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시 세상이 너무 무서워서, 그만큼 간절하게 궁금하고 이해하고 싶어서 읽고 쓰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쓰는 사람은 쓰지 못한 이야기 안을 헤매며 산다. 세상에는 모르고 싶은 일과 모르면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았다. ‘덜’ 중요한 것을 쓰고 싶다는 야심은 자주 실패했다. 직업을 잘못 택했다는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인정받고 싶다’와 ‘도망가고 싶다’ 사이에서 나는 자주 사라졌다. 나는 내가 쓰는 글이 작고 사소해서 반짝이는 것으로 가득하길 바랐다. 내 일은 그런 사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물음표 대신 마침표를 더 자주 써야 했다.

책에서 취한 살과 뼈에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마음대로 이어 붙였다. ‘읽기’는 자주 ‘일기’가 되었다. 밑줄을 따라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나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들고 책 앞에 서곤 했다. 삶도, 세계도, 타인도, 나 자신조차도 책에 포개어 읽었다. 책은 내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반드시 만들어 주었다.

결혼을 한 지금도 자정 넘어 귀가 중일 때, 엄마의 전화가 없으면 괜히 서운하다. 기껏해야 20여 초, 짧은 통화마저도 가끔은 귀찮지만 실은 그보다 많이 안심이 된다. 엄마는 늘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다. 엄마가 앞으로도 오래오래 나를 기다려 줬으면 좋겠다. 엄마도 모르는 사이 나는 엄마와 싸우고, 화해하고, 또 다른 엄마를 만들어 내기도 했으므로. 내 몸을 만든 엄마의 무수한 칼자국 덕분에 나 역시 ‘가슴이 아프다’라는 말을 물리적으로 아는 사람이 되었다.

글이 삶을 초과하지 않도록 애썼지만 매번 실패하고 타협했다. 쓸 때의 나는 여기 없다. 이 글들은 나였던 것,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닌 것이다. 살아가는 일은 사라지는 일이지만 나는 내 젊음을 부러워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과거의 나는 여기에 두고, 여전히 ‘처음’인 많은 것들에 매번 새롭게 놀라면서 다음으로 가고 싶다. 행간을 서성이며 배운 것들 덕분에 반드시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될 앞으로를 기대한다.

엄마,
다음 생엔 내 딸로 태어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그해 나는 다섯 살, 동생은 세 살이었다. 엄마는 고작 스물일곱 살이었다. 나중에 내가 스물일곱이 되었을 때 엄마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그제야 실감했다. 나의 스물일곱은 뭐든 허물고 새로 시작해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가능성의 나이였다. 왜 나를, 동생을 버리지 않았냐고, 따지듯 물었던 날도 있었다. 정말 궁금했다.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희생되어도 좋은지.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엄마의 스물일곱을 내가 방해하고 어쩌면 훼손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견디기 힘들었다. 엄마이기 이전에 ‘한 여자’의 삶을 그제야 제대로 볼 수 있었으나, 엄마에게는 그저 비난으로 들렸을 말을 참 잘도 지껄였다. 자라는 동안 나는 송곳 같은 자식이었다. 후벼 파기가 전공이었다. "다른 집에는 다 있는 아빠가 우리 집에는 왜 없어"라고 발버둥 치며 울던 여덟 살 때부터 나는 볼썽사나운 자식이었다

김애란이라는 작가를 소개한 어른은 내게 ‘김애란 같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나는 ‘김애란을 만나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문화팀 발령 이후 첫 인터뷰를 맡게 됐을 때였다. 그는 연재 중이던 장편소설(≪두근두근 내 인생≫)이 출간되고 나면 만나자고 몇 차례 고사했지만, 나는 그 전에 꼭 만나고 싶다고 졸랐다. 그의 글을 만난 이후 내 삶이 그에게 빚진 부분이 많았으므로.

