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시도해서 하나의 결과를 온전히 얻으려 한다면 그건 도둑놈 심보가 아닐까요? 내가 100을 준비해서 100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은 과한 욕심입니다. 그런 일이 결코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아주 드뭅니다. 공부라는 것, 살아간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죠. 100을 준비해도 20, 아니 그조차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다만 나의 잠재력이 언제 어디서 터질지 알 수 없기에 티끌 같은 기회나마 기다리며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내 앞에 깔린 돌길과 아스팔트길에 우직하게 씨앗을 뿌릴 뿐입니다.

어른의 공부에 대하여

De studio adulti
데 스투디오 아둘티

누군가 ‘당신은 학생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른들은 대개 아니라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공부하는 사람입니까?’라는 질문 앞에서 끄덕이는 어른이 더 많아지길 바랍니다. 자기 자신과 사람과 세상에 대해 공부하길 멈춘 어른이 꼰대가 됩니다.

나는 망각의 기술을 더 바랍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기억하고,
잊어버리고 싶은 것은
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Olivionis artem mallem;
올리비오니스 아르템 말렘;
nam nemini etiam quæ nolo,
남 네미니 에티암 퀘 놀로,
olivisci non possum quæ volo.
올리비쉬 논 포쑴 퀘 볼로.

망각을 막아내어 철저히 암기하는 것이 배움의 왕도라 믿는 분들이 많지요. 하지만 저는 어른의 공부는 망각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잊을 수 있어야 그 반대로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잘 잊는 자신을 탓하지 마십시오. 어른은 몸과 마음에 저도 모르게 배어든 것을 잊고 털어낼 수 있어야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망각이라는 이름의 자기 비움이 오히려 인간으로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억해야 할 것과 잊어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것인데, 이것이 또다른 어른의 공부 과제일 것입니다.

모든 것은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Omnia incipiunt ex cogitatione.
옴니아 인치피운트 엑스 코지타티오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099.사건/후삼국과 왕건

왕건의 근거지는 송악, 즉 오늘날 개성이다. 개성은 예성강과 임진강에 둘러싸여 한강과 서해로 나아가는 요지 중의 요지다. 즉, 왕건 일파가 해상 세력이자 호족이었단 말이다. 왕건은 전라남도 나주의 지배권을 두고 견훤과 쟁투를 벌여 승한다. 서로가 수천의 군사를 동원했고 일진일퇴를 벌였는데 결국 ‘수달’이라고 불렸던 뛰어난 해군 장수 능창을 제압하고 전라남도 일대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부터 견훤은 후고구려를 남북 쪽에서 동시에 상대하는 곤란을 겪는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고구려의 계승 국가임을 분명히 하고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청천강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해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 평양을 수복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것도 정의하지 마라.

Non debemus definitiones.
논 데베무스 데피니티오네스.

공감이 타인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라면, 공감은 ‘너에게로 가는 길’이며, 이를 다른 시점으로 바꾸면 ‘너를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소설이 타인의 마음과 영혼을 이해하는 행위라면 자선은 직접적으로 타인의 어려운 환경을 바꿔내고자 하는 개인적 차원의 혁명입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 도움이 가닿을 수 있는 곳만이라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선의 아름다움은 지금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혁명이 변질되기 쉽듯, 최근 이 개인적 차원의 혁명인 자선도 다소 변질되는 것을 목격하곤 합니다.
자선 행위를 할 때에는 비참한 사람이 존재하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나의 선의를 부각시키기 위해 타인의 비참을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공감과 자선을 받을 사람에게도 인격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나쁜 습관이 만들어낸 불행

Infelicitas sicut exitus malae
인펠리치타스 시쿠트 엑시투스 말래
consuetudinis
콘수에투디니스

불행 가운데 혹 습관이 만들어낸 불행은 없을까요? 제 인생엔 타자와 외부로부터 온 불행도 있지만 분명 나 스스로 만들어낸 나쁜 습관으로 인한 불행도 많았습니다. 무심히 쌓은 좋은 습관이 행운과 성공을 불러온다는 것을 사람들은 압니다. 마찬가지로 그저 대수롭지 않은 습관일 뿐이라 변명해왔던 나쁜 버릇이 계속 쌓이면 결국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초래합니다.

올곧은 사람은
아무도 시기하지 않습니다.

Probus invidet nemini.
프로부스 인비데트 네미니.

타인이 어렵게 이룬 성취를 한마디로 평가절하하거나 별것 아닌 것으로 깎아내린다고 해서 내가 더 높아지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결과만이 아니라 그 결과가 있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보려고 노력할 때, 그리고 그 과정과 결과를 인정하고 온전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게 됩니다.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태도입니다.

Felicitas non status sed attitudo.
펠리치타스 논 스타투스 세드 아티투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표를 행복이라 보았고 이를 ‘최고선summum bonum;숨뭄 보눔’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간은 과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일까요? 인간은 정말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일까요? 아니요.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행복은 그 정해진 시간을 채워가느라 고단하고 지친 삶에 주어지는 사탕과도 같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다 어느 날 약처럼, 영양소처럼 필요로 하는 것이 행복 또는 행복감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태도라 말합니다. 주어진 시간을 견디고 채워가는 데 필요한 태도 말이지요.

