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실에서 보는 백록담 봉우리 | 영실에서 한라산을 오르다보면 진달래밭, 구상나무숲, 윗세오름, 선작지왓, 백록담이 모두 한눈에 들어오게 된다. 나는 여기가 한라산의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영실 설경 | 영실 초입의 휴게소에 이르면 벌써 한라산의 장관이 펼쳐진다. 특히 눈 내리는 겨울날이면 눈 보라 속에 감춰졌다 드러났다 하여 더욱 신비롭게 느껴진다.

영실 초입의 짙은 숲 | 영실 등반은 짙은 숲길을 걷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들이 울창하고 제주조릿대가 빼곡히 퍼져 있어 숲의 깊이를 알 수도 없다. 비오는 날이면 곳곳에서 홀연히 폭포가 나타나곤 한다.

『남명소승』은 수려한 문장과 시편들로 구성된 기행문학의 백미로 1577년 음력 11월 3일 나주 본가에서 출발하여 이듬해 3월 5일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행정(行程)을 일기체로 쓴 글이다. 그중 7일간의 한라산 등반기는 미사여구를 동반하지 않고 발길 간 대로 기록한 내용인데 마치 그와 함께 백록담까지 오르는 듯한 기분을 잔잔히 전해준다.

오백장군봉에는 설문대할망 전설이 있다. 설문대할망은 제주의 창조신이다. 할망은 키가 엄청나게 커서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우면 다리는 현재 제주시 앞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걸쳐졌다. 빨래할 때는 관탈섬에 빨래를 놓고, 팔은 한라산 꼭대기를 짚고 서서 발로 빨래를 문질러 빨았다고 한다. 앉아서 빨 때는 한라산에 엉덩이를 걸치고 한 다리는 마라도에 걸치고 우도를 빨래판 삼았다고 한다. 할망이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나를 때 치마의 터진 구멍으로 조금씩 새어나온 흙더미가 오름이며, 마지막으로 날라다 부은 게 한라산이다.

오백장군봉 | 절벽 날카로운 봉우리 수백 개가 병풍처럼 둘러 있어 오백장군봉, 오백나한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옆으로 난 진달래 능선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마침내는 발아래로 깊숙한 숲까지 보게 된다.

오백장군봉 설경 | 눈내리는 날 영실에 오르면 흩날리는 눈보라가 오백장군봉을 감싸안으면서 맴돌며 번지기 기법을 절묘하게 구사하는 흑백의 수묵화가 된다.

오백장군봉에 봄이 오면 기암절벽 사이마다 털진달래와 산철쭉이 연이어 피어나면서 검고 송곳처럼 날카로운 바위들과 흔연히 어울린다. 그 조화로움엔 가히 환상적이라는 표현밖에 나오지 않는다. 산허리를 타고 한 굽이 돌면 발아래로는 저 멀리 서귀포 모슬포의 해안가 마을과 가파도·마라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는 아련한 푸른빛의 망망대해다. 날개를 달고 뛰어내리면 무사히 거기까지 갈 것 같은 넓디넓은 시계(視界)를 제공해준다.

영실의 진달래 능선 | 진달래가 활짝 핀 영실의 능선은 행복에 가득 찬 평화로움 그 자체가 된다. 산자락 전체가 더이상 화려할 수 없는 진분홍빛을 발한다.

봄철 오백장군봉을 다 굽어볼 수 있는 산등성에 오르면 진달래인지 철쭉인지 떼판으로 피어난 분홍빛 꽃의 제전을 만날 수 있다. 바람 많은 한라산의 나무들은 항시 윗등이 빤빤하고 미끈하게, 혹은 두툼하고 둥글게 말려 있는데 진달래 철쭉 같은 관목은 상고머리를 한 듯 둥글고도 둥글게 무리지어 이어진다. 어떤 나무는 스포츠형, 깍두기형으로 반듯하게 깎여 있다. 자연의 바람이 만들어낸 이 아름다움 앞에 인간의 손길이 만드는 인공미가 얼마나 초라한지 여실히 보여준다. 가위질을 거의 본능적으로 하는 일본 정원사나 원예가가 보면 절로 무릎을 꿇을 일이다.

둘을 구별하는 여러 방법 중 진달래는 꽃이 피고서 잎이 나고 철쭉은 잎이 나고 꽃이 핀다는 사실과 진달래는 맑은 참꽃이고 철쭉은 진물 나는 개꽃이라는 사실에 입각하건대 그때 영실에 피어 있는 것은 진달래였다.

