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아빠와 나는 호텔 조식 뷔페에서 만났다. 우리는 싸운 이야기는 하지 않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행을 계속했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호이안으로 가서 이틀을 보냈다. 구시가지의 역사 지구를 걸어다니면서 운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거리에는 죽 늘어선 좌판에서 알록달록한 손전등과 입체 카드를 팔고 있었다. 우리는 일본의 유명한 다리를 재현해놓은 곳에 멈춰 서서 현지인들이 촛불을 켠 작은 종이배를 강물로 떠내려보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호이안’이평화로운 만남의 장이라는 뜻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로.
우리는 치유를 하러 베트남에 갔다. 슬픔 속에서 서로에게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우리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땐 어느 때보다 상처받은 채 서로 멀어져 있었다. 우리는 무려 스물네 시간을 비행기를 타고 와 여덟시경에 집에 도착했다. 여독과 시차로 녹초가 된 나는 바로 잠들었다. 그리고 자정쯤 전화벨소리에 눈을 떴다. "사고가 났어." 아빠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집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어. 날 좀 데리러 와줘야겠다, 미셸. 올 때 구강청정제 좀 가져오고." 간이 철렁했다. 나는 아버지가 말하는 사이사이에 질문을 퍼부었고 아빠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시종일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기 신발 두 켤레를 발견했을 때는, 아무것도 버리질 못해 내게 그런 것까지 처리하게 만든 엄마가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신발은 완벽한 상태로 보존돼 있었다. 하나는 흰 리본 세 개가 발목 부분에 고정된 가죽 샌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알록달록한 격자무늬 안감을 댄 분홍 캔버스 슬립온 운동화였다. 두 켤레 다 너무 작아서 내 손바닥 안에 쏙 들어왔다. 나는 샌들 한 짝을 들고 눈물을 터뜨렸다. 이런 물건을 보관해뒀을 엄마 마음을 상상하면서. 엄마는 언젠가 자기 아기의 아기가, 자신은 절대 만나보지 못할 그 아기가 그 신을 신게 될 날을 생각하면서 이것들을 고이고이 싸뒀을 것이다.
미래의 내 아이를 위해 엄마가 보관해둔 물건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들을 정리하고 있자니 이상하게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홀린 듯이 빠른 속도로 물건들을 착착 치워 없앴다.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들을 분류하는 일은 고된 노역처럼 느껴졌지만 다 끝내고 나니 기나긴 고생 끝에 마침내 어떤 출구에 도달한 듯한, 긴 문장에 마침표를 찍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물건이 부모 잃은 아이처럼, 물체, 짐짝처럼 보였다. 한때는 존재이유가 있었던 것들이 거추장스러운 무언가로 변해 있었다. 특별한 식사를 위해 고이 모셔둔 볼들은 이제 그냥 정리해야 할 그릇이, 내 갈 길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었다. 어렸을 때 마법의 단지인 척하면서 갖고 놀던, 내가 상상한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초항아리는 이제 또하나의 버릴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가능한 한 바쁘게 지내고 싶었다. 몸을 최대한 바쁘게 놀려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댈 시간이 없도록, 피터와 내가 영영 유진을 떠날 때까지 남은 몇 달 동안 지속적으로 몰두할 일이 필요했다. 어쩌면 간호에 실패한 나 자신을 벌주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아니면 내게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려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모의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망설여졌다. 이모가 유진에 다녀간 뒤로 이모와 좀더 가깝게 지내고 싶었지만 언어의 장벽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내가 나누고 싶은 감정의 뉘앙스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더는 이모의 생활을 침범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4년 동안 이모와 이모부의 아파트는 죽어가는 손님들을 위한 회전문이 되다시피 했다. 이제 엄마는 돌아가셨고, 이모에게 그 어두운 시간을, 이모가 짊어져야 할 것처럼 느꼈을 그 무거운 짐을 상기시키는 일이야말로 내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엄마는 나미 이모가 점쟁이를 찾아간 이야기를 내게 해준 적이 있다. 점쟁이 말이, 이모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사람이라 했다. 다른 이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쉴 곳이 되어주고, 가만히 서서 누구든 자기 아래에 눕는 사람에게 그늘이 되어줄 운명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매양 발밑에서 작은 도끼가 밑동을 찍으면서 천천히 이모의 기운을 빼간다고. 그런 말을 들었던 나로서는 내가 그 작은 도끼인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모는 자기 가정만의 조용하고 고요한 사적인 공간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나는 그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모는 유일하게 남은, 내 심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그 여행이 이제는 나를 두려움으로 가득 채웠다. 우리 대화를 통역해줄 은미 이모나 엄마, 성용 오빠 없이 나미 이모와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중간 전달자 없이 바로 소통하는 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질문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세 살짜리 수준의 내 어휘력으로 어떻게 이모와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 내가 느낀 내적 갈등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을까? 엄마도 없는 마당에 과연 내가 한국이나 엄마 가족으로부터 뭘 바랄 자격이 있을까?
