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무소유'라는 책을 읽으면서 다시한번 주목하게 된 사실이 있었다. 법정 스님은 '어린 왕자'를 너무너무 사랑하셨던 분이라는 거... 살아생전 가까운 지인들에게 기꺼이 책을 사서 나눠주기도 하셨고, 심지어 이 책을 읽고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당신 자신과는 결이 맞지않는 사람이라고까지 단호하게 말씀하셨을 정도로 사람의 성품을 판단하는 본인만의 척도이자 관문의 역할로 활용하셨던 것 같다.
나야 법정 스님이 지금 살아계신다 해도 각자 살아가는 세계가 달라서 굳이 그 분께 좋은 이미지로 비춰져야할 이유가 전혀 없는 입장임에도 그 구절을 읽었을 때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살짝 찔리는 느낌을 받긴 했다. 사실 내게 있어 어린 왕자는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된 책이라는 핑계가 있다고 해도 겨우 초반부 보아뱀 모자 그림에 관한 에피소드 부분만 기억에 남아있는 정도의 솔직히 그렇게 특별하고 강렬한 감동이 있었던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님에게 인정받을 정도의 감흥을 간직하지 못한 것이 무슨 죄는 아니겠지만 이게 뭐라고... 나 자신에 대한 약간의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좀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무소유' 덕분에 '어린 왕자'를 다시 읽으려고 마음먹게 되었는데, 이번 기회에 마음에 드는 번역본을 딱 한 권만 골라서 책장에 나란히 함께 소장하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국내 인터넷 서점에서 어린 왕자를 검색하면 거의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출판사의 다양한 번역본이 나온다. 외국소설들 중에 이만큼 많은 번역본이 존재하는 책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이고 심지어는 경상도 사투리 버전의 '애린 왕자'라는 희한한 번역도 나와있는 상태다. 그래도 출판사의 지명도와 번역가의 명성에 의한 독자들의 선호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판매량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나는 인기도와 판매량에서 종합 10위권 이내에 올라있는 번역본들 중에서 미리보기 서비스의 도움도 받으면서 심사숙고한 끝에 총 4권을 최종 선택하여 구매했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어린 왕자'하면 가장 먼저 거론이 되고 압도적인 선호도로 제일 높은 판매량을 자랑하는 판본은 황현산 번역의 열린책들 버전이라고 판단이 되고, 그 다음은 문학동네의 김화영 번역판이 많이 팔리는 것 같다. 열린책들과 문학동네 이 두 버전이 전통있는 빅2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래서 별 고민없이 이 2권은 제일 먼저 골랐고... 오리지널 초판본의 표지디자인을 사용한 더스토리 버전은 최근 KBS 방송프로그램에 노출되면서 갑자기 판매량이 급증한 것 같은데 어쨌든 검증해볼 가치가 있을 것 같아서 그 다음으로 포함을 시켰다. 마지막으로 고른 책은 문예출판사의 전성자 번역판이다. 이 책은 부동의 1위를 지키고있는 황현산 번역가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번역이라는 추천사에 이끌려서 선택을 하게 되었다.
그 외에 새움출판사의 이정서 번역판도 구매여부를 살짝 고민했었는데 미리보기 서비스로 앞부분을 읽어보니까 바로 판단이 되어서 제외시켰다. 이정서씨는 카뮈의 '이방인' 논란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번역가인데 기존의 번역이 심각한 오역이니 뭐니 하면서 온갖 어그로를 끄는 것에 비해 그에 걸맞는 결과물은 전혀 제시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사람 번역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른 리뷰에서 하게 될 지도 모르겠지만 비록 판매량이 높다고 해도 이번 시간에는 포함시킬 가치가 전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몇년 전에 애들 보라고 별 생각없이 골라서 급하게 샀던 책이 있는데 더클래식에서 나온 한글 영문 합본판이다. 이미 가지고있던 책이라 이번 번역비교에 당연히 포함시키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이 책은 번역가가 베스트트랜스라는 번역팀이라서 번역가 개인의 개성과 특징을 논할 수 없기에 역시 제외시켰다. 그래도 내친 김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읽기는 다 읽었고 함께 포함된 영문판도 이번 기회에 의외로 아주 요긴하게 활용을 했다.
