뿐...

 

사실 아가사 크리스티도 이 정도까지 캐릭터를 허술하게 다루진 않았다.


그런데 이 작가는 제한된 공간이라는 밀실과 그 안에 갇힌 한정된 인원의 사람들... 그리고 한정된 시간 안에 누군가의 희생으로 빠져나갈 수 밖에 없는 특수한 조건과 그 와중에 살인이 벌어지고 살인자를 찾아야만 하는 더 특수한 조건... 이런 기본적인 설정들과 마지막 반전만 구상한 채 나머지는 모조리 여기에 억지로 끼워맞춰 그야말로 간신히 '소설'의 형태를 만들었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솔직히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그냥 '시놉시스'에 불과하다. 이러이러한 설정에 이러이러한 캐릭터로 이런 상황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면서 대충 뼈대가 되는 줄거리에 약간의 근육 정도만 붙인 수준인 것이다.



도입부 창세기의 구절은 제목이 방주니까 뭔가 있어보이려고 넣은 것일 뿐, 산속의 방주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당연히 성서와의 연결고리 따위도 없다. 작가에겐 그저 출입구가 두 군데 존재하는 밀실 구조물이 필요했을 뿐이다.


지진이라는 천재지변의 우연적 상황부터 현실성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주먹구구식 설정인데, 개연성 없고 말도 안되는 살인동기와 살해방식이 납득될 리가 없다. 그냥 그 타이밍에 살인사건이 필요해서 집어넣은 작가의 진행수순에 불과하다.


게다가 등산동아리 대학 동기란 설정이면 오랜기간 친구처럼 알고지낸 사이일텐데 좀전까지 바로 옆에 있던 친구가 살해당해도 별로 놀라거나 슬퍼하지도 않는다. 명색이 소설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서사와 설득력도 없는 것이다.


문장들은 인물들의 행동과 배경이 되는 지형지물만 기계적으로 묘사하고, 대사들도 영혼이 거의 없이 사건 브리핑 위주로 너무나 재미없게 이루어져 있다. 프로작가다운 문학적인 감성이나 문장의 테크닉은 눈씻고 찾아봐도 단 한군데도 없다.


그 와중에 일본소설 특유의 고질적인 나쁜 버릇은 어디서 또 충실하게 배웠는지 분명히 1인칭 주인공 시점을 택하고 있으면서도 전지적 작가 시점의 부연설명 모드가 수시로 끼어들어 시점이 애매모호하게 오락가락하는 것도 상당히 거슬리는데... 이것 역시 작가의 필력이 수준 이하라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책은 약 350페이지 분량이니까 명목상으로는 분명히 장편소설이 맞지만, 실제 체감상으로는 200페이지도 안되는 중편으로 느껴질 정도로 내용이 빈약하다. 판형과 활자의 크기도 페이지수를 늘리기 위해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데 거기에다 이 책은 상당히 기이하고 신박한 방식을 쓴 꼼수로 페이지를 굉장히 많이 부풀렸다.



문단의 줄바꿈을 아예 기준이 없을 정도로 무진장 집어넣은 것이다. 이렇게 줄을 계속 바꾸게 되면 여백이 늘어나고 페이지도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더 황당한건 대사 지문에도 줄바꿈을 수시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인데, 나는 대사에서까지 이렇게 줄바꿈을 쓴 편집 방식은 난생 처음 봤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이 책을 순식간에 읽었다면, 그 이유는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실제로 분량이 적어서 빨리 읽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소설 자체의 완성도가 이렇게 형편없는데... 헛웃음 나오는 그 미친 반전이란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일까 싶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NQcGPzOB9UQ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045452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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