나는 시차 때문에 졸음이 쏟아져 거실 바닥에 그대로 누워 설핏 잠이 들었다 깼다 했다. 까무룩 잠이 든 내게 이모가 얇은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막상 엄마처럼 대해주는 이모를 만나고 나니 그간의 이런저런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보살핌을 받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이모 집에 도착한 지 나흘째 되던 날이 내 생일이었다. 이모는 미역국을 끓였다. 미역국은 영양이 풍부해 원기를 북돋아주는 해조류 수프로, 본래 아기를 낳은 산모에게 권장하는 음식이다. 한국에서는 생일날,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생각하는 의미에서 이 음식을 먹는 전통이 있는데 이제 내겐 이 음식에 새로운 의미가 생겨 신성하게까지 느껴졌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국물을 들이켜고서 부드럽고 미끌미끌한 미역을 오물오물 씹었다. 그 맛은 고대의 어떤 바다 신이 바다 거품 속에서 벌거벗은 채로 해초를 포식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마치 엄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 그 안에서 자유롭게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모에게 할말이 산더미 같았지만 번번이 전달에 실패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소통하려고 노력했지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번역어를 검색하느라 대화가 한참 동안 중단되기 일쑤였다. "정말 너무 고마워요, 이모." 어느 날 밤 나는 식탁에서 맥주와 케이크를 먹으며 한국말로 말했다. 그리고 구글 번역기에 이렇게 입력했다. "전 이모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아요." 번역된 글자가 뜬 휴대폰을 이모에게 보여주었다. 이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노! 노!" 이모는 영어로 대답했다. 그리고 번역 앱에 대고 한국말로 뭐라고 음성 입력을 했다. 그랬더니 앱에 한글 문장이 커다랗게 뜨면서 인공지능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게 핏줄blood ties이야." 번역기 음성은 음절과 음절 사이의 연결 속도가 제멋대로였다. 음절끼리의 관계는 고려하지 않고 각 음절이 발음되어서 이를테면 축약 부분은 너무 길게, ‘blood’와 ‘ties’ 사이는 너무 빠르게 연결됐다. 나는 이모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나는 궁금해졌다. 만일 엄마를 가장 잘 아는 우리 세 사람, 그러니까 아빠와 나미 이모와 나에게 엄마가 남겨둔 10퍼센트의 부분이 제각각 다르다면, 우리가 같이 그 숨겨진 부분을 짜맞추어 엄마의 전모를 알아낼 수 있을지. 과연 내가 엄마의 모든 걸 알게 될 수 있을지, 엄마가 또 무슨 단서를 남겼을지도.
피터와 내가 여행 다닌 장소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고 싶어한 곳이었다.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 병원 격리 생활로 변해버리기 전에 엄마가 나를 데려가려 한 곳이었다. 엄마가 나와 함께 만들려던 마지막 추억이고, 엄마가 나를 키우며 내가 사랑하도록 만든 것의 원천이고, 내가 기억했으면 하는 맛이고, 내가 절대 잊지 않았으면 하는 감정이었다.
대체로 나는 꽤 잘 적응했다. 대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이며 어른의 제대로 된 직업이며 모든 게 너무 낯설었지만, 바꿀 수 없는 일에 너무 연연하지 않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만 몰입하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가끔씩 나도 모르게 지난날이 떠올라 괴로웠다. 뜬금없이 고통스러운 생각의 고리에 불이 붙으면 그동안 억누르려 애쓰던 모든 기억이 내 마음 맨 앞자락으로 훌렁 삐져나오기 일쑤였다. 엄마의 희뿌연 혀, 보라색 욕창 자국,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엄마의 무거운 머리, 저절로 번쩍 떠진 눈. 하지만 내면의 비명이 텅 빈 가슴을 뚫고 나와 온몸을 소용돌이치며 뒤흔들 뿐, 그 감정이 제대로 해소되지는 않았다.
나는 상담사를 찾아갔다. 퇴근 후 일주일에 한 번씩 L 전차를 타고 유니언 스퀘어로 갔다. 상담사에게 내가 느끼는 감정을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에 신경쓰느라 반시간을 보내고 나면 상담은 이미 끝나 있었다. 그러곤 다시 전차를 타고 베드퍼드 애비뉴로 돌아와 우리 아파트까지 반시간을 걸어와야 했다. 치료 효과는 없다시피 한데다 오히려 지쳐만 갔다. 상담사가 말한 것 중에, 이미 나 혼자 수백만 번쯤 정신분석을 해본 대목이 아닌 게 없었다. 한 번 갈 때마다 본인부담금을 100달러씩 내고 있었으므로 그 돈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50달러짜리 점심을 사 먹는 게 정신건강에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은 상담을 취소하고 스스로를 돌볼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한 음식은 모두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각각의 향과 맛이 잠깐이나마 나를 멀쩡했던 우리집으로 데려다주었다.
