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끝이야
콜린 후버 지음, 박지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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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생으로 43세인 여류작가 콜린 후버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면서도 영향력이 높은 스타작가 중의 하나임이 분명한 것 같다. 작가 홈페이지를 보면 주로 청소년을 비롯한 젊은층을 겨냥한 로맨스 장르가 주종목인 걸로 소개되어 있다.



'로맨스소설' 분야에서 지금까지 화제가 되거나 성공한 케이스라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나 '트와일라잇' 시리즈 같은 작품들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되는데, 아무래도 남녀간의 닭살돋는 애정행각이나 성적인 묘사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호불호가 좀 심하게 갈리는 장르라 할 수도 있겠다.


나같은 경우는 불호 쪽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로맨스 장르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영화만 하더라도 '노팅힐' '세렌디피티' '어바웃타임' 같은 로코물 정말 좋아하고, 특히 '노팅힐'은 나의 인생영화 10편을 뽑는다면 반드시 넣고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런 쪽의 책은 글쎄... 오래전에 읽었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로맨스물에 들어가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책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읽어본 작품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로맨스 소설을 기피하는 이유는 작품의 주제나 소재 때문이 아니라 정말 처참한 수준의 글솜씨를 보여주는 저급한 작품들이 거의 대부분이라는 선입견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금도 질 떨어지는 글쓰기가 가장 심하게 몰려있는 장르가 바로 '무협지'와 '로맨스'... 이 두 분야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래서 이 책도 로맨스물이라는 사전정보 딱 한 가지만 접한 상황에서 읽기도 전에 대충 지레짐작하고 혹시 지뢰를 밟는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가졌던 것이다.


이 작품은 2016년작으로 나온지 이미 꽤 오래되었는데, 최근 2021년에 젊은층이 많이 이용하는 TikTok이라는 어플에서 이 책을 읽고 감동받았다는 영상들이 챌린지 형식으로 퍼지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단숨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상당히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TikTok을 하지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BookTok이라는 카테고리가 있어서 책을 읽고난 느낌을 짧은 영상으로 공유하는 그러한 문화가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요즘 세대들이 워낙 책을 안 읽는데다가 진지하고 지루한 거 극도로 싫어하는 경향이라 생각해서 이것도 책 내용의 질과 완성도와는 별개로 그냥 또래들끼리 즐기는 밈(Meme)문화와 같은... 한때 가볍게 반짝 즐길거리로 어쩌다보니 그냥 얻어걸린 케이스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비슷하다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지만 예전에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라는 일본소설이 난리난 적 있었다. 2000년대 초에 일본의 어떤 유명 여배우가 그 책을 울면서 단숨에 다 읽었다느니 하는 소감이 화제가 되면서 갑자기 슈퍼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여파가 우리나라까지 덮쳐서 굉장히 많이 팔렸던 책이다. 일본어로는 '世界の中心で、愛をさけぶ'인데 이걸 줄여서 짧게 'セカチュー'라고 불렀고, 일본 현지에서는 'セカチュー신드롬'이라고까지 했을 정도였다.



당시에 나도 사서 읽었고 그때 썼던 리뷰가 블로그에 남아있는데, 어이없는 졸작이었고 차라리 황순원의 '소나기'가 열배는 낫다... 라고 썼던 기억이 난다. 프로작가가 썼다고는 도무지 믿기지않는 평범한 필력의 소유자가 분에 넘치는 성공과 함께 대단한 작가로 포장되는 현상이 씁쓸하게 느껴졌었다. 나는 그 이후로 일본의 호들갑은 절대 믿지 않는다.


아뭏든 그래서 이 책도 그냥 관종기 가득한 젊은이들의 놀이문화에 이용되었을 뿐인 그야말로 건질거 하나도 없는 흔하디흔한 로맨스소설일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의심을 안고 정말 별 기대없이 읽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이 책은 좀 대박이다.



도입부 몇페이지 읽자마자 이 작가가 글을 정말 잘 쓴다는 건 대번에 파악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가면 갈수록 그 잘 쓰는 정도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어서 깜짝 놀랐다. 바로 전에 읽었던 프리다 맥파든도 필력이 상당히 좋은 작가라고 판단했는데 이 콜린 후버는 그보다 한수 위의 글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스피디하고 감각적인 상황묘사와 빈틈없는 캐릭터 구축력에 통통 튀는 대사 모두가 한차원 높다. 이 정도면 장르 소설가로서는 거의 최상급의 필력이다.


같은 이야기라도 말을 조리있고 재미있게 할 줄 아는 사람이 들려주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훨씬 더 즐겁게 몰입하게 된다. 책도 마찬가지다. 일단 작가가 글을 잘 쓰면 스토리의 재미도 재미지만 문장 자체를 읽는 즐거움이 추가되는 것이다.


이 작가의 글은 뭐랄까... 한마디로 너무 사랑스럽다. 프로다운 문장의 기교가 살아있으면서도 쉬운 단어와 간결한 구성으로 풀어내기 때문에 실제로는 상당히 무겁고 깊이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모든 상황과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가 완벽하게 이해되고 쉽게 다가오는 한편, 별거없는 자잘한 일상사가 묘사되는 와중에도 뭔가 모를 품격이 느껴진다.


특히 나는 개인적으로 품위있는 서양식 유머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를테면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사회자나 배우들이 한번씩 던지는 농담같은... 그런 유머를 좋아한다.


