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키 파크
마틴 크루즈 스미스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17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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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작가와의 두번째 만남이다. 처음 만났던 작품은 '북극성'이라는 제목인데 약 30년전에 사서 읽었던 책이었고, 아마도 책표지에 해양 스릴러물이라 소개되어 있어서 구매욕구를 자극했던 것 같다. 전체적으로 굉장히 차갑고 묵직한 분위기와 마지막에 범인이 바다 속으로 깊이 가라앉는 장면이 지금도 인상깊게 남아있을 만큼 만족스럽게 읽었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나중에야 알게됐지만 북극성은 아르카디 렌코가 등장하는 두번째 작품이었다. 어쩌다보니 순서가 바뀌어 시리즈 첫번째 작품을 30년이 지난 지금 뒤늦게 읽게 된 셈이다.



​이 작품은 마틴 크루즈 스미스를 단숨에 스타작가로 올려놓은 대표작이기도 하고 북극성을 통해 또 그만큼 실력이 좋은 작가임을 이미 확인했기 때문에 기대가 제법 컷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이 책은 초반 몇 페이지를 읽자마자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영미권 범죄 스릴러 장르의 소설을 읽다보면 종종 이런 경험을 하게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 책처럼 등장인물들에 대한 행동이나 심리묘사가 명확하게 와닿지가 않고, 전체적으로 산만한 느낌이 들어서 독서에 집중이 되지않는 그런 현상이다. 특히 대화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들이 나오는데 각각의 대사가 도대체 누가 하는 말인지 분간이 안되는 상황들이 수시로 나와서 혼란스럽게 만들고, 또 높임말과 반말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어투들도 상황에 맞지않는 어색한 부분이 많아 캐릭터에 도무지 감정이입을 하기 힘들어서 흥미롭고 즐거워야 할 책읽기가 짜증스럽게 변해버린다. 이 모든게 바로 '번역' 때문이다.



​마틴 크루즈 스미스는 소위 말하는 '급'이 높은 작가다. 미국작가임에도 당시 자유로운 왕래가 거의 불가능했던 구 소련의 사법 시스템과 KGB를 포함한 여러 기관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베일에 가려진 공산국가를 주무대로 독창적인 스토리를 펼치면서 묵직한 스릴감과 함께 냉전시대를 관통하는 여러 정치, 경제, 사회적 이슈들을 심도있게 녹여넣는 스타일을 구사한다. 중심사건을 둘러싼 복잡한 이해관계를 디테일하게 풀어가기 때문에 각 문장 속에 숨어있는 정보량이 많고 대화의 내용도 어려운 부분이 많아, 그만큼 제대로 번역하지 않으면 이해를 못해서 잔재미를 느낄 수가 없는 그런 유형의 작가이다.


이 작품은 박영인씨라는 분이 번역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얼마전에 읽었던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이라는 책도 이 분이 번역을 했고, 그 책도 번역에 문제가 좀 많다고 이미 리뷰를 한 바 있다. 이 작품 역시 인물들간의 대화에서 어투 설정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캐릭터성이 죽어버리는 기본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전체적으로 번역가 스스로가 내용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거의 기계적인 직역 위주로 대충 떼워버린 듯한 부분이 너무 많이 보인다. 번역가도 이해를 못한 내용을 독자가 어떻게 이해를 하겠는가... 그러니까 책을 읽으면서도 지금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건지 또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어떤 상황인지 명확하게 와닿지가 않아서 결국에는 난해하고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는거다. 그와중에 또 여전히 눈가리고 아웅하는 듯한 불필요한 주석들은 역시나 트레이드마크처럼 어김없이 등장한다.



하나하나 지적하자면 셀 수도 없을 정도인데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비교적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이런 부분의 번역만 봐도 이 책의 가독성이 얼마나 나쁜지 바로 알 수 있다. 당연히 탄약통은 탄창, 탄약통 껍데기는 그냥 탄피라고 해야 한다. 총기류에 있어서 탄약통 껍데기라는 말은 도대체 누가 사용하는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번역가가 번역을 잘하기 위해서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첫째 조건은 외국어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어' 실력이라 생각한다. 뛰어난 번역가는 거의 소설가 수준의 문학적인 감성이 느껴질 정도로 한글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란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이 책의 번역가는 문장의 구성이나 단어의 선택 등 여러 부분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때, 좀 심하게 말하면 원작의 재미와 완성도를 거의 절반도 못 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를 비롯하여 사상과 인종에 관한 문제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어서, 모처럼 수준높은 범죄 스릴러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아쉽게도 번역때문에 다 망친 것 같아 살짝 화가 난다.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지뢰를 밟았다. 지금까지 영미권 장르소설 번역가 중에 믿고 거르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는데, 이제 한 명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제발 좋은 작품은 실력있는 번역가에게 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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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7-06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탄약통 껍데기와 탄피!

절반도 못 살려낸 원작의 완성도!

이렇게 이야기해주시니 꼭 원작으로 시도해봐야겠구나 싶습니다.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실버북 2021-07-06 09:21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