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명문장/조선경국전

<조선경국전》은 조선 건국 후 국가 운영을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법전 중 하나로정도전이 썼다. 조선은 건국 1년 전 과전법을 단행하여 권문세족의 토지를 혁파하고, 소작농에게 땅을 나누어주는 대대적인 토지 개혁을 실시했다. 토지 문제를 경제 모순의 근원으로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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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 속에 살면 풍요는 사라진다.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이고 조용한 것은 한 사람에게 굳어진 성질 이상을 말하지 않지만 관계를 지향하지 않는 데는 의지가 들어 있다. 어떤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면, 굳이, 다수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성적이거나 비사교적이어서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는 것도 아니고 마냥 조용하다는 것도 아니었다. 선배의 말을 듣기 전에는 나도 그렇게까지 선명하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가 관계지향적이지 않다는 걸 알아봐주고 ‘발화’해준 선배와의 관계를 그 후로 몹시 ‘지향’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세상에는 보풀을 꼭 떼야 심신에 안정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세상에 별다른 해악을 주지도 않으며, 오히려 니트의 미감에 복무한다.

나는 내가 이런 종류의 ‘멈칫’을 좋아한다는 걸 안다. 흐릿하고 납작한 일상에 침입하는 낯선 단어들. 어휘에 대한 감각은 사람마다 너무 달라서 어떤 이에게는 이런 일들이 ‘쓸데없이 어려운 말’, ‘먹물스러움’, ‘오글거림’으로 느껴진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물질은 압축될수록 좋고 정신은 확장될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박절하다’가 있는 일상이 내겐 확실히 덜 박절하다.

나도 ‘부캐’2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의 이름은 이조금이다. 세상에 ‘조금’만 해를 끼치고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그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스스로 바꾼 이름이다.

애틋하지도 무심하지도 않은 건 책뿐이 아니다. 부모와 형제, 친구, 식당의 손님들, 건물의 임대인, 다세대 빌라의 관리인, 주거래 은행의 직원들, 헤어진 연인, 또는 앞으로 만날 연인, 주차장을 함께 쓰는 이웃들, 심지어 아홉 살 난 딸아이까지. 이조금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을 적절한 거리와 책임으로 대한다. 계획에 없던 아이가 생겼을 때, 그리고 2년 전 아이의 아빠와 헤어졌을 때도 그랬다. 이조금은 사실을 사실대로만 받아들이고 그 이상을 판단하지 않는다.

사람이든 뉴스든 이조금이 일부러 피하는 것은 없지만, 이조금을 어떤 강렬한 상태에 오래 머물게 하는 것도 없다.

그러니까 이조금은 ‘지나가는 사람’이다.

이조금은 지나가는 사람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하다. 잠시 지나갈 곳이라면 너무 많은 짐을 부리지 않게 된다. 잠시 지나갈 곳이라면 너무 많은 시선을 주고받지 않게 된다. 잠시 지나갈 곳이라면 그곳에서 발생하는 모든 기쁨과 슬픔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지나가는 망나니’가 될 수 없다는 의식이 이조금에겐 중요하다. 지나가는 망나니는 갑작스럽고 불쾌한 주제에 복수조차 불가능하니까.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이조금은 매일 아침 식당 문을 열고, 틈틈이 딸아이를 챙기고, 꼬박꼬박 은행 대출금을 갚고,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이와 위 등을 검진받는다. 지나가되, 망나니로서 지나가지 않으려면 성실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조금은 알고 있다.

오늘도 나에겐 밤이 있지, 심지어 밤은 매일 있어,
라고 생각할 때의 은밀한 희열이 있다.
밤에 읽는 책은 낮에 읽는 책보다 명료하다.
밤에 듣는 음악은 낮에 듣는 음악보다 우아하다.
밤에 하는 생각은 낮에 하는 생각보다 반자본적이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더럽혀지지 않고, 동시에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깨끗해지지도 않는, 어떤 작은 공간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다가 ‘아아-’ 하고 소리를 내보기도 했다. 나만 말하는 집, 나만 듣는 집.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집.

