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도 때로 자식을 타인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지만, 자식 역시 자신의 부모를 타인으로서 정중하게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엄마’가 아니라 ‘어느 중년 혹은 노년의 여성’으로 바라본다면 측은지심을 느낄 것입니다.
부디 내가 가장 약하고 가난한 시절에도 다만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내 가족에게 약자의 패악을 부리지 않기를.

로마인들은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 ‘for(포르)’의 과거분사 ‘fatum(파툼, ‘말하여지다’라는 뜻)’을 명사화하여 ‘운명’이란 단어로 사용했고, 여기서 바로 ‘운명’이라는 뜻의 영단어 ‘fate’가 유래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운명이란 신들이 천명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운명을 말할 때 ‘fate’보다는 ‘destiny(영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destiny는 ‘정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 ‘destino(데스티노)’에서 유래했는데, 무의식 가운데 운명은 정해진 것, 그래서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깔린 듯합니다. 혹시 오늘날 전복시키기 힘들어진 굳건한 계층사다리로 인해, 운명은 인간의 힘으로 돌릴 수 없다고 여기게 된 사람들의 열패감이 말에도 영향을 끼친 것일까요.
반면 그리스인들은 ‘운명’을 자신에게 할당된 ‘부분’으로 이해했습니다. 인간은 ‘부분’을 부여받으면서 태어나고, 바로 이 ‘부분’이 한 인간의 존재를 특징짓게 될 일련의 사건들을 결정지을뿐더러 죽음의 의미와 순간까지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빈 부분, 부재, 텅 빈 것’도 삶의 ‘부분’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없는 것’ ‘없는 부분’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평등합니다.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

Qui maledixerit patri suo vel matri,
퀴 말레디세리트 파트리 수오 벨 마트리,
morte moriatur.
모르테 모리아투르.

부모님을 생각하면 복잡하고 묘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성장기에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분들이 나이들수록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부모님이 달라졌다기보다는, 내가 나이들어가면서 철도 들어 어른의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 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날은 문득 나의 부모가 그 험난한 세월 동안 부부의 연을 놓지 않고 끝까지 살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나의 부모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여긴다면 나 또한 ‘별 볼 일 없는 사람’의 소생에 지나지 않는가! 내가 타인 앞에서 내 부모님을 규정하는 만큼, 나는 꼭 그만큼의 인간, 그 정도의 아들이 되는 셈이지요.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깎아내리고 자학함으로써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사형과 마찬가지이지요.

빨리 따라오는 사람들하고만
길을 걸어가야겠습니까?
더 늦게 오는 사람들을
버려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Sed numquid cum celerioribus
세드 눔퀴드 쿰 첼레리오리부스
tantum ambulamus viam?
탄툼 암불라무스 비암?
Et qui tardius ambulant,
에트 퀴 타르디우스 암불란트,
non sunt relinquendi.
논 순트 렐린쿠엔디.

빨리 따라오는 학생들만 데리고 가려는 선생, 자신에게 경제적 정신적 지지를 수월하게 해주는 부모가 되어주지 못한다고 제 부모를 욕하는 자식, 이들은 모두 제 발등에 도끼를 찍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더디 따라오는 학생이나 뒷받침을 잘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부모들마저 존중하고 사랑하는 성숙한 인간이 되지 않으면, 자신과 연결된 그들의 결핍과 아픔을 모른 척 외면해버리고 나면, 그것은 평생의 상처와 얼룩이 되어 당신을 영영 따라다닐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날을 눈물과 복받치는 감정으로 보낸 어느 날, 머리가 아주 차가워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무엇이 될지, 어떠한 사람이 될지는 모르지만 내 안에 들끓고 있는 그 뜨거운 마음을 믿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도 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 버려지듯 던져졌다가 사라지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때 나는 스스로를 소중히 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내가 나를 먼저 이해하고 나의 소중함을 받아들이자, 내 가장 가까운 이웃인 부모님도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식된 자로서 부모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바라고 기대하기보다 먼저 가져야 할 마음은 부모를 향한 연민이었습니다. 처음 부모가 되어서 많은 것이 서툴고 힘겨웠을 텐데 부모 역할을 하시느라 수고하셨다고, 살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건네는 연민 말이지요. 부모도 자식도 서로를 선택할 수 없는 관계이기에 단지 한 세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완벽한 부모 노릇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부모에게도 그 윗세대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상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운명적이면서도 어찌 보면 그저 우연한 만남일 뿐입니다. 하필 나는 왜 이러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을까 생각하는 대신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키워야 했을 부모님에 대해 연민을 가져보십시오.
나는 세상 한구석에서 한탄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고 그저 내 몫을 살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이 세상 전부가 학교이고 선생입니다.