일단 책의 제본 스타일은 문예출판사를 제외한 나머지 3권 모두 하드커버 양장본이며, 열린책들의 판형만 어린이용으로 좀 큼직하게 제작한 신국판 사이즈이고 나머지는 4X6판의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사이즈이다. 작품설명이나 후기, 작가연표를 제외한 본문 페이지는 각각 열린책들 120페이지, 문학동네 140페이지, 더스토리 140페이지, 문예출판사 123페이지로 거의 비슷한데 삽화의 크기와 배치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이 작품은 원작자인 생텍쥐페리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 중간중간 적절한 타이밍에 삽입되어 내용을 구체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 중에서 다른건 몰라도 초반부 1장의 보아뱀 그림과 2장의 양 그림 만큼은 이 작품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해서 극적인 효과를 위해 그림배치에 신경을 쓴 쪽에 좀 더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1장에서 '나의 제1호 그림은 이것이다' '제2호 그림은 이것이다' 하는 장면에서 각각의 그림으로 딱 끝내는 페이지 구성을 보여주는 방식이 가장 바람직한데 이 부분에서 의외로 더스토리 버전만이 아주 정확하게 편집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머지 책들은 모두 페이지 구분없이 그림을 배치해서 극적 효과가 떨어진다.
2장에서도 마지막에 아무렇게나 그려서 툭 던져주었다는 문장을 끝으로 페이지가 바뀌면서 상자 그림이 딱 나와야 극적 효과가 가장 극대화된다. 역시 이 부분도 더스토리의 버전만 정확하게 살려주고 있고 나머지 책들은 신경을 전혀 쓰지않은 모습이다.
나는 원작자 역시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그림이 삽입되길 원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혹시나해서 영문판도 살펴봤는데 페이지에 여백이 생기는 것에 상관없이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극적 효과를 살리는 구성으로 삽화를 배치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삽화의 배치 만큼은 뜻밖에도 더스토리 출판사의 완승이다.
본격적으로 번역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보면...
지난번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비교편을 보면 짐작하겠지만, 나는 번역을 평가할 때 외국어 원문과 대조하면서 분석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어차피 외국어 실력이 안되기 때문에 그렇게 할 능력도 없고... 그래서 오로지 한국어로 번역된 최종 결과물만 놓고 판단을 한다. 나는 번역가의 능력을 가늠하는데 있어서 외국어보다 한글 구사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는 쪽이기 때문에 단어의 적절한 선택과 어휘의 기교, 문장의 문학적 감성 등에 포커스를 맞추고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흐름, 그리고 작가의 의도를 잘 구현하고 있는 지에 집중한다.
이번 어린 왕자 역시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과 정서에 포인트를 두고 읽었다. 이 작품은 총 27장의 단락으로 구성된 100여페이지 분량의 중편소설 수준인데 페이지당 활자의 수가 적고 삽입된 삽화들이 많아서 실제 내용은 훨씬 더 짧다. 그만큼 문장 하나하나가 빠짐없이 독자의 감성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기때문에 사소한 단어 선택 하나에도 번역가의 고심이 많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판매량에서 부동의 1위인 열린책들의 황현산 번역가는 1945년생으로 2018년에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셨으며 고려대 불문과를 나오셨고 교수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셨던 분으로 나온다. 보들레르를 비롯한 프랑스 문학의 번역서들이 꽤 많다. 이 책은 2015년에 처음 나왔으니까 돌아가시기 3년전인 70세에 번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학동네의 김화영 번역가는 1941년생이니까 현재 80세로 가장 원로이시다. 서울대 불문과 출신이고 알베르 카뮈의 독보적인 권위자로 명성이 자자하신 분이다. 번역가의 경력과 지명도에서 거의 넘사벽 수준이라 가장 기대를 많이 했던 책이다. 2007년에 처음 발매되었으니까 역시 60대 중후반에 번역을 하신 걸로 보인다.
더스토리의 김미정 번역가는 이화여대 불문과 출신이란 점 이외에는 출판사의 소개란에도 별다른 정보가 없고 인터넷 검색을 해도 나오는게 없다. TV 노출을 통해 버프를 받는 이런 책들은 그냥 직접 읽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문예출판사의 전성자 번역가 역시 서울대 불문과 출신인 점을 제외하면 별다른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는데 몇몇 기사를 통해 겨우 짐작할 수 있었던 점은 현재 이 분도 70대 이상의 원로 번역가란 점이었다.