엄마가 나를 가여워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엄마는 늘 나를 불쌍하게 여겼다. 자기 처지를 연민했고, 자기 새끼를 연민했다. 그래서 우리는 당당한 관계가 될 수 없었던 걸까. 나는 많은 시간 엄마에게 ‘물리적으로’ 빚진 기분으로 살았다. 차라리 소설 속 ‘어미’처럼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욕도 잘하는,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런 엄마는 소설 속에 이미 있었으므로, 나는 그저 나의 ‘두 번째 엄마’로 그를 취하기만 하면 됐다

나는 엄마의 은폐 덕분에 아버지의 죽음을 삼십 년 가까이 교통사고로 알고 살았다. "사실은 자살"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살짝 놀랐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정말 자살이라면, 근사한 측면도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늘 엄마에게 이름을 찾아 주고 싶었다. 장일호와 장명호의 엄마가 아닌 한 사람. 고3 여름, 취업이 결정되고 폴더형 휴대전화를 처음 가졌을 때 나는 휴대전화에 엄마 번호를 입력하면서 ‘엄마’ 대신 ‘송명희’라고 적어 넣었다. 아버지가 사랑을 담아 가만히 발음했을 그 이름을. 나는 많은 시간 송명희 씨가 여자로 살길 바랐지만, 그녀의 사랑은 번번이 실패했다. 엄마는 자신이 평생에 걸쳐 받을 사랑을 아버지와 함께 사는 5년 동안 모두 받았노라고 말하곤 했다. 그 말은 내 생각엔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버지가 동네 모르는 다방 아가씨가 없는 남자였다는 흉을 엄마 입으로 종종 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는 되도록 좋은 기억만을 파먹으며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자살했다. 당신 나이 스물아홉 살에. 여름이 한창인 1988년 초복이었고, 유서 한 장 없는 죽음이었다. 대체 청산가리는 어디서 어떻게 구한 걸까. 엄마는 아버지가 죽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고 경찰에게 매달렸다. 경찰은 주검을 발견한 즉시 아내 동의 없는 부검을 마치고 사건을 하루 만에 종결시켰다.

엄마가 싫어하는 것 중 하나는 내가 출근하면서 "간다"라고 말하는 인사다. "갔다 올게, 아니다.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해 봐." 시간에 쫓겨 인사 없이 훌렁 나가는 일이 다반사지만, 아침에 이렇게 한마디씩 나눌 여유가 있으면 새삼 깨닫곤 한다. 집 나선 가족이 돌아오지 않는 일이 엄마에게는 평생의 상처라는 걸. 삼십 년 넘는 세월이 지나도 희미해지지 않는 흉터가, 엄마에게는 아버지라는 걸. 그래서일까. 엄마는 내가 긴 출장이나 여행을 가기 전에는 밥을 잘 차려 주지 않았다. 엄마가 차렸던 아버지의 생전 마지막 식사가 출장 날 아침이었던 탓이다. 마찬가지로 그날 아침 밥상에 올렸던 고등어자반 역시 졸라야만 해 주는 음식이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 바깥을 상상해 보지 못한 채 좁아진 엄마의 삶은 직접적으로 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남편이 벌어 오는 돈으로 살림만 하고 살면 얼마나 좋아." 그런 엄마를 조롱하며 싸웠지만, 엄마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주부’로 살 때였고, 그래서 딸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그 말에 담겼음을 뒤늦게 헤아리고 한참을 후회했다. 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엄마에게 더 좋은 삶을 선물하고 싶다. 다만 현실의 엄마와 나는 당장 생활의 구멍을 메우는 일에 골몰할 수밖에 없으므로, 하릴없이 ‘다음 생’을 약속할 뿐이다. 다음 생에선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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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는 눈부시다는 거짓말

우리는 공부하고, 과제 하고, 시험을 봤다. 운동하고, 시위하고, 파티 하고, 학생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비가 내리지 않는 날에는 너른 잔디밭에 누워 있기도 했다. 항상 바쁘고 할 일이 많았으나, 학교를 잘 다니다가 졸업하겠다는 목표에 집중한 상태였다. 수업마다 정해진 일정이 있고 기말고사가 있었다. 한 학기는 다음 학기로 이어졌고, 그러다가 졸업할 때가 됐다. 마지막 기말고사 기간이 지나고 가족과 졸업식에 갈 준비를 마치자마자 모든 게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난데없이 맞이한 우리의 상황은 이랬다. 거의 20년 동안 이어지던 학교생활이 끝났고, 앞으로 해야 할 일에 관한 안내는 사실상 없었다.

