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

노력을 쏟아야 하는 관계,
바꾸거나 끝내야 하는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이러한 물리적 분리를 이뤄낼 수 있도록 사회에서 확실하게 생활과 경제적 차원의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쿼터라이퍼는 분리를 미룰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분리 본능을 무시하면 막대한 좌절감에, 갇혀버렸다는 기분에 휩싸일 수 있다.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삶을 시작하고 싶은 내적 욕구가 있다. 내면의 목소리는 ‘논리적인 결정’이 무엇인지, 생활에 어떤 제약이 생길지 신경 쓰지 말고 그저나아가라고, 탐험하고 호기심을 충족하라고 외친다. 그것은 정확히 명명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욕구이자 갈망이다. 어린 시절의 집과 관계에서 분리되고 싶은 욕구,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도 같은 욕구를 묵살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도 있다. 이 걷잡을 수 없는 허기는 고통, 공포, 소란, 불안, 심지어 폭력까지 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집을 떠난 쿼터라이퍼들이 알고 있듯 그것은 첫 단계일 뿐이다. 진정한 분리란 관계 속의 경제적?정서적?심리적 의존을 천천히 바꿔나가면서 자기 자신도 바꿔나가는 긴 과정이다. 건강한 분리 작업에는 새로이 관계의 선을 긋고, 의사소통 능력을 개선하고, 부모와 형제자매가(그리고 수많은 타인이) 자신의 자아 인식에 미치는 오묘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자세히 살펴보는 활동이 포함된다. 목표는 자신에 대해 알아내는 것,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신을 신뢰하는 것, 독립하는 것, 그렇게 타인과의 친밀감을 높이는 것이다. 이루기 힘들 때도 있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감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나는 코너가 아니라는 대답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코너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용서받고 싶었다. 그간 코너가 납덩이처럼 무거운 죄책감을 지고 살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를 용서해줄 권리가 없었다. 정말이지 용서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코너는 상처로 남은 찢어진 관계를 직면해야 했고, 과거로부터 배워야 했다. 친구이자 연인, 몹시 사랑하던 사람을 삶에서 잘라낸 후로 느꼈던 깊은 상실감과 외로움을 인정해야 했다. 상실의 슬픔과 죄책감을 솔직하게 직면하면, 새로이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나는 사건의 핵심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부모의 기대는 쿼터라이프 시기에 해결해야 할 문제 중 가장 어려운 축에 속하며, 이는 부모의 헌신에 직접적인 의문을 제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점차 알게 되었다. 부모 공경은 사회적으로, 지적으로 ‘선’하고 ‘도덕’적인 일로 수호된다. 많은 문화권과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규칙이다. 하지만 쿼터라이퍼에게는 뿌리로부터 진화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 이런 본능은 작은 속삭임과 회의감을 심어줄 때도 있고 요란한 비명을 외칠 때도 있다. 부모에게 의존하고 영향받는 삶과 분리하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부모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삶에 익숙한 상태인 데다가 부모의 믿음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허용하는 사회적 기반이 거의 없다 보니, 부모의 관점이 나 자신의 본능보다 더 중요해진다. 어린 시절의 충심을 너무 오래 간직하면 심리에 위험할 수 있다. 서로 싸우고 있는 두 명의 주인을 모시면서 제정신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코너는 자신이 부모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껄끄러웠다. 원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수 있을 정도의 결단력이나 용기가 없었고, 그 결과 림보나 연옥 같은 곳에 갇혀 자기 삶을 향해 나아가지도 못하고 부모의 기대에 맞게 살지도 못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이제 혼자서는 그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완전히 마비된 채로 추락하고 말았다.

코너는 용기를 내서 자기만의 삶을 살고, 자기만의 욕망과 선택을 추구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것 때문에 부모님의 욕망으로부터 멀어진다 한들 상관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는 부모님의 반응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코너의 분리 작업에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끊임없이 공유하고 소통하는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코너가 부모님의 복제품이나 후계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인식해야 했다. 그는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깊이 탐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이 코너가 창조할 평생의 걸작이 될 것이었다.

