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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살인귀 1~2 - 전2권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진환 옮김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2권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당연히 길이가 길어서 분책을 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각각 독립된 작품이었고 2편은 1편의 성공에 힘입어 속편으로 나온 것이었다.
작가 아야츠지 유키토는 일본 추리소설계에서 '신본격 미스테리'라는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던 중요한 인물로 손꼽히는 거물급 스타작가인데, 특히 호러 장르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유혈이 낭자하는 그야말로 무자비한 슬래셔 호러 소설이다. '13일의 금요일'이나 '할로윈' 같은 공포영화를 영상이 아닌 글로 읽는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1편은 1990년에 2편은 3년뒤인 93년에 처음 발표되었는데, 그 후로 약 20년이 지난 2011년과 12년에 각각 개정판이 나왔고, 이번에 읽은 이 책들은 모두 이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었다. 약간 만화스러운 표지 디자인 역시 별도 제작하지 않고 일본 개정판의 것을 그대로 가져왔다.
80년대 초에 등장하여 전세계적으로 슬래셔 무비의 열풍을 이끌었던 '13일의 금요일'시리즈는 80년대 말에 이미 8탄이 만들어졌을 정도였으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1편의 경우는 막판에 의외의 범인이 밝혀지면서 반전과 함께 미스테리 성향이 어느정도 있었지만, 희대의 살인마 제이슨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2편부터는 오로지 사람을 어떻게하면 좀더 잔인하게 죽이는가 하는 방법론에 골몰하게 된다. 제이슨은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점점 무적에 불사신 캐릭터가 되었고, 관객들은 그가 다양한 방법으로 죽이는 행위 자체가 영화를 보는 목적이 되어버렸다. '할로윈'시리즈 역시 흥미로운 스토리라인이 돋보였던 1편을 지나 2편부터는 마이클의 다양한 살육 퍼포먼스가 스토리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이런 슬래셔 호러 영화들이 그동안 자연스럽게 쌓아올린 어떤 정형화된 설정과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인간계를 뛰어넘는 막강한 피지컬의 살인마가 펼치는 잔혹한 행위의 적나라한 묘사에 포커스를 두고, 한 사람씩 차례로 죽여나가다가 마지막에 남은 생존자와 최후의 대결을 펼치고 살인마의 부활을 암시하면서 후속편을 기약하는 그런 패턴... 정말 읽다보면 '13일의 금요일'시리즈의 또 다른 한 편을 책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영상이 아닌 글로 표현되니 잔혹함의 강도가 오히려 훨씬 더 쎄게 다가온다. 영화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힘든 하드고어한 묘사가 그야말로 인정사정없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일본 추리작가들의 필력은 거의 상향평준화 되어있기 때문에, 이 작가의 필력 역시 그리 특출나지는 않지만 반대로 부족함도 별로 보이지 않는 보편적인 수준이다. 다만 세대가 세대이니만큼 아무래도 좀 올드한 느낌이 드는 부분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특히 살인마를 묘사하는데 있어 그에겐 인간의 감정이 없다는 식의 너무 대놓고 친절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고수의 글답지않고 어떻게보면 아마추어적인 냄새가 나기도 한다.
사실 공포영화들이 대부분 B급영화라 불리듯이 이런 노골적인 슬래셔 장르를 소설 형식으로 옮기려고 할 때 고급스러운 느낌을 내기란 생각보다 쉽지않다. 애초에 품위와는 거리가 먼 원색적인 표현들이 난무할 수 밖에 없어서 자칫하면 삼류 저질 무협지 수준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는 확실히 유치하다고 느껴질만한 부분이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선을 유지하는 노련함이 있다. 그리고 '신본격'을 대표하는 작가답게 하나의 추리소설로도 손색이 없는 미스테리 요소를 서술트릭을 이용해 곳곳에 심어두고 있다. 특히 1편의 목차를 보면 왜 B와 A가 번갈아 나오는지 궁금증이 일어나는데 나중에 반전과 함께 그 이유가 드러난다.
좀 억지스러운 설정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데 어차피 내용 자체가 말도 안되는 '전설의 고향' 수준이라, 메인요리인 피칠갑에 약간의 양념이 가해진 정도라 보면 될 것 같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본 적이 없지만, 이러한 서술트릭이 아마도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스타일이자 특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본사람들이 추리소설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이겠지만, 이렇게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이 벌써 오래전부터 나왔다는 사실이 좀 부럽다. 우리나라도 성인들이 즐길 수 있는 과감한 표현과 아이디어가 거침없이 들어간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