어떤 사람도 특정인을 자기 부모로 정해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어린 저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 번의 연민과 깨우침으로 저를 완전히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는 일상에서 보고 겪는 고통이 너무나 컸고, 그 고통은 가까스로 추어올린 나의 결심을 단번에 무너뜨렸습니다. 그때 나의 미숙한 삶은 마치 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어디로든 피하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내 작은 몸을 숨길 곳도 피할 곳도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태어난 가난한 사람hominem pauperem de pauperibus natum;호미넴 파우페렘 데 파우페리부스 나툼. 그것이 바로 나였습니다. 그런 내가 선택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몸부림과 절규뿐이었습니다. 그 절규는 마치 구약성경 하바꾹 3장 10절의 표현과 같았습니다.
"산들이 당신을 보고 몸부림칩니다. 폭우가 휩쓸고 지나갑니다. 심연은 소리지르고 그 물줄기가 치솟습니다."
그런 가운데 나온 외마디 절규는 ‘살고 싶다’라는 외침이 아니라 ‘살려주세요’라는 호소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주님, 제가 온 마음으로 당신을 찬미하리다. 당신 종에게 선을 베푸소서. 제가 살아 당신 말씀을 지키오리다. 저는 몹시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주님, 당신 말씀대로 저를 살려주소서.
Confitebor tibi, Domine, in toto corde meo: retribue servo tuo: vivam, et custodiam sermones tuos: vivifica me secundum verbum tuum, Domine.
콘피테보르 티비, 도미네, 인 토토 코르데 메오: 레트리부에 세르보 투오; 비밤, 에트 쿠스토디암 세르모네스 투오스: 비비피카 메 세쿤둠 베르붐 투움, 도미네. (시편 119, 17과 107 참조)

길을(계속) 걸어가다.

Insisto iter(viam).
인시스토 이테르(비암).

타인의 삶은
우리에게 스승이 된다.

Vita aliena est nobis magistra.
비타 알리에나 에스트 노비스 마지스트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그냥 하는 힘을 믿고 막연히 제 앞에 있는 길을 걸어갔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낯선 길을 걸어야 할 때 밀려오는 감정은 막연함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어디까지만 가면 목적지가 있다고 알려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제겐 스승이 필요했습니다. 그 길에서 부모님이 스승이 되어주셨더라면 좋았겠지만, 모두가 그런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부모가 내게 스승이 되어주지 못하더라도 일단 타인의 삶이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스승이 될 만한 이들은 역시 내 가까이엔 없었습니다. 너무 유명하신 선생님들은 감히 다가갈 수도, 제 형편으로는 그분들의 강의를 들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책을 통해 타인의 삶을 만나고, 그 책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에게도 기꺼이 스승이 되어줍니다. 모든 책이 선생이 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의 선생이 되어줄 인생책은 세상 어딘가에 꼭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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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 인물/소수림왕

소수림왕(?~384년)은 고구려의 제17대 왕으로, 4세기 고구려의 중앙 집권화를 이됐다. 고구려는 5세기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수백 년간 만주 집안지역의 국내성을 수도로 뒀다. 위치상 중국은 물론 만주 일대의 수많은 부족, 한반도의 여러 왕국까지 상대해야 하는 처지였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고자 적극적으로 주변 지역을 공략해 나간다.