자식이 자기만의 길을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이유로 자식에게 자유나 신뢰를 주지 않는 부모라면, 일단 자기 자신을 깊이 돌아봄으로써 온 가족을 이롭게 할 수 있다. 성인 자식에게 부모 노릇을 하려면, 부모부터 자신의 어린 시절의 관계로부터 분리되고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추구하는 작업을 마쳐야 한다. 자식이 새롭고 독립적인 삶을 찾아 나서야 하는 만큼 부모도 동일한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자식이 쿼터라이프에 진입하면, 더는 부모라는 사실만으로 부모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없다. 부모는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수도 있다. 양육에 집중하기 위해 미뤄두었던 과제,자기만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살아간다는 과제를 탐구하는 것이다. 자기만의 야망, 창의력, 두려움, 희망을 탐험하고, 자기만의 심리적 장애물을 용감하게 넘어서야 한다.

나는 확신했다. 코너는 여자 친구를 향한 애정을 존중하기 전에자기 삶을 지키기 위한 용기부터 찾아내야 했다. 이 작업은 도덕적 용기를 함양하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쿼터라이프 시기의 분리 작업은 타인이 자신의 관점과 선택에 어떤 영향과 압력을 행사하는지 의식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따라서 분리 작업은 심리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필요하다. ‘내가 믿는 것’과 타인이 믿는 것을 세심하게 분리해내면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과 자기 인생을 향한 신뢰가 강화된다. 자신의 진심이 평온한 일상에 방해가 될 때조차, 아니 그럴 때일수록 분리에 노력을 쏟아야 한다. 분리 능력이 있으면어떤 것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고 어떤 것은 아닌지 알아내기 수월하고, 상황이 모호하거나 순응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을 때 그 갈등 속에서 자신이 어떤 입장인지 알아낼 수 있다. 자신에 관해 알아가기를 거부하고자신의 욕구를 지켜내지 않는다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상대의 욕망과 욕구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자기만의 삶을 살고자 한들, 남에게 판단당할까 봐 줄곧 고통스러울 터였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거나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는 분리 작업이 사뭇 다르게 진행될 수 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거나, 함께할 수 없거나, 처음부터 옆에 없었다면 분리 작업은 기억, 이야기, 부모가 남긴 물건을 통해 정체성을 발달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때로는 가족에게 정보를 구하거나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기억하는지 물어보고, 오래된 편지나 일기를 읽으면서 절박한 질문에 답을 찾고 자신의 역사에 관한 미지의 직감을 확인해야 한다. 이는 어려운 일이다. 특히 분노와 상실, 고통, 기쁨이 밀려드는 가운데서 힘들다고 토로하고, 질문을 던지고, 용서를 구할 상대가 없을 때는 더욱 어렵다. 삶의 방향을 바꾸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도 마찬가지다. 축복을 빌어줄 사람이 없을 때, "미안하다"는 말이 절실히 듣고 싶은데 그렇게 말해줄 사람이 없을 때도 그렇다. 미라는 홀로 이런 역할을 해내야 했다. 가장 급한 일은 미라의 욕망을 옭아매고 있는 어머니의 욕망을 풀어낼 수 있도록 스스로 허락하는 것이었다.

쿼터라이프 시기에는 과거의 관계를 바꾸고 싶은 자연스러운 발달 욕구가 생긴다. 타인에게 심리적으로, 물리적으로 의지하던 습관으로부터 ‘분리’하고, 독립성과 개성을 포용하는 새롭고 더 성숙한 관계를 맺으려는 본능적인 욕구다.

바람직한 미래는 삶의 여정 속에서 부모와 자식이 평등하게 진화하는 것, 위계와 의존성이 사라진 상태로 다시 서로를 마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할 변화가 이루어지려면 상당한 양의 의식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는 압박이나 오해, 상처, 좌절 같은 함정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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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들을 수 있나요?

쿼터라이프의 두 번째 성장 기둥은 ‘경청’이다. 더는 유익하지 않은 관계와 관점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도록 용기와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에 더해 자신에게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고 내면에서 들리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경청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직감, 느낌, 신체 감각, 우연, 침묵, 꿈을 비롯한 온갖 비언어적 정보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도취라고 성급하게 판단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경청의 목표는 자아도취와 거리가 멀다. 자신의 진실을 직시하려면 불굴의 정직성과 겸허함이 필요하고, 때로는 현실의 안정을 흩어낼지도 모르는 내면의 지침에 오롯이 헌신해야 한다.

