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돈을 버는 것과 어른의 의미 with 주희
부모로부터의 경제적 독립은 물론이고, 생계를 위한 벌이 자체도 인간인 이상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추구해야 할 가치는 아니라는 거예요. 경제적 독립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잠금 해제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하는데, 나만 아직’ 같은 마음이 들지요? 그것은 사실과 다를 뿐만 아니라, 비합리적인 판단입니다. 다른 사람이라고 다 하는 것도 아니고요,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게 해야 하는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가치인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압박감이 삶의 문젯거리가 되는 것은 돈을 당장 벌어오는지, 얼마만큼 벌어오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경제적인 독립이 아니라 삶의 가치들 간 충돌 혹은 평가입니다. 어떤 것을 보다 우선으로 두어야 하는지,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등의 문제이죠.
모든 과정 중에 사람이 주기적으로 부딪히는 저 압박감, 지금이라도 당장 돈이 되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의 가장 큰 원인은 자기 평가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생각하는 거죠.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나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음에도, 여전히 ‘나는 다른 사람만큼의 한 사람 몫을 다하고 있는가?’라고 물으면 어쩐지 그렇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는 것이지요. 그 한 사람 몫이라는 것을 판단하기 위해 사람들이 가장 크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대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활동이고요.
‘어른답게’의 필수 조건, 돈이 되지 않는 노동
부모님에게 경제적 원조를 받지 않아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내가 더 이상 돌봄을 받기만 하는 역할로 머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일 때는 그런 생각을 잘 하지 않잖아요. 관계가 바뀌었기 때문에 내 역할도 바뀐 거죠. 하지만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나의 역할이 경제 활동만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이라면 극단적으로 말해 부모님이 나를 키우며 들였던 금액만큼 돌려줄 수 있으면 되겠죠. 그러나 누군가를 키우고, 돌보고,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일은 돈으로만 가능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만큼 자라난 것도, 내가 흔들리고 의심하면서도 계속 나아가고 있는 것도, 우리의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도 실은 전부 돈을 벌 수 없는 노동 덕분입니다.
이것이 잠금 해제 2단계입니다. 돈을 벌 수 없는 노동, 그러나 전체 사회의 뿌리가 되는 일을 우리는 이미 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러 관계 속의 나로 살며 다시 관계를 돌보고, 사회 안의 무수한 관계를 만드는 일이죠. 그러므로 현재 경제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 하나만으로 내게 주어진 역할을 회피한다거나, 한 사람 몫을 하고 있지 못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과정은 이 사회 속에서 나라는 사람의 자리를 만드는 일,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한 관계를 엮어가는 일에 더욱 가까운 것 같습니다.
경제적 독립은 그 와중에 요청되는 것 중 하나일 수 있으나 그것만으로 우리의 길이 완성되거나, 나를 진정 위하는 삶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거꾸로 사람다운 삶을 사는 일, 관계를 돌보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경제적 독립이라는 미션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러나 그 모든 것, 경제적 독립, 좋은 관계 등을 위한 가장 밑바탕은 나 자신의 힘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삶에서 ‘독립적’인 어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입니다. 어른은 관계를 고려하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려는 존재니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독립보다는 관계가 아닐까요? 나를 죽이거나 억누르지 않고, 상대를 기만하거나 억누르지 않는 관계 말입니다. 그런 관계를 위해 필요한 것은 나 혹은 누군가, 우리에게 소중한 여러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경제적 독립이 아닌, 그것 이외의 다른 중요한 것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서로에게 허용해주세요.