고국원왕의 뒤를 이은 왕이 소수림왕이다. 소수림왕은 정복 사업보다 체제 개혁에 집중한다. 그는 율령을 반포했고 불교를 공인했으며 태학을 설립했다. 중국에서 발전한 법체계인 율령을 도입하여 각종 제도와 국가 운영 방식을 개혁했으며, 불교를 통해 기존의 신화적이고 부족적인 정신세계를 해체하고자 했다. 또 교육 기관 대학을 통해 관료를 양성하고자 했다. 즉,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 이후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장수왕이 등장하면서 5세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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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 사건/일본군 위안부

일제 강점기 성노예 제도로, 1937년 중일 전쟁부터 1945년의 패전까지 일본 점령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실시됐다. 일제는 러시아혁명 당시 시베리아에 출병하고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는 등 지속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확대했다. 따라서 해외에 파견한 군대를 통제하거나 점령 지역을 관리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일본군은 현지 여성을 겁탈하거나 성매매업 여성들과 어울리면서 성병에 걸리는 등 각종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와 군부는 군의 사기를 유지하고 성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과 대만 등 식민지에서 성병에 걸리지 않은 일반 여성들을 동원하고자 한다. 군이 직접 관리하는 위안소와 위안소에서 일하는 여성인 위안부를 조직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사회가 민주화되자 여성 문제, 역사 문제 등 다양한 이슈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여성학자들과 정대협 등 여성단체의 도움을 받아 공개적으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렸다. 일본은 1993년 고노담화를 통해 이 사실을 시인했고, 1995년 무라야마 총리는 일본 식민 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공식 사과하는 등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후 일본이 우경화되면서 현재까지 각종 갈등과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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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로 살고 싶다면 젊은 시절에 철저하게 돈을 움켜쥐어라.

젊은 시절에 돈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개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다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당신이 특별한 재능도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당신 호주머니에 돈이 쌓이는 법칙은 단 하나라는 사실이다. "먼저 몸값을 올려 나가면서 최대한 절약하고 최대한 먼저 모아라. 그러면 먼저 쌓일 것이다." 그 쌓인 돈이 부자가 될 종잣돈이 된다. 젊었을 때 놀 것 다 찾아다니고 즐길 것 다 찾아다니며 카드를 긋고, 쉴 것 다 찾아 먹는 사람들이여. 당신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았던 덕분에 부자가 된 사람들이, 당신들과 별다를 바 없이 젊음을 보냈던 사람들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라. 명심해라.

행복은 우리가 소유한 것들과 비례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반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말한다면, 행복은 우리가 소유한 것들이 유형의 것이건 무형의 것이건 상관없이 그 양과 질이 증가하는 과정이 계속될 때 얻어진다.

꿈 깨라. 꿈을 갖고 야망만 품으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가? 꿈과 야망이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누구나 성공의 꿈을 품고 살아가는데 왜 성공한 사람은 극소수라는 말인가.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은 야무지고 원대하게 품지만 그 꿈을 실현시키는 아주 작은 단계들은 하찮게 여기고 무시하기 때문이다. 마치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고자 하는 사람이 망원경으로 부산만 바라보면서 집 밖으로 나서는 첫걸음들은 무의미하게 여기고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나 야망은 버려라. 10년 후의 목표? 5년 후의 목표도 세우지 말라. 그 기간 동안 당신은 그만 지쳐 버리고 만다. 그저 1년 정도 앞의 목표만을 세우되 1000만 원을 모으는 것 같은 소박하지만 구체적으로 실행 가능한 목표를 세워라. 그러한 목표가 정하여지면 당신은 이제 당신의 수입에서 얼마를 떼어 내 얼마 동안이나 저축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계산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행동 지침이 당신 자신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세워지게 된다는 말이다. 이제 남은 일은 그 행동 지침에 따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조만간 목돈을 쥐게 될 것이며, 바로 그 목돈이 종잣돈이 되어 부자의 길로 접어드는 첫 계단에 올라갈 수 있게 된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 소돔과 고모라를 빠져나오다가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처럼 소금 덩어리로 변하고 만다. 계속 전진만 하라. 앞을 바라보되 절대 저 높은 계단 꼭대기 위의 찬란한 태양빛을 성급히 찾지 말라. 오르페우스Orfeus처럼 에우리뒤케Euridice를 또 한 번 잃어버리게 될 뿐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오늘 지금 밟아야 할 계단이 어디 있는지 찾는 것뿐이다.

