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다가도 슬픔이 묵직하게 방문하면 마음 둘 곳을 몰라 서성인다. 가능하면 몰려오는 감정을 피하지 않고 맞선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굉장한 재능 중 하나다. 꼭 그만큼 삶이 넓고 깊어진다. 싫어하는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늘려 가면서 살고 싶다.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이 늘어날 때마다 싫어하는 것들이 나를 침범해 올 때 숨거나 도망갈 수 있는 요새를 짓는 기분이 든다.

내 마음에는 할머니 무덤도 있고, 아빠 무덤도 있고, 종현의 무덤도 있다. 살아 있는 일은 마음에 그렇게 몇 번이고 무덤을 만드는 일임을, 슬픔은 그 모든 일을 대표하는 감정이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인사하고 돌아서는 내 등을 뾰족한 것이 지그시 눌러 왔다. 두꺼운 점퍼를 입었지만 느낄 수 있는 날카로움이었다. 아저씨는 나긋한 목소리로 그것이 칼임을 알렸다. 본관 건물 뒤쪽으로 나를 몰았다.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했다. 바지와 속옷이 차례로 벗겨지는 동안 나는 오줌을 지렸다. 나지막한 소리로 욕하는 그에게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너무 무서우면 목소리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동시에 찾아왔던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토막 쳐진 기억 속에서도 지금까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이 수치심은 오랜 시간 내게 벌어진 일을 해석하는 데 방해가 됐다.

발도 키도 크는데, 몸무게만큼은 좀체 늘지 않았다. 2차 성징은 더디게 왔다. 차라리 남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남자가 아닐까 상상했다. 생리를 하지 않는 건 그때의 경험 때문일까 싶었다

‘지나간다’는 말 안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이 웅크리고 있는지. 몇 번쯤 죽음을 결심했다. 고등학교 2학년 봄방학을 앞두고 생리가 시작됐을 때, 나는 그걸 작은 신호로 받아들였다. 나는 망가지지 않았다고, 나도 정상 범주 안에 속해 있다고 안도했다.

계절이 거듭되는 동안 반복되던 악몽도 잦아들었다. 살아남았으므로 살아 보기로 했다. 이왕이면 ‘잘’ 살고 싶었다. 뒤늦게 진학한 대학에서 만난 페미니즘은 문자 그대로 복음이었다. 별생각 없이 신청한 페미니즘 교양 수업 하나가 삶의 지축을 바닥부터 흔들었다. 교수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 보고 나온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교수는 과거 부천 성고문 사건 속 ‘권 양’이었다. 내 눈앞에 권인숙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 있었다. 자신의 삶이 빠뜨린 함정에서 걸어 나와 마침내 살아남은 사람.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 서 있었으므로, 나는 처음으로 과거가 나를 반드시 망가뜨리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 뒤에도 내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부인과 도망이 필요했다. 여성으로 사는 일은 일상의 크고 작은 성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페미니즘 덕분에 삶에서 아주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다. 페미니즘은 내게 입이 되어 주고,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생존자’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을 때 몇 번이고 발음하며 입 안에서 굴려 봤다.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니 감격스러웠다. 내가 경험한 폭력을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어느 것도 사소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를 둘러싼 풍경도 달라졌다. 나는 혼자가 아니고, 내가 당한 일은 내 잘못이 아니며, 나는 이 고통을 ‘자원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고통과 더불어 살아갈지, 어디에 서서 고통을 바라보아야 할지에 따라 고통은 다르게 해석된다."

말하고 난 후에야 ‘다음’을 꿈꿀 수 있었다. 다음으로 가고 싶었다.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의 자리로 온전히 이동하고 싶었다. 말하는 동안은, 글로 적는 동안은 그럴 수 있었다. 11살 어린이를 성폭행하고 암매장한 사건으로 떠들썩하던 2006년이었다. 그즈음 나는 용서라는 단어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있어요’라고 일기장에 적고 또 적었다. 그건 내가 다시 쓰는 역사였다. 그 안에서 과거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이 됐다. 비참을 기어코 안도할 수 있었다. 내게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큰 숙제였다. 나는 그 해석을 몇 번이고 고쳐 썼다. 증오를 연민으로 바꾸기 위해 애썼다. 그래야 내가 살 것 같았다. 평생 그 기억에 갇혀 살 수는 없었다. 계속 도망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사는 일’은 별개였다. 먼지 쌓인 묵은 기억은 편히 쉬지 못했다. 몸이 기억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성폭력 관련 기사를 가능하면 피해 다녔다. 혹시나 내가 관련 사건을 취재하게 될까 봐 어디선가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내려앉곤 했다.

