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실에서 보는 백록담 봉우리 | 영실에서 한라산을 오르다보면 진달래밭, 구상나무숲, 윗세오름, 선작지왓, 백록담이 모두 한눈에 들어오게 된다. 나는 여기가 한라산의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영실 설경 | 영실 초입의 휴게소에 이르면 벌써 한라산의 장관이 펼쳐진다. 특히 눈 내리는 겨울날이면 눈 보라 속에 감춰졌다 드러났다 하여 더욱 신비롭게 느껴진다.

영실 초입의 짙은 숲 | 영실 등반은 짙은 숲길을 걷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들이 울창하고 제주조릿대가 빼곡히 퍼져 있어 숲의 깊이를 알 수도 없다. 비오는 날이면 곳곳에서 홀연히 폭포가 나타나곤 한다.

『남명소승』은 수려한 문장과 시편들로 구성된 기행문학의 백미로 1577년 음력 11월 3일 나주 본가에서 출발하여 이듬해 3월 5일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행정(行程)을 일기체로 쓴 글이다. 그중 7일간의 한라산 등반기는 미사여구를 동반하지 않고 발길 간 대로 기록한 내용인데 마치 그와 함께 백록담까지 오르는 듯한 기분을 잔잔히 전해준다.

오백장군봉에는 설문대할망 전설이 있다. 설문대할망은 제주의 창조신이다. 할망은 키가 엄청나게 커서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우면 다리는 현재 제주시 앞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걸쳐졌다. 빨래할 때는 관탈섬에 빨래를 놓고, 팔은 한라산 꼭대기를 짚고 서서 발로 빨래를 문질러 빨았다고 한다. 앉아서 빨 때는 한라산에 엉덩이를 걸치고 한 다리는 마라도에 걸치고 우도를 빨래판 삼았다고 한다. 할망이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나를 때 치마의 터진 구멍으로 조금씩 새어나온 흙더미가 오름이며, 마지막으로 날라다 부은 게 한라산이다.

오백장군봉 | 절벽 날카로운 봉우리 수백 개가 병풍처럼 둘러 있어 오백장군봉, 오백나한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옆으로 난 진달래 능선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마침내는 발아래로 깊숙한 숲까지 보게 된다.

오백장군봉 설경 | 눈내리는 날 영실에 오르면 흩날리는 눈보라가 오백장군봉을 감싸안으면서 맴돌며 번지기 기법을 절묘하게 구사하는 흑백의 수묵화가 된다.

오백장군봉에 봄이 오면 기암절벽 사이마다 털진달래와 산철쭉이 연이어 피어나면서 검고 송곳처럼 날카로운 바위들과 흔연히 어울린다. 그 조화로움엔 가히 환상적이라는 표현밖에 나오지 않는다. 산허리를 타고 한 굽이 돌면 발아래로는 저 멀리 서귀포 모슬포의 해안가 마을과 가파도·마라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는 아련한 푸른빛의 망망대해다. 날개를 달고 뛰어내리면 무사히 거기까지 갈 것 같은 넓디넓은 시계(視界)를 제공해준다.

영실의 진달래 능선 | 진달래가 활짝 핀 영실의 능선은 행복에 가득 찬 평화로움 그 자체가 된다. 산자락 전체가 더이상 화려할 수 없는 진분홍빛을 발한다.

봄철 오백장군봉을 다 굽어볼 수 있는 산등성에 오르면 진달래인지 철쭉인지 떼판으로 피어난 분홍빛 꽃의 제전을 만날 수 있다. 바람 많은 한라산의 나무들은 항시 윗등이 빤빤하고 미끈하게, 혹은 두툼하고 둥글게 말려 있는데 진달래 철쭉 같은 관목은 상고머리를 한 듯 둥글고도 둥글게 무리지어 이어진다. 어떤 나무는 스포츠형, 깍두기형으로 반듯하게 깎여 있다. 자연의 바람이 만들어낸 이 아름다움 앞에 인간의 손길이 만드는 인공미가 얼마나 초라한지 여실히 보여준다. 가위질을 거의 본능적으로 하는 일본 정원사나 원예가가 보면 절로 무릎을 꿇을 일이다.

둘을 구별하는 여러 방법 중 진달래는 꽃이 피고서 잎이 나고 철쭉은 잎이 나고 꽃이 핀다는 사실과 진달래는 맑은 참꽃이고 철쭉은 진물 나는 개꽃이라는 사실에 입각하건대 그때 영실에 피어 있는 것은 진달래였다.