이 안타까움이 남아 있는 한, ‘지나치게’ 의존적인 사람으로 늙어가지는 않을 거라고, 내 몸을 내가 가눌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내 정신도 내가 가눌 수 있게 해보겠다고, 변명인지 최면인지 모를 다짐도 한다. 그렇지만 변명이든 최면이든 다짐이든, 반복의 힘이란 무서운 것 아닌가.

무엇보다 ‘밤’을 얻었다. 밤에 대한 내 감정은 이중적이다. 일조량에 예민하기 때문에 해가 짧아지면 기운이 달리면서도, 달이 뜨고 세상의 소란이 잦아들 때부터 느껴지는 느슨한 감각을 사랑한다. 그것은 하루가 또 무탈히 소멸했다는 데 대한 안도감이기도 하다. 눈알을 굴리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뒷목을 잡고, 악다구니를 쓰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는 시간. 눈에 힘을 풀고, 신경을 해산하고, 뒷목을 베개에 대고, 목소리를 아껴도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시간. 아무 죄책감이 없기에 뭐라도 해보고 싶은 시간.

통장의 잔고가 줄고 내달을 계획하기 어려워도, 오늘도 나에겐 밤이 있지, 심지어 밤은 매일 있어, 라고 생각할 때의 은밀한 희열이 있다. 밤에 읽는 책은 낮에 읽는 책보다 명료하다. 밤에 듣는 음악은 낮에 듣는 음악보다 우아하다. 밤에 하는 생각은 낮에 하는 생각보다 반자본적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어둠 때문일까. 너무 많은 자극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마침내 고개를 내밀기 때문일까. 우리는 모두 모체의 자궁이라는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 생을 시작했으므로, 밤으로부터 그 오랜 기억을 호출하는 것일까. 아니면 잠 때문일까. 나의 잠이 아닌 남의 잠.

곤히 잠든 인간의 모습은 내게 대체로 항복을 얻어낸다. 힘들었겠다, 당신도. 그래서 쉬고 있겠지. 당신의 아주 오래된 적이 당신을 기습한다 해도 지금은 어떤 방어도 하지 못할 연약함으로, 그저 잠들어 있네.

실체가 있는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마음은 글이 안 써질수록 간절해진다. 어린아이가 애착 인형을 끌어안듯 뭐라도 눈앞에 두거나 손에 쥐고 싶다(조카가 공갈젖꼭지를 물던 시절, 저걸 나도 하나 사서 하루에 딱 한 시간만 사용해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내게 어떤 집착할 만한 물건이 없다는 사실, 물건에 마음을 붙여본 일이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차고 시리다. 물건을 소유하는 일도 관계 맺기와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까이 두고, 보살피고, 특정한 기억을 투영하고, 함께 낡아가는 과정은 유대와 결속의 감정을 제공한다. 미니멀리스트나 맥시멀리스트나 인간에겐 최소한의 끈이 필요하다. ‘최소한’의 기준이 천차만별일 뿐.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없이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다.

한 사람에게 필요한 끈은 어느 정도이며,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끈은 또 어느 정도일까.
당연히, 관계의 ‘양’이 정신의 만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드레스룸에 온 동네 사람이 입고도 남을 옷이 가득해도 철이 바뀌면 웬일인지 입을 게 없다. 핸드폰에 전화번호가 수천 개여도 전 지구에 나보다 찌질한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싶은 어느 새벽의 외로움은 전혀 경감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고독을 방어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인다. 아니,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미니멀로 사느냐, 맥시멀로 사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죽을 때까지 오늘은 이 끈, 내일은 저 끈, 돌아가며 만지작거리더라도, 외롭다고 해서 아무 끈이나 동여매 질식하는 일은 없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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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 학문•철학/지눌

지눌(1158년~1210년)은 고려의 고승이자 조계종의 창시자다. 수선사 결사를 주도하며 고려 불교의 개혁을 이끌었고 ‘돈오점수(깨달음은 단번에 하지만 번뇌의 소멸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를 주창했다.