이 작품은 분량이 짧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고있기 때문에 사실상 기본적인 의미전달에 있어 번역에 따른 변별력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아무리 개떡같이 번역한다 해도 정말 심각한 오역이 아닌 이상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오직 마음으로 봐야한다는 여우의 입을 통해 아예 대놓고 얘기해주는 이 작품의 가장 큰 메세지를 비롯하여 중간중간 마음을 울리는 굵직굵직한 포인트들은 절대로 놓칠 수가 없는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어떤 번역판을 읽어도 별로 큰 차이가 없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는 것인데 막상 따지고보면 또 그런 의견에 일견 수긍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따뜻한 느낌을 준다고 해도 그 따뜻함에는 엄연히 온도차이가 존재하듯이 4권의 똑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번역에 따른 각각의 느낌은 미묘하게 달랐다. 지구 외딴 곳에서 절대순수를 상징하는 미지의 아이와 조우하는 설정이기 때문에 작품 전반에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항상 은은하게 깔려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이유로 어린 왕자의 말투는 기본적으로 반말을 쓰는게 어울린다. 중간에 다른 별에 사는 왕을 만나서 얘기할 때 등 몇몇 장면은 어쩔 수 없지만 사람들과 전혀 어울린 적이 없는 순진무구함은 반말로 표현해야 느낌이 산다. 그런 면에서 앞서 언급했던 더클래식의 베스트트랜스 번역판은 어린 왕자가 시종일관 높임말을 쓰고있기 때문에 어차피 탈락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4장에 보면 화자인 내가 이 이야기를 동화처럼 쓰지않은 것은 내 글이 가볍게 읽히는게 싫어서였다고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스토리 진행에 사용되는 문체도 경어체보다 평어체가 어울린다. 잠깐 고민했던 새움출판사의 이정서 번역을 바로 탈락시켰던 이유도 이것이다. 이정서씨는 어른이 아이에게 동화책 읽어주듯 경어체로 번역하고 있는데 원작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이번 번역비교에 선택된 4종류의 책들은 모두 평어체를 쓰면서 어린 왕자의 말투도 반말을 기본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합격이다.
이 작품은 어린 왕자가 양을 그려달라고 하는 첫 대사와 함께 화자 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설렘 가득한 여정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를 주도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먼저 비교해보겠다.
황현산은 뭔가 모르게 좀 무뚝뚝한 느낌이 들고 너무 간결해서 삭막한 느낌도 살짝 드는 반면, 김화영의 번역은 가장 따뜻한 느낌이 강한 번역이고 기대감과 호기심을 갖게 만든다. 더스토리의 김미정은 역시 너무 불쑥 들어오는 듯한 느낌에 표현이 딱딱하고, 전성자는 유일하게 양 한마리'만'이 아니고 양 한마리'를'이라고 했는데 어감상 '를'보다는 '만'이 더 낫고 역시나 좀 삭막한 느낌이다. 사실 여기에서 벌써 김화영의 번역에 개인적으로 호감도가 많이 올라가버렸다.
4장에서 터키의 천문학자가 어린 왕자가 사는 별을 발견했는데 그가 입은 옷 때문에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도 문학동네의 김화영만 유일하게 그냥 옷이 아니라 '민속의상'이라고 표기해서 바로 이해되도록 번역하고 있다. 이런 작은 디테일들이 쌓여서 번역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5장 초반부에는 어린 왕자가 양이 작은 나무를 먹느냐고 질문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작은 나무를 황현산과 김미정은 '작은 떨기나무'라고 번역했고 김화영과 전성자는 그냥 '작은 나무'라고만 표현했다. 떨기나무라는 명칭이 생소해서 사전을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특정 나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역시나 작은 관목류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내가 판단하기에 이 부분은 굳이 떨기나무라는 고유명사로 표현해서 불필요하게 주목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에는 장미꽃과 바오바브나무에 대한 이야기만 있으면 된다. 참고로 바오바브와 바오밥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마치 자장면과 짜장면 정도의 차이라서...
