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으로 의무교육을 받고도 불국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아직 경주에 가보지 못한 인생이야 있겠지만 경주를 보러 가서 불국사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국사는 우리나라 문화재 중 가장 높은 지명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불국사를 보고 나서 멋지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불국사를 보고 나서 시시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을까?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국사는 우리나라 문화재의 얼굴이며 한국미의 한 상징이다.

나의 주관적 견해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건축을 논하려면 반드시 사찰 건축을 거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중 뛰어난 절집이라면 당연히 영주 부석사, 순천 선암사, 경주 불국사가 꼽힐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세 절은 건축적 지향점, 특히 자연과의 조화 관계가 아주 다르다. 부석사는 백두대간의 여맥을 절 앞마당인 양 끌어안는 장엄한 스케일을 보여주고, 선암사는 부드러운 조계산 자락이 사방에서 감지되는 아늑한 산중에 자리 잡았는데, 불국사는 산자락을 타고 올라앉았으면서도 비탈을 평지로 환원하여 반듯하게 경영되었다. 그래서 부석사는 자리앉음새(location)가 뛰어나고, 선암사는 건물과 건물 간의 공간(space) 운영이 탁월하며, 불국사는 돌축대의 기교(technic)와 가람 배치(design)의 묘가 압권이다. 그런 저마다의 특징으로 인하여 한국 사람은 부석사를, 일본 사람은 선암사를, 서양 사람은 불국사를 더 좋아한다. 한국 사람은 부석사의 호방스러운 기상을, 일본 사람은 선암사의 유현(幽玄)한 분위기를, 서양 사람은 불국사의 공교로운 인공(人工)의 멋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불국사 전경| 회랑이 있는 쌍탑 1금당의 정연한 자태는 화엄불국토의 장엄한 모습이자 고대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보탑 | 석가탑과 달리 대단히 화려한 구성이지만 전혀 이질감이 없고 오히려 불국사의 다양함을 보여준다.

관음전에서 내려다본 회랑과 다보탑 | 불국사 가람 배치의 엄정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불국사 축대| 불국사 건축이 다른 사찰과 가장 큰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축대다. 반듯한 석축과 자연석을 서로 이가 맞도록 조성한 석축이 잘 어울린다.

불국사 건축의 아름다움은 석축(石築)으로부터 시작된다. 불국사 석축은 누구에게나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석축과 청운교·백운교 | 산자락을 다져 평지로 환원하기 위한 이 석축에는 불국토로 이르는 길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한 고대국가의 조화적 이상미가 구현되어 있다.

불국사의 석축은 곧 천상의 세계로 오르는 벽이다. 그 정상이 수미산인데 범영루가 이를 의미한다. 그래서 「역대기」에서는 ‘수미범종각’이라고 이름하였고, 그 정상의 누각에는 108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하였다. 108은 물론 백팔번뇌를 의미한다. 그리고 천상으로 오르는 청운교와 백운교는 모두 33계단으로 곧 33천(天)의 세계를 의미한다. 청운교와 백운교의 위치는 책마다 다르게 나오는데 「역대기」에 의하면 위가 청운교, 아래가 백운교로 되어 있고, 「동경기행」에서도 위가 청운, 아래가 백운이라고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아래 계단이 끝나면서 무지개다리 모양으로 돌이 깔려 있는 부분이 백운교이고, 위의 계단이 끝나면서 자하문(紫霞門) 문턱에 다리를 가설하듯 돌을 깐 것이 청운교라고 했다. 어느 말이 맞는지 모르지만 위가 청운교이고, 아래가 백운교이다.

