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

노력을 쏟아야 하는 관계,
바꾸거나 끝내야 하는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이러한 물리적 분리를 이뤄낼 수 있도록 사회에서 확실하게 생활과 경제적 차원의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쿼터라이퍼는 분리를 미룰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분리 본능을 무시하면 막대한 좌절감에, 갇혀버렸다는 기분에 휩싸일 수 있다.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삶을 시작하고 싶은 내적 욕구가 있다. 내면의 목소리는 ‘논리적인 결정’이 무엇인지, 생활에 어떤 제약이 생길지 신경 쓰지 말고 그저나아가라고, 탐험하고 호기심을 충족하라고 외친다. 그것은 정확히 명명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욕구이자 갈망이다. 어린 시절의 집과 관계에서 분리되고 싶은 욕구,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도 같은 욕구를 묵살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도 있다. 이 걷잡을 수 없는 허기는 고통, 공포, 소란, 불안, 심지어 폭력까지 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집을 떠난 쿼터라이퍼들이 알고 있듯 그것은 첫 단계일 뿐이다. 진정한 분리란 관계 속의 경제적?정서적?심리적 의존을 천천히 바꿔나가면서 자기 자신도 바꿔나가는 긴 과정이다. 건강한 분리 작업에는 새로이 관계의 선을 긋고, 의사소통 능력을 개선하고, 부모와 형제자매가(그리고 수많은 타인이) 자신의 자아 인식에 미치는 오묘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자세히 살펴보는 활동이 포함된다. 목표는 자신에 대해 알아내는 것,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신을 신뢰하는 것, 독립하는 것, 그렇게 타인과의 친밀감을 높이는 것이다. 이루기 힘들 때도 있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감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나는 코너가 아니라는 대답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코너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용서받고 싶었다. 그간 코너가 납덩이처럼 무거운 죄책감을 지고 살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를 용서해줄 권리가 없었다. 정말이지 용서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코너는 상처로 남은 찢어진 관계를 직면해야 했고, 과거로부터 배워야 했다. 친구이자 연인, 몹시 사랑하던 사람을 삶에서 잘라낸 후로 느꼈던 깊은 상실감과 외로움을 인정해야 했다. 상실의 슬픔과 죄책감을 솔직하게 직면하면, 새로이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나는 사건의 핵심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부모의 기대는 쿼터라이프 시기에 해결해야 할 문제 중 가장 어려운 축에 속하며, 이는 부모의 헌신에 직접적인 의문을 제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점차 알게 되었다. 부모 공경은 사회적으로, 지적으로 ‘선’하고 ‘도덕’적인 일로 수호된다. 많은 문화권과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규칙이다. 하지만 쿼터라이퍼에게는 뿌리로부터 진화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 이런 본능은 작은 속삭임과 회의감을 심어줄 때도 있고 요란한 비명을 외칠 때도 있다. 부모에게 의존하고 영향받는 삶과 분리하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부모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삶에 익숙한 상태인 데다가 부모의 믿음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허용하는 사회적 기반이 거의 없다 보니, 부모의 관점이 나 자신의 본능보다 더 중요해진다. 어린 시절의 충심을 너무 오래 간직하면 심리에 위험할 수 있다. 서로 싸우고 있는 두 명의 주인을 모시면서 제정신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코너는 자신이 부모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껄끄러웠다. 원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수 있을 정도의 결단력이나 용기가 없었고, 그 결과 림보나 연옥 같은 곳에 갇혀 자기 삶을 향해 나아가지도 못하고 부모의 기대에 맞게 살지도 못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이제 혼자서는 그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완전히 마비된 채로 추락하고 말았다.

코너는 용기를 내서 자기만의 삶을 살고, 자기만의 욕망과 선택을 추구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것 때문에 부모님의 욕망으로부터 멀어진다 한들 상관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는 부모님의 반응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코너의 분리 작업에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끊임없이 공유하고 소통하는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코너가 부모님의 복제품이나 후계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인식해야 했다. 그는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깊이 탐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이 코너가 창조할 평생의 걸작이 될 것이었다.

