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문화/제사
고대 사람들이 신의 가호라 여기는 샤머니즘이 기원이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전통문화라고 하지만 내가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그게 전부라고 믿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조상이나 신령에게 음식을 바치며 추모하거나 기원을 드리는 의식.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는 매우 이른 시점부터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문화가 존재했다. 조상이 죽으면 귀신이 돼 후손을 돌본다는 믿음에 기인한 것인데 다른 문명권과는 확연이 구분되는 발상이다.
자연에도 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다의 신도 있고 강의 신도 있고 하늘을 주관하는 옥황상제도 있다. 하지만 자연신은 인간계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은 조상만이 가족과 공동체를 보호한다는 믿음이 발전했고 이에 따라 국가 공동체나 가족 공동체가 제사를 지내는 문화가 일찍부터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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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문제가 되는 건 그러니까 정확히는, 울프의 돌멩이다. 죽음 쪽의 욕망에 무게를 달아, 삶 쪽의 욕망을 패배시키는 도구. 삶을 향한 욕망과 죽음을 향한 욕망이 서로 포개져 있음을 아는 사람이 마땅히 선택할 만한 도구. 욕망의 다층을 안다는 것은 그러므로 꼭 돌멩이만큼 무거운 일일까. 욕망 자체도 무거운데 말이다.

글을 쓰는 일은 쉬지 않고 ‘경계’를 의식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삶과 죽음 사이의 거대한 틈을 노려보다가, 사실은 그 경계가 믿기 어려울 만큼 희미하다는 것을 눈치채는 일. 세상이 나눈 선과 악의 경계를 부수며 선을 열 겹으로 쪼개고 악을 스무 겹으로 다시 나누는 일. 인간의 욕망은 선명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분열한다는 것을 아는 일. 어쩌면 죽음을 선택하(려)는 사람들의 욕망 또한 누구보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욕망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살하는 것은 세상에 진지한 것이 있다고 믿는 것"이라는 모리스 바레의 말에 동의한다면.

모든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 삶을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도 그것이 도무지 단순해지지 않음을 아는 일이 예술이라는 생각을 나는 오래도록 하고 있다. ‘어떤’ 글쓰기 또한 그 과정 중 하나일 것이다. 고백건대 그래서, 글 쓰는 삶은 어쩔 수 없이 불행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작가들은 대체로 고통 속에 살다 헤밍웨이처럼, 로맹 가리처럼, 실비아 플라스처럼,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처럼 흔히들 ‘비극’이라고 말하는 죽음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두렵기도 했다. 글을 씀으로써 나는 많은 것을 견딜 수 있게 됐지만, 글을 쓰는 일이 다시 많은 것들의 ‘견딜 수 없음’을 일깨우는 역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세상은, 특히 한 인간의 생산성을 끊임없이 저울질하는 자본의 세상은 그가 지켜내고자 하는 품위를 절로 보장해주지 않는다. 품위가 훼손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훼손된 인간은 공통적으로 모멸을 느낀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유독 모멸에 예민하다. 그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모멸을 느낀다는 게 아니라, 공기 같은 억압과 소리 없는 차별처럼 자신이 훼손될 만한 상황을 신속히 감지한다는 뜻이다.
감지한 사람들이 글을 쓴다. 씀으로써 그들은 모멸에서 벗어난다. 수시로 모멸에서 벗어나는 사람을 모멸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그들이 ‘가장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달아난다면 더욱. 엄마이건, 회사원이건, 가게 주인이건, 투잡을 뛰는 아르바이트생이건 간에.

안갯속에 길을 잃었을 때 오직 안개만을 감각하는 사람은 제자리를 맴돌지만 이슬을 감각하는 사람은 풀과 바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나를 둘러싼 거대한 미지를 구획하여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주는 작업, 내가 처한 상황과 거기서 느끼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마주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사람들의 단어는 언제나 모자랄 수밖에 없다.

삶이 너무 지독할 때는 쓸 수가 없다.
하지만 지독하지 않으면 쓸 이유가 없다.
그 중간의 어딘가에
모든 글쓰기가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 사이에 오가는 공기를 파악하는 게 습관이었고, 그 기압에 쉽게 휘둘렸다. 내가 자주 휘둘리다 보니 내가 남을(본의 아니게) 휘두르는 데도 신경이 곤두섰다. 늘 감정이 문제였다. 넘쳐흐르는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흘러넘쳐 나를 덮치고 타인에게까지 쏟아지는 그것을, 어떻게 수습하며 살 것인가.

