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문제는 조선 중기부터 내려온 고질적인 문제였는데, 농지개혁법은 이 문제를해결하기 위해 1949년 제정된 법이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농업 국가였던 우리나라에서는 토지 문제가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된다. 절대 다수의 농민들이 소작료 인하 주장에 나섰고 일부에서는 좀더 근본적인 토지 제도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소작료를 인하하는등 몇 가지 조치를 실시했지만 농촌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기도 했다. 이 와중에 1946년 북한에서는 5정보(町 땅 넓이의 단위)이상의 토지를 대상으로 무상몰수, 무상 분배하는 토지 개혁이 실시된다.
1949년 실시된 남한의 농지 개혁은 3정보 이상의 토지를 기준으로 유상 매입, 유상 분배 형태로 실시됐다. 지주들에게 현금이 아닌 지가 증권을 발행했고, 농민들에게 낮은 이자로 농지를 분배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고물가 상황, 특히 개혁이후 발생한 한국 전쟁 등으로 인해 지가 증권은 휴지 조각처럼 가치를 잃었고 농지 개혁은 수월하게 진행된다. 북한의 토지 개혁은 무상을 표방했지만 역시 현물세를 받는 등 경제적 환수 과정이 있었고 양자가 실제로는 비슷한 가격으로 토지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보였다.
이를 통해 수백 년간 한반도의 농민들을 괴롭혔던 소작제 문제는 일단락됐고, 지주 세력은 역사에서 영원히 퇴출됐다. 당시 농지 개혁의 영향으로 현행 헌법에도 경자유전의 원칙, 소작 제도 금지의 원칙 등이 명문화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