행복하지는 않았다. 재정적인 생존을 제외하면 내가 하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도 없었다.

내면과 조응하면서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생을 꾸려가려고 애썼으나 실패하고 있었다. 내가 꿈꾸던 미래가 아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한 이유가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라니, 믿기 힘들었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막다른 길이었다. 마음속의 소음이 잦아들지 않았다. 내 중심을 찾을 수 없었다.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지쳐버린 상태였지만, 내 걱정들이 하찮고 지겨워서 죽을 것 같았다. 내가 하는 일은 위기가 끊이지 않는 세상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내가 하는 일은 뚜렷한 행복감이나 목적의식을 선사하지 못했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은 몇 년이 지난 후였다. 그 당시 할 수 있었던 말은 이 책 속의 무언가가, 이 안에 담긴 생각이 내게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고 인생을 바꿔놓으리라는 것뿐이었다. 융이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은 내 삶 속의 경험과 깊이 공명했다. 과거에는 그 어디서도 접하지 못한 방식이었다. 융이자기만의 삶을 찾아내고 살아내야 할 필요성에 관해서 쓴 대목을 읽었을 때, 나는 내 끝없는 질문과 더 나은 삶을 향한 탐색이 옳다고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융이 완벽과 성취가 아닌온전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을 때는 그 기분이 더욱 강렬해졌다.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느끼지 못한 깊고 지속적인 평온을 느꼈다.

쿼터라이프를 지칭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어휘는 성인기나 청소년기에 이런저런 수식어를 붙인 것뿐이다.연장된 청소년기extendedadolescence,어린 성인기youngadulthood,이른 성인기earlyadulthood,성장하는 성인기emergingadulthood 등등. 심리학 문헌을 살펴보면 각각의 용어를 향한 상반되는 관점을 자주 접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모든 용어의 공통점은 이 시기를 일종의 중간다리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20년 남짓한 기간이 ‘진정한’ 생애 주기 사이에 낀 전환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 무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날 때까지 앉아 기다리는 로비 격이라는 듯한 태도다.

이 시기의 발달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또 다른 원인은 어느 시기든 특정 세대를 지칭하는 단어가 유행을 타면 다들 그 단어에만 집착하는 풍조다. 이렇게 한 세대에 꼬리표를 붙이는 행위는 그 세대가 쿼터라이프에 진입했을 때 이루어지고는 한다. 과거의 ‘밀레니얼’, 최근 ‘Z세대’를 보면 알 수 있듯, 특정 세대를 일컫는 말은 ‘요즘 애들’(이것도 흔히 쓰는 말이다)에게 주로 사용된다. 세대를 지칭하는 말인데도 그 세대만의 특징보다는 특정 나이대를 묘사하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다. 이는 막대한 혼란과 오해를 낳는 심각한 문제다. 현재 많은 밀레니얼이 정확히 쿼터라이프 시기를 지나고 있고 나머지는 중년에 진입했다. 매일 더 많은Z세대가 쿼터라이프에 진입하고 있으나 대다수는 청소년기와 아동기에 머물러 있다.세대와 생애 주기는 같은 것이 아니다.
같은 나이대에 속한 사람들이 전부 똑같은 것도 아니다.