영실 기암은 사람에게 많은 기(氣)를 불어넣어준다는 속설이 있다. 대지의 기, 바다의 기, 설문대할망이 보내주는 기를 한껏 들이켜며 풍광에 취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어느새 구상나무 자생지에 도착하게 된다. 검고 울퉁불퉁한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 건너뛰면서 구상나무 숲길을 지나노라면 자연의 원형질 속에 내가 묻혀가는 듯한 맑은 기상이 발끝부터 가슴속까지 느껴진다. 영실이 인간에게 기를 선사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

구상나무 숲길 | 진달래 능선이 끝나면 구상나무숲이 시작된다. 해발 1,500미터에서 1,800미터 사이에서 자생한 구상나무가 지구 온난화로 아래쪽부터 고사목이 되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구상나무는 크리스마스트리의 원조이다.

윌슨은 동양의 식물을 연구한 몇 안 되는 서양 식물학자로 특히 경제적 가치가 높은 목본식물을 위주로 채집하고 연구했다. 윌슨은 아널드식물원에서 구상나무를 변종시켜 ‘아비에스 코레아나 윌슨’을 만들어냈다.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수·공원수 등으로 좋으며, 재질이 훌륭하여 가구재 및 건축재 등으로 사용된다. 특히 이 나무는 크리스마스트리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비싸게 팔리는 나무로 유럽에서는 ‘Korean fir’로 통한다. 그 로열티로 받는 액수가 어마어마하단다.
지금 아널드식물원에는 윌슨이 그때 한라산에서 종자를 가져다 심은 구상나무가 하늘로 치솟아 자라고 있다. 윌슨의 별명은 ‘식물 사냥꾼’(planthunter)이었는데 그는 이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그가 개발한 구상나무 크리스마스트리를 사려면 로열티를 내야 한다. 종자의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제국주의가 총칼만 앞세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윗세오름은 영실과 어리목 코스가 만나는 곳으로 한라산 등반의 중간 휴식처로 탐승객(探勝客)이 간편히 식사를 할 만한 산장도 있고 대피소도 있으며 국립공원 직원이 상주하고 있다. 윗세오름은 1100고지에서 위쪽으로 있는 세 오름(삼형제오름)이라 해서 ‘윗’자가 붙었다. 뭉쳐 부르면 윗세오름이지만 세 오름 모두 독자적인 이름이 있어 위로부터 붉은오름·누운오름·새끼오름이다. 이들을 삼형제에 빗대어 큰오름(1,740미터), 샛오름(1,711미터), 족은오름(1,698미터)이라고도 한다.
큰오름인 붉은오름은 남사면에 붉은 흙이 드러나 있어 한라산의 강렬한 야성미를 보여주고, 새끼오름인 족은오름은 영실로 통하는 길목에서 아주 귀염성 있게 다가온다. 길게 누운 듯한 누운오름은 누운향나무와 잔디로 뒤덮였고 꼭대기에 망대 같은 바위가 있어 방목으로 마소를 키우는 테우리들은 망오름이라고 한다.
바로 이 누운오름의 남쪽 자락이 선작지왓이다. 크고 작은 작지(자갈)들이 많아 생작지왓이라고도 한다. 선작지왓은 한라산 최고의 절경으로 꼽을 만한 곳이다.

백록담 | 백록담에 오른 이들은 한결같이 그 적막의 고요한 모습이 명상적이고 선적이며 비현실의 세계 같다고 했다. 정지용은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라고 했다.

윗세오름은 한라산 위에 있는 세 개의 오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여기에 이르면 선작지왓 너머로 백록담 봉우리의 절벽이 통째로 드러난다. 그것은 장관 중에서도 장관으로, 이렇게 말하는 순간 내 가슴은 뛰고 있다.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한라산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의 반은 만끽할 수 있다.

"영실! 한라산 영실을 안 본 사람은 제주도를 안 본 거나 마찬가지야."