불국사가 아무리 훌륭한 교리적 상징체계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것을 받쳐주는 형식을 제시하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술로나 건축으로나 실패를 의미할 뿐이다. 파노프스키의 친구로 그의 도상학에 동조하여 인도, 인도네시아의 불교미술을 해석한 쿠마라스와미(A.Coomaraswamy)는 『시바의 춤』(DanceofSiva)이라는 책에서 "과학에 근거하지 않은 예술은 아무것도 아니다"(The Art without science is nothing)라고 단언하면서 수리적 체계의 조화를 강조했는데 불국사는 그에 걸맞은 비례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한 분석은 요네다가 발표한 「불국사 조영계획에 대하여」라는 논문에 수치와 도면으로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수치란 비례 관계이며 그것이 조화(harmony)와 균제(symmetry)의 근거가 된다.

석가탑, 다보탑, 석등과 배례석,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금동비로자나불좌상, 불국사 사리탑, 그 어느 것 하나 나라의 보물 아닌 것이 없고, 명품 아닌 것이 없다.

첫 번째는 대웅전 정면으로 오르는 돌계단의 소맷돌 측면의 살짝 둥글린 곡선의 아름다움이다. 마치 옷깃의 선 맛을 낸 것도 같고, 소매끝의 곡선 같기도 한데 그 날카로운 듯 부드러운 아름다움엔 더할 수 없는 기쁨이 일고, 그런 미세한 아름다움을 구사한 옛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 놀라움이 일어난다. 우드 관장을 이 자리에 끌고 오자 그는 "믿을 수 없다!"(unbelievable)를 여러 번 되뇌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두 번째는 석가탑의 탑날개 직선의 묘이다. 사람들은 다보탑을 볼 때 그 화려한 구조의 묘를 자세히 살피면서도 석가탑은 전체적 인상만 즐길 뿐 세부적 관찰은 포기하곤 한다. 석가탑은 무엇보다도 지붕돌이 상큼하게 반전한 맵시가 일품이다. 그러나 이를 자세히 살피면 지붕돌은 기울기가 직선으로 되어 있고 반전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처마를 직선으로 뻗게 하다가 추녀 부분에서 살을 두툼히 붙여 급하게 깎아낸 것인데, 그것을 밑에서 올려다보니까 살포시 반전한 느낌을 갖게 된다. 착시 현상을 이용하여 곡선의 느낌을 창출한 것이다. 석가탑의 아름다움은 바로 우아한 부드러움이 있으면서도 견실한 힘이 느껴지는 이런 디테일의 묘에 있다.

세 번째는 석축의 그랭이법으로, 자연석 위에 얹힌 장대석을 자연석 모양에 따라 깎은 것이다. 외국인들은 대개 여기에서 자지러지듯 놀라며 인공과 자연의 조화에 얼마나 많은 공력과 계산이 들었는가를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극락전 바깥쪽 서쪽 면의 축대 쌓기에 이르면 그 감동은 절정에 이른다. 불국사 석축 정면에서 왼쪽으로 돌아서면 비탈길에 드러난 극락전의 석축이 있는데, 곧게 세운 세로줄 장대석을 가로지르는 허리축 걸림돌이 수평으로 뻗어가다가 오르막에서 급격한 꺾임새를 나타내는 동세는 천하의 일품이다. 수직 수평으로 교차하는 장대석을 마치 목조건축의 가구(架構)인 양 못처럼 박아놓은 동틀돌로 조이면서 입체적으로 돌출시킨 아이디어도 여간 놀라운 것이 아니다. 우드 관장과 경주를 함께 답사하고 헤어지면서 경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 하나만 꼽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어려운 문제라며 머뭇거리더니 결국은 이 극락전 서쪽 석축의 짜임새를 꼽았다. 그때 우드 관장은 정말 "경이롭다"(marvelous)라고 했다.

네 번째는 극락전 안양문에서 연화교를 내려다보면서 연꽃 무늬가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장면을 보는 것이다. 계절과 시각과 광선에 따라 선명도에 차이는 있지만 육안으로 반드시 간취된다. 우드 관장은 이 조각 새김을 보는 순간 "믿기지 않는다"(incredible)라고 했다.
다섯 번째는 관음전에 올라 관음전 남쪽 기와담 너머로 보이는 회랑과 다보탑을 꼭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보는 시각이, 회랑이 있는 절집의 정연한 기품이 무엇인가를 남김없이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불국사 석축 정면 | 90미터에 달하는 석축은 자연석과 인공석의 다양한 벽화로 이루어졌다. 돌계단의 설치로 긴 석축이 지루해 보이지 않고, 자연석 위에 인공석이 올라앉아 아주 조화롭다.