오랫동안 우리에게는 이 시기의 발달에 관한 이해가 필요했다. 문화는 끊임없이 변하고, 삶에 새로운 기술이 침투하며, 새로운 위기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 변화는 한 세대의 행동과 경험을 형성하겠지만, 인간의 발달과 건강의 기반을 재정의하지는 못한다. 이제20년마다 새로운 인구 집단과 행동 패턴에 관한 통계를 붙들고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자기만의 삶을 만들어내는 시대 불변의 과제에서, 세상의 변화는 이야기의 배경이지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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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학문•철학/시민단체

비정부 조직(non-governmental organization)이자 시민들의 자발적인 결사체로, 이익단체와 구분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단체는 1989년에 만들어진 ‘경제정의실천연합‘이다. 약칭경실련이 만들어지면서, 각양의 사회 의제를 두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가 이루어졌고 관련 전문가들이 합세했다.
시민단체의 발전은 운동권의 쇠퇴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80년대 전두환정권과의 투쟁을 통해 성장한 운동권은 민주화 이후에도 전대협, 한총련 등을 결성하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벌였지만 국민들에게 외면받으면서 급속도로 쇠퇴한다. 이 와중에 <조선일보> 같은 보수 언론이 적극적으로 시민단체의 활동상을 보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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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삶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인생은 길다. 그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다. 젊어서 죽으면 인생은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요절하지 않으면 다 자란 후에도 추가로 남은 몇십 년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50년, 60년 어쩌면 70년 정도 남은 시간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형이 죽고 나서 나는 어찌어찌 메트로 오는 길을 찾게 됐다.
그리고 성년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여정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추구하던 성장과 변화를 마무리 짓는 최종 목적지 같은 시기라 생각하는 쪽이 편했다. 형보다 더 나이 든 사람이 된 지금이 이상하고 부자연스럽다. 어릴 적 올라가서 놀던 나무보다 키가 더 커지면 이런 느낌일까. 그러나 이제는 내 삶이 지금 보이는 지평선 너머까지 뻗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정도의 관록은 갖추게 되었다. 삶은 휘청거리고 삐걱거리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테고, 그 방향을 나 스스로 잡는 편이 낫다는 것도 알게 됐다. 다시말해 내 삶은 여러 개의 챕터로 되어 있고, 그 말은 현재의 챕터를 언제라도 끝낼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리를 지키며 서 있는 동안에는 계속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다. 거의 완벽한 직장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이상 완벽한 직장이 아닐지도 몰랐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전시실에서 벌어진다고 생각하던 한때가 있었고, 명상과 같은 고요함을 감사한 마음으로 음미했다. 그러나 요즘은 생각이 미술관 밖으로 휘리릭 날아가서 몸과 마음이 움찔거리고 안절부절못하기 일쑤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고요하고 정돈된 환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경기장 밖에 서서 게임을 잠자코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 전시실을 찾는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들을 지켜보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이 큰 도시와 넓은 세상을 어떻게 만나게 해줄지를 계획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두려우면서도 흥분되는 미래다. 솔직히 말해서 코딱지만 한 우리 집이 혼란에 빠지지 않게 하는일만으로도 벅차고, 바깥 세상과 다양한 관계를 맺기 위해 더 강인하고 용감해질 방법을 배우고 싶다.

미술관이 소장한반 고흐 작품 중 절반가량이 눈에 들어온다. <해바라기>와 <협죽도>와 심플한 하얀 꽃병에 꽂힌 <붓꽃>이 보인다. 감자를 깎고 있는 농부와 카페 주인인 지누 부인, 무릎을 꿇고 앉아 딸이 첫 걸음마를 떼는 걸 응원하는 농부가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붉은 턱수염이 더부룩한 채 오랜 고통에 시달리는 화가 자신이 모습을 드러낸다. 맑은 눈에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고 관광객들의 요청에 마지못해 그들이 찍는 셀카에 응해주는 반 고흐.

예술에 관해 내게 가장 큰 감명을 준 글은 1884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을 방문한 빈센트 반 고흐에 관한 글이었다. 그는 늘 일행들의 발걸음을 늦추게 하는 종류의 관람객이었던 듯하다. 1884년에 그와 함께 박물관을 찾았던 친구 안톤 케서마커스는 "그는 <유대인 신부> 앞에서 하염없이 서 있었다"라고 썼다. 렘브란트의 작품이었다.