고려 중기 무신 집권기에는 좀 더 적극적인 불교 개혁이 모색됐다. 불교 개혁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지눌이었다. 오늘날 송광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수선사를 중심으로 결사운동을 벌였는데, 그도 의천처럼 ‘정혜쌍수‘ 즉, 선종과 교종의 수행 방법을 함께 닦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또 돈오점수라는 독자적인 선종 수행방법을 제안했는데, 이후 한국 선종의 가장 중요한 수행 방법으로 자리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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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위험한 이유는 자신이 무얼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진리를, 나는 늘 가스 불 앞에서 실감한다.

모르는 일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지 우선 생각해봤다.
그것은 바로 만용을 부리지 않는 것이었다.

스스로 무용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때는 ‘큰 성공’보다 ‘작은 실패’가 도움이 된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성공(이라고 불리는 것들)에는 나 자신이 통제하기 어려운 변수가 너무 많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실패는 다르다. 실패는 그 자체보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나를 단련시키기 때문이다. ‘작은’ 실패가 중요한 건 그 때문이다. 너무 한 방에 때려눕히는 실패 말고, 몇 번쯤 겪어도 스리슬쩍 넘어갈 수 있는 실패. 몇 번 반복해도 그렇게 막 난리가 나지는 않는구나, 하는 안도감을 주는 작은 실패들. 그 경험이 훨씬 소중하고 장기적으로 쓸모가 크다.

이 지경에 이르면 저 모든 일을 실제로 하는 것만큼의 에너지가 들지만 ‘아직 못 했다’는 점에서 스트레스가 폭증하면서 형언하기 어려운 피로가 몰려온다. 안 좋은 기분에 더 안 좋은 기분이 원플러스원 행사 상품처럼 딸려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의지와 힘을 들여 생각을 중단해야 한다. 이때부터의 생각은 그저 ‘기분 탓’이기 때문이다. 쉽지는 않다. 생각은 컨베이어 벨트 같은 속성이 있어서 가만히 두면 가던 방향대로 가기 마련. 생각을 멈추려면 ‘내가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는 것이 먼저다. 움직이고 있었다는 걸 알아야 정지 버튼을 누른다.

정신노동을 하는 경우, 특히 그것이 창작의 영역인 경우에는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생각들이 흘러가다가 어떤 착상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있어서 생각의 온/오프 스위치를 통제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그러니 계속 ‘생각하는 상태’에 올라가 있는 것이다. 생각을 멈추는 방법은커녕 생각하지 않는 상태가 어떤 건지 감이 오지 않을 때가 많다.

‘생각하지 않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훈련의 고통에 대해, 자신을 노리는 적수에 대해, 야유와 비난에 대해, 또는 무지막지한 기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하기 때문에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진짜로 있다. 그런 재능이 전혀 없는(나 같은) 사람은 그럼 어쩌란 말인가. 평생 원플러스원 행사 상품처럼 딸려오는 ‘안 좋은 기분’과 ‘비효율’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월리스는 이에 대해서 약간의 위로를 건넨다. "선수들 같은 천상의 재능을 갖지 못한 구경꾼인 우리야말로 자신이 허락받지 못한 재능의 경험을 진정으로 보고 서술하고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인생은 과거의 연속이고 현재는 과거의 업보다. 결혼을 하든 이사를 하든 성형수술을 하든, 인생은 결코 ‘싹 다 갈아엎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갈아엎고 싶지 않은 인생이 있을까. 간절히 갈아엎고 싶은데 도무지 갈아엎어지지 않으므로,
비가 내린다.
발자국을 씻어준다는 논리(?)가 그래서 뭉클하다. 물에 씻겨 내려가는 흔적들. 나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과거의 상흔들이 차가운 빗줄기에 섞여 흩어진다면, 문득 어깨를 펴고 힘차게 출발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는 게 새삼 힘들 때 생각한다. ‘어쩌다-이렇게-되었지?’ 먼저, ‘어쩌다’부터. 나의 현재를 만든 원인들을 돌이켜본다. 게으름? 무능? 잘못된 선택? 금수저 아님? 알 수 없다. ‘그렇게 될 일은 결국 그렇게 된다’고, 인디언들은 말했다지 않은가.