영실은 최소한 네 차례의 새로운 감동을 전해준다. 교향곡에 비유하면 라르고, 아다지오로 전개되다가 알레그로, 프레스토로 빨라지면서 급기야 마지막에는 ‘꿍꽝’ 하고 사람 심장을 두드리는 것과 같다. 연극으로 치면 프롤로그부터 본편 4막, 그리고 에필로그까지 이어진다. 그 서막은 영실 초입의 숲길이다.
영실에 들어서면 이내 솔밭 사이로 시원한 계곡물이 흐른다. 본래 실(室)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계곡을 말하는 것으로 옛 기록에는 영곡(靈谷)으로 나오기도 한다. 언제 어느 때 가도 계곡 물소리와 바람소리, 거기에 계곡을 끼고 도는 안개가 신령스러워 영실이라는 이름에 값한다. 무더운 여름날 소나기라도 한차례 지나간 뒤라면 이 계곡을 두른 절벽 사이로 100여 미터의 폭포가 생겨 더욱 장관을 이룬다.
숲길을 지나노라면 아래로는 제주조릿대가 떼를 이루면서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며 온통 푸르게 물들여놓고, 위로는 하늘을 가린 울창한 나무들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아름답고 기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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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 문화/농지개혁법

토지 문제는 조선 중기부터 내려온 고질적인 문제였는데, 농지개혁법은 이 문제를해결하기 위해 1949년 제정된 법이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농업 국가였던 우리나라에서는 토지 문제가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된다. 절대 다수의 농민들이 소작료 인하 주장에 나섰고 일부에서는 좀더 근본적인 토지 제도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소작료를 인하하는등 몇 가지 조치를 실시했지만 농촌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기도 했다. 이 와중에 1946년 북한에서는 5정보(町 땅 넓이의 단위)이상의 토지를 대상으로 무상몰수, 무상 분배하는 토지 개혁이 실시된다.

1949년 실시된 남한의 농지 개혁은 3정보 이상의 토지를 기준으로 유상 매입, 유상 분배 형태로 실시됐다. 지주들에게 현금이 아닌 지가 증권을 발행했고, 농민들에게 낮은 이자로 농지를 분배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고물가 상황, 특히 개혁이후 발생한 한국 전쟁 등으로 인해 지가 증권은 휴지 조각처럼 가치를 잃었고 농지 개혁은 수월하게 진행된다. 북한의 토지 개혁은 무상을 표방했지만 역시 현물세를 받는 등 경제적 환수 과정이 있었고 양자가 실제로는 비슷한 가격으로 토지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보였다.
이를 통해 수백 년간 한반도의 농민들을 괴롭혔던 소작제 문제는 일단락됐고, 지주 세력은 역사에서 영원히 퇴출됐다. 당시 농지 개혁의 영향으로 현행 헌법에도 경자유전의 원칙, 소작 제도 금지의 원칙 등이 명문화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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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피아골의 연곡사터, 산청의 단속사터, 여주 혜목산의 고달사터, 경주 암곡의 무장사터, 보령 성주산의 성주사터, 강릉 사굴산의 굴산사터…… 어느 폐사지인들 답사객이 마다하리요마는 그중에서도 나에게 답사가 왜 중요한가를 가르쳐준, 꿈에도 못 잊을 폐사지는 설악산 동해와 마주한 산비탈에 자리 잡은 진전사터와 하늘 아래 끝동네에 있는 선림원터다.

진전사탑은 석가탑의 전통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것이다. 기단이 상하 2단으로 되어 튼튼한 안정감을 주는 것, 3층의 몸체가 상큼한 상승감을 자아내는데 그 체감률을 보면 높이는 1층이 훤칠하게 높고 2층과 3층은 같은 크기로 낮게 설정했지만 폭은 4:3:2의 비율로 좁아지고 있는 점, 지붕돌〔屋蓋石〕의 서까래가 5단의 계단으로 되어 있는 점,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1장의 돌로 만들어 이었는데 몸돌 네 귀퉁이에 기둥이 새겨져 있는 점 모두가 석가탑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석가탑은 높이가 8.2미터인데 진전사탑은 5미터로 현격히 축소되어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석가탑의 장중한 맛이 진전사탑에서는 아담한 맛으로 전환되었다. 지붕돌의 기왓골이 석가탑은 거의 직선인데 진전사탑은 슬쩍 반전하는 맵시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런 미감의 차이를 낳았다. 석가탑에는 일체의 장식 무늬가 없으므로 엄정성이 강한데 진전사탑에는 아름다운 돋을새김이 친근감을 더해준다. 이것이 두 탑의 차이다.

불국사가 중대 신라를 살던 중앙 귀족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진전사는 지방 호족의 새로운 문화 능력을 과시했다. 중앙 귀족이 권위를 필요로 했다면 지방 호족은 능력과 친절성을 앞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보통 차이가 아니다.