어린아이를 아끼는 어른의 마음은 양가적이다. 아이가 고작 『인어공주』 보고 우는 것만으로 맘이 부서지는 동시에, 아이가 더욱더 풍요로운 서사 속에서 생을 누리길 바란다. 아이의 앞날에 되도록 애타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동시에, 아이의 마음이 메마르지 않기를 바란다. 꽃길만 걸었으면 하는 동시에, 타인의 불행을 모른 척하지 않았으면 한다. 염병하지 말고 하나만 해라, 하나만. 내가 나를 다그쳐본다. 양립할 수 없는 일들이라는 걸 안다. 풍요로운 서사를 이해하는 인간이라면 인어의 슬픔에 공명하지 않을 수 없다. 애가 탄다는 건 마음이 메마르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불행을 모른 척하지 않는 인생이 온통 꽃길일 리가 있을까.

그사이 내게도 눈물바다에서 헤엄칠 뗏목이 몇 개쯤은 생겼다. 아이에게도 생길 것이다. 아니, 벌써 있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믿어줄 수밖에 없다.

나는 모든 관계에서 내가(아무리 용써도) 어쩌지 못하는 부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돌아보면 그것이 관계를 바로잡기 위한 시작이기도 했다. 나의 부피를 줄여 몸을 가볍게 했을 때, 내 힘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어디까지인지 알 때, 진짜 상대방을 위한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대단하지 않아도 소중한 관계. 내가 당신을 돌보고 당신이 나를 돌봐줄 때 우린 연결되지만, 그 끈은 상대의 존재를 쥐고 흔들 만큼 지배적일 수 없고 지배해서도 안 된다. 주위를 둘러보니, 관계에 크게 허덕이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들의 자아는 자신과 타인의 거리를 왜곡하지 않는 정도의 크기인 듯했다.

그러니까 선생은 미쳐야 마땅한 고통 속에서 도무지 ‘미쳐지지’ 않았다. "정신이 미치기 직전까지 곧장 돌진해 들어갔다가 어떤 강인한 저지선에 부딪혀 몸부림치는 걸" 수시로 느꼈다. 그것이 선생을 다른 차원에서 괴롭혔다. 미쳐버리면 차라리 편할 것 같은데 미쳐지지 않고, 미쳐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자식을 잃은 극한의 처지에서도) 미침을 강하게 거부하는 에너지, 그러니까 생에 대한 ‘민망한’ 의지가 있기 때문 아닐까, 반추에 반추를 거듭하는 것이었다.

유튜브에 새 영상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진정한 욕쟁이 할머니의 스웩이란 저런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어김없이 넋을 놓고 킬킬거리지만, 동시에 얼떨떨한 마음으로 짐작해본다. 여름밤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는 손녀에게 ‘나는 내 인생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던 할머니의 심정을. 저승에서 만난다 해도 멱살 잡고 싶을 남편의 기일에 음식을 만들다가, 같이 산 기간이 짧아서 무슨 음식을 좋아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고 말하는 70대 여성의 블랙코미디를.

내게는 그런 긍지가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나는 고작 된장찌개 한 냄비를 끓이고 나서 드러눕는 종류의 사람이다. 나의 두 손은 감자 두 개를 30분 동안 깎는다. 평소엔 이런 얘기를 ‘자학 개그’처럼 던지곤 하지만, 몸을 움직여 삶을 밀고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이 내겐 분명히 있다.

