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학문•철학/실존주의 문학
파스칼/팡세
톨스토이/부활
도스토옙스키/죄와벌
니체/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전까지의 철학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했다면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본질이 아닌 현상, 세계 그리고 세계 안에 실존하는 인간을 탐독했다. 본질은 결정돼 있지 않고 선택할 수 있으며 인간은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실존적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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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약속

낮의 호수에는 늙은 잉어와 청둥오리가 사는데
밤의 호수에는 작은 파문이 인다 그리곤 일렁이는 불빛들
따라 걷는 자들은 제 갈 길을 안다

나갈까 같이 걸을래

이상핰 일은 딴생각을 할 때 일어나고
사람들은 나에게 길을 물었다처음 가는 곳이었다

나는 거리를 서성이다
굴러오는 눈을 마주치고 말았던 것인데
그것들은 내게도 지도가 있다는 걸 알아챈 것인가
반대편에서 천천히 걷는다면
손바닥에 움켜 쥔 여정을 기꺼이 내미는 얼굴들

이름 부르는 정거장과 미래의 시장으로 가는 방법을 알려 줄는지

길을 찾는 사람들은 서로, 서로를 알아본다
어디에서나 고장난 로컬처럼 비춰진 나는 여기가 낯설어도
낯선 만큼 친절한 궤도를 그려 줄 수 있으니까

밝은 불빛을 찾기 위해선 어둠을 먼저 발견해야 해
길에서 주워들은 말이지만
어둠, 어둠은 서로를 잃고 이끄는 방식으로
물가를 서성이고 방명록을 남긴다

늙은 잉어와 청둥오리는 호수의 윤곽으로 떠오른다
우리는 순진한 얼굴로 낯선 거리를 흘러 흘러
뒤돌아서면 길은 이어질 것이다
갈림목에 선 서로의 목격자

지금 가고 있어 그래 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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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 문화/모내기법
지금은 농기계의 보급과 이용이 급속히 늘어 모내기의 작업기간이 훨씬 줄었다.

모내기법은 여러모로 유익했다. 우선 같은 토지에서의 생산량이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농업 생산력에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같은 노동력을 투입해 몇 배나 생산할 수 있는 기회가 도래한 것이다. 따라서 여유 있는 농민들은 토지를 빌리거나 매입하여 농사의 규모를 확대한다. 이를 ‘공작‘이라 불렀다. 광작을 통해 성공한 농민들을 ‘부농‘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조선 후기 지방에서 세력을 장악하며 전통적인 양반 지주와 대립하는 등 사회 변동의 주요 세력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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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꼭질

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

촛불을 모두 켜기도 전에 케이크 모서리를 한 움큼 쥐었다 몇 개의 어금니 자국이 버터크림 위에 미끄덩 맴돌았다 넘어가겠지 기념이 그랬던 것처럼 먹자꾸나, 그래도 생일이잖아 잠깐의 어둠과 심지의 냄새를 기억한다 플라스틱 폭죽, 반투명의 칼날, 둘러앉은 무릎, 열린 셔터에 순간의 공포가 있다

꺼지지도 켜지지도 못하는 베이커리 보급형 초가 단면으로 고요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독하게 이어지는 연기는 흔들림 없는 나선에서 손뼉과 맞닥뜨린다 끔뻑거리는 동공들, 허공의 눈을 맞춘다 초침이 자정을 향해 귀를 막고 있었다 한 번의 호흡으로 어둠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들키면 안 돼, 발견되지 못하면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술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눈을 가리게 되는 거야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발끝을 내밀거나

