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명작에는 해설이 따로 필요 없는 법이다. 그저 거기서 받은 감동을 되새기면서 즐거워하면 그만이다. 마치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아르헨티나와 축구 경기를 한 날, 멋진 골 장면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며 즐거워하는 축구팬의 모습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만약에 감은사 답사기를 내 맘대로 쓰는 것을 편집자가 조건 없이 허락해준다면 나는 원고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쓰고 싶다.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에 한번이라도 다녀온 분은 나의 이런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고, 또 거기에 다녀온 다음에는 모두 내게 공감할 것이 분명한데, 나는 지금 어젯밤 그 멋진 축구 경기를 못 보고 잠만 실컷 잔 사람들을 상대로 상황을 다시 떠올려 해설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는 셈이다.
감은사터 전경 |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의 정연한 가람배치로 이후 통일신라 절집의 한 모범이 되었다.
감은사터 쌍탑 | 쌍탑이 연출하는 공간감은 단탑과 달리 장중하고 드라마틱한 분위기가 있다.
이견대에서 바라본 대왕암 | 조선시대 정조 때 경주 부윤을 지낸 홍양호는 여기서 문무대왕의 뜻에 감사하는 제사를 올렸다.
신문왕은(…) 681년 7월 7일에 즉위하였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세웠다. 사중기(寺中記)에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되었는데,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682년에 마쳤다. 금당 계단 아래를 파헤쳐 동쪽에 한 구멍을 내었으니 그것은 용이 들어와 서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 생각건대 유조로 장골(葬骨)케 한 곳을 대왕암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으며, 그후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하였다.
감은사의 가람 배치는 정연한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으로 모든 군더더기 장식은 배제하였다. 이것은 이후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는 가람 배치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또 여기에 세워진 한 쌍의 삼층석탑, 이 감은사탑은 이후 통일신라에 유행하는 삼층석탑의 시원(始原)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것의 조형적 발전은 불국사 석가탑에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우리는 역사를 되새길 때 흔히 완성된 결실에서 그 가치를 논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미술 문화를 이야기할 때면 그 문화의 전성기 유물을 중심으로 논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전성기 양식 못지않게 시원 양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전성기의 전형을 파괴하는 양식적 도전을 보여주는데 이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전성기 양식은 정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시원 양식의 웅장한 힘은 갖추지 못하며, 말기의 도전적 양식이 갖고 있는 파격과 변형의 맛을 지닐 수 없다. 그 모든 과정은 오직 그 시대 문화적 기류와 취미의 변화를 의미할 따름인 것이다. 그렇게 인식할 때 우리는 문화와 역사의 역동성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다. 중국의 전탑(벽돌탑)과 일본의 목탑(목조건축)과 비교해서 생긴 말이다. 중국에서 처음 불교가 들어올 때는 목조건축 형식의 목탑이 유행하여 황룡사 구층탑 같은 거대한 건물을 세우게도 되었다. 이것을 석탑으로 전향하는 작업을 해낸 것은 역시 백제 사람들이었다. 익산 미륵사터에 남아 있는 한 쌍의 구층석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인데, 돌로 지었을 뿐 거의 목조건축을 모방한 것이었다. 이를 발전시켜 건축 부재의 표현을 간소화하면서 석탑이라는 양식, 기단부와 각층의 몸돌과 지붕 그리고 상륜부라는 구조의 틀을 보여준 것은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이었다. 정림사 오층석탑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완결미를 갖고 있는 또 다른 명작이다. 나의 답사기가 부여로 향할 때 나는 이 탑 앞에 아주 오래 머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아하다는 감정을 조형적으로 표현해낸 모범답안이었다.
감은사터 삼층석탑 | 튼실한 이중 기단에 삼층탑신이 알맞게 체감하는 구조다. 안정감과 상승감을 동시에 충족한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기본형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정림사탑은 대단히 우아하고 세련된 멋을 갖추고 있다. 고상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그러나 정림사탑에는 힘이 없다. 1층의 몸체가 훤출하여 상승감이 돋보이지만 이를 받쳐주는 안정감이 약하다. 감은사를 조영하던 정신은 통일된 새 국가의 건설이라는 힘찬 의지의 반영이었으니 백제 식의 오층석탑은 통일신라에 어울릴 수가 없었다. 장중하고, 엄숙하고 안정되며, 굳센 의지의 탑을 원했던 것이다. 그 조건을 충족하려면 상승감과 안정감이 동시에 살아나야 한다. 그러나 상승감과 안정감은 서로 배치되는 미감이다. 상승감이 살아나면 안정감이 약해지고, 안정감이 강조되면 상승감이 죽는다. 그것을 결합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은 기단과 몸체의 확연한 분리였다. 기단부의 강조에서 안정감을 취하고, 몸체의 경쾌한 체감률에서 상승감을 획득하는 이른바 이성기단(二成基壇)의 삼층석탑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감은사탑은 우리나라 삼층석탑 중 가장 큰 규모로 높이 총 13미터, 몸체 위에 꽂혀 있는 상륜부 고리인 쇠꼬챙이〔擦柱〕의 높이 3.9미터를 제외해도 9.1미터가 되는 장중한 스케일이다. 그리고 그 기세는 결코 허세를 부리는 과장된 상승이 아니다. 대지에 굳건히 뿌리내린 팽창된 힘을 유지하고 있어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엄정한 기품이 서려 있다.
불국사 석가탑 |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의 모범답안이라고 할까. 통일신라의 삼층석탑은 여기에서 형식의 완성을 이룩하게 되었다.
감은사탑에 비할 때 석가탑은 그 스케일이 3분의 2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왜소함이 아니라 알맞은 크기로의 축소였다. 감은사탑은 누가 보든 생각보다 크다고 말한다. 그 크기 때문에 1층 몸돌은 한 장의 돌로 만들지 못하고 네 개의 기둥돌을 세운 다음 네 장의 돌판을 붙여놓고 그 속을 자갈로 채웠던 것이다. 그래서 감은사탑은 오늘날 뱀의 소굴이 되었다. 내가 학생들에게 "감은사탑에 올라가서 사진 찍다가는 뱀에게 물려 클레오파트라 뒤따르게 된다"고 말하면, 학생들은 내가 탑에 오르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말인 줄로만 안다. 그러나 내 말을 무시하고 기단부 갑석에 쭉 늘어앉아 사진 찍다가 1층 몸돌 기둥과 돌판 사이로 뱀이 고개를 내미는 바람에 자지러진 학생이 있었다. 이는 고선사탑도 마찬가지다.
감은사탑은 석양의 실루엣이 정말 아름답다. 토함산으로 넘어간 태양이 홍채를 뿌려 배경을 은은하게 물들일 때 감은사탑은 장엄의 극치를 보여준다.
정림사터 오층석탑 | 백제 사람들이 만든 석탑의 이상은 여기에 있었다. 우아하면서 부드러운 인상. 그러나 여기엔 힘과 안정감이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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