경청은 일상 속의 건강과 방향감각을 기를 때 도움이 된다. 우리는 전부 ‘행복과 불행’을 경험하고, 때로는 경험의 정도가 몸이 실감하는 수준보다 지나쳐서 내면의 현기증을 겪듯 위험할 정도로 ‘도취’될 수도 있다. 혹은 납덩이를 짊어진 듯 일어서지 못하고 ‘가라앉을’ 수도 있다. 때로는 ‘무질서’라든가 ‘방향 상실’의 감각을 느낄 수도 있다. ‘홍수’가 난 듯 감정이 터져 나오거나, ‘통제 불능’이 될까 봐 두려워지거나,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끙끙댈 수도 있다. 그러다가 기분이 좋아지면 ‘안정’이나 ‘균형감’이나 ‘집중력’이 생겼다고 느낀다. 타인의 말 한마디나 시선이 자신을 ‘쓰러뜨렸’거나 ‘북돋아줬다’는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이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무엇 때문에 그런 감정이 생겼고 다음에는 어떻게 기분 전환할 수 있을지 알아내는 법을 익힐 수 있다.

때로는 인내력과 시간을 쏟아서 이전에 ‘불안정’의 감각이 시작된 시기를 돌아보고 다시 느껴봐야 한다. 과거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유용한 정보가 드러나는 법이다.

자기 내면을 경청하는 행위의 목적은 방향감각을 얻고 직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때로는 외부의 소음을 줄여야 한다. 남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줄이고, 기술과 단절하고, 수면 시간을 늘리고, 트라우마와 중독을 치유해야 한다. 트라우마와 중독은 욕구를 느끼고 표현하는 능력을 망가뜨리고 의식을 흐려놓기 때문이다. 어떤 방법을 택하든, 결국 이런 활동은 안테나를 세워서 과거에 쉽게 감각하지 못했던 자기 삶에 관해 더 많은 정보를 수신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청은 그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분별력을 요구한다. 분별력은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 혹은 ‘어떤 것의 특성을 옳게 판단하고 그런 판단력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분별력은 자기 자신을 든든한 거름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때로는 반문화적 신념과 실천에 전념하는 집단이나 운동도 지배 문화만큼이나 자기 내면을 경청하는 작업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경청으로 얻을 수 있는 궁극적인 효과는 결정 과정을 단순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심리적 성숙의 바탕, 그리고 성숙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건강한 사회의 바탕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생각하는 능력, 주변 사람의 관점과 거리를 둔 채 스스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다. 이것은 자신을 신뢰하는 능력이다. 끊임없는 도전과 실수를 통해 안간힘을 쓰거나 지나치게 고민하는 일 없이 내면의 신호를 알아채는 법을 깨우쳤다면, 최종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제다이가 포스를 느끼게 된 것처럼.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트라우마 역사가 있는 경우, 쿼터라이프 초반의 몇 년은 거센 급류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려고 애쓰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버거워도 줄곧 힘을 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쩔 수 없이 피로가 쌓인다. 많은 쿼터라이퍼는 ‘경직 상태’에서 영웅적인 회복력을 유지하지만, 끊임없이 흐르는 삶 속에서 점차 지치고 만다. 회복력이 바닥나고, 그 밑에 있는 겹겹의 절망과 공포가 드러난다. 곧 휩쓸려 떠내려갈지도 모른다. 대단하든 미미하든 트라우마 역사가 남아 있다면, 자기 내면을 경청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트라우마 치유가 핵심이 되어야 한다. 해묵은 트라우마와 해로운 패턴의 목소리가 본능과 욕구가 내는 믿음직한 목소리와 싸우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능과 욕구에 관한 정보를 내부에서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쿼터라이프 내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줄곧 힘겨울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트라우마 중심의 심리 치료를 포함해 일반적인 심리 치료 역시 상처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서 현실 세계에서 자유와 독립성을, 무엇보다기쁨을체험하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그레이스를 포함한 수많은 의미형에게 이는 현실 세계가 자신을 품어줄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하다는 믿음을 다지는 과정이다.