일반 사람들은 승탑의 정확한 역사적 의미를 알기 어렵다. 승탑은 고승의 시신을 화장한 사리를 모신 건조물로 한동안 ‘부도(浮屠)’라고 불리기도 했고, 많은 문화재 명칭에 부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도의선사탑 역시 ‘진전사터 부도’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명확히 말해서 고승의 사리탑(舍利塔), 또는 승탑이라고 해야 맞고, 오늘날에는 문화재청에서도 박물관에서도 역사교과서에서도 승탑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탑의 본질은 사리탑이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것은 불탑, 줄여서 탑이라 하고, 스님의 사리를 모신 것은 승탑이다. 승탑은 스님의 이름 뒤에 탑을 붙여 부르는 것이 보통이며 별도로 승탑 자체에 이름을 부여한 경우도 많다. 보통명사로 쓰일 때는 승탑이라 하고, 스님의 이름을 알 경우에는 아무개 스님의 사리탑이라고 하며, ‘보조국사 창성탑’ ‘지광국사 현묘탑’처럼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는 승탑도 있다.

진전사터도의선사탑 | 하대신라 선종의 시대, 승탑의 시대를 말해주는 팔각당 형식 승탑의 시원 양식으로 도의선사 사리탑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선종 사찰 폐사지 선림원터는 행정구역상 양양군 서면 황이리에 있지만 실제는 양양군·인제군·홍천군·강릉시와 경계선을 맞대고 있는, 설악산과 오대산 사이의 움푹 꺼진 곳인데, 이 동네 사람들은 스스로 ‘하늘 아래 끝동네’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은 새 길이 뚫려 더 이상 하늘 아래 끝동네가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처연한 이름에 걸맞은 캄캄한 골짜기였다.

‘하늘 아래 끝동네’, 그것은 반역의 자랑이다. 지리산 뱀사골 달궁마을 너머 해발 900미터 되는 곳에 있는 심원마을 사람들이 ‘하늘 아래 첫동네’라며 역설의 자랑을 펴는 것보다 훨씬 정직하고 숙명적이며 비장감과 허망이 감돈다.

홍각선사의 사리탑과 탑비는 당대의 명작이었다. 특히 탑비는 왕희지 글씨를 집자해 만들어 금석학의 귀중한 유물로 되었고 돌거북 받침과 용머리 지붕돌은 하대 신라의 문화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 잘생긴 석등과 조사당을 지어 그 공덕을 기리어왔는데, 그 모든 것이 어느 날 산사태로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홍각선사 사리탑비 | 비석은 산산조각이 나고 돌거북이와 용머리만 남아 있는데, 거북이의 힘찬 기상과 정성을 다한 조각 솜씨에서 9세기 지방문화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조선 정조시대에 유한준(兪漢雋,1732~1811)이라는 문인이 당대의 최고 가는 수장가였던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의 수장품에 붙인 글을 내 나름으로 각색하여 만든 문장도 이야기해주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진전사터에는 놀랍게도 고압선 송신탑이 어마어마한 위세로 세워져 있다. 진전사탑보다 10배도 더 큰 철탑이 계곡과 산자락을 건너뛰고 있으니 진전사터는 더 이상 진전사터가 아니었다. 2005년부터는 진전사 복원불사가 시작되어 2023년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유한준의 원문은 "知則爲眞愛愛則爲眞看看則畜之而非徒畜也"이며, 이는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이다.

진전사가 정확하게 언제 세워졌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자료가 없다. 그러나 도의(道義)선사가 서라벌을 떠나 진전사의 장로가 되었던 때를 그 시점으로 잡는다면 821년에서 멀지 않은 어느 때가 된다. 진전사의 삼층석탑은 양식상으로 보더라도 9세기 초 하대 신라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 점을 의심하는 미술사가는 아무도 없다. 진전사의 삼층석탑(국보 제122호)은 아주 아담하게 잘생겼다. 귀엽다, 예쁘다고 표현하기에는 단정한 맛이 강하고, 야무지다고 표현하면 부드러운 인상을 담아내지 못한다.

염거화상의 사리탑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모셔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것을 반출하려다 실패하여 1914년 무렵 탑골공원에 설치했다가 해방 후 경복궁으로 옮겨놓았고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옥외 전시장에 놓여 있게 되었다. 전하기로는 원주 흥법사(興法寺)터에서 훔쳐온 것이라고 하여 미술사가들은 염거화상 사리탑의 원위치를 찾으려고 이 일대를 샅샅이 조사했으나 아무런 근거를 찾지 못하여 아직도 미궁 속에 빠져 있다.

선림원터 | 설악산과 오대산 사이 미천계곡 깊숙한 곳에 삼층석탑 하나가 그 옛날을 증언하듯 오롯이 서 있다.