옛날 영화 중에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감독 주연에 닉 놀테가 나오는 'The Prince of Tides'라는 영화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사랑과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있는데 당시에 별 생각없이 비디오테이프로 빌려보다가 어느 틈에 흠뻑 빠져서 감상했던 영화다. 그 영화를 보다보면 중간중간 주로 대사로 묘사된 수준높은 유머가 나오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그래도 너무 내 취향이어서 좋았던 기억이 나고, 아직도 '사랑과 추억'하면 고급스런 유머가 제일 인상깊었던 영화로 남아있다.



이 작품에는 내가 좋아하는 그런 스타일의 유머들이 마치 융단폭격하듯이 이어져서 책을 읽는 내내 미소를 머금거나 킥킥거리면서 웃었던 시간이 많았다. 책 읽다가 하도 혼자서 킥킥거리니까 집사람이 한심하게 쳐다보긴 했지만서도... 하여튼 이 작가의 유머감각은 정말 취향저격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로맨스물이라고 하기에는 성적인 묘사의 수위가 한참 약하다. 켄 폴리트의 작품들에 비하면 거의 애들 수준이고 영화로 치면 15세 관람가 정도여서 이 책이 과연 로맨스 장르가 맞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물론 그래도 나름 로맨스물다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표현법이 눈길을 끄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제는 어쨌거나 '가정폭력'이다. 어린 시절 가정폭력에 의한 트라우마와 이를 극복하려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진지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있는 것처럼 작품 전반에 항상 조마조마한 긴장감이 깔려있는 스릴러적인 요소가 오히려 강한 편이다.


TikTok 영상을 보면 업로드한 사람이 거의 여성인데 이것은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대부분 여성들이란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여성들에게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강력하게 어필하는 메세지가 있다. 거기에 작가의 출중한 필력이 더해져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있는 것이라 본다. 과연 무엇이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는 책을 읽어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한편으로는 작가가 페미니즘 성향이 좀 강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이 책에는 '그녀(She)'라는 3인칭 대명사가 없다. 남자든 여자든 무조건 '그'라고 지칭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번역가가 실수를 했나 싶었는데 나중에는 작가의 의도적인 표현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도 원문에는 'He'나 'She'의 구분없이 모두 'They'로 통일해서 쓰지않았나 싶다. 작가의 성향이 그렇다면 존중해줄 필요는 있다. (엉뚱하게도 설마 번역가가 페미니스트라서 자기 마음대로 '그녀'를 지워버린 거라면 정말 낭패지만...) 내 직감이 맞다면 이런 디테일까지 세심하게 살릴 정도로 번역 역시 너무나 훌륭하다. 앞서 '하우스 메이드'도 그렇지만 장르소설에서 이 정도로 좋은 번역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이번에 운 좋게도 두 작품 연속으로 번역이 너무 고퀄리티라 웬일인가 싶다.


한가지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우리나라 독자들이 미리 알아두면 좋은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엘런 드제너러스'라는 인물이다. 미국에서 '오프라 윈프리'에 버금가는 어마어마한 셀럽이고 아카데미 시상식의 사회도 몇번 맡았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릴리가 멋있어서 오줌 쌀 뻔했다고 표현했던 대목은 바로 아래 장면이다.



이 책에서 그녀는 릴리가 어린 시절 심적으로 의지하는 동경의 대상으로서 그냥 실명으로 언급이 된다. '니모를 찾아서'라는 애니메이션 영화에 사용된 도리의 대사가 인상깊게 활용되는데, 그 도리의 성우가 바로 엘런 드제너러스이기도 하다. 이런 부분은 번역가가 주석을 달아주었으면 훨씬 더 좋았을텐데 살짝 아쉽다.



후반부 엘런 드제너러스의 사인을 받은 걸로 등장하는 책도 'Seriously...I'm Kidding'이 원제목이고 실제로 그녀가 쓴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만약 엘런 드제너러스가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나라면 정말로 영광스럽고 고마운 마음과 함께 감동을 많이 받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혹시나 엘런 드제너러스가 콜린 후버를 자신의 쇼에 초대한 적이 있는지 구글로 찾아봤는데 아쉽게도 두 사람이 직접 만난 흔적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이 이 정도로 인기있는 베스트셀러라면 그녀가 모를 리는 없을텐데 그 흔한 SNS의 언급조차도 없다는 건 너무 이상해서 좀더 살펴보니... 엘런 드제너러스는 이 책이 TikTok에 의해 역주행하기 전인 2020년부터 여러가지 부정적인 구설수와 논란에 휩싸이면서 커리어가 완전히 무너지는 시기를 보냈다고 나온다. 그러니 이런데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지도... 거기에 생각보다 인성이 별로 좋지않은 사람이란 것도 덤으로 알게되면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진실은 저 너머에...


어쨌든 만약 작가가 이 책에서 엘런 드제너러스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쯤 분명히 훈훈하고 감동적인 에피소드가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작가 후기에 절대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고는 했지만 그건 너무 떨릴 것 같아서 오히려 장난스럽게 반어법으로 쓴 것 같은데... 어쩌면 지금은 진심으로 만나지 않기를 바랄 지도 모르겠다.



아뭏든 나는 이번에 이 책을 읽고 지금 현재 미국에서 가장 핫한 작가의 실력이 과연 어느 정도이고 어떤 스타일로 글을 쓰는지 한번 제대로 느껴본 것 같다. 요즘 젊은이들이 책을 안읽는 세대라고 멋대로 넘겨짚었던 내 모습을 반성하기도 했고, 편견은 무조건 버려야 한다는 것도 또한번 깨달았다.


이 작가는 어떤 작품이든 기본 이상은 할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겨서 나중에 그녀의 다른 작품도 꼭 읽어볼 계획이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6po4J1dZcak&t=52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185206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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