비가 내린다.
네가 지금껏 걸어온 자국을 지워줄 테니, 시침을 뚝 떼고 한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새로 걸어가보라고. 첫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출발해보라고. 심기일전을 독촉하는 비. ‘마음의 틀(心機)’이 ‘한 번 바뀐다(一轉)’는 뜻은 얼마나 정확한가. 인간은 제 마음의 틀에 매여 살고, 내 마음의 틀은 내 모든 과거가 주조한 것이다. 과거가 반듯해서 반듯한 틀을 갖고 사는 사람도 있고, 과거가 울퉁불퉁해서 울퉁불퉁한 틀을 갖고 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반듯한 삶이든 울퉁불퉁한 삶이든 고단하지 않은 삶은 없고, 고단한 인간은 소망한다. 아, 시발 그냥, 틀 자체를 뒤집고 싶다고. 내 것이 아닌 틀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끼니는 그저 반복되는 것이지만 반복되기에 강한 것이었다. 따뜻한 한 끼는 많은 순간에 어떤 사람을 일으키거나 버티게 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좀 늦게 알았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고작’ 먹는 일 따위가 아니라 무언가 더 추상적이고 원대한 감응일 거라고 오랫동안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음이 비 맞은 새처럼 처량한 날에 나를 다독여준 것은, 무슨 원대한 감응의 순간보다는, 멸치 육수가 진하게 우러난 잔치국수 한 그릇이었다. 아니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돈가스, 그것도 아니면 맑은 된장국을 곁들인 오므라이스 한 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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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노동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이상하리만치 꾸밈없는 명랑함이었다. 세상에, 참 이상도 하지. 나는 여기 들어온 후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소리를 속으로 뇌까렸는지 모른다. 한창 예쁜 옷과 재미난 일을 탐하고 이성에 이끌리고 행복한 가정을 꿈꿀 나이였다. 좀 특별한 능력이나 야망이 있다고 해도 이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 안에서 노력을 하든지 팔짝팔짝 뛰는 걸 정상으로 보는 게 내 상식의 한계였다.

내가 극도로 감정적일 때 될 수 있는 대로 이성적인 방법으로 신을 제시해보려는 게 역시 수녀님다웠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분을 믿기 위해서 한번 크게 건너뛰는 일은 내 소관이지 누가 도와줘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견딜 수 없는 느낌이 도질 것 같았다. 그럼 지금은 견딜 만한가? 적어도 내 몸이 곧 죽어져 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믿지는 않게 되었다. 따라 죽을 수 있으리라는 것도 교만이요, 환상이라는 걸 받아들일 채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은 살 궁리인가? 역겹고 비참하지만 자신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그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걸 어쩌랴.

어려서 무서운 꿈을 꾸다가 흐느끼며 깨어난 적이 있었다. 꿈이었다는 걸 알고 안심하고 다시 잠들려면 옆에서 어머니가 부드러운 소리로 말씀하셨다.
"얘야 돌아눕거라, 그래야 다시 못된 꿈을 안 꾼단다." 돌아누움, 뒤집어 생각하기, 사고의 전환, 바로 그거였어. 앞으로 노력하고 힘써야 할 지표가 생긴 기분이었다. 나는 내 속에 생긴 희미한 희망 같은 것을 보듬어안고 그들이 헤어지기 전에 먼저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막상 혼자가 되고 나니 그게 아니었다. 바로 거기서 거기 같던 사고의 차이가 나로서는 절벽 끝에서 다른 절벽 끝을 향해 심연을 건너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엔 남의 불행이 위안이 되는 고통이 얼마든지 있다. 세상사람들이 예서제서 자기들의 근심이나 걱정을 위로받으려고 내 불행을 예로 들어가며 쑥덕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남의 고통에 쓸 약으로서의 내 고통, 생각만 해도 끔찍한 치욕이었다.
주여, 어찌하여 나를 이다지도 미천하게 만드시나이까. 나는 마음으로 무릎을 꺾으며 이렇게 탄식했다.