여섯 번째, 불국사 서북쪽의 빈터에는 불국사 복원 때 사용되지 않은 석조 부재들이 널려 있는데 이중 주춧돌이야 누구나 알 만한 것이지만, 뒷간에 사용되었던 타원형으로 구멍난 돌은 참 신기하고 재미있다. 또 한쪽에는 완벽한 단독 뒷간이 있다. 그것은 상상 외로 멋있고 조형적이다. 우드 관장이 이 멋있는 단독 뒷간을 보면서 왜 이것만 이렇게 잘 만들었는지 묻자 나는 즉흥적으로 "관장님 전용"(Director’s only)이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며 내가 유머 책을 쓰면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될 거라고 했다.

그랭이법 석축| 자연석의 초석을 깎는 것이 아니라 위에 얹는 장대석을 자연석에 맞추어 깎았다. 이런 기법을 목조건축에선 그랭이법이라고 한다. 다른 나라엔 예가 없다.

언젠가 나는 답사엔 초급, 중급, 고급이 있다고 했는데 불국사는 당연히 초급 코스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초급자가 초급 코스를, 중급자가 중급 코스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초급자가 오히려 중급 코스를 더 가고 싶어 하고, 중급자는 고급 코스에서 더 큰 매력을 느낀다. 그런데 고급자가 되어야 비로소 초급 코스의 진가를 알고 거기를 즐겨 찾게 된다. 그런 진보와 순환의 과정이 인생유전의 한 법칙이고 묘미인지도 모른다. 결국 불국사는 답사의 시작이자 마지막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놓쳐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사항은 작은 일각문 너머 있는 뒷간에 다녀오는 일이다. 일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서 멀리 불국사 강원(講院)을 합법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멀리 보이는 강원, 그것은 우리가 늘 보아온 산사의 한 정경인데 불국사가 회랑이 있는 평지 사찰로 경영되는 바람에 여기서 보는 산사의 편안한 분위기가 새삼 따뜻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그것을 우리는 불국사의 여운으로 삼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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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3-11-28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밑줄쳐주신 글 중에 고급자가 초급 코스의 진가를 알고 즐겨 찾는다는 문구가 뭔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억울한홍합 2023-11-28 20:08   좋아요 1 | URL
리뷰 남겨주신 거 보고 제가 더 배우고 감사해요^^
 

078. 사건/유신 체제

1972년부터 1979년까지 유지됐던 박정희 독재 체제, 독재 정권, 즉 권위주의 정권의 등장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문제였다. 이승만은 두 차례 헌법을 개정하면서 13년간 집권했고, 1961년 5.16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군부 세력은 소후 박정희를 중심으로 약 20년간 집권한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신군부가 등장하여 전두환 정권이 수립된다.