촛불의 마지막 리듬이 끝나면 쏟아져 나오는 축하의 말들을 견뎌야 한다 일그러진 케이크가 테이블 위에 손자국을 냈다 푸른 셀로판지에 싸인 꽃다발 옆 상자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곧 터질 것이다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나를 찾아, 우정의 규칙과 게임의 각도를 구하는 공식을 따라 사다리를 다시 오른다 우리는 파티가 끝나기를 숨죽여 기다릴 것이다 검게 탄 초를 손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믿고 있는 균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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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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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눈에 띈 계기가 있다.
해마다 두번씩 있는 명절은 내게 ‘명절증후군’이라는 상상도 못했던 명찰을 달아주고야 말았다.
그 날은 언제나 오고야 말았고, 이번에도 그 날은 오고야 말테지.
몸과 마음은 이미 반응하기 시작해 컨디션은 난조였고 울컥하는 마음에 펑펑 울고 싶었다.
그래서 그날 밤 급 전자책으로 주문을 했었던…
며칠 밤을 눈물, 콧물 범벅으로 읽고 말았다.
파친코 작가 이후로 미국 출판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작가가 이 미셸 자우너라고 한다.
미국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한인2세다. 읽기도 전부터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는 5년 사이에 이모와 엄마를 암으로 잃게 된다. 그런 그녀에게 H마트는 얼마나 마음이 아릴지 감히 말해본다.
그녀의 엄마는 문화적인 차이로 육아방식이나 교육방식이 미국엄마들과는 달랐으리라 여겨진다. 그런 엄마와 미셀 자우너에게도 잠시 충돌의 시기가 있었다. 바로 사춘기! 엄마와 전쟁 아닌 전쟁도 하지만 그 과정도 잘 넘기고 그녀에겐 언제나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다.
그러던 중 미셸의 엄마가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고 엄마를 위해 온갖 몸부림을 쳤건만 결국 엄마는 세상을 뜨고 만다.
안타깝게도 엄마가 떠난 후 아빠는 엄마 대신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주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스스로 엄마와 엄마의 나라, 엄마 나라의 음식을 통해 위안을 찾아간다.
엄마와의 애틋함으로 인해 상실감은 몇 배나 더 크게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자전적 에세이를 써 내려간 그녀는 뼛속부터 멋진 한국인 중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이따금씩, 출입문도 없는 방안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 정도로 깊은 슬픔에 잠길 때가 있다. 엄마가 돌아가셨단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단단한 벽에라도 부딪힌 듯한 심정이 된다. 출구도 없고 단단하기만 한 벽면에 쿵쿵 머리를 찧으면서, 앞으로 다시는 엄마를 보지 못하리라는 절대 불변의 현실만 자꾸자꾸 떠올리는 것이다. p17

나는 우리집에서 시내로 가는 길에 있는 묘지를 골랐다. 언덕을 절반쯤 내려가다보면 나오는, 철문이 있는 긴 담장으로 둘러싸인 묘지였다. 아빠는 매장을 하는 것에 두려움이 좀 있다고 고백했다. 해충 구제업자로 몇 년을 일했으니 벌레들이 앙갚음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엄마의 재를 땅에 묻는 일은 나에게 중요했다. 꽃을 가져와 놓아둘 공간이 필요했다. 쓰러질 수 있는 땅이, 주저앉을 바닥이, 아무 철이고 와서 눈물을 흘릴 풀밭과 토양이 필요했다. 마치 은행이나 도서관에 찾아간 것처럼 진열장 앞에 똑바로 서 있어야 하는 곳이 아니라. p229

내 기억을 곪아터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트라우마가 내 기억에 스며들어 그것을 망쳐버리고 쓸모없게 만들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 기억은 어떻게든 내가 잘 돌봐야 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공유한 문화는 내 심장 속에, 내 유전자 속에 펄떡펄떡 살아 숨쉬고 있었다. 나는 그걸 잘 붙들고 키워 내 안에서 죽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했다. 엄마가 가르쳐준 교훈을, 내 안에, 내 일거수일투족에 엄마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를 언젠가 후대에 잘 전할 수 있도록. 나는 엄마의 유산이었다. 내가 엄마와 함께 있지 못한다면 내가 엄마가 되면 될 터였다.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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