박막례 할머니의 ‘편’이라면 이 또한 다들 알겠지만, 할머니의 피디이자 손녀인 김유라 씨와 할머니의 관계는 혈연이 보여주는 평면적인 애정을 넘어선다. 그들을 잇는 건 자매애(sisterhood)에 가까워 보인다. 페미니즘이 낯설지 않은 세대의 손녀는 할머니의 설움에 공명한다. 하지만 결코 할머니를 연민의 대상으로 연출하지 않는다. ‘무서운 인생’에 짓눌린 사람은, 그래서 자기 연민에 갇혀버린 사람은 결코 자기 입으로 인생을 말하며 웃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다르면 다른 대로 서로 인정하면 되지, 감정적으로 곡해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누군가 나를 나쁘게 생각해도 그걸 바꾸려고 애쓰지 않게 되는 상황이 점점 많아진다. 나이가 드니 인간관계가 부질없게 느껴진다거나, 사람에게 공을 들이는 일이 귀찮아서가 아니다. 나와 정서적으로 긴밀한 사람들을 나는 끊임없이 염려한다. 그들의 기쁨과 슬픔은 내게 옮아오며, 나의 기쁨과 슬픔 또한 그들과 결속한다. 다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처럼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일 또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중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누군가 나를 싫어하는 데는(그게 합리적이든 아니든) 그만의 이유가 있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설령 어찌할 수 있다 해도, 어찌하는 데 사용할 에너지나 마음이 내게 없다면, 또다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글쓰기의 좋은 점 중 하나는 글 쓰는 사람들에 대한 헛된 기대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글은 글일 뿐 글이 사람을 말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청년 시절의 많은 부분을 글쓰기에 할애한 결과 깨달았다. 생의 초반에는 생의 뒤통수에 관해 생각할 일이 많지 않듯, 창작을 꿈꾸던 청춘의 초반에는 글의 뒤통수를 대번에 알아차리진 못했다.

시간에 저항할 수 없다면 시간과 화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굴종도 타협도 아닌 온전한 화해. 내가 더 이상 보살펴질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내가 보살펴야 할 존재들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내게는 시간과의 화해였다. 책임과 인내를 가까이하고, 미움과 미망(迷妄)에서 멀어지는 것이 화해였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제 나이는 낯설고 마음속엔 자라지도 가출하지도 않는 어린애가 칭얼대고 있으므로, 시간과 화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매번 저만치 앞서가는 시간의 꽁무니에 대고 읍소를 한들 욕을 한들, 시간은 귀먹은 강물처럼 제 갈 길을 갈 뿐이니.

아주 조금씩, 누군가 노력해줄 때 인간은 나아질 수 있다. 인간은 너무 복잡하기에 수많은 형태로 망가지지만, 또 너무 복잡하기에 수많은 형태로 나아질 수 있다. 우리가 목격하는 수많은 ‘괴물’들에게, 과거의 어느 시점에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다면, 그와 주변인들이 겪는 불행의 크기가 지금보다 작았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 누군가의 개입으로 어떤 불행의 크기는 줄어들고 있다.

나에게 개입하는 몇몇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들 덕에 나는 지나치게 망가지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아주 조금씩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이불 동굴 밖으로 나온다. 글도 그렇다. 나는 글을 쓰며 수시로 내게 개입한다. 글을 통해 세상에 개입한다. 그렇게 매일 ‘고쳐질 가능성’을 타진한다. 포기하지 않고.

어린 시절이 끝나고 시간의 지배를 받게 되면, 취하지 않고 오늘을 견디는 인간을 찾기 어려워진다. 불안을 피하려 일에 취하든, 상처를 덮으려 술에 취하든, 수치를 잊으려 명예에 취하든, 고독을 이기려 시선에 취하든, 열등감을 지우려 폭력에 취하든, 무엇에도 취하지 않은 채 오감을 깨우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어린 시절을 끝낸 인간은 어딘가 취한 채, 자신의 과거와 싸우느라 매일을 소비한다. 이 싸움은 잘해야 본전이다. 이겨야 기껏 ‘사람 꼴’이며, 졌을 때의 상황에는 바닥이 없다. 바닥 없음을 목격하는 일은 너무 잔인해서, 다시 취할 거리를 찾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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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지나는 구름과 햇빛의 농도에 따라 바다 빛깔은 시시각각 요변을 한다. 어느 땐가는 수평선 쪽이 초록색 띠를 두른 것처럼 선명하게 바다의 남색과 경계를 이루면서 그쪽에 떠 있는 양식장의 흰 스티로폼이 초원에 노니는 양 떼처럼 보였다. 이 환상의 초원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쪽에 초원이 있고 없음이 뭐 그리 중요한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물 중 다만 보였다는 것 이상의 관계를 맺은 게 몇이나 된다고.

자식의 보호를 벗어나려는 게 객쩍은 오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벗어나겠다는 게 아니라 벗어나면 내가 어떻게 되나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 또한 걷잡을 수가 없다. 뭔가 내 정신이 아니다.