유신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의 임기는 6년인데, 무한정 연임이 가능하다.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데, 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박정희 정권의 심사를 받아야 했고 회의 의장 역시 박정희였다. 국회는 유신정우회(유정회) 일원이 의석의 삼분의 일을 사전에 할당받는데 유정회도 박정희 정권의 지지자들로 구성돼 있었다. 국회의원 선거는 중선거구제로 치러졌다. 한 지역구에서 두 명의 국회의원을 뽑았는데 못해도 여당 의원이 2위는 했기 때문에 국회의 삼분의 이는 여당 의원으로 채워졌다. 또 법관 심사 제도를 강화하여 사법부도장악하는데 그야말로 ‘무늬만 삼권 분립‘일 뿐이었다.
유신 체제 기간 동안 가장 악명 높았던 제도는 ‘긴급조치‘다. 대통령에 의해 발표되는 일종의 긴급 명령으로, 때에 따라 헌법의 일부 조항을 정지시킬 수 있고 긴급조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도 긴급조치 위반이 되곤 했다. 유신 체제에 강경하게저항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던 이들을 억압하기 위한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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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명작에는 해설이 따로 필요 없는 법이다. 그저 거기서 받은 감동을 되새기면서 즐거워하면 그만이다. 마치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아르헨티나와 축구 경기를 한 날, 멋진 골 장면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며 즐거워하는 축구팬의 모습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만약에 감은사 답사기를 내 맘대로 쓰는 것을 편집자가 조건 없이 허락해준다면 나는 원고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쓰고 싶다.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에 한번이라도 다녀온 분은 나의 이런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고, 또 거기에 다녀온 다음에는 모두 내게 공감할 것이 분명한데, 나는 지금 어젯밤 그 멋진 축구 경기를 못 보고 잠만 실컷 잔 사람들을 상대로 상황을 다시 떠올려 해설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는 셈이다.

감은사터 전경 |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의 정연한 가람배치로 이후 통일신라 절집의 한 모범이 되었다.

감은사터 쌍탑 | 쌍탑이 연출하는 공간감은 단탑과 달리 장중하고 드라마틱한 분위기가 있다.

이견대에서 바라본 대왕암 | 조선시대 정조 때 경주 부윤을 지낸 홍양호는 여기서 문무대왕의 뜻에 감사하는 제사를 올렸다.

신문왕은(…) 681년 7월 7일에 즉위하였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세웠다. 사중기(寺中記)에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되었는데,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682년에 마쳤다. 금당 계단 아래를 파헤쳐 동쪽에 한 구멍을 내었으니 그것은 용이 들어와 서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 생각건대 유조로 장골(葬骨)케 한 곳을 대왕암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으며, 그후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하였다.

감은사의 가람 배치는 정연한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으로 모든 군더더기 장식은 배제하였다. 이것은 이후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는 가람 배치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또 여기에 세워진 한 쌍의 삼층석탑, 이 감은사탑은 이후 통일신라에 유행하는 삼층석탑의 시원(始原)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것의 조형적 발전은 불국사 석가탑에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우리는 역사를 되새길 때 흔히 완성된 결실에서 그 가치를 논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미술 문화를 이야기할 때면 그 문화의 전성기 유물을 중심으로 논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전성기 양식 못지않게 시원 양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전성기의 전형을 파괴하는 양식적 도전을 보여주는데 이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전성기 양식은 정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시원 양식의 웅장한 힘은 갖추지 못하며, 말기의 도전적 양식이 갖고 있는 파격과 변형의 맛을 지닐 수 없다. 그 모든 과정은 오직 그 시대 문화적 기류와 취미의 변화를 의미할 따름인 것이다. 그렇게 인식할 때 우리는 문화와 역사의 역동성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다. 중국의 전탑(벽돌탑)과 일본의 목탑(목조건축)과 비교해서 생긴 말이다. 중국에서 처음 불교가 들어올 때는 목조건축 형식의 목탑이 유행하여 황룡사 구층탑 같은 거대한 건물을 세우게도 되었다. 이것을 석탑으로 전향하는 작업을 해낸 것은 역시 백제 사람들이었다.
익산 미륵사터에 남아 있는 한 쌍의 구층석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인데, 돌로 지었을 뿐 거의 목조건축을 모방한 것이었다. 이를 발전시켜 건축 부재의 표현을 간소화하면서 석탑이라는 양식, 기단부와 각층의 몸돌과 지붕 그리고 상륜부라는 구조의 틀을 보여준 것은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이었다. 정림사 오층석탑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완결미를 갖고 있는 또 다른 명작이다. 나의 답사기가 부여로 향할 때 나는 이 탑 앞에 아주 오래 머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아하다는 감정을 조형적으로 표현해낸 모범답안이었다.

