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 가족 찾기에 평생을 바쳐 온 그는 은퇴 후 백석대로부터 교수직을 제안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선뜻 쉽게 수락하지 못했다. 다른 가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느라 정작 자신의 가정은 잘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 그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게 너무 미안했고, 그런 자신이 과연 학생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나 싶었다.

아이들이 필요로 했던 건 사회적으로 훌륭한 일을 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훌륭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곁에 있어 주는 아버지란 사실을 너무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어느 날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말했다.
"학생들도 내 자식처럼 가르쳐야 하는데 그 전에 너희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고 싶다."

아이들이 너무 늦었다며 자신을 원망하고 거부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새 훌쩍 커 버린 아이들은 무릎까지 꿇어 가며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아버지를 보며 눈물을 삼켰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만 챙기느라 자신들을 외롭게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동안 아버지도 참 힘들고 외로웠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뒤늦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한 아버지에게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고, 용서한다는 말을 해 주었다. 이 교수는 아이들이 자신의 용서를 받아 주는 것이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가슴을 쳤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못 할 말이 있을까 싶지만 우리는 가깝다는 이유로 오히려 ‘미안하다’는 말을 미루게 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 주겠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고맙다면 고맙다고 말해야 하고, 미안하다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용기를 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이 언제든 증오와 허세와 자만심과 특권 의식에 빠져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를 수 있음을, 그것이 우리 모두를 멸망의 길로 이끌 수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곧 사라지겠지만 우리의 후손들은 지구 위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지구를 망칠 권리는 현재 살아 있는 80억 명의 사람 중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말한다. 일단 일이 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그런데 하마구치 감독은 나에게 말하는 듯했다. 아무리 바빠도 사람이 먼저라고 생각한다면 우선 사람을 챙기라고. 바쁘다고 말하는 건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나에게 묻는다. 정말 일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생각하느냐고. 사람을 챙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말 한마디로도 충분히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데 나는 왜 그러지 못했는가. 하마구치 감독과 문재인 전 대통령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노고를 챙기는 데 거창한 이벤트나 특별한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라고. 그들의 수고와 노력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우리는 가족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요즘은 제삿상에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을 올리는 경우도 많다는데, 우리는 가족이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알고 있을까. 자녀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냐’, ‘오늘 숙제는 다 했냐’는 말 대신 요즘 좋아하는 건 뭐냐고 물어본 적은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르면 더 늦기 전에 물어봐야 한다. 어떤 노래를 가장 좋아하느냐고, 어떤 음식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으냐고, 어떤 죽음을 바라느냐고….

배우 윤여정, 그녀는 자신의 과거사 때문에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지만 그에 대해 억울하다고 소리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자신을 불쌍한 사람 취급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똑같이 대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낯선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실수를 저지를까 봐 조심하며 살았다.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어. 내 인생만 아쉬운 것 같고 내 인생만 아픈 것 같지만 다 아프고 다 아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세상이 나를 배척하고, 부당하게 거부하는 듯한 날이 찾아온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뾰족해져서 누가 나를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그에게 다 쏟아붓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라고 오늘이 쉬웠을까. 윤여정 배우의 말처럼 누구도 타인을 함부로 대할 권리는 없다. 그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어릴 적 나는 착하게 살면 복을 받을 거라고, 열심히 살면 좋은 일만 생길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착하게, 열심히 살아야지 했다. 그런데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불행이 찾아올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내 세상이 원래 불공평하고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때때로 화가 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특히나 ‘다큐 3일’과 ‘유 퀴즈’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들이 불행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끝끝내 버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눈물겹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모양 빠지고 추저분해 보여도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라는 할머니의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던 날 그 말은 내게 깊은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인생의 겨울을 지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 말을 전해 주고 싶다.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것이라고. 그리고 한번 믿어 보면 어떨까. 지금은 너무 춥고 힘들지만 겨울은 지나갈 테고, 그러면 따스한 봄이 찾아올 것이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분명히 봄은 온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실수를 ‘부끄러운 것’, ‘벌받아야 할 것’으로 배워 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수와 실패를 하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사회적으로 망신을 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하게 될 텐데, 그럴 바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세계 기술 혁신을 이끄는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는 오히려 실패를 권장한다. 그들은 "대박을 터트리기까지 평균 4회 가까이 실패한다"는 통계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실리콘밸리에서는 스타트업을 만들었다가 실패한 경험을 대기업에 취업한 경험 못지않게 좋은 경력으로 인정한다. 실수와 실패가 부끄럽거나 숨겨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취업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엔비디아 CEO 젠슨 황 역시 성공하려면 실패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실패를 견디는 능력부터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가 쉽게 바뀔 리 없다. 실패를 격려하는 문화 또한 단번에 생기기 어렵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어려울 때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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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겪고 있는 시행착오들이 불필요한 과정이 아니라 어쩌면 훗날 멋진 곳으로 가기 위한 아주 중요한 단계일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경로는 종종 돌아가고, 흔들리며, 예상과 다르게 펼쳐지지만 그 모든 경험은 결국 고스란히 쌓여서 의미를 갖게 된다고도 했다.

