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에 오는 비는 ‘처서비處暑雨’라고 해서 걱정스러운 현상이었다고 해요. 햇살과 바람 속에서 마저 영글어야 할 곡식에 빗물이 들어가 썩게 되고, 과실도 알찬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한국 사회에서 일하는 사람치고 번아웃 안 된 사람이 어디 있겠어라는 생각에 그런 커다란 말을 저에게 갖다붙이는 게 지나치게 비장하고 조금 유난스럽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선생님 말씀이, 긴 시간 동안 서서히 번아웃에 이른 것처럼 동난 에너지를 다시 채우는 데에도 서서하고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요
짐작이라 말하는 건 그때 나에게 벌어지는 일이 뭔지 당시에는 스스로 잘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험들은 한창 그 가운데 있을 때는 진행중이라는 게 보이지 않다가 지나가고 나서야 그 시간이 뭐였는지, 그때 내가 어땠는지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고갈된 것이 체력이거나 사회성이거나 집중력이거나 하여간 바닥을 드러낸 채로 꾸역꾸역 계속하고 있었구나. 저 같은 사람들은 멈추는 방법을 몰라서 계속하곤 합니다.
무시당했다는 데 화가 나기보다 그저 너무 신경이 쓰였습니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오래 지속하기 위해선 언제든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부디 적극적으로 더 많은 일을 거절하는 데 성공하기를, 잘 먹고 잘 자는 생활을 쟁취해내기를, 그래서 마침내 더 많은 쉼을 사수하기를 바랍니다. 언제든 멈출 수 있어야 더 오래 좋은 글들을 쓸 수 있을 테니까요.
세상에는 변기보다 더러운 것들이 왜 이리 많은 걸까요. 키보드, 마우스, 휴대폰, 책상, 헬스장 기구들, 냉장고, 베개, 수세미, 칫솔, 도마…… 이쯤 되면 우리는 그냥 거대한 변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생각해보면 무엇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말할 때 변기가 자주 소환되듯이, 무엇이 얼마나 유해한지를 말할 때 담배가 자주 소환되곤 합니다. 담배보다 해로운 미세먼지, 담배보다 해로운 냉수, 담배보다 해로운 절망, 담배보다 해로운 고독…… 아마 찾아보면 담배보다 해로운 밤샘도 있을 거예요. 어쩌면 담배 외에는 매사 건강을 알뜰히 챙기는 담요가 저보다 건강할지도요. 게다가 스트레스를 담배 연기에 실어 그때그때 뒤끝 없이 날려 보낸다는 담요 같은 사람에게는 담배가 영혼의 건강을 지키는 면이라도 있겠지만 밤샘은 영혼까지 피폐하게 만드니까요.
그런데 그들이 흥겨이 부르는 노래 가사가 뜻밖에 쓸쓸하고 서글퍼서 잠깐 멈칫하게 됩니다.
다만 당시의 저에게는 그렇게 TV 앞에서 넋 놓을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반짝이는 조명이 돌아가고 노래가 계속되는 동안은 세상에 가득한 고통이 잠시 멈추는 것 같았어요. 중력도, 갑갑한 현실의 우울도, 코로나의 불안도 잊을 수 있을 것처럼요.
사람들이 자꾸 억울하게 죽는 사회에서, 낫기도 전에 또 쌓이는 이 슬픔과 좌절의 응어리는 다 어디로 갈까요?
부디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들을 곁에 두고 단단히 붙드시길 바랍니다.
누군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나무들까지도 알고 있네. _앤 섹스턴, 「애도Lament」 중에서
나무들은 정말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모든 나무들이, 모든 죽음에 대해서요. 산마다 길마다 슬픔이 잔뜩 스민 나무들이 이렇게나 많은 계절이었던가요, 11월은. 그리고 저 시구처럼, 머릿속에 가시처럼 박혀 자꾸 떠오르는 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가시가 다시 박히는 것처럼 괴로운 것들이 갑자기 많아졌습니다. 그날 새벽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소식을 듣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인터넷에 들어갔다가 무방비 상태로 봐버린 영상과 사진 속 이미지들은 여전히 꿈속까지 따라 들어와 잠을 갈가리 찢어놓습니다. 일선에서 취재중인 기자 친구에게 듣는 여러 뒷이야기들은 낮밤을 가리지 않고 기습적으로 달려들어 심장을 아프게 틀어쥡니다. 그럴 땐 이제 그냥 웁니다. 아니면 하리보를 먹거나요.
이런 죽음들을 겪을 때마다 여전히 무엇을 어디에 놔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 제 몸과 마음부터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울다가, 오늘의 세번째 하리보 봉지를 뜯어 초록색 젤리를 골라먹는 데에 몰두하다가, 잠들기 위해 수면제 한 알을 입에 넣다가, 관련된 건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기를 쓰고 찾아 읽다가, 관련된 건 하나도 보지 않겠다고 기를 쓰고 책이나 드라마 속으로 도망치다가, 문득문득 어리둥절해집니다. 이보다는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때로는 이보다는 더 고통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날에는 슬픔에 휘둘려 아무것도 못하는 제가 나약하게 느껴졌다가 어떤 날에는 변함없이 일상을 꾸려나가는 제가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온전히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슬픔이고, 그래야 한다고 학습된 슬픔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백수린 작가의 산문집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창비, 2022)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슬픔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감정과 타인의 감정이 끝내 포개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없이 예민해지고, 슬픔이 단 한 사람씩만 통과할 수 있는 좁고 긴 터널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터널 속으로 같이 들어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빠져나올 때까지 지켜봐주면서요.
우리는 아주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아주 많은 슬픔과 분노를 겪어낸 뒤겠지요. 많은 기억을 잊어버리고 또 어떤 기억은 선명한 채로, 그럼에도 자주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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