어쨌든 별 의미없는 단어를 떨기나무라고 특정지으니까 괜한 혼란을 불러온다. 떨기나무는 성경에서 모세와 하나님이 만나는 장면에 등장해서 제법 알려졌을 뿐 일반인들은 대부분 모르고 실생활에서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명칭이다. 영문판에서도 little bushes라고 되어있고 bush는 그냥 덤불이나 관목을 의미한다. 황현산씨가 그냥 잡목을 왜 굳이 떨기나무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이 단어 때문에 어린 왕자를 괜히 성경과 연관지어서 확대해석하거나 상징 운운하며 엉터리 의미부여를 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떨기나무가 결코 좋은 번역이 아님에도 김미정씨가 똑같이 번역한 것이 재미있는데, 내 생각에는 황현산의 번역이 1등이니까 별 생각없이 그냥 따라간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bush를 무난한 선택지인 덤불, 관목, 잡목 다 놔두고 굳이 떨기나무로 번역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화자가 독자를 향해 경험담을 얘기해주는 형식인데 유일하게 독자가 아닌 어린 왕자에게 직접 편지하듯이 말하는 단락이 있다. 바로 6장인데 화자가 회상을 하면서 혼잣말을 하는 느낌이 강하다.
어린 왕자가 지금 지구라는 사실을 깜빡하고 착각해서 말한 부분에 대해서 황현산은 '그렇다' 하면서 문장을 이어간다. 어린 왕자가 아닌 화자 스스로를 향한 독백에 가깝고 역시나 톤이 좀 딱딱하다.
김화영은 '그럴 수 있겠지'라고 또 한번 가장 매끄러운 흐름을 보여준다. 어린 왕자를 향한 독백으로 6장 전체의 서술 형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김미정은 '그 말은 사실이었다'로 여전히 독자에게 말하는 화법 그대로여서 6장 전체가 화자가 얘기하는 대상이 다르다는 걸 아예 인지하지 못한 느낌이다. 김미정의 번역은 여기서 점수를 굉장히 많이 깍아먹었다.
전성자도 '실제로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로 번역했는데 역시나 독자를 향한 말이고 그 전까지 어린 왕자를 향해 잘 말해오다가 갑자기 방향을 선회하니 일관성이 무너지면서 다소 매끄럽지 못한 연결을 보인다.
7장에서는 반복되는 질문에 대답이 귀찮다는 반응에 어린 왕자가 대응하는 장면인데 중요한 일을 하느라 바쁘다고 하자 그 말을 한번 따라한다.
황현산은 '중요한 일이라고!' 하면서 느낌표를 넣었는데 여기서는 분위기상 되묻는 식으로 물음표를 넣는게 훨씬 깔끔하고 자연스럽다. 김미정과 전성자의 번역은 모두 물음표로 처리했다. 하지만 김화영은 갑자기 '심각한 일이라고!' 하면서 이상한 번역을 했다. 되묻는 물음표도 아닌 느낌표를 쓰면서 상대방 대사와 전혀 호응이 안되는 엉뚱한 단어를 사용한 대답인데 아마도 착각이나 실수를 심각하게 한 것 같다.
10장에서 13장에 걸쳐서 어린 왕자는 어른들과 헤어지면서 한 마다씩 던진다. 어른들은 이상하다는 식의 푸념인데 반복되면서 표현의 강도도 점점 강해지고 미묘하게 조금씩 강해지는 표현에서 잔잔한 유머가 느껴진다.
황현산은 뭔가 일관성이나 점진적인 느낌이 좀 떨어지는데 반해, 김화영은 비슷한 느낌으로 점차 강도를 올려준다. 이 부분의 포인트를 가장 잘 이해하고 센스있게 살려내려는 시도를 했다고 느꼈다. 김미정은 역시나 점진적 반복 따위에는 별로 신경 안 쓴 모습이고 전성자는 약간 애매하면서도 가장 어색한 단어의 조합으로 처리하고 있다.
13장 사업가 에피소드에서는 숫자들이 계속 나오는데 황현산과 김미정 번역에서는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했고 김화영과 전성자는 그냥 한글로 처리했다.