그를 그 자리에서 떼어낼 방법이 없었다. 그는 그냥 그곳에 가서 편히 자리를 잡고 앉았고 나는 다른 작품들을 둘러보러 갔다.
"다 보고 와. 나는 여기 계속 있을게." 그가 말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내가 돌아가서 이제 다른 곳으로 좀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묻자 그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믿을 수 있겠어? 진심에서 하는 말인데 여기, 이 그림 앞에서 말라 빠진 빵 조각이나 먹으면서 2주일 정도 앉아 있을 수만 있으면 내 명을 10년은 단축해도 좋을 것 같아." 그러다가 마침내 그가일어섰다. "하는 수 없지." 그가 말했다. "여기 영원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렇지?"

그렇다,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은 위안을 준다. 힘이 나게 한다. 그리고 순수하다. 빈센트의 <붓꽃>을 보고 있자면 가난과 자신을 괴롭히는 상념들에서 벗어나 그 생기 넘치는 단순함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화가의 염원이 느껴진다. 그러나 몸을 돌려 우리 앞에 놓인 것을 직면해야 하는 시간은 오고야 만다. 빈센트의 이야기가 슬픈 것은 그가 삶을 살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보다 운이 좋다는 사실에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감사하다. 내 이야기는 행복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술관 경비원으로서 수행한 마지막 임무는 바로 맨 처음 미술관에 갔을 때 배운 일이었다. 20여 년 전, 어머니는 톰 형과 미아와 나를 시카고 미술관에 데리고 가서 각자 제일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씩을 고르기 전에는 전시실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그렇기에 메트에서 10년을 일했는데 내가 어떤 작품을 제일 좋아하는지 모르는 채 떠날 수는 없는 일이다. 몇 달 동안 공책에 후보들을 적고 리스트를 만든 다음 가차 없이 숫자를 줄이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메트 소장품들을 개인적인 컬렉션으로 축소했다.

너무 많이도, 너무 적게도 고르고 싶지 않다. 내가 품고 갈 수 있는 숫자 정도면 된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시금석이 되어줄 작품들. 옛 거장 전시관에서 내가 제일 필요로 하는 그림은 15세기 이탈리아 수사 프라 안젤리코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내가 가진 편견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오래된 작품이 좋다. 단단한 나무판 위에 입혀진 템페라의 느낌도, 자디잘게 금이 간 금박 아래로 붉은 진흙

베이스가 살짝 얼굴을 내미는 것도 좋다. 옛 기독교 예술품과 거기에 깃든 빛을 발할 정도로 선명한 슬픔이 좋다.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이 그림이 톰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예수의 몸은 태풍에 요동치는 배의 돛대에 못 박힌 것처럼 보인다. 그를 중심으로 나머지 세상이 흔들리며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우아하면서도 부서진 몸은 뻔한 사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 고통 속의 용기는 아름답다는 것, 상실은 사랑과 탄식을 자극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림의 이런 부분은 성스러운 기능을 수행해서 우리가 이미 밀접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불가해한 것에 가닿게 해준다.

나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가운데 부분이 혼란스러운 일상생활을 제대로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디테일로 가득하고, 모순적이고, 가끔은 지루하고 가끔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일상. 아무리 중차대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기저에 깔린 신비로움이 숭고하다 할지라도 복잡한 세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림 하단이 있다. 그곳에서 그림의 톤은 다시 한번 변화한다. 거기에는 슬픔에 겨워 쓰러진 어머니를 돌보는 연민 가득한 사람들이 있다. 수동적인 구경꾼들과 달리 그들의 마음은 같은 방향, 즉 선행으로 향하고 있다. 그림의 이 마지막 부분은 따르고 싶은 모범이다. 내 앞에 펼쳐진 삶에서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필요한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다른 이들도 나를 위해 그렇게 해줄 것이라는 게 나의 희망이다. 이제 형은 세상에 없다. 나는 그 상실을 느낀다. 형은 그림에서 성모 마리아를 돌보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린 채 몸을 굽히고 있는, 칭찬받아 마땅한 현실적인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지금도 형의 초상화, 티치아노가 그린 듯한 밝고, 솔직한 형의 얼굴이 선명하게 살아 있고, 그 모습에서 나는 위안을 찾는다. 이 그림이라면 확실히 내가 메트 바깥으로 품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미술관이 문을 닫을 시간이 가까워올 때까지도 나는 계단 맨 꼭대기의 내 자리에 서 있다. 저 아래 그레이트 홀은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사람들이 바다처럼 몰려가 맡겨뒀던 옷을 찾아 입고, 지도를 보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세상을 떠나 일상과 삶으로 돌아가는 수순을 밟고 있다.

