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정의하지 마라.
Non debemus definitiones. 논 데베무스 데피니티오네스.
공감이 타인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라면, 공감은 ‘너에게로 가는 길’이며, 이를 다른 시점으로 바꾸면 ‘너를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소설이 타인의 마음과 영혼을 이해하는 행위라면 자선은 직접적으로 타인의 어려운 환경을 바꿔내고자 하는 개인적 차원의 혁명입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 도움이 가닿을 수 있는 곳만이라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선의 아름다움은 지금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혁명이 변질되기 쉽듯, 최근 이 개인적 차원의 혁명인 자선도 다소 변질되는 것을 목격하곤 합니다. 자선 행위를 할 때에는 비참한 사람이 존재하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나의 선의를 부각시키기 위해 타인의 비참을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공감과 자선을 받을 사람에게도 인격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나쁜 습관이 만들어낸 불행
Infelicitas sicut exitus malae 인펠리치타스 시쿠트 엑시투스 말래 consuetudinis 콘수에투디니스
불행 가운데 혹 습관이 만들어낸 불행은 없을까요? 제 인생엔 타자와 외부로부터 온 불행도 있지만 분명 나 스스로 만들어낸 나쁜 습관으로 인한 불행도 많았습니다. 무심히 쌓은 좋은 습관이 행운과 성공을 불러온다는 것을 사람들은 압니다. 마찬가지로 그저 대수롭지 않은 습관일 뿐이라 변명해왔던 나쁜 버릇이 계속 쌓이면 결국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초래합니다.
올곧은 사람은 아무도 시기하지 않습니다.
Probus invidet nemini. 프로부스 인비데트 네미니.
타인이 어렵게 이룬 성취를 한마디로 평가절하하거나 별것 아닌 것으로 깎아내린다고 해서 내가 더 높아지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결과만이 아니라 그 결과가 있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보려고 노력할 때, 그리고 그 과정과 결과를 인정하고 온전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게 됩니다.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태도입니다.
Felicitas non status sed attitudo. 펠리치타스 논 스타투스 세드 아티투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표를 행복이라 보았고 이를 ‘최고선summum bonum;숨뭄 보눔’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간은 과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일까요? 인간은 정말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일까요? 아니요.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행복은 그 정해진 시간을 채워가느라 고단하고 지친 삶에 주어지는 사탕과도 같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다 어느 날 약처럼, 영양소처럼 필요로 하는 것이 행복 또는 행복감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태도라 말합니다. 주어진 시간을 견디고 채워가는 데 필요한 태도 말이지요.
거짓 허기
Falsa phagedaena 팔사 파제대나
저는 여전히 ‘가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것은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의미의 가난이 아니라, ‘거짓 허기’에서 나온 가난과 목마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다가오면 다가오지 못하도록 벽을 쳤고요. 마치 염소나 산양, 아이벡스 같은 동물들이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산악지대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지요. 얼마 전부터 집 밖을 나와 진짜 세상을 대면하며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얼마나 가진 게 많은 사람인지를 겸허하게 깨닫습니다. 거짓 허기, 거짓 배고픔, 거짓 가난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SNS가 현대인의 일상을 지배하면서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데 많은 시간을 쏟고 있습니다. 하지만 삶이란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담아내는 것입니다. 저마다 삶의 그릇이 어떤 형태로 빚어질지는 모르지만, 그 그릇에 오롯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담고 살아내는 것이 인생 아닐까요. 쏜살같이 지나가는 삶 속에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보는 우리를 더욱 지치게 할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그럴듯하게 플레이팅한 요리 접시가 아니라 내용물이 엎질러지지 않게 잘 담아내는 우묵하고 질박한 그릇에 가까울 겁니다.
우리는 금지된 것을 늘 꾀하고 거절당한 것을 기어코 얻어내려 합니다.
Nitimur in vetitum semper 니티무르 인 베티툼 셈페르 cupimusque negata. 쿠피무스퀘 네가타.
인간의 본성 안에는 금지된 것을 꾀하고 거절당한 것을 얻어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문장을 읽는 부모님들이 있다면 더러 자신의 자녀가 꼭 그렇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비디우스가 『사랑』에 쓴 이 문장은 꼭 이성애적인 사랑이나 청소년들의 태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금지된 것을 꾀하는 인간의 본성이 꼭 일탈이나 탈선으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금지된 것을 동경하는 인간의 열망은 영원과 자유, 평등에 대한 의지와 꿈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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