내가 초라하다고 느낄수록 나를 더욱 가혹하게 채찍질해 왔던 것이다. 애쓰고 있는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격려하고 응원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인데 말이다.
나는 그의 말대로 나한테 친절해지고 싶어졌다. 내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친절하게 내미는 손, 나는 허준이 교수를 통해 그 손을 어떻게 내밀어야 할지를 배웠다. 내가 나에게 하는 부정적이고 가혹한 말들, 그 말들을 먼저 멈추어야 한다.

지금 삶은 보너스 게임이라고, 오늘을 살아 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사는 거라며 일찌감치 그 누구도 믿지 않겠다 마음먹었다면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과 어울려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그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게 아닐까. 어려움에 처한 타인을 보면 마음이 쓰이고, 자꾸만 계산적으로 변해 가는 내가 싫고, 상처받더라도 다시 사람을 믿어 보고 싶은 게 아닐까.

세상에 손해 보며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이 커지면 매사에 계산적이고 따지는 게 많아지며 그럴수록 주변에 사람이 없게 된다. 즉,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이 나를 지켜 주는 게 아니라 나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살다 보면 나는 별것 아닌 작은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에겐 오래도록 기억되는 일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큰 따뜻함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당장엔 손해 같아 보여도 그것이 훗날 어떻게 돌아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반대로 당장엔 이익을 보는 것 같은데 그것이 독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 그래서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린 전우익 선생이 그렇게 말한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혼자만 잘 사는 삶보다 내 곁의 사람들과 함께 잘 살아가길 바란다. 별것 아닌 것도 함께여서 즐겁고, 작은 것도 나누며 그렇게 나이 들어 가길 바란다.

생각해 보면 살아 있는 한 심장은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떤 순간에도 무서울 만큼 자신의 본분을 다한다.

인간이 살겠다고 굳게 마음먹으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닐까. 그래서 나는 뭐든 지레 겁먹고 포기하기보다 일단 포기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기로 한다. 내가 어느 만큼 버틸 수 있을지는 결국 부딪쳐 봐야 알 일이다. 나는 그렇게 지금도 강하게 뛰고 있는 심장을 굳게 믿어 보기로 한다.

"삶의 지배권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자신의 의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김정자 할머니의 삶을 지켜보면서 ‘해야 할 일들’ 대신 ‘하고 싶은 일’을 늘려 나가야 할 명확한 이유를 발견했다. 그 일이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누가 뭐라든 내가 원하고 힘들어도 그 일을 할 때 즐겁고 살맛이 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내 마음에 귀 기울이며 나답게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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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쌓여 한 달, 일 년이 되고 미래가 됩니다. 여기서 긍정적인 사실은 실패도 서서히 쌓이지만 성공도 서서히 쌓인다는 것입니다.

도덕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거창한 철학이 등장할 것 같지만 헤밍웨이가 정의하는 도덕은 의외로 심플합니다. 내 기분을 자제하지 못하고 스스로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면 결국 자신은 더욱 더 불쾌해진다는 것이 헤밍웨이가 말하는 도덕입니다. 정말 간결하고 명료하죠.
우리 역시 감정을 주체 못하고 내뱉은 말 때문에 후회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를 마주하지 못하고 지금 이 상황에서 도망쳐 일을 그르친 적은 얼마나 많은가요? 하지만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말하는 도덕, 즉 기분대로 행동하고 나서 후회했는지, 불쾌했는지 생각해 보면 이런 후회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헤밍웨이가 제시한 이 가이드라인처럼,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면서 훗날 스스로 불쾌해지지 않는 도덕적인 선에서 행동을 해 나가면 인생의 작은 해답이 되지 않을까요? 나에게 변명하지 말고, 나에게서 도망치지 말고 말이지요.