미래의 야망은 던져 버려라. 꿈과 야망은 성공의 원동력이 아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1인치 전진을 위하여 오늘 외롭게 최선을 다하는 힘이 바로 성공의 원동력이다. 세계 최고의 테니스 선수 피터 샘프라스 역시 성공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답했다. "나는 결코 한 시합에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한 세트나 한 게임을 이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한 점만을 따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솔직히 샘프라스가 누군지도 알지 못하지만 나 역시 그 사람처럼 하여 왔다. 당신도 그렇게 하라.

나는 인생을 Life와 Living으로 구분한다. 번역을 한다면 삶과 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다. Living은 경제적 대가를 얻고자 시간을 투여하는 대상, 혹은 그런 목적으로 일하는 시간 자체를 그 영역으로 갖는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그 일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건 없건, 그 대가가 많건 적건 간에 무료로 하는 것이 아니고 생계를 의존하고 있다면 모두 Living에 속한다.
Life는 돈을 벌고자 하는 행위와는 관계없이 시간을 사용하는 영역이며 우정, 사랑, 희생, 보람, 가족, 자연 등이 그 중요 가치를 이루지만 게임이나 영화, 음악 등과 같이 자신이 재미있어하거나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것도 이 영역에 속할 수 있다. 다른 직업을 택하면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데도 적은 보수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은 Living 속에 Life가 깊이 스며든 경우이다. 그러나 입으로는 봉사나 보람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대가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Life를 위장한 위선적인 Living에 불과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예술가들처럼 Life와 Living의 영역이 상당 부분 중복되는 경우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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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로 들어가지 못하던 때, 그 문장들은 제 마음을 어루만져주었고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북극성이 되어주었습니다. 어둑한 공부방에서 그 문장들은 실제로 별처럼 빛나며 피로에 지쳐 흐릿해지는 제 눈에 안광을 되찾아주었습니다. 낡은 스탠드 대신 인생의 등대가 되어준 것도

요즘 젊은이들이 몸에 새기는 타투 문구 가운데 라틴어 문장이 자주 보여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아모르 파티Amor fati, 카르페 디엠Carpe diem,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처럼 널리 알려진 말 외에도 우리가 새겨야 할 라틴어 문장들은 별처럼 많습니다. 이 책에서 평생 암호처럼, 주문처럼 읊조릴 만한 한 문장, 당신의 마음과 인생에 영영 지워지지 않도록 타투처럼 새겨둘 만한 문장을 만난다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고난을 넘어 별을 향해
Ad astra per aspera
아드 아스트라 페르 아스페라

우주뿐만 아니라 인생의 별에 이르는 길에도 언제나 고난이 뒤따릅니다. 닥쳐오는 고난들을 직면하고 견뎌내는 이들은 결국 자신의 별에 가닿을 것입니다. 역경에 짓눌려 별에 이르는 길을 잊지 않기만 한다면 말이지요.

나는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먹고 싶다.

Volo esse ut vivam,
볼로 에쎄 우트 비밤,
non vivere ut edam.
논 비베레 우트 에담.

하나의 명문, 한 폭의 명화, 한 소절의 아름다운 음악이 때론 오늘이 없는 인간을 일으켜 내일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나는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먹고 싶다"는 이 짧은 문장이 제겐 그랬습니다. 미래도 안 보이고, 그저 열등한 저 자신에 대한 답답함으로 가득했던 제게 하나의 문장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너, 어떻게 살래?’ 하고요. 어떻게 살지에 대한 해답은 없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물음은 계속해서 제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속으로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위로해줄 이들을 바랐건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Sustinui qui simul contristaretur, et non fuit.
수스티누이 퀴 시물 콘트리스타레투르, 에트 논 푸이트.
(시편69,20)

시편의 이 고백처럼 위로해줄 이도 없고, 제게 내일이 존재할지도 알 수 없었지만 저는 ‘될 때까지’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살기 위한 것입니다. 먹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그 밖의 모든 활동도 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짧은 명문이 내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못할지라도, 내일이 없을 것만 같은 내게 내일을 생각하게 해줄 수는 있습니다. 그 힘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또 하루를 더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의지입니다

너와 함께 살 수도
너 없이 살 수도 없네.

