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 속에 살면 풍요는 사라진다.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이고 조용한 것은 한 사람에게 굳어진 성질 이상을 말하지 않지만 관계를 지향하지 않는 데는 의지가 들어 있다. 어떤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면, 굳이, 다수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성적이거나 비사교적이어서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는 것도 아니고 마냥 조용하다는 것도 아니었다. 선배의 말을 듣기 전에는 나도 그렇게까지 선명하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가 관계지향적이지 않다는 걸 알아봐주고 ‘발화’해준 선배와의 관계를 그 후로 몹시 ‘지향’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세상에는 보풀을 꼭 떼야 심신에 안정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세상에 별다른 해악을 주지도 않으며, 오히려 니트의 미감에 복무한다.
나는 내가 이런 종류의 ‘멈칫’을 좋아한다는 걸 안다. 흐릿하고 납작한 일상에 침입하는 낯선 단어들. 어휘에 대한 감각은 사람마다 너무 달라서 어떤 이에게는 이런 일들이 ‘쓸데없이 어려운 말’, ‘먹물스러움’, ‘오글거림’으로 느껴진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물질은 압축될수록 좋고 정신은 확장될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박절하다’가 있는 일상이 내겐 확실히 덜 박절하다.
나도 ‘부캐’2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의 이름은 이조금이다. 세상에 ‘조금’만 해를 끼치고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그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스스로 바꾼 이름이다.
애틋하지도 무심하지도 않은 건 책뿐이 아니다. 부모와 형제, 친구, 식당의 손님들, 건물의 임대인, 다세대 빌라의 관리인, 주거래 은행의 직원들, 헤어진 연인, 또는 앞으로 만날 연인, 주차장을 함께 쓰는 이웃들, 심지어 아홉 살 난 딸아이까지. 이조금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을 적절한 거리와 책임으로 대한다. 계획에 없던 아이가 생겼을 때, 그리고 2년 전 아이의 아빠와 헤어졌을 때도 그랬다. 이조금은 사실을 사실대로만 받아들이고 그 이상을 판단하지 않는다.
사람이든 뉴스든 이조금이 일부러 피하는 것은 없지만, 이조금을 어떤 강렬한 상태에 오래 머물게 하는 것도 없다.
그러니까 이조금은 ‘지나가는 사람’이다.
이조금은 지나가는 사람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하다. 잠시 지나갈 곳이라면 너무 많은 짐을 부리지 않게 된다. 잠시 지나갈 곳이라면 너무 많은 시선을 주고받지 않게 된다. 잠시 지나갈 곳이라면 그곳에서 발생하는 모든 기쁨과 슬픔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지나가는 망나니’가 될 수 없다는 의식이 이조금에겐 중요하다. 지나가는 망나니는 갑작스럽고 불쾌한 주제에 복수조차 불가능하니까.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이조금은 매일 아침 식당 문을 열고, 틈틈이 딸아이를 챙기고, 꼬박꼬박 은행 대출금을 갚고,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이와 위 등을 검진받는다. 지나가되, 망나니로서 지나가지 않으려면 성실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조금은 알고 있다.
오늘도 나에겐 밤이 있지, 심지어 밤은 매일 있어, 라고 생각할 때의 은밀한 희열이 있다. 밤에 읽는 책은 낮에 읽는 책보다 명료하다. 밤에 듣는 음악은 낮에 듣는 음악보다 우아하다. 밤에 하는 생각은 낮에 하는 생각보다 반자본적이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더럽혀지지 않고, 동시에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깨끗해지지도 않는, 어떤 작은 공간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다가 ‘아아-’ 하고 소리를 내보기도 했다. 나만 말하는 집, 나만 듣는 집.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집.
이 안타까움이 남아 있는 한, ‘지나치게’ 의존적인 사람으로 늙어가지는 않을 거라고, 내 몸을 내가 가눌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내 정신도 내가 가눌 수 있게 해보겠다고, 변명인지 최면인지 모를 다짐도 한다. 그렇지만 변명이든 최면이든 다짐이든, 반복의 힘이란 무서운 것 아닌가.
무엇보다 ‘밤’을 얻었다. 밤에 대한 내 감정은 이중적이다. 일조량에 예민하기 때문에 해가 짧아지면 기운이 달리면서도, 달이 뜨고 세상의 소란이 잦아들 때부터 느껴지는 느슨한 감각을 사랑한다. 그것은 하루가 또 무탈히 소멸했다는 데 대한 안도감이기도 하다. 눈알을 굴리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뒷목을 잡고, 악다구니를 쓰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는 시간. 눈에 힘을 풀고, 신경을 해산하고, 뒷목을 베개에 대고, 목소리를 아껴도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시간. 아무 죄책감이 없기에 뭐라도 해보고 싶은 시간.
통장의 잔고가 줄고 내달을 계획하기 어려워도, 오늘도 나에겐 밤이 있지, 심지어 밤은 매일 있어, 라고 생각할 때의 은밀한 희열이 있다. 밤에 읽는 책은 낮에 읽는 책보다 명료하다. 밤에 듣는 음악은 낮에 듣는 음악보다 우아하다. 밤에 하는 생각은 낮에 하는 생각보다 반자본적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어둠 때문일까. 너무 많은 자극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마침내 고개를 내밀기 때문일까. 우리는 모두 모체의 자궁이라는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 생을 시작했으므로, 밤으로부터 그 오랜 기억을 호출하는 것일까. 아니면 잠 때문일까. 나의 잠이 아닌 남의 잠.
곤히 잠든 인간의 모습은 내게 대체로 항복을 얻어낸다. 힘들었겠다, 당신도. 그래서 쉬고 있겠지. 당신의 아주 오래된 적이 당신을 기습한다 해도 지금은 어떤 방어도 하지 못할 연약함으로, 그저 잠들어 있네.
실체가 있는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마음은 글이 안 써질수록 간절해진다. 어린아이가 애착 인형을 끌어안듯 뭐라도 눈앞에 두거나 손에 쥐고 싶다(조카가 공갈젖꼭지를 물던 시절, 저걸 나도 하나 사서 하루에 딱 한 시간만 사용해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내게 어떤 집착할 만한 물건이 없다는 사실, 물건에 마음을 붙여본 일이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차고 시리다. 물건을 소유하는 일도 관계 맺기와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까이 두고, 보살피고, 특정한 기억을 투영하고, 함께 낡아가는 과정은 유대와 결속의 감정을 제공한다. 미니멀리스트나 맥시멀리스트나 인간에겐 최소한의 끈이 필요하다. ‘최소한’의 기준이 천차만별일 뿐.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없이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다.
한 사람에게 필요한 끈은 어느 정도이며,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끈은 또 어느 정도일까. 당연히, 관계의 ‘양’이 정신의 만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드레스룸에 온 동네 사람이 입고도 남을 옷이 가득해도 철이 바뀌면 웬일인지 입을 게 없다. 핸드폰에 전화번호가 수천 개여도 전 지구에 나보다 찌질한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싶은 어느 새벽의 외로움은 전혀 경감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고독을 방어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인다. 아니,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미니멀로 사느냐, 맥시멀로 사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죽을 때까지 오늘은 이 끈, 내일은 저 끈, 돌아가며 만지작거리더라도, 외롭다고 해서 아무 끈이나 동여매 질식하는 일은 없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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