매일 같은 것이 반복되는 우리의 하루도 어떤 면에서는 시시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진실한 하루들이 모여 인생의 총합을 이루고 멋진 삶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헤밍웨이가 무명시절부터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이후까지도 스스로 다그치며 외웠던 만트라는 ‘하나의 진실된 문장(one true sentence)’이었습니다. 문학계에서는 ‘헤밍웨이=하나의 진실된 문장’이라고 정의할 정도로 그를 대변하는 표현입니다.
단어, 문장, 단락, 소설 전체가 진실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는 경험하지 않은 것은 글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모든 작품 하나하나가 그의 삶 자체였습니다. 다른 어느 작가보다도 헤밍웨이의 작품은 그의 인생과 주변 사람을 알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실한 문장을 탄생시키기 위해 그는 누구보다 자신에게 가혹했습니다. 비평가들이 칼날을 들이대기 전에 진실되지 못한 자신의 글을 스스로 도려내야 했습니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해야 했기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상처와 충격을 이겨 내는 능력이었습니다.

인생에 어느 압박도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짓누르는 부담을 이겨 내는 일입니다. 사람은 압박에 취약합니다. 짓눌리다가 엉뚱한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심적인 부담을 못 이기고 최악의 수를 두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럴 때 대개 나‘만’ 인생이 안 풀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연 진짜로 그런가요?

인간은 누구나 고독을 품고 있습니다. 인류가 이 지구상에 온 이후로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사실일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입니다. 세상이 눈부시게 변하고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도, 모든 고독과 외로움을 문명의 이기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감정은 각자의 사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말로 콕 집어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대신 드러내 말해 주고 있는 것이 헤밍웨이의 작품입니다. 이런 이유로 헤밍웨이의 작품들이 영원한 고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고독의 감정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몰입의 힘은 대단합니다. 몰입해 달리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 몰입하고 있는 분야에서 성과가 나지 않더라도, 내가 열고자 하는 문이 끝내 열리지 않더라도 적어도 다른 문은 열리거든요. 또한 몰입하는 순간에는 결핍을 따질 겨를도 없습니다. 톨스토이가 말했듯 자신이 생각할 때 너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여겨질 때는 쓸데없는 일에 마을 쓸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꿈과 목표 이 두 녀석들은 질투가 많습니다. 자신들에게 완전히 헌신하지 않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지요. 다른 데 신경 쓰는 것을 못 참고 떠나 버립니다. 때문에 재능만으로는 한 분야에서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일관성과 노력이라는 진리에 의해서 인정받는 것이지요. 피츠제럴드의 몰락은 아무리 훌륭한 재능도 목표와 노력 없이는 빛을 잃는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누구든 다리 하나로 설 수 없는 것처럼, 재능도 홀로 설 수 없습니다. 노력이라는 다른 다리가 꼭 필요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틈틈이 뇌가 한숨 돌릴 틈을 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지금 처한 일상이 아닌 다른 이의 삶을 부러워하고 동경합니다. 현재란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입니다. 항상 불만족스럽고, 내 현실이 아닌 것은 다 멋진 영화처럼 보이지요. 동경하는 것을 손에 넣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가진 가치보다 더 많은 지출을 하게 되면 빈곤과 파산에 이릅니다. 자신이 가진 가치가 얼마인지 모르고 무언가를 계속 얻으려 하다 보면 정신적인 빈곤, 인간관계의 후회, 지식의 파산에 이를 수 있겠죠. 후회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스스로 반성할게 없다는 뜻인데 좋은 의미가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반드시 어떤 대가를 치르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한 준비로 무언가를 많이, 그리고 미리 채워 두어야 합니다. 세상은 다양한 재화를 사고파는 거대한 쇼핑몰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삶이 지겹고 지긋지긋할 때 현실에서 달아나고 싶은 기분은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도망친 그곳은 얼마나 천국 같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놀라지 마세요. "달아난 곳에 천국은 없습니다." 제가 장담하지요. 도망친 그곳에서도 역시 새로운 걱정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금세 또 다른 낯선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질 겁니다.