영실 기암은 사람에게 많은 기(氣)를 불어넣어준다는 속설이 있다. 대지의 기, 바다의 기, 설문대할망이 보내주는 기를 한껏 들이켜며 풍광에 취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어느새 구상나무 자생지에 도착하게 된다. 검고 울퉁불퉁한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 건너뛰면서 구상나무 숲길을 지나노라면 자연의 원형질 속에 내가 묻혀가는 듯한 맑은 기상이 발끝부터 가슴속까지 느껴진다. 영실이 인간에게 기를 선사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

구상나무 숲길 | 진달래 능선이 끝나면 구상나무숲이 시작된다. 해발 1,500미터에서 1,800미터 사이에서 자생한 구상나무가 지구 온난화로 아래쪽부터 고사목이 되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구상나무는 크리스마스트리의 원조이다.

윌슨은 동양의 식물을 연구한 몇 안 되는 서양 식물학자로 특히 경제적 가치가 높은 목본식물을 위주로 채집하고 연구했다. 윌슨은 아널드식물원에서 구상나무를 변종시켜 ‘아비에스 코레아나 윌슨’을 만들어냈다.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수·공원수 등으로 좋으며, 재질이 훌륭하여 가구재 및 건축재 등으로 사용된다. 특히 이 나무는 크리스마스트리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비싸게 팔리는 나무로 유럽에서는 ‘Korean fir’로 통한다. 그 로열티로 받는 액수가 어마어마하단다.
지금 아널드식물원에는 윌슨이 그때 한라산에서 종자를 가져다 심은 구상나무가 하늘로 치솟아 자라고 있다. 윌슨의 별명은 ‘식물 사냥꾼’(planthunter)이었는데 그는 이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그가 개발한 구상나무 크리스마스트리를 사려면 로열티를 내야 한다. 종자의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제국주의가 총칼만 앞세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윗세오름은 영실과 어리목 코스가 만나는 곳으로 한라산 등반의 중간 휴식처로 탐승객(探勝客)이 간편히 식사를 할 만한 산장도 있고 대피소도 있으며 국립공원 직원이 상주하고 있다. 윗세오름은 1100고지에서 위쪽으로 있는 세 오름(삼형제오름)이라 해서 ‘윗’자가 붙었다. 뭉쳐 부르면 윗세오름이지만 세 오름 모두 독자적인 이름이 있어 위로부터 붉은오름·누운오름·새끼오름이다. 이들을 삼형제에 빗대어 큰오름(1,740미터), 샛오름(1,711미터), 족은오름(1,698미터)이라고도 한다.
큰오름인 붉은오름은 남사면에 붉은 흙이 드러나 있어 한라산의 강렬한 야성미를 보여주고, 새끼오름인 족은오름은 영실로 통하는 길목에서 아주 귀염성 있게 다가온다. 길게 누운 듯한 누운오름은 누운향나무와 잔디로 뒤덮였고 꼭대기에 망대 같은 바위가 있어 방목으로 마소를 키우는 테우리들은 망오름이라고 한다.
바로 이 누운오름의 남쪽 자락이 선작지왓이다. 크고 작은 작지(자갈)들이 많아 생작지왓이라고도 한다. 선작지왓은 한라산 최고의 절경으로 꼽을 만한 곳이다.

백록담 | 백록담에 오른 이들은 한결같이 그 적막의 고요한 모습이 명상적이고 선적이며 비현실의 세계 같다고 했다. 정지용은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라고 했다.

윗세오름은 한라산 위에 있는 세 개의 오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여기에 이르면 선작지왓 너머로 백록담 봉우리의 절벽이 통째로 드러난다. 그것은 장관 중에서도 장관으로, 이렇게 말하는 순간 내 가슴은 뛰고 있다.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한라산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의 반은 만끽할 수 있다.

"영실! 한라산 영실을 안 본 사람은 제주도를 안 본 거나 마찬가지야."

영실은 최소한 네 차례의 새로운 감동을 전해준다. 교향곡에 비유하면 라르고, 아다지오로 전개되다가 알레그로, 프레스토로 빨라지면서 급기야 마지막에는 ‘꿍꽝’ 하고 사람 심장을 두드리는 것과 같다. 연극으로 치면 프롤로그부터 본편 4막, 그리고 에필로그까지 이어진다. 그 서막은 영실 초입의 숲길이다.
영실에 들어서면 이내 솔밭 사이로 시원한 계곡물이 흐른다. 본래 실(室)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계곡을 말하는 것으로 옛 기록에는 영곡(靈谷)으로 나오기도 한다. 언제 어느 때 가도 계곡 물소리와 바람소리, 거기에 계곡을 끼고 도는 안개가 신령스러워 영실이라는 이름에 값한다. 무더운 여름날 소나기라도 한차례 지나간 뒤라면 이 계곡을 두른 절벽 사이로 100여 미터의 폭포가 생겨 더욱 장관을 이룬다.
숲길을 지나노라면 아래로는 제주조릿대가 떼를 이루면서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며 온통 푸르게 물들여놓고, 위로는 하늘을 가린 울창한 나무들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아름답고 기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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