그 애를 잃고도 죽지 못하고 살아가야 할 앞날이 얼마나 치욕스러우리라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나는 거러지만도 못하게 헐벗은 마음으로 오래도록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 애가 이 세상에서 없어진 후 이렇게까지 수치스럽고 피폐한 심정이 되어보긴 처음인 것 같았다. 이곳을 떠나기로 속으로 정해놓고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수녀가 될 수 없는 바에야 세속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 최소한의 염치였다.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 모상대로 지어내셨다는 말씀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그다지도 잔인하고 천박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정말 왜 이 모양일까? 어쩌자고 고통에 있어서조차 교만하고 싶어하는가? 내가 왜 주님을 느낄 수가 없는지 알 것 같았다. 주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나는 주의 눈 밖에 날 밉상만 고루 갖추고 있으니까.

얼마 만이었을까, 한 생각이 떠올랐다. 텅 빈 머리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어서인지 그건 내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라기보다는 계시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미사시간에도 기도시간에도 산책하면서도 긴긴 밤 잠 못 이루면서도 신에 대한 내 물음은 딱 한 가지였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그렇게 크게 잘못했기에 이런 무서운 벌을 받아야 하느냐는, 질문이라기보다는 포악이요 항의였다. 그러니까 내가 신의 부당함을 항의하고 내가 억울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나는 그닥 죄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죄가 있다면 어디 말해보시지 하는 신에 대한 일종의 시험이었다. 십자가 밑에서 밤새도록 몸부림치며 구해도 얻어낼 수 없었던 응답이 하필 변기 앞에 무릎 꿇고 앉았을 때 들려올 게 뭐였을까? 그때 계시처럼 떠오른 나의 죄는 이러했다.

나는 남에게 뭘 준 적이 없었다. 물질도 사랑도. 내가 아낌없이 물질과 사랑을 나눈 범위는 가족과 친척 중의 극히 일부와 소수의 친구에 국한돼 있었다. 그 밖에 이웃이라 부를 수 있는 타인에게 나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위선으로 사랑한 척한 적조차 없었다. 물론 남을 해친 적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모르고 잘못한 적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의식하고 남에게 악을 행한 적이 없다는 자신감이 내가 신에게도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대들 수 있는 유일한 도덕적 근거였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은,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야말로 크나큰 죄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 벌로 나누어도 나누어도 다함이 없는 태산 같은 고통을 받았음을, 나는 명료하게 깨달았다. 하필 변기 앞에 무릎 꿇은 자세로, 나는 그 정답에 머리 숙여 승복했다. 나중에 나의 간지(奸智)가 또다시 빠져나갈 구멍을 찾게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은 그건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정답이었다. 그리고 구원이었다. 고통도 나눌 가치가 있는 거라면 나누리라.

참척을 겪은 에미는 그래 마땅했다. 살고 싶지 않은 게 거짓이 아닌 바에야 육체가 정신의 소망을 따라주는 건 당연했다. 나는 이렇게 내 식욕 없음에 체면과 자존심을 걸고 있었다. 아니 희망까지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먹기 싫으니 차츰 쇠약해지면서 죽어가겠지 하는. 그리하여 나의 식욕 없음은, 미구에 아들 뒤를 고통 없이 따라갈 수 있으리란 희망이었다.