모든 인생의 이치는 ‘평균으로의 회귀’ 법칙을 따릅니다. 세상 모든 일이 평균에 맞춰지기 위하여 좋은 일은 나쁜 일을 끌어오고, 나쁜 일은 좋은 일을 끌어온다는 법칙입니다. 어쩌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이 그냥 그저 그런 하루를 걱정 없이 보내는 것이 최상일지도 모릅니다.

요즘 ‘메타인지(한 차원 높은 인지 과정으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라는 단어가 유행합니다. 스스로를 마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를 직시한다는 것은 위치, 한계, 본질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내 안의 나는 만족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심각한 나르시시스트가 아닌 이상 용서가 안 되는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의 화해, 소통, 반성, 용서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메타인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비로소 삶이 다르게 보입니다.

스스로를 진실하게 마주하고 넘치는 생각과 자기연민을 버리는 것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선 자신에게 규율을 정해 보세요. 과도하게 생각하거나 자기를 연민할 틈이 생기지 않을 규칙을 만드는 겁니다. 헤밍웨이의 규칙은 하루에 쓰는 단어 수를 정해 놓고 매일 쓰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봅시다. 자신을 하루하루 단련하다 보면 얇은 철사를 꼬아 두꺼운 철근이 되듯이 강인한 내면으로 자라날 겁니다.

마음을 따르는 삶을 살며, 아름다운 이야기가 내면에 남은 사람은 명랑하고 행복한 마음 근육이 짱짱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것은 일하는 데 있어서 남들과 차별화되는 영감을 주는 것은 물론, 살아가는 내내 자부심이 됩니다. 단편적인 지식이 주지 못하는 입체적인 행복은 이런 곳에서 나옵니다.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자연히 한도를 넘게 됩니다. 실패자가 아닌데도 생각이 부풀려집니다. 기분이 좋다가도 생각할수록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기도 하죠.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건 생각을 방치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핵심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그 핵심 이유가 나도 모르게 떠오를 때는 생각 버튼을 바꿔 버려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모든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에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하루아침에’라는 표현 역시 이전에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날 그 일은 사실 우리의 하루 속에서 천천히, 서서히, 조금씩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성격이나 인생을 사는 태도 등으로 이미 모든 조건이 마련된 상태에서 하나의 불씨로 인해 큰 불이 일어나자 마치 갑자기 불이 난 것처럼 보일 뿐인 겁니다.
우리는 변화의 신호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변화를 외면하면 현실에 머물게 되고, 현실에 머물면 적응에 실패하고 인생에 실패할 테니까요.

지금 차갑고 세찬 비를 맞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벌판에 혼자 서서 비를 맞으며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봄이 영영 오지 않을 듯 겨울이 기승을 부려도 결국 봄은 옵니다. 거센 폭풍 같은 압박 속에서 헤밍웨이의 글이 작은 우산이 되어 줄 거라 믿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봄이 곧 찾아오길 바랍니다.

일단 잘하든 못하든, 완벽하든 아니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시작한 후에는 완벽을 위해 다그치기보다는 자신만의 속도로 여유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거든요.

헤밍웨이가 인용한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가 더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헤밍웨이의 세대는 갔지만 지금 우리 세대 또한 또 다른 전쟁터에서 살아가고 있고, 이런 우리의 모습은 변하지 않으며, 영원히 세상은 그대로라는 사실이 말이지요.
태양은 또 다시 떠오릅니다. 그러니 불행할 필요 없지요. 21세기의 길 잃은 세대도 제이크처럼 자신의 삶에 책임을 느끼고, 인생이 달아나지 않도록 따듯한 시각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사실은 지금 바로 여기가 괜찮은 곳입니다. 지옥 같아 보여도 본인의 현재에서 승부를 봐야 합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나를 만들어 봐야죠. 다른 곳으로 도망쳐도 똑같을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청구서는 대부분 사람이 잘 모르고 지나가기도 하고 당장 깨닫지는 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무조건 깨닫게 되는 인생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변하지 않고 세상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죠. 꼭 연애가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호의 역시 대가를 치루지 않고 계속 받기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청구서가 날아오기 마련입니다.