Nec tecum possum vivere
네크 테쿰 포쑴 비베레
nec sine te.
네크 시네 테.

성경은 한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어느 특정인의 탓으로 몰아감으로써, 불행의 책임을 계속해서 남에게 뒤집어씌우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 대속 심리를 보여줍니다. 그럼으로써 나는 죄 없는 선량한 사람이라 믿으며 현재 벌어진 눈앞의 문제들은 나와 무관한 양 외면하려 하지요. 이는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에서도 쉽게 드러나는 인간의 허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꼭 역사상 어느 한 시대, 한 사회만의 문제였을까요?
가정에서도 유난히 튀는 가족 구성원 한 명을 콕 집어 문제아 취급할 때가 많고, 직장에서도 그 대상이 상사든 말단사원이든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이유를 어느 한 사람의 문제로 몰아가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만 없어지면 정말 내가 편하고 행복해지나요? 지금 제 곁에는 그때 불편했던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나는 그 사람이 없어져서 행복한 걸까요? 그대가 지금 죽도록 미워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혹시 나는 인생에서 사라지면 짜릿할 듯한 누군가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며 내 불행의 핑계를 전가하는 것은 아닐까요?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하는
사람은 내키지 않는 소리를
듣게 되리라.

Qui quae vult dicit,
퀴 퀘 불트 디치트,
quae non vult audiet.
퀘 논 불트 아우디에트.

이제 공부든 어떤 분야든 경쟁상대를 가까이에 있는 학급 동료나 친구, 주변 사람이 아니라 책 속의 인물이나 세계적인 인물로 설정하고 자기 자신을 담금질해가면 어떨까요? 주변 인물을 경쟁상대로 여기면 친구를 사귀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없으면 사람은 결코 행복해지기 힘듭니다. 하물며 주변 인물을 모두 경쟁상대로 돌리면 친구는 고사하고 본인조차 숨쉬기 힘들어질 겁니다. 내가 숨쉬고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주변인을 경쟁상대로 몰아가는 풍토와 태도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합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면서
사는 법을 배운 사람은
행복하다.

Felix est,
펠릭스 에스트,
qui didicit contentus vivere parvo.
퀴 디디치트 콘텐투스 비베레 파르보.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과 기쁨,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시간?이런 시간은 짧지만, 이 짧은 시간의 총량이 행복의 얼굴입니다.

약한 사람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만 강하다.

Infirmi tantum valent iis
인피르미 탄툼 발렌트 이이스
qui sunt proximis.
퀴 순트 프록시미스.

절박한 처지에 놓이다보면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것을 해결책으로 믿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또 너무 절박해지다보면 현재 상황을 결코 호전시키거나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에 붙들리기도 하지요. 두려움은 늘 더 나쁜 믿음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가난한 처지와 절박한 상황에 내몰리면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가장 힘들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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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3-12-12 1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밑줄쳐주신 글들 중에 굉장히 공감되는 문장들이 많네요 섣불리 한두개 꼽기 힘들정도로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지금이야 2023-12-12 20:09   좋아요 1 | URL
별 말씀을요~ 부끄러워요.. 오히려 제가 즐라탄님 보고 반성하는걸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3-12-12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뭐라고 반성까지..ㅠ 제가 더 부끄럽네요.. 아무쪼록 하루 마무리 잘하시고 남은 12월도 즐거운 독서하시길 바랍니다!

지금이야 2023-12-13 22:12   좋아요 1 | URL
제가 코바늘로 조금 꼼지락꼼지락하느라 지난달부터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어서 찔렸나봐요^^;;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럼 편안한 밤 되셔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3-12-13 2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홍합님도 하루 마무리 잘하시고 평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