수많은 쿼터라이퍼, 특히 안정형 쿼터라이퍼는생각으로 이해하는 법 대신느낌으로 판단하는 법을 연습할 필요가 있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너무 차갑지도 않은딱 적당한 온도를,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고딱 적당한 크기를 직접 판단하는 것이다.

경청은 쿼터라이프의 핵심적인 요소다. 카를 융은 과거엔 경청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여겼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세상에 진입한 쿼터라이퍼는 본능과 호기심을 따라가며 조금씩 원하던 지식을 얻어낸 것이다.

쿼터라이프에서 경청이라는 행위는 삶의 중심을 목표 성취에서 호기심 탐구로 옮기는 것을 뜻한다. 자기만의 특성에 관해 정보를 모으는 행위다.

쿼터라이퍼는 오직 시도와 실수를 통해서 자기 삶을 정확히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어진 상황에서 신체와 감정이 보이는 반응에 집중하면, 아주 미묘한 반응이라도 정보가 될 수 있다. 내가 내담자에게 권장하는 것은 저항, 두려움, 갈망, 즐거움, 피로, 호기심, 부끄러움 등 다양한 감정을 느낄 때 자신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경청해보는 것이다. 그런 반응의 의미를 질문하기 전에 그저 귀 기울여보고 자신의 경험에 관찰자적 태도를 취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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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유적•유물/한양도성

조선 시대 수도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도성으로, 그 둘레가 18.64km다. 남한산성이 12.4km, 북한산성이 12.7km, 부산 금정산성이 17.34km인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규모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성이기도 하다.
태조 이성계가 두 차례 공사에서 각각 118,700명, 79,400명을 동원하여 지었고 세종 때 한 달간 322,400명을 다시 동원하여 보수했다. 한양도성은 한반도의 어떤 성보다 빨리 쌓았다. 태조 때 진행된 두 차례 공사는 합쳐서 98일이 소요됐고 세종 때는 한 달이 걸렸다. 남한산성 2년, 수원 화성 2년 9개월을 고려해도 빠르다.
고려의 개성은 21년, 고구려의 평양성은 35년이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구간마다 책임 실명제를 실시하는 등 엄격한 관리를 통해 탄탄하게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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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장소/북촌

오늘날 북촌 일대는 유명한 관광지다. 한옥마을까지 이르는 여러 길에 예쁜가게들과 맛있는 먹을거리가 즐비하다. 왼편에는 경복궁, 오른편에는 창덕궁이 있고 아래편에는 인사동이 있고, 헌법재판소, 정독도서관 같은 유서 깊은 공간도 있다. 제2공화국 대통령 윤보선과 고려대학교, <동아일보>를 세운 김성수가 살았던 고택도 있다. 한때 이곳에 경기고, 휘문고, 창덕여고, 풍문여고, 덕성여고 등 여러 명문고등학교들이 몰려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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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형

미라는 유명한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는 서른한 살의 변호사였다. 주로 회색과 검은색 옷을 입었다. 니트 원피스와 스타킹, 때로는 짙은 청바지와 멋진 부츠 차림이었다. 세심하게 고른 것이지만 지극히 깔끔해서, 마치 군중 속으로 쉽게 사라지기 위해 선택한 옷차림 같았다. 미라는 언행이 진중하고 조용했는데, 옆에 앉아 있으면 어딘가 짓눌린 듯한, 너무 ‘통제된’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때로는 미라의 완벽하게 통제된 몸 옆에 있으면 덩달아 숨쉬기가 힘들어질 정도였다.