일을 잘 끝내려면 오히려 숨 쉴 틈을 주어야 합니다. 오늘 떠오른 영감을 다 짜내어 써 버리며 내일의 영감이 말라비틀어지도록 하면 안 됩니다. 체력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오늘 50퍼센트 또는 70퍼센트만 쓰고 완전히 방전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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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5-12-03 11: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밑줄쳐주신 문장들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내용들인 것 같아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 읽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꼬꼬닭 2025-12-04 11:47   좋아요 1 | URL
아이고 꾸준히 하지 못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에요~
날씨가 너무 추워졌어요, 항상 건강 잘 챙기시고 얼마남지 않은 올해도 무탈하게 잘 보내시길 바랄게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12-04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날씨가 하루이틀 사이에 갑자기 추워졌네요 꼬꼬닭님도 올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밤새 울며 지내든 고요하게 즐기면서 지내든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면 무엇이 좋은 방법이겠습니까? 당연히 침착하게 즐기며 지내는 방법일 겁니다. 인생이 뜻대로 흘러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데 매순간 웅크리고 불평하며 지내는 것보다는 춤을 추며 즐겁게 지내는 것이 인생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 아닐까요?
훗날 생을 돌아볼 때 ‘괴로운 일도 많았지만 참 유쾌하게 잘 지냈어’라고 회상하는 것이 ‘괴로운 일이 많아서 정말 고통스러운 인생을 보냈어’라고 회상하는 것보다는 백배 낫겠지요. 똑같은 일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삶의 질이 크게 달라집니다.

우리가 해야 할 생각은 ‘이 상황 열받아’가 아니라 ‘내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입니다. 폭풍우에 잠겨 있지 말고 해결 방법을 찾아 직접 행동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나는 내 감정의 주인이고 주체입니다. 내 반응은 내가 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전부 유한합니다.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러니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찾아보세요. 우리 모두 각자 가치관에 따라서 매일매일 아주 풍요롭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감정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감정은 존재하는 이유이자 핵심이기도 합니다. 감정에 뒤따른 행동은 별개이지만요. 감정을 인정해 주고 옳다고 다독여 보세요. 반대로 생각해서 누군가의 인생을 돕는다는 것은 의외로 쉬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저 그의 감정에 포개어서 나도 그 감정을 긍정해 주면 되는 거니까요. 당신의 그 감정은 옳다고 공감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존재가 따듯한 집중을 받고 감정을 이해 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가집니다. 이는 스스로도 해 줄 수 있고, 또 상대방에게 해 주면서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섬일 때도 있고 육지일 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책을 읽는 것이 공감대를 확장시키고, 단단한 내면을 형성하며, 타인을 향한 배려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지금 당장 책을 읽는다고 신부님이 말한 ‘베푸는 사랑’과 ‘주는 사랑’이 단번에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읽은 책 한 권 한 권이 모여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드러내는 것만큼 훌륭한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방법이지요. 트라우마는 누군가에게 쉽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파괴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상처를 안 보이는 곳에 슬쩍 치워 두기 때문에 그곳에서 더더욱 손쉽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손쉽게 얘기할 수 있고 아무렇지도 않게 몇 시간씩 수다할 수 있는 주제라면 아마도 큰 상처는 아닐 겁니다. 죽어도 말 못하고 꽁꽁 숨기는 것,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숨죽여 우는 것이 가장 큰 상처일 가능성이 높죠. 숨긴 트라우마는 나를 뒤흔들며 내면에서 강력한 파괴의 힘을 휘두르지만, 마음 밖으로 끄집어내는 순간 쪼그라들면서 힘을 잃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단 한순간도 멈춰 있거나 같은 것이 없습니다. 계속 변화하고 또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이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매일매일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덧없기 때문에 벚꽃과 반딧불, 그리고 단풍을 최선을 다해 즐기는 것입니다. 벚꽃, 반딧불, 단풍 모두 아주 짧은 시간에 절묘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금세 그 아름다움을 잃는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받아들이고, 닥친 현재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재건에 힘쓰는 것이 맞다고 하루키는 말합니다. 건물뿐만 아니라 도덕까지, 그 모든 것을요.

세상에 납득되는 일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내가 상식적일수록 현실은 점점 더 불행하기만 합니다. 비상식적인 세상을 끌어안느라 버겁고 허덕이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갑자기 참아온 눈물이 봇물처럼 터질 듯한 순간이 찾아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받아들이는 연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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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에만 통하는 상징을 집어넣은 책은 그 시대에는 베스트셀러가 될지 모르지만 고전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인류는 각자 개성을 지니고 있고, 각자의 경험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이와 똑같은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한날한시에 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쌍둥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사람은 다양한 상황에 노출되며 자신만의 가치관을 만들고 인생을 완성해 갑니다. 예술 작품은 독자의 경험을 거울처럼 반영하며 다양하게 읽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시대를 건너뛰어 공감할 여지가 있는 것이 바로 고전 소설의 맛입니다.