8. 어디에 돈을 써야 할까요? with 공리주의
사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돈이 별로 없어서 쪼개어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취미 생활에 돈을 쓰는 일에 자기 자신부터 부담을 느끼게 되긴 합니다. 취미를 즐기다가도 문득 ‘너 지금 이럴 때니? 이런 데 쓸 돈이 어디 있어?’라고 스스로를 나무라며 자발적인 반성의 시간을 갖기도 하고요. 하지만 취미 생활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취미 생활이 그만큼 내 삶의 낙이 되어주기 때문이지요. 양쪽 다 좋은 것인지는 알겠는데 어쨌든 지금은 선택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소비 우선순위 리스트, 공리주의와 상담하기
내가 기쁨을 느끼는 어떤 활동에 아예 돈을 쓰지 말라고 하는 것이 현명한 답변이 되기 어렵다는 점은 우리 모두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숨구멍은 남겨둬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공리주의는 상대적으로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쉬운, 세속적인 윤리학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공리주의가 무턱대고 행복 최고! 다수 최고!를 외치는 것은 아닙니다. 공리주의는 정치학이기도 하거든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개인에게 더 좋은 행동을 알려주는 원칙이기도 하면서, 그 원칙이 나라를 다스리는 법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개인과 사회의 근본 원칙이 되려면 모두에게 가치 있고 바랄 만한 것이어야 하는데, 사람마다 바라는 것이 다양해도 그 근본은 결국 행복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국가 역시 모든 국가 구성원의 행복 추구권을 인정하고, 가능한 한 최대의 행복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공리주의는 생각보다 훨씬 여러 가지 안배를 해둡니다.
일반적인 확률을 생각해보라고요. 행동 하나에 대응하는 행복에 대한 구체적인 점수 산정에는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행복이 고통에 비해 압도적인 비율을 점유하는 것이라고요.
결국 자기 계발이든 취미 활동이든 누가 아무리 즐겁다고 해도, 혹은 내가 지금까지 아무리 즐거웠어도 지금 이 순간 그 행동을 선택했을 때 내가 얻을 수 있는 행복과 괴로움을 전적으로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곧, 습관적인 선택이 행복이라는 귀결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통계는 설명하지만 약속하지는 않거든요.
사람만 행복을 느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람이 다른 종과 다르게 ‘더욱’ 혹은 ‘고유하게’ 행복을 느끼는 영역이나 활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뇌는 상당히 고차원적인 컴퓨터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쓴다’고 할 때, 그 일이 꼭 괴로움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죠.
무엇이 되었든 취미를 만들고 유지하는 일에 도전해본 사람은 취미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취미를 갖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고요.
자기 계발이라는 용어는 조금 더 교묘하게 사용됩니다. ‘관리’라는 표현이 은연중에 지시하는 이 사회의 시스템이나 타인의 평가를 희미하게 만들고, ‘계발’이라는 표현을 통해 나의 자발성과 능동성을 강조하는 척 하면서, 사람이 ‘다른 무엇을 위한 쓸모’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전제를 덮어버리거든요.
말의 의미대로 하자면 자기 계발에 취미 활동은 얼마든지 포함될 수 있고, 나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유익한 활동인 취미 활동이 죄책감의 원인이 되고, ‘지금 네가 감히’라는 사치로 치부되는 것은 나라는 존재와 나의 인생을 이윤을 남겨야 할 투자 상품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자기 계발은 재테크의 일종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너무 퍽퍽해진 요즘 세상에서 ‘취미’라고 부를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사실 취미는 단지 말초적인 자극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취미 활동을 지속해나가는 데 우리는 많은 에너지를 쏟습니다.
투자 대비 성과는 미래의 약속입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판돈으로 배팅하라고 요구하지요. 현재는 언제나 미래의, 심지어 내가 잘 해내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불확실한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물론 때로는 그런 순간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쩌다 올지도 모르는 대박만큼이나, 평범한 현재의 기쁨 또한 필요합니다. 오늘의 매일을 그 자체로는 기쁘지도 의미 있지도 않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며 살 수는 없거든요. 자기 계발보다 취미 활동이 낫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취미 활동 역시 때로는 공허한 현재를 가리는 수단으로만 활용되기 때문입니다. 즉, 중요한 것은 취미 활동과 자기 계발 중 무엇이 더 가치 있느냐가 아니라 ‘지금 우리는 그 자체로 기쁨과 의미를 느낄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아닐까요?
9. 나는 같은 실패를 반복하는 것일까요? with 한나 아렌트
사실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이 전부 다 잘될 리는 없지요. 그래서 굳이 ‘실패’라는 말을 쓰는 것이 거창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패’의 뜻을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일을 잘못하여 뜻한 대로 되지 아니하거나 그르침’이라고 나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인생은 거의 ‘실패하는 인생’입니다. ‘에브리데이 실패데이’ 같은 것이죠.