많은 경우 예술은 우리가 세상이 그대로 멈춰 섰으면 하는 순간에서 비롯한다. 너무도 아름답거나, 진실되거나, 장엄하거나, 슬픈 나머지 삶을 계속하면서는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순간 말이다. 예술가들은 그 덧없는 순간들을 기록해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들은 덧없이 흘러가버리지 않고 세대를 거듭하도록 계속 아름답고, 진실되고, 장엄하고, 슬프고, 기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믿게 해준다. 그리고 이곳 메트에 유화물감으로 그려지고, 대리석에 새겨지고, 퀼트로 바느질된 그 증거물들이 있다.

세상이 이토록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고 충만하며, 그런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며,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들을 정성을 다해 만들려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신비롭다. 예술은 평범한 것과 신비로움 양쪽 모두에 관한 것이어서 우리에게 뻔한 것들, 간과하고 지나간 것들을 돌아보도록 일깨워준다. 예술이 있는 곳에서 보낼 수 있었던 모든 시간에 고마운 마음이다. 나는 이곳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10년 전, 배치된 구역에 처음 섰을 때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다. 때때로 삶은 단순함과 정적만으로 이루어져 있을 때도 있다. 빛을 발하는 예술품들 사이에서 방심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살피는 경비원의 삶처럼 말이다. 그러나 삶은 군말 없이 살아가면서 고군분투하고, 성장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이기도 하다.

미술관이 소장한반 고흐 작품 중 절반가량이 눈에 들어온다. <해바라기>와 <협죽도>와 심플한 하얀 꽃병에 꽂힌 <붓꽃>이 보인다. 감자를 깎고 있는 농부와 카페 주인인 지누 부인, 무릎을 꿇고 앉아 딸이 첫 걸음마를 떼는 걸 응원하는 농부가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붉은 턱수염이 더부룩한 채 오랜 고통에 시달리는 화가 자신이 모습을 드러낸다. 맑은 눈에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고 관광객들의 요청에 마지못해 그들이 찍는 셀카에 응해주는 반 고흐.

그렇다,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은 위안을 준다. 힘이 나게 한다. 그리고 순수하다. 빈센트의 <붓꽃>을 보고 있자면 가난과 자신을 괴롭히는 상념들에서 벗어나 그 생기 넘치는 단순함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화가의 염원이 느껴진다.

그러나 몸을 돌려 우리 앞에 놓인 것을 직면해야 하는 시간은 오고야 만다. 빈센트의 이야기가 슬픈 것은 그가 삶을 살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보다 운이 좋다는 사실에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감사하다. 내 이야기는 행복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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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문화/기업

이윤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체로, 현재는 대한민국 국민 경제의 기본 요소로자리 잡았다. 기업의 탄생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단순한 상업 행위는 지역의 범주를 넘지 못하고, 무역 행위는 귀족의 사치품 소비에 제한돼왔다. 하지만 유럽에서 신대륙을 발견하고 독자적으로 아시아 항로를 개척한 이후, 상업과 무역의 의미는 종래의 가치를 뛰어넘는다. 신대륙 개척해서 대규모농장을 건설하여 단일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생산하면 큰 이윤을 남길 수 있고, 중국이나 인도에서 특산품을 구매해 유럽으로 가져오면 큰 이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상업과 무역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또한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틀이 됐다. 이러한 흐름은 산업혁명을 통해 가속화됐고, 일이 체계적으로 분업화되면서 이윤만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 일반화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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