우리는 눈앞의 목표와 이루어 낸 것에 얼마나 집착을 하나요? 그것을 잃었을 때 감정의 동요 없이 다음 날을 맞이할 수 있는 마음가짐은요? 매일의 전쟁 같은 일상에서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모든 것을 내던져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것은 대단합니다. 하지만 헤밍웨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릎이 꺾이거나, 억울한 실패를 겪었더라도 위엄과 존엄을 잃지 않고 우아함을 지키는 능력, 그것이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는 점입니다.

나만의 큰 물고기가 보이지 않을 때 기억할 것은, 언젠가 분명히 어느 시점에 큰 물고기가 나타날 것이라는 자기 확신입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나를 믿고, 그 믿음을 다시 또 한번 믿는 것입니다.
강한 자기 확신 끝에 물고기가 나타났다면 그때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합니다. 신은 가장 미워하는 사람에게 작은 성공을 먼저 준다고 하죠. 작은 성공에 취해 거만하게 모든 것을 그르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항상 언제나 겸손하게 다가가는 태도를 잃지 마세요. 그리고 노력해 온 보상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전부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태어난 조건을 선택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모든 상황을 마주하고 해결해 나가야 하죠. 내가 갖지 않은 것을 불평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과거로 돌아가 태어난 상황을 바꿀 수 없고, 내 부모님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불평해도 상황은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이 비겁한 방식으로 자신의 승리를 쟁취하려 합니다. 디지털을 이용한 수법은 갈수록 악랄해지고, 이득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대이기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속 자연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하나하나의 장면은 더욱 값지게 여겨집니다.
헤밍웨이는 아마도 공정하고 선량하게 자신만의 싸움을 해 나가는 이들을 위해 이 소설을 썼을 것입니다. 《노인과 바다》를 읽는 시간만큼은 스스로가 이미 지닌 의지와 투지 등을 상기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시선을 장기적으로 가져가면 미래는 희뿌옇게 보일 뿐이고, 때로는 그 사실에 압도되어 버립니다. 언제 취직이 될지, 언제 대출금을 다 갚을지 생각하면 한숨만 나옵니다. 이럴 때는 그냥 눈앞의 순간만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운이 자기 역할을 하도록 내버려 두세요. "내가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이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달려가는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위대한 소설의 첫 문장은 과연 어떻게 시작할까요? 소설에서 첫 문장은 그 소설 전체의 모든 분위기를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합니다. 때문에 문학계에서는 소설 속 가장 인상적인 첫 문장을 뽑아 순위를 매기기도 합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첫 문장 역시 첫 문장계의 클래식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만큼 상징적입니다.

사람을 패배시키는 것은 실패하거나 모든 것을 잃은 그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처하는 우리의 반응입니다. 스스로 실패했다고 인정하고 반응하면 실패한 것입니다. 반면에 노인처럼 모든 걸 파멸당했을지라도 ‘지지 않았다, 실패하지 않았다’라고 생각하고 편히 잠을 잘 수 있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느 한 구석이 부서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깨진 틈이 있기에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죠. 무사하게 하루하루 건너가는 날들을 꿈꾸지만, 살아 있는 한 문제는 생기게 마련이고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나약한 부분을 인지해야 스스로를 보듬고, 응원하며, 빛을 발견하고,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겁니다. "난 왜 나약하지?"라는 의문에만 빠질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몇 살이니? 너의 첫 여행이니?"
"푹 쉬어 작은 새야. 그리고 돌아가서 사람, 새, 물고기가 그렇듯이 꿋꿋이 도전하며 살거라."
"금방 가버렸네. 하지만 해안에 도착하기까지 너의 갈 길은 더 험하단다."

