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인물/김일성

김일성(1912년~1994년)은 북한의 정치 지도자로,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김일성 유일체제 확립에 성공했다. 해방 이전까지 김일성에 관한 기록은 미미하다. 그의 항일투쟁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1930년대 초반 만주 일대에서 활발한 활약을 펼쳤고 1937년에는 보천보 전투라는 국내 진공전을 펼쳤으며 끝내 일제에 체포되지 않고 소련 지역으로 망명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60.사건/갑오개혁과 광무개혁

조선 말기, 대한제국기의 근대화를 목표로 한 대규모의 개혁이다.
세계 각국의 역사를 보면 개혁의 시대가 있다. 종교개혁처럼 유럽 문명 자체가변화하기 시작한 사건도 있고, 뉴딜 정책처럼 새로운 경제 정책을 도입해 국가 위기를 극복한 사례도 있다. 한민족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신라 말기에는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개혁안을 제시했고, 고려 말에는 공민왕이 적극적인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갑오개혁은 1894년부터 1896년에 진행됐던 조선 말기 대규모의 개혁이고, 광무개혁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추진한 개혁이다. 두 개혁은 모두 근대화를 목표로 했다. 갑오개혁은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추진되는데 신분제와 과거제를 폐지, 각종 전근대적인 관습 폐지부터 근대적 학교 설립, 단발령 실시 등 그야말로 개혁의 종합체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59.명문장/농사직설

농사는 천하의 대본(本)이다. 예로부터 성왕(聖王)이 이를 힘쓰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 오방(方)의 풍토가 같지 않아 곡식을 심고 가꾸는 법이 각기 적성이 있어 옛 글과 다 같을 수 없다 하여, 여러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주현의 노농(老)들을 방문토록 하여, 농토의 이미 시험한 중험에 따라 갖추어 아뢰게 하시고 (...) 그 중복된 것을 버리고 그 절실하고 중요한 것만 뽑아서 찬집하여 한편을 만들게 하고 제목을 <농사직설>이라고 했다.
농사 외에는 다른 설(說)은 섞지 아니하고 간략하고 바른 것에 힘을 써서, 산야(山)의 백성도 환히 쉽사리 알도록 했다. (…) 백성을 인도하여 살림을 넉넉하게 해서,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되도록 할 것이다.

세종 대 편찬한 농서 <농사직설>의 일부다. 논농사는 조선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가장 일반적인 생산 방식이었다. 벼농사는 이미 기원전 6000년부터 확인될 만큼 오래됐다. 양쯔강 하류에서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고 베트남에서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한반도에서도 오랫동안 농사를 지었지만 농업 발전을 위한 체계적인 농서 보급 같은 것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58.학문•철학/공명첩

공명첩은 초기에는 납속책의 일환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재정 문제를 자발적 기부를 통해 해결하고 그 대가로 관직을 하사하는 제도로 운영됐다. 일종의 명예직으로, 실제 관료로 임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돈으로 관직을 사는 방식자체가 일종의 신분 상승 수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붕당 정치로 인해 향반, 잔반으로 불리는 몰락한 양반이 나타났고 농사로 크게 성공한 부농들이 등장하면서 신분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경제력을 이용해 공명첩을 구입하며 일종의 신분 세탁에 나서게 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큰 세상, 호화로운 삶(높은 계층)보다 행복에 이르는 나쁜 길은 더 없다. 그러한 생활은 우리의 비참한 존재를 기쁨, 즐거움, 쾌락으로 끊임없이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의무적으로 수반되기 때문에 기만과 환멸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다.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자극으로
공허를 이기면 불행해진다

드물게 운의 우연을 제외하고서는 인간의 본성에 결함이 있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의 그런 본성은 손대지 않는 게 더 낫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일반적인 속임수에 빠지지 않으며, 그 누구를 보더라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차릴 수 있으므로 그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욕구를 거의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호라티우스는 "모든 면에서 행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송가>)라고 말했다. 인도 속담에는 "줄기 없는 연꽃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고독에는 많은 장점 외에도 작은 단점과 어려움이 있지만 아주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과 비교해보면 그들 없이 지내는 편이 더 쉬운 일이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형편이 나아 보이는 사람보다는 우리보다 형편이 나쁜 사람을 더 자주 살펴보는 것이 좋다. 또한 실제로 불행이 닥쳤을 때 가장 효과적인 위로가 되는 것은, 위로가 비록 질투와 같은 근원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우리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바라보는 일이다.

어떤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에는 충분히 반복해서 생각해야 한다. 모든 것을 가장 철저하게 숙고한 후에도 여전히 인간 지식의 불충분함을 인정해, 조사를 하거나 예측을 할 수 없게 하고 전체 계산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상황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는 항상 부정적인 면에 무게를 실어 중요한 문제에서 필요 없이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일단 결정을 내리고 계획을 실행하게 되면 모든 것이 되는 대로 맡기고 그 결과를 기다리면 된다. 그런 다음에는 이미 실행한 일을 계속 반복해서 생각하거나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을 걱정하며 불안해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깨끗하게 잊고 모든 것을 적절한 때에 충분히 잘 해내었다는 확신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가지고 자신을 진정시켜야 한다.

이미 일어나버려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불행한 사건의 경우, 그것이 달라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허용해서는 안 되며, 피할 수 있었다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다가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커져서 자학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우리 자신의 태만이나 무모함이 그 불행에 적어도 최소한 책임이 있다면 고통을 느끼겠지만, 미래에는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는지를 거듭 숙고해보는 것이 우리의 교훈과 개선을 위해서도, 또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도 유익한 자기 체벌이 될 것이다.