여기에서는 사업가가 그저 숫자에 집착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숫자 자체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눈에 잘 띄는 아라비아 숫자보다는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한글로 표현하는게 작가의 의도에 부합하는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장미꽃은 어린 왕자와 8장에서 처음 만나고 9장에서는 이별을 하게된다.
황현산, 김화영, 전성자 이 3명의 번역에서는 모두 8장에서 서로 존댓말을 하지만 9장에서는 갑자기 서로 말을 놓는다. 8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어린 왕자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인데, 이것을 존댓말과 반말이라는 디테일한 설정으로 처리한 점이 돋보인다. 그런데 더스토리의 김미정만 8장과 9장 모두 변화없이 서로에게 반말을 한다.
확실히 이 부분은 번역가의 연륜에 의한 관록의 차이라 느껴진다. 세 분 모두 60대를 훌쩍 넘긴 나이에 번역을 하신 거라 너무 올드하면 어쩌나 하고 처음에는 약간 우려를 했던 것도 사실인데 이 부분을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이렇게 섬세하고 노련하게 처리하신 것을 보고 과연 '프로는 프로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정말 감탄을 많이 했다.
하나하나 따지자면 너무 길어지니 이쯤에서 전체적인 총평을 해보자면...
먼저 열린책들의 황현산 번역은 의외로 문장이 좀 딱딱하다는 느낌과 함께 단어의 선택에 있어서도 확실히 약간 올드하면서도 튀는 느낌이 있다. 떨기나무도 그렇지만 해가 지는 걸 좋아하는 어린 왕자를 묘사함에 있어서도 이 분은 유일하게 '해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소설에서 해넘이라는 순우리말은 입에 잘 붙지도 않고 어색하다. 그리고 다른 번역가들은 모두 꽃을 위한 울타리나 보호막 정도로 처리한 것을 이 분은 또 굳이 '갑옷'이라는 생뚱맞고 튀는 단어로 선택했다. 여우와 길들인다는 것에 관해 얘기할 때에도 다른 번역가들은 모두 '의식'이라고 했지만 이 분만 유독 '의례'라고 한다. 바오바브나무에 관련한 에피소드에서도 '도덕 선생 같은 말투'라고 한 걸 보면 이 분의 번역은 확실히 나이가 어린 연령층를 겨냥한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완전히 어린이용 번역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해서 좀 혼란스럽다. 어쨌든 판매량과 인기도 1등이라는 점의 기대감에 비해서는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문학동네의 김화영 번역가는 확실히 이름값을 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어의 선택이나 대사를 포함한 문장을 구성하는 테크닉에서 깊은 내공이 묻어나오고 원작자의 의도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물론 중간중간 아쉽거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부분도 더러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가장 밸런스가 좋으면서 일관된 톤을 유지하고 있는데 특히 작품의 분위기를 시종일관 따뜻한 느낌으로 감싸고 있는 점이 좋았다.
더스토리의 김미정 번역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무난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전형적인 패턴이다. 음식점으로 비유하자면 본인만의 노하우를 가진 수십년 전통의 맛집이 아니라 그때 그때 유행에 따라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매장 같은 느낌...
마지막으로 문예출판사의 전성자 번역은 역시 연륜에서 오는 내공이 느껴진다. 이번 리뷰를 위해 가장 먼저 읽은 책이 더스토리 버전이고 그 다음 두번째 읽은 책이 이 분 번역인데 딱 초반부 읽자마자 수준이 다르다는 걸 바로 느꼈다. 너무 미묘한 느낌적인 부분이라 말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고 애매하기는 한데 오랜 경력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어떤 깊이감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다만 중반부 이후에는 왠지 모르게 몰입감이 떨어져서 점수를 많이 잃었다.
이번 번역 비교를 통해 '어린 왕자'라는 너무나 훌륭한 책을 다시 알게되었고 문장 하나하나 정말 제대로 음미하고 즐기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특히 노장 번역가들의 관록이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던 점도 의미가 있었고... 각각의 번역판들은 장점과 단점들이 모두 다 골고루 들어있기 때문에 특정한 책이 월등하게 훌륭하다고 평가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이번에 읽으면서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많이 받았던 문학동네의 김화영 번역판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최종적으로 이 한 권만 소장하려고 한다. 양장본에 사이즈도 딱 맞아서 법정 스님 옆에 나란히 진열하니 보기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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