미라는 자기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듯 자신과 불화하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런 감정에 관해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누려고 상담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미라가 상담을 시작한 이유는 자신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더 이상 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안정형은 종종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고 느낄 때가 많지만, 사실은 우리의 언어에 그 감정을 전달할 만한 어휘나 개념이 없는 것 같다. 미라 같은 안정형은 보통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적어도 진정한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그렇다. 안정형의 삶은 꽤나 기능적이다. 부러움을 살 때도 많다. 인생의 숙제를 전부 해치웠으며,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미라는 자기 일에 장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직장 동료들을 좋아했고, 연봉도 높았다. 남편과의 관계도 다정하고 든든했다. 하지만 많은 안정형이 그러듯 미라 역시 무언가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라는 자신이 잘 지내는데도, 심지어 행복한데도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된" 듯한 기분이었다.
때로 이런 미묘한 감정은 은유를 통해 더 쉽게 포착할 수 있다. 나는 미라에게 은유를 이용해 내면을 묘사해보라고 제안했고, 미라는 때때로 자신과 세상 사이에 창문이 있는 것 같다고, 아니면 세상이 수족관이고 자신이 관람객인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미라에게 그 기분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했다. 미라는 부끄러운 듯 싫다고 하더니, 곧 높은 벽을 사이로 한쪽에는 한 사람이, 반대쪽에는 여러 사람이 서 있는 그림을 쓱쓱 그려냈다. 벽은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신은 한쪽에서 얼어버렸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자신이 그곳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속한 세상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 같고, 전부 보이기는 해도느낄 수는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안정형은 자기 내면보다 외부 세계에 더 익숙하다.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며, ‘비합리적인’ 것, 신화나 상상 같은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시간을 선형적이고 고정된 것으로, 그리스인이 ‘크로노스’라고 부른 것으로 인식한다. 안정형은 힘든 상황이 되면 자신과 세상 사이에 벽이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안정형과 심리 상담을 진행할 때는, 가끔씩 그들을 살짝 찔러 안정적 성향 반대편으로 보내야 한다. 공상, 비합리성, 연약함 쪽으로 안내하고, 때로는 무책임하고 괴상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자극할 필요도 있다. 그들이 삶을 사는 방식과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하고, 일상의 동기가 무엇인지 탐구해야 한다.

안정형은 비인지적이고 합리성이 떨어지는 작업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이야말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꿈, 수수께끼, 미지를 향한 호기심 같은 것들. 안정형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 이를테면 자연이나 밤하늘, 우주 같은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안정형을 도우려면 그들이 어떤 삶을 추구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줘야 할 때도 있다. 논리적이고 선형적이고 실용적인 영역을 깨고 나와, 바라건대 어린 시절에는 느껴봤을 감각을 되돌려주어야 한다. 때로는 예술 작법이나 다른 창의적인 활동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하면 깨달음을 얻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신비주의나 점술을 활용하는 것이 유익할 때도 있다. 미라의 열정은 여행에서 싹튼 것이었으므로, 나는 그 사실에 집중한 채로 작업을 시작했다. 미라가 바다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항상 통제하려고 애쓰는 대신 혼자 여행을 즐기고 파도에 젖어드는 감각이 어땠는지 떠올릴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처음에 내가 인사를 건넸을 때 코너는 나와 선뜻 눈을 맞추지 못했다. 악수하려고 다가서자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심리 치료에 관해 문의하는 메시지를 남겼을 때는 목소리가 어색하고 서두르는 것이, 전화를 빨리 끊으려고 억지로 말을 짜내는 느낌이었다.

코너는 한숨을 내쉬고 눈을 비볐다. 코너의 스웨터와 방수 재킷은 너무 큰 것을 샀는지 어깨와 손목 부분이 잔뜩 뭉치고 구겨져 있었다.

심리 치료를 향한 코너의 부정적인 마음이 상담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코너가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기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코너는 잠시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분명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코너의 창백한 피부가 눈에 띄게 시들어 병약해 보였다. 푸른 눈은 마치 구름이 낀 듯 흐릿했다. 자신을 방어하려는 듯 목과 어깨가 굳어졌고, 호흡이 짧아졌다. 마치 짙은 안개에 휩싸인 여행자처럼, 코너는 수치심에 갇혀 있었다.
나는 귀를 기울이며 이런저런 질문을 몇 가지 던졌다. 코너는 최근에 큰 변화가 발생했다고 했다. 그 변화 때문에 코너의 가족은, 그리고 코너도 겁에 질려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코너는 긴장이 풀린 것 같았는데, 어쩌면 내가 코너의 이야기를 지겨워하거나 신경질을 내거나 그의 자기비판에 동참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믿음이 생긴 듯했다.