새는 주변이 오직 바다뿐인 노인의 황량한 우주에서 친구가 되어 주는 듯합니다.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이 처음 바다에 나왔냐며 나이와 안부를 묻는 대사부터, 인생 선배로서 새에게 연민을 지니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귀엽고 따듯하게 느껴집니다. 노인은 배려 깊게도 작은 새에게 인생이 험하다는 것을 알려주면서도 꿋꿋이 도전하며 살라는 조언을 잊지 않습니다. 마치 헤밍웨이가 직접 다음 세대에게 하는 조언 같습니다.
헤밍웨이가 한 단어 한 단어 세심하게 꾹꾹 눌러 담은 이런 대사 속에서 고전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전은 몇 백 년 또는 몇 천 년의 시간을 견디고 지금껏 인정받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한 번 읽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나이 들어가며 청춘에도 읽고 노년에도 읽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로 그때도 공감이 되고 지금도 공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헤밍웨이의 글은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관과 지금도 변함없이 통용되는 감정들, 그리고 도덕성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모든 작품을 통틀어, 노력해서 살아 나가는 하루하루를 중요하게 언급합니다. 그의 소설 속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딱 알맞은 인생 조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가장 눈부시고 중요한 부분은 마지막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항구로 향하며, 노인은 문득 침대를 떠올립니다. 그저 침대에 편하게 눕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널 때려눕힌 건 누구지? ‘아무것도 아냐.’ 난 너무 멀리 갔을 뿐이야."

모든 독자의 예상을 뒤엎지요. 노인의 회복탄력성이 빛나는 순간입니다.

헤밍웨이는 상징을 미리 정해 두고 쓰인 좋은 책은 없다고 단호히 말하며, 자신의 소설이 건포도 빵이 아닌 플레인 빵이 되길 원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건포도 빵에서 건포도는 무엇보다 명확하게 눈에 보이죠. 하지만 플레인 빵이야말로 겉으로 보기엔 무색무취라도 각자가 즐기기 나름에 따라 수많은 맛으로 변신할 수 있는 겁니다.

인생에 좋은 일이 생길 때, 또 안 좋은 일이 생길 때 산티아고 노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떠올렸는지 한번 기억해 봅시다. 저마다의 인생을 대입하는 이런 과정들을 통해 그럼에도 패배하지 않는 자신만의 위대한 인생을 만들어 가길 바랍니다.

스스로에게 유독 가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채찍질하며 매몰찬 혼잣말을 하는 습관이 있다면 산티아고 노인의 태도를 더욱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혼잣말은 때로는 가장 중요한 멘탈의 방어막이 되고, 지칠 때도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추진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과 바다》에서 눈여겨봐야 할 또 하나는 바다라는 무대 장치입니다. 어떤 장치나 상황 없이 단순하게 이끌어 가는 소설이기에 사실 바다 말고는 딱히 강조할 면도 없어 보입니다. 제목에서도 보이지만, 바다라는 장치는 소설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
헤밍웨이는 노인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 전쟁터를 바다로 설정했습니다. 이 얼마나 공정한 곳인가요? 자연 한복판에 있는, 어떤 편향된 감정도 개입할 수 없는 너무나도 객관적인 무대입니다. 따라서 결투의 결과에 누구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바다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습니다. 공정한 무대에 오른 노인은 드디어 승리를 거둡니다.

혼잣말은 무의식에 가장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낯선 목소리가 아닌 평생 들어온 자기 자신의 목소리만큼 중독성이 강하고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는 목소리가 있을까요? 혼잣말은 무의식 속을 마치 고속도로처럼 막힘없이 달려 도달합니다. 자기 자신을 극한 상황에서도 구하고 인생을 바꿀 수도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이 혼잣말인 것입니다.
혼잣말은 이토록 커다란 힘이 지녔기에 절대로 나쁜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수많은 세월을 견디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들은 당대의 독자만 흡수하지 않습니다. 고전은 세대를 건너 독자를 만납니다. 그 독자 중에는 이 플레인 빵에 크림치즈를 발라 먹는 것을 좋아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참치를 끼워 샌드위치로 먹고 싶은 독자도 있을 것입니다. 또, 플레인 빵을 그냥 갓 구운 고소한 맛으로만 느끼고 싶은 독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고전은 어떤 식으로든 해석될 수 있어야 합니다.

완벽주의를 향한 동경은 역사 속에서도 증명이 됩니다. 인간은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로 기정사실화한 뒤 완전한 존재인 ‘신’을 동경해 왔습니다. 신을 향한 끊임없는 애정이 중세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림과 문학 등 모든 예술 속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인간에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생물체가 자신이 더 크고 더 강한 존재처럼 보이고자 노력하는 것은 몇십만 년간 이어져 온 자연스런 생존 전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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