나는 엄마가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주야장천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너한테서 항상 김치 냄새가 날 거야. 그 냄새가 네 땀구멍으로 배어나올 테니까. 엄마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말했다.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
카메라 렌즈 뒤에는 어김없이 엄마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나를, 나의 단순한 즐거움을, 내 안의 세계를 포착해 보존하려던 엄마가.
마음에 드는 사진들은 엄마가 객관적으로 잘 못 나온 사진들이었다. 무심코 눈을 깜빡이는 바람에 눈을 감은 사진. 라이트 에이드 약국에 사진 현상을 하러 가는 길에 남은 필름을 다 쓰려고 대충 찍은 사진.
엄마는 나의 대리인이자 기록 보관소였다. 엄마는 내 존재와 성장 과정의 증거를 보존하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내 모습을 순간순간 포착하고, 내 기록과 소유물을 하나하나 다 보관해두면서. 엄마는 나의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가 사라지고 나니 이런 것들을 물어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록되지 않은 일은 엄마와 함께 죽어버렸으니까. 한낱 기록과 내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엄마가 남긴 표식을 단서로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 오롯이 내 숙제가 되었다. 이 얼마나 돌고 도는 인생인지, 또 얼마나 달콤쌉싸름한 일인지. 자식이 엄마의 발자취를 더듬는 일이, 한 주체가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기록 보관인을 기록하는 일이.
나는 발효가 통제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배추는 놔두면 곰팡이가 피고 부패한다. 썩어 못 먹게 된다. 하지만 배추를 소금에 절여두면 부패 과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당이 분해되면서 젖산을 만들어내 배추가 썩지 않게 되고, 그 과정에서 탄산가스가 나와 절임이 산성화된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색과 질감이 변하고, 톡 쏘는 새콤새콤한 맛이 나게 된다. 요컨대 발효는 시간 속에 존재해 변화한다. 그러니 발효가 완전히 통제된 죽음인 건 아니다. 사실상 새로운 방식으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거니까.
내 기억을 곪아터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트라우마가 내 기억에 스며들어 그것을 망쳐버리고 쓸모없게 만들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 기억은 어떻게든 내가 잘 돌봐야 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공유한 문화는 내 심장 속에, 내 유전자 속에 펄떡펄떡 살아 숨쉬고 있었다. 나는 그걸 잘 붙들고 키워 내 안에서 죽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했다. 엄마가 가르쳐준 교훈을, 내 안에, 내 일거수일투족에 엄마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를 언젠가 후대에 잘 전할 수 있도록. 나는 엄마의 유산이었다. 내가 엄마와 함께 있지 못한다면 내가 엄마가 되면 될 터였다.
아주머니는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아주머니가 찾는 게 뭔지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학교에서 아이들이 나를 보며 정체가 뭐냐고 묻던 것과 똑같은 궁금증이었다. 그들이 나를 바라보며 딛고 서 있는 위치만 정반대쪽이었을 뿐. 아주머니는 내 얼굴에서 한국인의 흔적을, 자기와 닮은 부분을 찾고 있었지만 딱히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한때 그토록 백인 친구들과 닮기를 갈망하고 한국적인 면이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던 내가, 지금은 목욕탕에서 만난 이 낯선 사람이 그 한국적인 면을 바로 못 알아보는 것이 이토록 두렵다니.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머니가 내 얼굴에서 찾으려 하던 게 점점 희미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 내 옆에서 내 존재를 납득시켜줄 온전한 누군가가 없었다. 나는 얼굴 윤곽이건 피부색이건, 내 소중한 반쪽을 나타내던 것이 유실되기 시작해 두려웠다. 마치 엄마와 함께, 내 얼굴의 그 부분들에 대한 권리마저 사라지기라도 한 듯이.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반쪽이 사라진 작은 형틀 칼처럼 생긴 목침 두 개만이 있었다. 나는 목침의 옴폭 파인 부분에 목을 대고 한쪽 벽 근처에 누웠다. 은은한 오렌지색 조명이 희미하게 방을 밝혔다. 편안하고 산뜻하며 새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마치 불필요한 허물을 벗어던진 것처럼, 세례를 받은 것처럼. 뜨끈뜨끈한 바닥에 방안 공기도 기분좋은 정도로 따뜻했다. 건강한 사람의 몸속처럼, 자궁 속처럼. 나는 눈을 감았다.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리는 내지 않았다.