딸애는 그 동안 그렇게 지성껏 봉양을 했건만 뭐가 부족해서 저러나 싶은 얼굴로 쳐다봤지만 나는 그 애에게 딴소리할 틈을 주지 않았다. 어디서 뭔가 강력한 힘이 끌어당기는 것처럼 도무지 지접을 못하는 에미를 딸은 딱한 듯, 슬픈 듯 바라보더니 말없이 짐을 들고 따라나섰다. "모셔다나 드릴게요." 딸의 지친 듯한 목소리를 듣고 나는 문득 나를 그 애의 에미가 아니라 자식처럼 느꼈다. 자식 중에서도 에미 속이나 썩이는 못된 자식처럼.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은 마음과 ‘아직은 안돼’라는 오기가 속에서 싸움질하듯 보깼다. 늙은이의 어리광이야 망령밖에 더 되나.

나에겐 잡아줄 손이 필요했다. 죽는 날까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건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원통(寃痛)함에서만은 놓여나고 싶었다.

그러나 떠나갈 땐 주제넘게도 어린 자식을 험한 고장에 떼어놓고 가는 에미 같은 얼굴을 하더니, 기어코 눈물을 보였다.

그 애가 떠나고 나서 잠깐 혼자가 되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어떤 고비를 맞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고비였지만 두려웠다.

마리로사 수녀님만 특별히 명랑하고 발랄한 게 아니었다. 다들 그늘이라곤 없이 빛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수녀님도 있었다. 이상도 하지, 저 젊음과 저 미모로 무얼 못해서 하필 수녀가 되었을까. 나는 누가 부른 것처럼 이곳에 이끌렸고, 지금 여기 당도해 있건만 왜 이런 곳이 있어야 하는지, 어떻게 세속의 한가운데 이런 곳이 있을 수가 있는지 그저 이상하기만 했다.

참척의 쓰라림으로 내 마음은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져 있었다. 그러나 수녀님은 딴소리만 했다. 어떻게 해서 화제가 거기 이르렀는지는 모르지만 수녀님은 아주 열렬하게 감동적인 어조로 교황 요한 23세 얘기를 했다.

수녀님은 어린애한테 위인전 얘기를 해주듯이 재미있고 신바람나게 요한 23세 얘기를 다 해주고 나서 비로소 나더러 이곳에 잘 왔다고, 마음 편히 지내길 바란다는 뜻의 인사말을 했다. 연민이 섞이지 않은 담담한 말투여서 고마운 한편 조금은 서러웠다. 그 동안 나는 싫어하는 것처럼 굴면서도 실은 얼마나 남이 나를 불쌍히 여기면서 비위 맞추고 위해주는 데 길들여졌던가.

이제야말로 혼자가 된 것이다. 나는 그 동안 왜 그렇게 혼자 있고 싶어했는지 생각도 안 나고 이해도 안되어 우두망찰을 했다. 그리고 누가 떠다민 것처럼 비실비실 방구석으로 가서 찰싹 붙어섰다. 인기척 없는 언덕방의 공기가 사방에서 화살처럼 내 몸에 꽂혀오는 것 같았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니잖아. 자업자득이야. 이렇게 자신을 윽박질러보았지만 완벽한 고립감은 고약했다.

워낙 정신적이지 못한 나는 고립감도 감각적이었다. 무서움증만 해도 상상의 소산이니 정신적이라 하겠다.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고 다만 등더리에 누가 자꾸자꾸 눈덩이를 한 움큼씩 집어넣는 것처럼 차가운 전율이 간단없이 지나갔다.

그래, 나는 주님과 한번 맞붙어보려고 이곳에 이끌렸고, 혼자돼보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주님,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시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해보라고 애걸하리라.
애걸해서 안되면 따지고 덤비고 쥐어뜯고 사생결단을 하리라. 나는 방바닥으로 무너져내렸고 몸부림을 쳤다. 방안을 헤매며 데굴데굴 굴렀다. 나는 마침내 하나의 작은 돌멩이가 되었다. 돌멩이처럼 보잘것없었고, 돌멩이처럼 무감각해졌다.
그리고 돌멩이가 말랑말랑해지려고 기를 쓰듯이 한 말씀을 얻어내려고 기를 썼다. 돌멩이가 말랑말랑해질 리 없듯이 한 말씀은 새벽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도 들려오지 않았다. 처절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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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 유적•유물/안동