양을 자제했기 때문에 더욱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내려오면서 나는 내 육신과 정신의 분열이 한없이 창피하고 슬퍼서 몸둘 바를 몰랐다. 할 수 있는 말은 다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날 이후 내 배는 영락없이 끼니때만 되면 고파왔다. 그 이상 얘기한다는 것은 너무도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다. 참척을 겪은 기막힌 애통과 절망은 당연히 에미의 목숨을 단축시킬 줄 알았다. 살고 싶지 않은 게 조금도 거짓이 아닌 이상 육신은 의당 거기 따라주려니 했다. 그러나 내 육신은 내 마음과는 별개의 남처럼 끼니때마다 먹고 살고 싶어하는 게 아닌가. 나는 내 육신에 대해 하염없는 슬픔과 배신감을 느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내 아들이 없는 세상에 나가서 시도해야 할 홀로서기가 한결 덜 두렵게 여겨졌다. 그래, 나에겐 딸들이 넷이나 되지 않나. 그 애들이 내 홀로서기를 힘껏 도와주리라. 나는 그 동안 딸들 생각을 너무 안했다. 어쩌면 피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외아들을 잃었다는 무서운 사실을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때, 만일 딸들 중의 하나를 잃었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치밀려고 했었다.

나는 무서워서 피하던 생각과 이제 두려움 없이 직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잃은 게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다고 해도 애통이 조금이라도 덜하진 않았겠지만 남들이 나를 덜 불쌍하게 여기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 그건 인정하자. 그러나 내가 나를 아들딸에 의해 더 불쌍해하거나 덜 불쌍해하지는 말자. 어디선지 모르게 그런 자신이랄까, 용기 같은 게 생겼다. 수녀님들 덕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수녀 생활을 세상일이 잘 안 풀린 여자들의 마지막 도피처쯤으로 여겨왔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여기서 수녀님들과 생활을 같이하면서 수도 생활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이 세상 밑바닥에 깔린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 못 가진 이들, 버림받아 외로운 이들과 함께 있으려는 크나큰 용기라는 걸 확연히 알 수가 있었다. 이곳 수녀님들은 내가 보기엔 더할 나위 없는 청빈과 근면과 봉사의 생활을 하면서도 여기 생활이 안일한 게 아닌가 늘 반성하는 것 같았다.

수녀원을 나와 딸네 집에서 며칠 더 유하고 나서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사이에 나는 다시 홀로서기에 자신이 없어졌다. 하루 세끼 밥을 찾아먹고 그 밥을 소화시킬 수 있을 만큼 몸이 회복됐다고 해서 살아갈 능력이나 의욕까지 회복된 건 아니었다. 우리 동네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내 아들이 없어진 동네에서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풍경과 길과 상가와 동네 사람들을 대하며 살아갈 일이 무서워서 가슴이 떨렸다. 내가 도처에서 한시도 잊지 못할 내 아들 없는 빈자리를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느끼지 않고 태연하게 히히덕대며 살아갈 게 아닌가. 그걸 참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순 어거지 같은 생각이었다.

사람 만나는 게 극도로 싫었다. 아는 사람뿐 아니라 길에 지나다니는 모르는 사람까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자연 외출도 두려워하게 되었다. 딸이나 사위가 자기네 친구가 찾아오는 것까지 내 눈치를 보며 쉬쉬하기에 이르러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남의 처지나 고통을 헤아리는 마음이 마비돼 있었다.

그때 나는 몇 날 며칠을 밤이나 낮이나 주님을 찾아 대들고 몸부림쳤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 한 말씀만 하시라’고 애걸복걸도 해보았다. 그러나 주님은 끝내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어쩌면 나직하고 그윽하게 뭐라고 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늦게 난 철처럼 슬며시 왔다.
그래, 분명히 뭐라고 그러셨을 거야. 다만 내 귀가 독선과 아집으로 꽉 막혀 못 알아들었을 뿐인 것을. 하도 답답해서 몸소 밥이 되어 찾아오셨던 거야. 우선 먹고 살아라 하는 응답으로. 그렇지 않고서 그 지경에서 밥 냄새와 밥맛이 그렇게 감미로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기는 우리 아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고장이다’라는 생각이 처음에는 홀가분하고 편하더니만 점점 그것도 별게 아닌 게 되었다. 내 아들의 추억과 전혀 연관지을 수 없는 이국의 풍경과 사람들은, 내 아들이 죽었는데도 히히덕대며 일상을 영위하는 내 나라 사람들이 꼴 보기 싫은 것과는 다른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외로움이라고 해도 좋았다. 별안간 악이라도 써서 구원을 청해야 할 것처럼 그 외로움은 절박했고, 집에서보다 밖에 나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을 때 한결 더했다.