코너는 사회의 기대에 맞추어 모든 것을 ‘제대로’ 해내는 중이었고, 삶의 모든 요소가 체계와 안정을 향한 상태였다. 그러나 스물한 살의 나이에 삶이 통째로 무너져버렸다. 결국에는 대학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고, 장학금과 농구팀의 주전 선수 자격을 빼앗겼다. 그가 연달아 이어진 실패에 관해 말해주는 동안, 나는 그것이 얼마나 아픈 경험이었을지 겨우 상상이나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코너가 자신을 탓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해 전의 코너였다면 자신이 수업을 몇 과목이나 낙제하고, 농구팀에서 쫓겨나고, 집에 틀어박혀 살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코너는 최고의 농구선수,A+만 받는 학생이 되고 싶었다. 동기들과 함께 졸업하기를 고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지금은 혼자서 계속 게임만 하고 있고, 식사도 챙기지 않으며, 자꾸만 분노가 치밀고, 부끄러워 지인 앞에 나설 수도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 같았다.

지금이 코너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정말 솔직하게 대화해야 할 시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모험을 감행했다. 외부인에게는 충격적일 수도 있지만, 심리 치료의 관점에서 보면 코너의 속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행위였다. 이 순간을 그대로 흘려보낸다면, 코너가 어떤 감정 때문에 혼자 끙끙대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면, 첫 번째 상담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상담 전보다 더욱 큰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

코너는 그 모든 것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구구절절 말했지만, 성취감이나 인정 욕구 외에 기쁨 비스름한 것을 내비친 적은 없었다. 순수하게 원하는 마음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는 이런 식의 욕망을 장려한다. 만족보다는 성취감을, 친밀감이나 연결감보다는 물질 획득을 부추기는 것이다. 개인이 진정한 안녕을 누리기보다는 사회적 기대에 기반한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과제를 하나씩 완료하기를 원한다. 바로 이것이 또래들이 으레 그러듯 코너가 어린 시절부터 순응한 사회의 대본이었다. 하지만 코너의 삶은 그 대본만으로 지속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알아챘다. 코너와의 작업은 겁에 질린 채 숨어있는 길거리의 강아지를 유인해내는 것과 비슷할 터였다. 나는 코너의 신뢰를 얻어 그를 완전한 고립 상태에서 꺼내주어야 했다. 하지만 코너의 본능을 사로잡을 무언가를 제공해야 했다. 굶주린 동물에게 지금 막 요리한 맛있는 음식 냄새를 풍겨주는 것과 비슷하다. 줄곧 코너의 이성만을 상대로 대화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바로 그 이성이 독재자, 사디스트로 변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지금 코너의 이성은 그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사회적 가치에 순응하면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안정형의 삶에서, 그 가치가 변하고 부패할 때 생기는 증상이다. 코너의 행동 체계는 사회가 정의하는 성공에 부합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코너의 개인적인 욕구는 삶 속에서 비이성적이고 불필요한 것으로 무시당했다.