안동은 경상북도의 중심지로,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곳이다. 조선 시대 유교 문화유산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회마을은 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전통 마을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사실 하회마을을 다니다 보면 의아한 느낌이 든다. 기와를 얹은 양반집과 양인들이 사는 초가집이 한데 모여 있기 때문이다. 기와집 근처에 몰려 있는 초가집 사람들은 대부분 양반집에서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들이었다. 즉, 도적이 약탈을 시도할 때소작농들이 모여서 양반집을 보호하는 형태였다고 보면 된다. 아름다운 전통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신분제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안동하면 임청각의 주인 이상룡을 기억해야 한다. 이상룡은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한 저명한 독립운동가다. 안동은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이면서 상대적으로 매우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의병항쟁을 시작한 이상룡은 입장을 바꾸어 애국계몽운동을 벌인다. 이후 1910년 조선이 강제병탄을 당하는 와중에 신민회에 참여, 신흥무관학교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또 서로군정서를 이끌며 임시정부에 참여했고 1925년에는 국무령에 취임하기도 한다. 보수적인 양반 마을에서 태어나서 급진적인 무장투쟁을 진행하고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의 지도자로 선다는 것은 보통 결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 그가 국무령으로 취임했던 때는 임시정부가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이상룡은 가치와 이상을 따르는 위대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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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뭘 어째보겠다는 요량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때때로 혼자 있고 싶어 미칠 것 같을 때가 있다. 좋은 딸들을 둔 것도 복에 겨워 저런다고 흉잡힐 만한 청승인지라 될 수 있는 대로 겉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이런저런 부자유가 사람을 지치게 한다.

미사 보는 동안도 내내 자식 잡아먹은 내 모성의 독함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는 아직도 그 애가 누워 있는 산에도 못 가봤다. 즈이 아버지 발치에 누워 있다니 내 발길이 여러 번 미친 산이건만, 그 애가 묻힐 때도, 묻힌 후에도 못 가봤으니 그 산은 나에게 미지의 산일 수밖에 없다. 에미가 눈 뜨고 살아 있으면서 그 애가 어떻게 묻히고 어떤 모양으로 누워 있는지 확인도 안해봤으니 세상에 그런 못된 에미가 어디 있을까.

나는 그때 분명히 기절하지 않았는데도 누군가 주사로 일부러 기절을 시켜 장례에서 빼돌려버렸다. 당해야 할 고통은 아무리 못할 노릇이라도 그 자리를 피하지 않는 게 옳다. 일생 피할 수가 없게 되고 만다.

그러나 내가 놀란 건, 그 애의 피곤보다도 그 크림통보다도 작은 필름통 속에 유명(幽明)이 함께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유람선 사진 몇 장만 빼고는 다 그 애가 죽은 후의 날짜로 돼 있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거리의 단위나 감각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길 없이 멀고 먼 이승과 저승이 어쩌면 그 작은 필름통 안에 그리도 친근하게 밀착돼 있었더란 말인가. 나에겐 그 필름통이 마치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가련한 인간의 운명처럼 느껴졌다.

아이는 할머니한테 선물이라며 주머니에서 산에서 주웠다는 알밤을 주섬주섬 꺼내놓는다. 고맙다, 고마워. 나는 선물도 고맙고 아이들이 무사히 돌아온 건 더 고마웠다.

아무리 좋은 일도 그걸 못이 박힌 가슴으로 느껴야 할 때 어떠하다는 걸 네가 알 리가 없지, 또 알아서도 안되고, 그러나 너도 손가락에 가시 같은 게 박혀본 적은 아마 있을 것이다. 가시 박힌 손가락은 건드리지 않는 게 수잖니? 이물질이 닿기만 하면 통증이 더해지니까. 에미에게 너무 잘해주려고 애쓰지 말아라. 만약 손가락 끝에 가시라도 박힌 경험이 있다면 그 손가락으로는 아무리 좋은 거라도, 설사 아기의 보드라운 뺨이라도 아픔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만져볼 수 없다는 걸 알 테지. 그런 손가락은 안 다치려고 할수록 더욱 걸치적거린다는 것도. 못박힌 가슴도 마찬가지란다. 오오, 제발 무관심해다오. 스스로 견딜 수 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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