신경을 곤두세워도 한두 마디 알아들을까 말까 한 것도 괴로웠지만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그 이질적인 리듬이었다. 그 이질감은 여기는 네가 놀 물이 아니라는 소외감을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있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만약 어떤 피치 못할 운명이 나를 이 땅에 죽을 때까지 묶어두는 일이 생긴다면, 생전 호강을 보장해준다고 해도 아들을 잃은 고통 다음 가는 고통이 되리라고.

역설적인 얘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나의 홀로서기는 내가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가까이서 멀리서 나를 염려해준 여러 고마운 분들을 비롯해서 착한 딸과 사위들, 사랑스러운 손자들 덕분이다. 나만이 알고 느끼는 크나큰 도움이 또 있다. 먼저 간 남편과 아들과 서로 깊이 사랑하고 믿었던 그 좋은 추억의 도움이 없었다면 내가 설사 홀로 섰다고 해도 그건 허세에 불과했을 것이다. 나는 요즈음 들어 어렴풋하고도 분명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이런 도움이야말로 신의 자비하신 숨결이라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주여, 저에게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여 너무 집착하게는 마옵소서."

납득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고통 앞에 서본 이라면, 그래서 다시는 눈을 뜨지 않게 되기를 꿈꾸며 잠들었던 밤과 실눈 뜬 사이로 낯익은 천장 벽지 무늬가 보였을 때 그 새벽 햇살의 참담함을 기억하는 이라면, 아마도 쉽게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수도 없이 신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었던가를. 얼마나 자주 죽음을 꿈꾸었었던가를. 절망 속에서도 어떻게 희망이 자라나며, 죽음에의 유혹 속에서도 어떻게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는지를.

자식을 잃은 어미로서의 슬픔과 이를 감내하는 과정의 내밀한 모습들이 가식 없이 그대로 담겨 있는 고백이며, 그 고백은 독자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과 신을 향해 있다. 그 고백은 떠나간 아들에 대한 어미로서의 비통함과 절절한 그리움으로 시작하여, 아들의 빈자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는 세상에 대한 분노로, 그리고 다시 그토록 어처구니없이 생명을 주관하는 신을 향한 저주로 이어진다.

생때같은 아들이 사라졌는데 왜 세상은 무너지지 않느냐고, 왜 하늘은 여전히 푸른 것이냐고, 이러고도 신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냐고, 그녀의 뒤틀린 심사는 자신을 부정하게 하고 세상을 부정하게 하며 급기야 신을 부정하게 만든다. 신은 오로지 자신의 살의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이 글은 이런 살의와 분노와 회의로 가득 찬 무엄한 포악에 가깝다.

박완서 개인의 내면적 기록인, 더구나 저주와 분노와 포악으로 일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글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리고 이 글을 박완서 문학의 중요한 일부로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이처럼 이 글이 단지 아들 잃은 어미로서의 비통함을 토로하고 기록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하여 삶과 죽음, 신의 문제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이 글은 자식 잃은 어미의 슬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 슬픔이 이끌어가는 생명과 존재에 대한 인식의 깊이에 있어서 우리의 주목을 요한다.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는 존재의 허망함에 대하여, 그 하찮은 존재 안에 불어넣어진 진한 사랑에 대하여,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되는 삶의 길과 신의 부르심에 대하여, 절망의 심연 속에서도 꿈틀대는 본능적 생명의 움직임에 대하여, 신의 존재방식에 대하여, 그녀의 질문은 계속되고, 결국 이 과정에서 그녀는 죽음으로의 이끌림에서 다시 삶 속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들을 잃은 후 세상을 피해 숨어들고 다시금 세상 속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이 그대로 하 나의 놀라운 서사적 구성을 지니고 있는 셈인데, 그 끝에서 생명에의 경외를 다시금 확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글은 박완서 문학의 가식 없는 원천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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