코너는 심각한 위기를 맞은 안정형이었다. 한 해 전에는 심리 치료 같은 것은 고려할 필요조차 없었고, 자신이 내리는 결정에 문제가 있다고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코너가 의지하고 있던 체계가 전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나는 코너가 자살 충동을 느낀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았다. 그간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이 무너져내린 충격은 삶이 통째로 사라진 듯 격렬했을 것이다. 코너에게는 단 한 가지 계획밖에 없었고, 그때까지는 훌륭하게 계획을 실천했다. 올라갔고, 성취했다. 코너는 지금껏 배운 대로 수행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좋은 성적을 받으면서 농구팀의 주장으로서 학교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을 끌어냈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두 해 동안 줄곧 비슷한 길을 가다가 무언가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이것저것 다른 질문을 던진 후에도 변화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익숙한 패턴을 식별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는 쿼터라이퍼를 등 떠밀어 수직적인 성취의 사다리를 오르게 하지만, 그 사다리는 결국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이어질 뿐이다. 이것은 불완전한 계획이다. 맨 위에 도달한 사람은 위험할 정도로 자아가 부풀고, 진정한 삶이 있는 지상과 단절된 채로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내가 코너에게 행운이라고 말했던 것은, 그의 상승을 지탱하던 부유물이 터졌을 때 그는 겨우 대학생이었으니 삶의 방향을 급격하게 바꿀 여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많은 것이 무너졌지만, 아직 코너를 잡아줄 친숙한 안전망이 있었다. 긴 경력을 쌓았거나 대출금을 갚아야 할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책임져야 할 부양가족도 없었다. 부모님과 같이 살아야 하는 상황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머물 곳이 있으니 다행이었다. 코너는 안전했고, 삶은 막 시작된 참이었다. 분명 무너진 것을 다시 쌓아 올릴 기회가 있었다. 그것도 전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안정형이 의미를 향해 나아가려면 붙잡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할 때가 많다. 이렇게 통제와 계획을 놓아버리는 것은 일종의 희생이자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죽음이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할 것만 같은 것을 포기하는 행위다. 놓아주는 행위는 오래된 삶의 방식이 끝났고 무언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여정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여정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다. 삶의 여정도, 받아들인다는 개념도 모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이론적이다. 하지만 허공에서 낙하하는 것 같다거나 지친 손으로 절벽에 매달리는 것 같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내면의 경험은 은유나 직유를 통해 묘사할 수 있다. 때로는 꿈의 도움을 받을 때도 있다.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도, 받아들이는 행위에 수반하는 두려움도, 전부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코너는 사다리 오르기를 그만두고 통제를 놓아야 했다.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진정한 삶이 있는 지상으로 내려와야 했다. 오랜 세월 동안 집중해온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삶의 다른 면에 관해 배우고 그의 의지력이나 계획보다 더 거대한 무언가를 신뢰하겠다는 뜻이었다. 코너는 열심히 삶에 매진하면서도 추락이 임박했다는 것을, 자신이 겨우 버티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균형을 잡기 위한 훈련과 기초가 없던 상태였기에, 의지력을 총동원해서 과거의 계획과 목표를 포기하라는 직감을 거부했다. 생과 영혼이 자신에게 권장하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의 작업은 주로 이런 사실을 이해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었다. 코너의 생각, 기분, 예감, 꿈, 경험에는 자기 자신과 미래의 안녕을 위한 정보가 풍부했고, 실은 최근에 일어난 일들을 미리 예견한 것 같았다. 어쩌다가 코너는 한때 즐기고 사랑하던 것들을 잊어버렸을까? 대학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놓아줘야 할까?

안정형은 의미형이 "유난"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내심 의미형의 풍부한 감정과 창의적인 표현력을 부러워하곤 한다. 반면 의미형은 안정형이 "꽉 막혔다"거나 "특권을 누리며 산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내심 안정형의 일관성과 손쉽게 세상을 살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며 부러워한다. 물론 이런 현상은 문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수많은 변주가 존재한다.

보통 상대 유형을 판단하고 질투하는 이유는 자신의 가장 큰 두려움과 갈망을 투사?3하기 때문이다. 그런 부정적인 반응은 온전한 삶을 향한 이끌림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실제로 안정형의 의미 추구는 궁극적으로 삶의 안정성을뒷받침하는데, 의미가 풍부하면 삶이 더 만족스럽게 느껴지고 허무라는 유령이 안정감을 압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형의 안정 추구 역시 오히려 삶의 의미를뒷받침하는데, 자신의 신념을 실현할 수 있고, 자신에게 외부 세계에서 살아가고 성장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더욱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정형은 자기 내면을 더 깊이 탐험하면서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평온한 일상에 위협이 될지라도, 자신에게 생동감과 목적의식을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반면 의미형은 일상의 과제와 장기적 목표에 매달릴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아주 고생스럽겠지만, 이런 과제와 목표는 창의력의 흐름을 돕고 삶을 더 탄탄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두 유형 모두 과거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삶 속의 관계와 소통을 개선하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다층적이고 단단한 개인이, 자신에 관해 더 정확하게 인식하면서 편안하게 외부 세상에 참여하는 개인이 탄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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