행복이나 불행에 대한 모든 것에는 상상력을 억제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공중누각을 지어서는 안 된다. 쌓아 올리자마자 한숨을 쉬며 다시 무너뜨리면 그 대가가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나중에 일어날 수 있는 재난을 미리 떠올리며 마음을 괴롭히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과 불행에 관련되는 것들을 이성과 판단력의 눈으로만 보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숙고하고, 상상력에서는 벗어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상상력은 판단할 수가 없는 데다가 쓸데없이 종종 매우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단순한 그림을 눈앞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지 않은 것을 보면 쉽게 ‘저것이 내 것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 생각은 우리에게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
그 대신 우리는 ‘이것이 내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 하고 자신에게 더 자주 물어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내 말의 의미는 때때로 ‘우리가 가진 것을 잃어버리고 나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면에서 사물을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유리한 가능성만을 추측해 현재의 우울함을 밝히려고 노력하거나 공상과도 같은 모든 종류의 희망을 생각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사실 환멸을 품고 있는 것이라 냉혹한 현실에 산산이 부서지면 그 환멸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서랍에서 하나를 열 때는 다른 것들은 모두 닫아두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무거운 걱정 하나가 현재의 모든 작은 기쁨을 시들게 해 우리의 마음의 평정을 잃게 하지 않고,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들을 밀어내지도 않으며, 하나의 중요한 일을 걱정하느라 많은 다른 사소한 일을 소홀히 하지도 않게 된다.

외부로부터의 강제를 피하려면 무엇보다 자기 강제의 방법을 쓰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는 극단적인 경우나 예민한 문제와 관련되어 긴장이 풀리는 경우를 제외하고, 자기강제를 통해 언제나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외부에서 가해지는 강제는 가차 없고, 인정사정없으며, 무자비하다. 그렇기에 외부의 강제가 오기 전에 자기 강제에 의해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우리 각각은 욕망에 대한 목표를 설정하고, 우리의 욕망을 억제하기도 하고, 분노를 길들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원하는 모든 것 중 아주 작은 부분밖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많은 불행은 모든 사람에게 닥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소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의 목표를 세워 욕구를 억제하고, 분노를 제어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단념하고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으면 끔찍한 무료함에 빠져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이러한 충동을 체계적으로 더 잘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충동을 조절해야 한다. 그래서 활동하는 것, 즉 가능하면 무언가를 행하고, 또 가능하면 무언가를 만들고, 최소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인간의 행복에 필수적이다.

우리 인생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어쩌면 만화경의 그림과 비슷하다. 만화경에서 우리는 매번 다른 그림을 보고 있지만 실제로 눈앞에 있는 그림은 사실 항상 같은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시간의 영향과 사물의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의 반대 상황을 즉각적으로 상상해봐야 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언제나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고 쉽게 속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 데 진정한 지혜의 원천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게 될 것이다.

그 어떠한 것도 영원히 그러한 권리를 지키지 못하며, 영원한 것은 오직 ‘변화한다’는 사실뿐이다. 현명한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그러한 안정성에 속지 않고, 변화가 일어날 방향을 예견한다.

영향을 예상해 시간을 앞질러 결과를 예견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만 해야지 실제적으로, 즉 시간이 지나야만 가져올 수 있는 것을 그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미리 앞질러서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 어느 누구라도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은 ‘시간보다 더 지독하고 무자비한 고리대금업자는 없다’는 사실과 ‘무리하게 억지로 시간을 앞지르려 하면 그 어떤 유대인보다 더 높은 이자를 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시간의 고리대금업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시간을 앞당기지 않으려고 계획하는 것은 어쩌면 굉장히 값비싼 작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에 이자를 빚지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사건·사고들은 그것이 크든 작든 우리 인생의 한 요소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늘 반드시 명심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리즈포드(영국의 작가, <인생의 불행>이라는 저서로 유명함?옮긴이)가 이야기한 ‘인생의 불행’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한탄하며 얼굴을 찌푸리기만 하거나, 작은 벼룩에 물렸다고 신의 도움을 청해서는 안 된다. 분별력이 있는 인간으로서 사람에게서나 사물로부터 일어날지도 모르는 재난을 사전에 피하고 그것을 예방하는 데 신중함을 기해야 한다. 마치 동화에 나오는 영리한 여우처럼 크거나 작은 불행(이러한 것은 대부분 그저 미숙한 것을 숨기려는 것에 불과하다)을 말끔히 피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심사숙고를 기울여야만 한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 그들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나쁜 행동은 다음 세상에서 속죄의 대가를 치르게 될지라도,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짓을 한 자들은 때때로 자비로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결국은 이 세상에서 그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더 끔찍하고 위험해 보이는 건 사납게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현명한 눈을 가진 사람이다. 사자의 발톱보다 인간의 두뇌가 더 무서운 무기임은 확실하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있다면 결코 주저하지도 않고 급하게 서두르지도 않는 사람일 것이다.

인생 그 자체는 비겁하게 떨며 마음이 위축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인생에서의 재산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용감하게 살아라, 용감한 가슴으로 운명의 시련에 맞서라.’(호라티우스, <풍자시>)
그러나 이런 마음에도 지나침을 조심해야 한다. 용기가 무모함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느 정도의 두려움과 소심함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겁이란 단지 두려움이 지나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