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사건/조선물산공진회

일제가 1915년 9월 11일부터 약 두 달간 경복궁에서 실시했던 대규모 박람회다. 박물관과 박람회는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영국,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각지에서 문화재를 약탈했고, 한편에서는 자동차, 비행기 같은 근대 문물과 각종 신기술을 자랑하기 위한 행사를 열었는데 이런 문화가 박물관과 박람회로 정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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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명문장/8호 감방의 노래

진중이 일곱이 진흙 색 일복 입고
두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할 때
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 열고 던져줄 때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3.1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유관순, 심명철, 어윤희, 권애라, 신관빈, 임명애, 김향화 등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돼 있었는데, 서대문형무소 여 옥사 8호에서 함께 불렀던 노래다. 이 가사는 심명철의 아들에 의해 2019년에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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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학문•철학/양명학

명나라 당시 왕양명에 의해 주창된 사상으로, 유학의 한 계보이면서 성리학을 비판하며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양명학에 대한 배척 기운이 높았고, 영조 때 정제두 정도가 수용했을 뿐이다. 정제두는 강화도에 유배된 기간 동안 양명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했고, 이를 일가친척에게 전파하여 가학(家學) 형태로 발전한다. 구한말 박은식 등이 양명학을 계승했다.

이후 왕양명은 성리학의 주지주의적인 기풍을 비판하면서 심즉리와 지행합일설 등을 주장한다. 마음이 곧 이치이며, 마음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는 간명한 논리를 제안한 것이다. 성리학은 우주의 본질, 인간의 본질 그리고 인간 안의 도덕과 마음의 관계 등 복잡한 사변적 논리를 강화시켜나갔는데, 왕양명이 보기에 이런 것들은 잘못된 태도였다. 그가 보기에 마음은 언제나 진리로 나아갈 단초를 제공하고 사람들이 이를 따르지 않을 뿐이었다. 누군가 사고를 당하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고, 누군가 어려움을 겪으면 함께 슬퍼하고 애통하는 것이 모든 인간에게 있는 기본적인 심성이다. 따라서 왕양명은 그러한 마음의 이치에 따라 직접 행동에 옮기는 삶을 군자의 삶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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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문화/편두

아이가 태어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려고 하므로 지금 진한 사람의 머리는 모두 납작하다. 왜(倭)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남녀가 문신을 하기도 한다.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의 기록이다. 진한과 변한 지역에서 편두 문화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고고학적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예안리 85호, 99호분에서 출토된 두개골이 편두 모양이기 때문이다.
편두 풍속은 삼한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신체 특정 부분의 모양을 조절하는 문화는 원시사회의 특징이기도 한데 편두 문화는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다양한 지역에서 보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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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유적•유물/약탈 문화재

거의 대부분의 묘가 온전한 모양새를 가지지 않은 참상을 보여주었다.
- 우메하라 스에지

왕릉군 근처에 가면 무수한 묘영이 파헤쳐져 모든 산과 언덕이 벌집처럼 구멍이나 있다.
- 다나카 만소

21세기 초반 강화도와 개성 일대를 돌아본 일본인 고고학자들의 기록이다. 조선침발의 역사는 조선 문화재 수탈과 궤를 같이한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한 것으로 시작해 열강의 침탈이 가속화되면서 무차별적인 도굴과 약탈이 벌어진다. 특히 일본인들에 의한 문화재 약탈이 심각했는데 조선이 병합되면서 이 경향은 가속화된다. 조선에 파견된 일본인 관료나 총독부의 정책을 통한 합법적인 수탈부터 수집가들의 후원을 받아 한몫 챙기려는 도굴까지 그 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고려자기를 좋아해서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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