감은사터 삼층석탑 | 튼실한 이중 기단에 삼층탑신이 알맞게 체감하는 구조다. 안정감과 상승감을 동시에 충족한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기본형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정림사탑은 대단히 우아하고 세련된 멋을 갖추고 있다. 고상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그러나 정림사탑에는 힘이 없다. 1층의 몸체가 훤출하여 상승감이 돋보이지만 이를 받쳐주는 안정감이 약하다.
감은사를 조영하던 정신은 통일된 새 국가의 건설이라는 힘찬 의지의 반영이었으니 백제 식의 오층석탑은 통일신라에 어울릴 수가 없었다. 장중하고, 엄숙하고 안정되며, 굳센 의지의 탑을 원했던 것이다.
그 조건을 충족하려면 상승감과 안정감이 동시에 살아나야 한다. 그러나 상승감과 안정감은 서로 배치되는 미감이다. 상승감이 살아나면 안정감이 약해지고, 안정감이 강조되면 상승감이 죽는다. 그것을 결합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은 기단과 몸체의 확연한 분리였다. 기단부의 강조에서 안정감을 취하고, 몸체의 경쾌한 체감률에서 상승감을 획득하는 이른바 이성기단(二成基壇)의 삼층석탑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감은사탑은 우리나라 삼층석탑 중 가장 큰 규모로 높이 총 13미터, 몸체 위에 꽂혀 있는 상륜부 고리인 쇠꼬챙이〔擦柱〕의 높이 3.9미터를 제외해도 9.1미터가 되는 장중한 스케일이다. 그리고 그 기세는 결코 허세를 부리는 과장된 상승이 아니다. 대지에 굳건히 뿌리내린 팽창된 힘을 유지하고 있어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엄정한 기품이 서려 있다.

불국사 석가탑 |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의 모범답안이라고 할까. 통일신라의 삼층석탑은 여기에서 형식의 완성을 이룩하게 되었다.

감은사탑에 비할 때 석가탑은 그 스케일이 3분의 2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왜소함이 아니라 알맞은 크기로의 축소였다. 감은사탑은 누가 보든 생각보다 크다고 말한다. 그 크기 때문에 1층 몸돌은 한 장의 돌로 만들지 못하고 네 개의 기둥돌을 세운 다음 네 장의 돌판을 붙여놓고 그 속을 자갈로 채웠던 것이다. 그래서 감은사탑은 오늘날 뱀의 소굴이 되었다. 내가 학생들에게 "감은사탑에 올라가서 사진 찍다가는 뱀에게 물려 클레오파트라 뒤따르게 된다"고 말하면, 학생들은 내가 탑에 오르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말인 줄로만 안다. 그러나 내 말을 무시하고 기단부 갑석에 쭉 늘어앉아 사진 찍다가 1층 몸돌 기둥과 돌판 사이로 뱀이 고개를 내미는 바람에 자지러진 학생이 있었다. 이는 고선사탑도 마찬가지다.

감은사탑은 석양의 실루엣이 정말 아름답다. 토함산으로 넘어간 태양이 홍채를 뿌려 배경을 은은하게 물들일 때 감은사탑은 장엄의 극치를 보여준다.

정림사터 오층석탑 | 백제 사람들이 만든 석탑의 이상은 여기에 있었다. 우아하면서 부드러운 인상. 그러나 여기엔 힘과 안정감이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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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7. 명문당/파한집

햇곡식 푸릇푸릇 아직 논밭에 자라는데 아전들 벌써 세금 걷는다 야단이네.
힘써 농사지어 나라를 살찌우는 것은 우리이거늘어째서 이리도 극성스럽게 침탈하는가.
(・・・) 붉은 알몸 짧은 갈옷으로 가리고 하루에도 밭 갈기를 얼마였던가?
벼 싹 파릇파릇해지면 가라지 김매기에 괴로울 따름.
풍년 들어 천 종의 곡식을 거둔다 해도 한갓 관청에 바치는 것일 뿐.
어쩌지 못하고 다 빼앗긴 채 돌아오니 가진 것이라고는 한 알도 없네.

