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위험한 이유는 자신이 무얼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진리를, 나는 늘 가스 불 앞에서 실감한다.

모르는 일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지 우선 생각해봤다.
그것은 바로 만용을 부리지 않는 것이었다.

스스로 무용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때는 ‘큰 성공’보다 ‘작은 실패’가 도움이 된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성공(이라고 불리는 것들)에는 나 자신이 통제하기 어려운 변수가 너무 많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실패는 다르다. 실패는 그 자체보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나를 단련시키기 때문이다. ‘작은’ 실패가 중요한 건 그 때문이다. 너무 한 방에 때려눕히는 실패 말고, 몇 번쯤 겪어도 스리슬쩍 넘어갈 수 있는 실패. 몇 번 반복해도 그렇게 막 난리가 나지는 않는구나, 하는 안도감을 주는 작은 실패들. 그 경험이 훨씬 소중하고 장기적으로 쓸모가 크다.

이 지경에 이르면 저 모든 일을 실제로 하는 것만큼의 에너지가 들지만 ‘아직 못 했다’는 점에서 스트레스가 폭증하면서 형언하기 어려운 피로가 몰려온다. 안 좋은 기분에 더 안 좋은 기분이 원플러스원 행사 상품처럼 딸려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의지와 힘을 들여 생각을 중단해야 한다. 이때부터의 생각은 그저 ‘기분 탓’이기 때문이다. 쉽지는 않다. 생각은 컨베이어 벨트 같은 속성이 있어서 가만히 두면 가던 방향대로 가기 마련. 생각을 멈추려면 ‘내가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는 것이 먼저다. 움직이고 있었다는 걸 알아야 정지 버튼을 누른다.

정신노동을 하는 경우, 특히 그것이 창작의 영역인 경우에는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생각들이 흘러가다가 어떤 착상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있어서 생각의 온/오프 스위치를 통제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그러니 계속 ‘생각하는 상태’에 올라가 있는 것이다. 생각을 멈추는 방법은커녕 생각하지 않는 상태가 어떤 건지 감이 오지 않을 때가 많다.

‘생각하지 않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훈련의 고통에 대해, 자신을 노리는 적수에 대해, 야유와 비난에 대해, 또는 무지막지한 기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하기 때문에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진짜로 있다. 그런 재능이 전혀 없는(나 같은) 사람은 그럼 어쩌란 말인가. 평생 원플러스원 행사 상품처럼 딸려오는 ‘안 좋은 기분’과 ‘비효율’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월리스는 이에 대해서 약간의 위로를 건넨다. "선수들 같은 천상의 재능을 갖지 못한 구경꾼인 우리야말로 자신이 허락받지 못한 재능의 경험을 진정으로 보고 서술하고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인생은 과거의 연속이고 현재는 과거의 업보다. 결혼을 하든 이사를 하든 성형수술을 하든, 인생은 결코 ‘싹 다 갈아엎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갈아엎고 싶지 않은 인생이 있을까. 간절히 갈아엎고 싶은데 도무지 갈아엎어지지 않으므로,
비가 내린다.
발자국을 씻어준다는 논리(?)가 그래서 뭉클하다. 물에 씻겨 내려가는 흔적들. 나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과거의 상흔들이 차가운 빗줄기에 섞여 흩어진다면, 문득 어깨를 펴고 힘차게 출발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는 게 새삼 힘들 때 생각한다. ‘어쩌다-이렇게-되었지?’ 먼저, ‘어쩌다’부터. 나의 현재를 만든 원인들을 돌이켜본다. 게으름? 무능? 잘못된 선택? 금수저 아님? 알 수 없다. ‘그렇게 될 일은 결국 그렇게 된다’고, 인디언들은 말했다지 않은가.

비가 내린다.
네가 지금껏 걸어온 자국을 지워줄 테니, 시침을 뚝 떼고 한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새로 걸어가보라고. 첫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출발해보라고. 심기일전을 독촉하는 비. ‘마음의 틀(心機)’이 ‘한 번 바뀐다(一轉)’는 뜻은 얼마나 정확한가. 인간은 제 마음의 틀에 매여 살고, 내 마음의 틀은 내 모든 과거가 주조한 것이다. 과거가 반듯해서 반듯한 틀을 갖고 사는 사람도 있고, 과거가 울퉁불퉁해서 울퉁불퉁한 틀을 갖고 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반듯한 삶이든 울퉁불퉁한 삶이든 고단하지 않은 삶은 없고, 고단한 인간은 소망한다. 아, 시발 그냥, 틀 자체를 뒤집고 싶다고. 내 것이 아닌 틀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끼니는 그저 반복되는 것이지만 반복되기에 강한 것이었다. 따뜻한 한 끼는 많은 순간에 어떤 사람을 일으키거나 버티게 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좀 늦게 알았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고작’ 먹는 일 따위가 아니라 무언가 더 추상적이고 원대한 감응일 거라고 오랫동안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음이 비 맞은 새처럼 처량한 날에 나를 다독여준 것은, 무슨 원대한 감응의 순간보다는, 멸치 육수가 진하게 우러난 잔치국수 한 그릇이었다. 아니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돈가스, 그것도 아니면 맑은 된장국을 곁들인 오므라이스 한 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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