자식이 자기만의 길을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이유로 자식에게 자유나 신뢰를 주지 않는 부모라면, 일단 자기 자신을 깊이 돌아봄으로써 온 가족을 이롭게 할 수 있다. 성인 자식에게 부모 노릇을 하려면, 부모부터 자신의 어린 시절의 관계로부터 분리되고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추구하는 작업을 마쳐야 한다. 자식이 새롭고 독립적인 삶을 찾아 나서야 하는 만큼 부모도 동일한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자식이 쿼터라이프에 진입하면, 더는 부모라는 사실만으로 부모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없다. 부모는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수도 있다. 양육에 집중하기 위해 미뤄두었던 과제,자기만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살아간다는 과제를 탐구하는 것이다. 자기만의 야망, 창의력, 두려움, 희망을 탐험하고, 자기만의 심리적 장애물을 용감하게 넘어서야 한다.

나는 확신했다. 코너는 여자 친구를 향한 애정을 존중하기 전에자기 삶을 지키기 위한 용기부터 찾아내야 했다. 이 작업은 도덕적 용기를 함양하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쿼터라이프 시기의 분리 작업은 타인이 자신의 관점과 선택에 어떤 영향과 압력을 행사하는지 의식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따라서 분리 작업은 심리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필요하다. ‘내가 믿는 것’과 타인이 믿는 것을 세심하게 분리해내면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과 자기 인생을 향한 신뢰가 강화된다. 자신의 진심이 평온한 일상에 방해가 될 때조차, 아니 그럴 때일수록 분리에 노력을 쏟아야 한다. 분리 능력이 있으면어떤 것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고 어떤 것은 아닌지 알아내기 수월하고, 상황이 모호하거나 순응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을 때 그 갈등 속에서 자신이 어떤 입장인지 알아낼 수 있다. 자신에 관해 알아가기를 거부하고자신의 욕구를 지켜내지 않는다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상대의 욕망과 욕구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자기만의 삶을 살고자 한들, 남에게 판단당할까 봐 줄곧 고통스러울 터였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거나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는 분리 작업이 사뭇 다르게 진행될 수 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거나, 함께할 수 없거나, 처음부터 옆에 없었다면 분리 작업은 기억, 이야기, 부모가 남긴 물건을 통해 정체성을 발달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때로는 가족에게 정보를 구하거나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기억하는지 물어보고, 오래된 편지나 일기를 읽으면서 절박한 질문에 답을 찾고 자신의 역사에 관한 미지의 직감을 확인해야 한다. 이는 어려운 일이다. 특히 분노와 상실, 고통, 기쁨이 밀려드는 가운데서 힘들다고 토로하고, 질문을 던지고, 용서를 구할 상대가 없을 때는 더욱 어렵다. 삶의 방향을 바꾸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도 마찬가지다. 축복을 빌어줄 사람이 없을 때, "미안하다"는 말이 절실히 듣고 싶은데 그렇게 말해줄 사람이 없을 때도 그렇다. 미라는 홀로 이런 역할을 해내야 했다. 가장 급한 일은 미라의 욕망을 옭아매고 있는 어머니의 욕망을 풀어낼 수 있도록 스스로 허락하는 것이었다.

쿼터라이프 시기에는 과거의 관계를 바꾸고 싶은 자연스러운 발달 욕구가 생긴다. 타인에게 심리적으로, 물리적으로 의지하던 습관으로부터 ‘분리’하고, 독립성과 개성을 포용하는 새롭고 더 성숙한 관계를 맺으려는 본능적인 욕구다.

바람직한 미래는 삶의 여정 속에서 부모와 자식이 평등하게 진화하는 것, 위계와 의존성이 사라진 상태로 다시 서로를 마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할 변화가 이루어지려면 상당한 양의 의식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는 압박이나 오해, 상처, 좌절 같은 함정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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