이 글은 고려 농민의 어려운 사정을 읊은 것이다. 사실 조선 시대에서도 이와비슷한 글을 찾기란 어렵지 않으며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농민의 삶은 고됐고 국가나 지배층은 백성을 행복하게 이끌지 못했다. 그나마 안정적일 때는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했지만 전란이 일어나거나 역병이 돌면 그마저도힘들었고, 귀족이나 지주의 착취가 심해지면 도망을 가서 산이나 섬에서 생계를연명하거나 도적떼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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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면 제로 점으로 내려가라

왜 큰 부자들은 대부분 하나같이 가난하였던 과거를 갖고 있을까? 어째서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태어나 부자가 된 사람들보다는 하류층에서 태어나 큰 부자가 된 사람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더 많은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사실은, 가난을 일찍 경험한 사람들은 가난하였던 생활 수준이 출발점이었기에 그곳으로 언제라도 ‘되돌아가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이 잘못되어 갖고 있던 것을 모두 다 날리는 실패를 당하게 되어도 제로 점으로 ‘되돌아가’ 재출발을 할 줄 안다. 수없이 많은 부자들이 사업이나 투자에서 실패하거나 홍수나 화재 등으로 전 재산을 날렸다가도 재기에 성공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나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어려움이 닥칠 때 제로 점으로 가려고 하지 않는다. 제로 점에서 출발하였던 경험이 없는 그들에게 있어서 제로 점으로 가는 것은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니라 개척하여야 하는 미지의 불안한 공포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실패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실패 자체를 너무 두려워하다 보니 되는 일도 별로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은 곳에서의 삶을 체험하여야 나중에 경제적 문제에 부딪혔을 때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음을 나는 지금도 믿는다.

왜 재산을 갖고 이민을 간 사람들보다는 빈털터리로 이민을 간 사람들이 그 낯선 땅에서 성공하는 경우가 더 많은가. 밑바닥에서 아무것도 없이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하면서 그곳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주 낮은 생활 수준으로 살아가며 돈을 모았기 때문이다. 제로 점에서 살게 되면 모든 것이 플러스의 희망으로 쌓여만 간다. 돈이 쌓이고 희망이 쌓여 간다. 빚이 있는데도 삶의 질과 품위를 유지하려고 들면 그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돈은 쌓이지 않고 희망은 갉아먹힌다. 마이너스의 희망뿐이다. 그것이 절망이다.

내가 말한다. 경제적으로 실패하였다면 저 아래 낮은 곳으로 내려가라. 체면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그 체면에 "흠집을 내라scratch". 출발점을 저 낮은 곳에 다시 "그어라scratch". 당신이 놓치려고 하지 않는 생활수준이라는 것을 "지워 버리고scratch" 새로운 "출발점scratch"에서, "무에서from scratch", "근근이 살아가면서scratch along" "돈을 모아라scratch up. 그러면 "돈scratch"이 쌓이게 된다. 이것이 실패로부터 탈출하는 비결이다. 스크래치하라!

사람들은 ‘하면 된다’라고 말하였지만 나는 도무지 할 것이 없었다. 뭘 하면 된다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살다 보면, 해도 해도 아무것도 안 될 것같이 보일 때가 있다. 어떠한 대안도 보이지 않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적인 때가 있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실망, 좌절이 절망 속에서 계속 쌓이면 자살의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한 경우 자살은 함부로 저지르는 무의미한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이 처한 고통이나 위기 상황, 상실감 등으로부터의 탈출구로 잘못 여겨지기도 한다. 나도 그렇게 오해했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절망의 골짜기에는 밑바닥이 없다. 아무리 깊이 떨어져도 우리를 산산조각으로 부서뜨릴 절망이란 이 세상에는 없다는 말이다. 우리를 파괴시키는 것은 우리 자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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