선림원터는 미천계곡이 맴돌아가는 한쪽편에 산비탈을 바짝 등에 지고 자리 잡고 있다. 그 터가 절집이 들어서기엔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곳 하늘 아래 끝동네에는 그보다 넓은 평지를 찾아볼 길도 없다. 그렇다면 선림원은 그 이름이 풍기듯 중생들의 기도처가 아니라 스님들의 수도처였던 모양이며, 바로 그 지리적 조건 때문에 어느 날 산사태로 통째로 흙에 묻혀버린 슬픈 역사를 간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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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 유적•유물/다산초당

다산초당은 전라남도 강진에 유배 중이던 정약용이 8년간 머문 곳이다. 강진은 고려청자 생산으로 유명했는데, 좋은 흙에 기술이 더해져 도자기 예술의 절정을 선보인 곳이다.
정약용은 강진에서만 11년간 머물렀다. 유배된 상황이었지만 끊임없이 학문을 탐독하며 성실하게 지적인 성과를 이루었다. 오랜 유배 기간이 오늘날의 정약용을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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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은 전국에 고루 퍼져 있는 민족의 노래이고 민족의 문학이며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동질성을 확보해주는 언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의 정확한 유래와 말뜻은 아직껏 밝혀지지 않고 있다.
흔히 우리나라에는 3대 아리랑이 있다고 한다. 강원도의 정선아리랑, 호남의 진도아리랑, 영남의 밀양아리랑이다. 밀양아리랑은 씩씩하고, 진도아리랑은 구성지고, 정선아리랑은 유장하다. 그것은 각 지방에서 자생한 민요조와 결합하면서 생긴 현상으로 진도아리랑은 육자배기조, 밀양아리랑은 정자소리조, 정선아리랑은 메나리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리랑의 뜻과 어원에 대하여는 알영(박혁거세의 부인)설에서 의미 없는 사설이라는 설까지 십여 가지 설이 있는데 정선아리랑은 ‘(누가 내 처지를) 알아주리오’라는 뜻에서 ‘아라리’가 되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고 실제로 이곳 사람들은 ‘정선아라리’라고 부르고 있다.

황재형 작 「앰뷸런스」 | 탄광촌 사람이 아니면 지금 이 작품에서 산천초목이 떨리는 마음을 다는 읽어내지 못한다.

나는 그때 황재형이 그림을 그릴 때 왜 그렇게 강한 터치를 하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밝은 조명의 전시장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세련된 안목과 멋쟁이 관객들의 감각에 호소할 의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진실을, 있는 사실을 그렇게 담고 있었다. 나는 지물포 아저씨 앞에서 부끄러웠다. 나의 미학적 척도로 작품을 재어보려고 했던 황재형에게도 부끄러웠다. 그것은 미안함이 아니었다. 분명 부끄러움이었다.

정암사 일주문 | 사북과 고한을 지나 마음의 갈무리터로서 만나는 절집이라 정암사는 더욱 맑게만 느껴진다.

정암사의 아름다움은 공간 배치의 절묘함에 있다. 이 태백산 깊은 산골엔 사실 절집이 들어설 큰 공간이 없다. 모든 산사들이 암자가 아닌 한 계곡 속의 분지에 아늑하고 옴폭하게 때로는 호기 있게 앉아 있다. 정암사는 가파른 산자락에 자리 잡았으면서도 절묘한 공간 배치로 아늑하고, 그윽하고, 호쾌한 분위기를 두루 갖추었다. 무시해서가 아니라 이 시대 건축가들로서는 엄두도 못 낼 공간 운영이다.

수마노탑은 전형적인 전탑 양식인데 그 재료가 전돌이 아니고 마노석으로 된 것이 특색이다. 마노석은 예부터 고급 석재다.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사람들이 이 위대한 장공(匠工)에게 큰 맷돌을 하나 깎아달라고 준비한 돌이 마노석이었다고 한다(그래서 일본 나라의 동대사(東大寺,도다이지)서쪽 대문을 맷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탑에 물 수(水)자가 하나 더 붙어 수마노가 된 것은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귀국할 때 서해 용왕을 만났는데 그때 용왕이 무수한 마노석을 배에 실어 울진포까지 운반한 뒤 다시 신통력으로 태백산(갈래산)에 갈무리해두었다가 장차 불탑을 세울 때 쓰는 보배가 되게 하였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즉 물길을 따라온 마노석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아리랑은 지역과 세대를 불문하고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다는 점과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고 재창조할 수 있다는 다양성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15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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