무대에 올랐을 때 나는 잠깐 서서 홀을 둘러보았다. 내 야심이 정점에 달했을 때조차 엄마의 모국, 내가 태어난 도시에서 콘서트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엄마가 이런 내 모습을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란 여자, 내가 쌓은 커리어, 내가 절대로 이루지 못할 거라고 엄마가 그토록 오랫동안 걱정한 일을 이렇게 떡하니 이루어낸 모습을 보고 얼마나 자랑스러워했을까. 우리가 맛본 성공이 엄마의 죽음을 둘러싸고 있고, 내가 부르는 노래가 죄다 엄마를 추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완전히 모순이긴 해도 엄마가 공연장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더욱 간절했다.
열 살 때 이후로 신을 믿지 않았고, 그래도 혹시 기도할 일이 생기면 로저스 아저씨*를 떠올렸다. 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내게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꼭 뭔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열여섯 살 때부터 밴드에 참여해 쭉 음악가로 성공하는 꿈만 꾸었고, 엄마의 불만어린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국인으로서 그런 꿈을 꿀 자격이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 꿈을 위해 싸워왔지만 이렇다 할 보상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마법처럼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엄마가 신의 목이라도 졸라서 내게 좋은 일들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요구했을 게 틀림없다. 하필 우리 모녀 사이가 막 좋아지기 시작했을 때 우리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린 신이라면, 절대로 내 몽상이 실현되게 할 리가 없을 테니까.
엄마가 지난 몇 년간 나를 지켜봤다면 아마 굉장히 기뻐했을 것이다. 내가 멋지게 차려입은 채 패션잡지 화보를 찍고, 역사상 최초로 한국 감독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유튜브에서 열다섯 단계 피부 관리법을 알려주는 채널들이 수백만 뷰를 기록하는 모습을 보고. 내 평소 신념과는 완전히 모순된 생각이지만, 엄마가 그 모든 걸 볼 수 있다고, 드디어 내가 속할 곳을 찾아 엄마가 기뻐한다고 믿어야만 했다.
"할머니랑 은미 이모랑 네 엄마 되게 행복할 것 같아." 나미 이모가 말했다. 이모는 내가 준 목걸이의 하트 펜던트를 똑바로 뒤집었다. "다들 하늘나라에서 같이 소주도 마시고 화투도 치면서 우리가 여기 함께 있는 걸 보고 기뻐할 거야."
이모가 터치스크린 위로 차트를 죽 훑어내리더니 〈커피 한 잔〉을 찾았다. 심벌즈를 천천히 두드리는 소리로 노래가 시작되자 기타가 바통을 이어받아 즉흥연주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침내 멜로디 라인이 나왔을 때 나는 틀림없이 전에 들어본 적 있는 노래임을 확신했다. 어렸을 때 다 같이 간 노래방에서 엄마와 이모가 듀엣으로 불렀던 것 같다. 긴 전주가 끝날 무렵 화면 위로 천천히 가사가 올라왔다. 이모는 하나 더 준비돼 있던 무선마이크를 내게 건넸다. 이모는 내 손을 잡아 나를 화면 앞으로 끌고 가서 내 얼굴을 보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모의 노래에 장단을 맞추며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모음 소리라도 따라 내면서 멜로디를 좇아가려 애썼다. 저 깊은 곳에 존재했을 수도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기억을, 혹은 어떻게든 내가 접했을 엄마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이모가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게 느껴졌다. 지난 한 주 동안 내가 이모에게서 찾으려 하던 것이었다. 이모가 나의 엄마도, 내가 이모의 동생도 아니었지만, 그 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그다음으로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따라 불렀다. 이모가 기억을 되살리는 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쏟고 싶었다. 그래서 빛의 속도로 바뀌는 글자를 열심히 따라 읽었다. 자꾸만 입에서 가사가 한 박자 늦게 튀어나왔지만 모어가 나를 인도해주기를 바라며 계속 노래했다.
고개를 돌려버리는 편이 더 쉬웠을 때조차 두 팔 벌려 나를 맞아준 나미 이모께 감사드린다. 비록 그 뿌리가 같은 슬픔에 있었을지라도, 지난 몇 년 동안 우리가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은 하나의 선물과도 같았다. 이모, 제가 이모에게서 얼마나 많은 걸 받았는지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 이모와 나눈 추억을 영원히 소중하게 간직할 거예요. 그게 바로 핏줄이니까요.
다른 누구보다도 피터 브래들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 책을 쓰는 동안 과대망상과 극단적인 낙담을 오가며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나를 잘 다독이고 너그럽게 대해주었지. 내 책의 첫번째 독자이자 편집자이며 가장 완벽한 동반자인 당신을 곁에 두다니 이 얼마나 행운인지! 당신의 모든 걸 사랑해. 정말,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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