인생의 대부분이 실패의 순간이라면 굳이 새롭게 ‘실패’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겠죠. 현실에서 우리가 느끼는 ‘실패’는 더 무거운 것들입니다. 옷에 음식을 흘리고, 넘어지고, 버스를 놓치는 정도는 귀여운 실수로 넘어갈 수 있지 않나요. 굳이 무거운 ‘실패’의 이름표를 붙이는 이유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아마 우리는 국어사전의 구분과 달리, 내가 쉽게 넘길 수 없는 모든 종류의 일의 그르침, 잘못됨을 실패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실수가 곧 실패로 남기도 하고, 실패했지만 쉽게 넘어가기도 하거든요. 결국 ‘실패’라는 규정은 내가 조심했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내가 감당할 만한지에 달려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더욱 힘겨운 실패는 반복되는 실패입니다. 우리는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는 말을 농담거리로 삼곤 하지만, 실제로 그 주인공이 바로 나일 때는 전혀 웃을 수 없습니다. 뼈저리게 아프죠. 어떤 실패에는 결코 내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여러 번 실패한다고 해서 그 후의 시간을 겪어내는 일이 만만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실패, 아는 고통이 더 무서워요. 이 뒤로 얼마나 아프고 쓰라릴지, 얼마나 긴 시간을 감당해야 하는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고 그런 만큼 더 무섭습니다. 아는 괴로움이라 해도 괴로움을 겪는 시간은 단축되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앞선 실패와 그 이후의 괴로움이 누적되고 중첩돼서 상처가 덧나는 기분을 느끼기도 합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렇게 같은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 내 ‘실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입니다. 내가 충분히 주의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인 거죠.
이 순간, 똑같이 반복되는 실패는 내가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다는 뼈아픈 증거로 다가옵니다. 나를 의심하고, 탓하고, 후회하게 되지요. 내가 스스로 지난 실패의 경험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 것 같거든요. 반복된 실패는 나를 긍정할 수 없게 하고, 나의 두려움을 키워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인간의 조건을 생각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은 활동activity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계속해서 움직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을 말할 때는 활동이 핵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은 목숨을 유지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모든 활동입니다. 먹고, 자고, 숨 쉬고, 화장실 가고, 휴식을 하는 활동 등은 모두 나의 생명을 유지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노동에 포함됩니다. 한편 작업은 노동이 아닌 활동 중 사물과 관계하는 활동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일 곧, 인공물을 만드는 제작이 바로 작업 활동입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노동, 곧 직업 활동으로서 노동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겠죠. 마지막으로 행위는 우리의 사회적 삶,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그와 관련되어 하는 활동, 말과 행동 모두를 뜻합니다. 예능을 보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감상을 남기고,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친구를 만들고, 직장 동료와 소통하고, 투표를 하는 등 다른 사람에게 내 의견을 밝히고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전부 행위입니다.
탄생과 행위의 공통점은 또 있습니다. 반드시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정지된 상태라면 무슨 일이든 간에 새로 일어날 수도 생겨날 수도 없으니까요. 그러므로 같은 행위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행위는 시간, 자연, 서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조건 속에서 발생하고, 그 조건은 계속 변합니다. 다른 조건은 둘째치고라도, 시간은 계속 흐르니까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는 말처럼요. 흘러가버린 강물은 지금의 강물과 같지 않죠. 그래서 우리의 행위는 매번 새롭고, 매번 태어납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한번 태어난 것은 결코 없었던 것처럼 되돌릴 수 없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잖아요.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복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러나 복구 불가능성은 새로운 가능성과 이어져 있습니다. 어쨌든 과거와는 똑같을 수 없으니까요.
예상과 기대는 언제나 우리를 배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 번 생겨난 행위를 결코 뒤로 돌리거나 무를 수도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행동합니다. 멈추지 않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사는 동안 우리는 매번, 그리고 항상, 가슴 밑바닥의 의심과 함께 복구 불가의 영역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확실한 일에 도전하고 싶어지지만 더 확실한 일이라고 해봤자 그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성공이든 실패든 예측 불가능한 행위의 본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 삶의 어쩔 수 없는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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