거짓 허기

Falsa phagedaena
팔사 파제대나

저는 여전히 ‘가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것은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의미의 가난이 아니라, ‘거짓 허기’에서 나온 가난과 목마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다가오면 다가오지 못하도록 벽을 쳤고요. 마치 염소나 산양, 아이벡스 같은 동물들이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산악지대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지요. 얼마 전부터 집 밖을 나와 진짜 세상을 대면하며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얼마나 가진 게 많은 사람인지를 겸허하게 깨닫습니다. 거짓 허기, 거짓 배고픔, 거짓 가난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SNS가 현대인의 일상을 지배하면서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데 많은 시간을 쏟고 있습니다. 하지만 삶이란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담아내는 것입니다. 저마다 삶의 그릇이 어떤 형태로 빚어질지는 모르지만, 그 그릇에 오롯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담고 살아내는 것이 인생 아닐까요.
쏜살같이 지나가는 삶 속에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보는 우리를 더욱 지치게 할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그럴듯하게 플레이팅한 요리 접시가 아니라 내용물이 엎질러지지 않게 잘 담아내는 우묵하고 질박한 그릇에 가까울 겁니다.

우리는 금지된 것을 늘 꾀하고
거절당한 것을 기어코
얻어내려 합니다.

Nitimur in vetitum semper
니티무르 인 베티툼 셈페르
cupimusque negata.
쿠피무스퀘 네가타.

인간의 본성 안에는 금지된 것을 꾀하고 거절당한 것을 얻어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문장을 읽는 부모님들이 있다면 더러 자신의 자녀가 꼭 그렇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비디우스가 『사랑』에 쓴 이 문장은 꼭 이성애적인 사랑이나 청소년들의 태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금지된 것을 꾀하는 인간의 본성이 꼭 일탈이나 탈선으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금지된 것을 동경하는 인간의 열망은 영원과 자유, 평등에 대한 의지와 꿈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098. 명문장/청산별곡

살으리 살으리라
청산에 살으리라
머루와 다래를 먹으며 청산에 살으리라
얄리 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울어라 울어라 새야!
자고 일어나 울어라 새야!
너보다 근심이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 울며 지내노라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던 새 가던 새 봤느냐
물 아래 가던 새 봤느냐
이끼 묻은 연장을 가지고
물 아래 가던 새 봤느냐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 그대가 먹은 음식이 내일의 그대가 된다’는 말처럼, 오늘 그대가 돌본 마음이 내일의 그대가 될 것입니다. 그 시작은 낫고 싶다는 마음, 더 나아지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세월이 약이다.

Dies tempusque lenit iras.
디에스 템푸스퀘 레니트 이라스.

이 문장을 말 그대로 옮기면 "날과 시간이 분노를 가라앉힌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아픔도, 기쁨도, 영광도?감각은 의지를 스쳐지나갑니다. 기억도 그렇게 스쳐지나갑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간신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삶의 질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가 가른다.

Qualitas vitae non nomina
콸리타스 비태 논 노미나
sed adiectiva dividit.
세드 아디엑티바 디비디트.

저는 인생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삶’은 명사 자체로 있을 때는 그냥 삶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어떠한 형용사가 붙느냐에 따라 그 삶은 ‘행복한 삶’일 수도 있고 ‘불행한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당시의 상황과 불안에 휩싸인 내 기준의 최선이 아니라 인생 단위에서의 최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합니다.
그대가 사랑해야 할 것을 선택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공부에 이르기 위해서는 혼자 견디는 태도인 고독, ‘솔리투도Solitudo’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

Sic habeas somnium,
시크 하베아스 솜니움,
ut vivas in sempiternum.
우트 비바스 인 셈피테르눔.
Sic enim vivas, ut cras moriaris!
시크 에님 비바스, 우트 크라스 모리아리스!

이루어진 것에는 못다 한
일이 남아 있을 수 없다.

Quod factum est,
쿼드 팍툼 에스트,
infectum manere impossibile est.
인펙툼 마네레 임포씨빌레 에스트.

뻔한 것을 매일 하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이루었다면, 못다 한 아쉬운 일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매일 해온 뻔한 일, 그 안에 무엇이든 이루는 힘이 있습니다.

의지란 무언가를 이성에 따라
열망하는 것이다.

Voluntas est quae quid cum
볼룬타스 에스트 퀘 퀴드 쿰
ratione desiderat.
라티오네 데시데라트.

때로는 명문이 아니라 선인들의 탄식이 위로를 건넬 때가 있습니다. 우리보다 앞선 시간을 살아갔던 그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을 달래줍니다.
그러나 이렇게 위로받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시공간을 거슬러 모든 사람과 사물로부터 위로받되, 냉철한 머리와 굳건한 다리로 스스로 일어서야만 합니다. 금 가고 깨진 부분은 남의 위로로 메워지지 않습니다. 더 나은 삶으로 움직여 가겠다는 스스로의 열망과 의지만이 결국 나 자신을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