가해자 이름을 가리면 구분조차 어려운, 판에 박힌 듯한 크고 작은 성폭력 피해 사례를 기어코 직시해 겹쳐 보고 모아 보며 알게 됐다.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살아 있는’ 일이다. 고통의 원인은 내가 아니라 사회다. 수치심은 비밀 안에 싸여 있을 때에나 존재한다. 성폭력 생존자를 위한 가이드북 《아주 특별한 용기》의 저자들 역시 ‘침묵 깨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많은 생존자들은 다른 생존자들이 보여 주는 용기를 보면서 동기 부여가 된다.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친구에게 드러내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책을 쓰고, 가해자(혹은 기관)를 고소할 때 그녀는 다른 생존자들에게 침묵을 깨라고 자극하는 중이다. 많은 여성들이 다른 생존자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치유를 결심하게 된다." 성범죄 특성상 가해자가 피해자의 수치심과 침묵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해가 가시화되면 추가 피해를 막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도 타인을 살리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를 포함해 많은 여성이 그 깨달음의 폐허 위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지치지 않고 증언을 이어 가고 있다.

존재가 있어야 부정도 할 수 있다는 말, ‘아니’라는 이름 안에 담긴 분명한 존재감은 우리의 삶을 바꿨다. 그해 여름, 불쑥 내 삶에 연루된 고양이 ‘아니’는 여러모로 내 삶을 흔들었다.

이렇게까지 무언가를 강렬히 그리고 속속들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존재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를 기르는 일은 전전긍긍을 동반한다. 그것이 고양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약하고 작은 존재인 아니와 함께 살면서 어린 사람과 함께 사는 타인의 기쁨과 보람과 고단함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사랑은 피곤을 동반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일임을 배웠다.

나 역시 아니를 통해 ‘현재’를 산다. 무엇보다 내가 구한 줄 알았던 고양이는 나를 구했다. 불현듯 암 환자가 되었을 때 특히 그랬다. 지독하게 이어지는 치료에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나는 간신히 아니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니의 남은 시간을 세어 보곤 했다.

우리는 기적 같은 ‘완치’라는 단어를 좋아하지만, 암은 완치되지 않는다. 비관할 일이 아닌 의학적 사실일 뿐이다. 다만 진단 이후 5년 이상 생존한 환자는 병증이 호전되는 기간을 의미하는 관해기remission에 접어드는 것으로 본다. 5년 이상 살면 무엇이 좋은가. 골몰하는 사이 아니가 내게 다가와 제 머리를 콩콩 들이밀며 부볐다. 고양이의 ‘헤드 번팅’은 집사에게 자신의 페로몬을 묻히는 것으로, 집사를 자기 영역이라고 선언하는 애정 표현이다. 내가 병과 함께 5년을 버티면 우리 고양이는 아홉 살이 된다. 오래 사는 고양이는 스무 살까지도 살 수 있다고 하니, 아마도 자기 생의 절반쯤 되는 나이가 되는 셈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날이면 나는 가라앉는 몸과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 애쓸 수 있었다. 아니를 마지막까지 내 손으로 책임지고 싶다는 생각은 부족한 ‘생의 의지’를 앞질렀고, 끝내 나를 구했다.

따로 자던 고양이가 이불 속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터 가을이다. 사람이 없는 집에도 고양이는 있기 때문에 한여름에는 에어컨이, 한겨울에는 보일러가 쉬지 않고 돌아간다. 나는 더는 전기료 5400원을 내던 가구원이 아니다. 무엇보다 고양이 몸에서 가장 추워 보이는 귀가 따끈따끈하면 마음이 누긋해진다. 나는 잠든 고양이의 귀 끝을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특히 고양이 귀 끝 주름을 만질 때면 초보 집사 시절이 떠올라 매번 웃는다. 고양이 귀 끝은 마치 찢어진 것처럼 보인다. 초보 집사였던 나는 매끈하지 않은 고양이 귀가 찢어진 거라고 생각하고 울면서 병원에 간 적이 있다. 인간이 있든 말든 침대 위로 올라와 가로로 길게 누워 버리는 고양이를 볼 때면 ‘역시 잘 키웠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고양이가 이렇게 제멋대로인 것이 안심이 된다.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제대로 한 일은 없는 긴 하루들의 반복 속에서 나는 자주 일을 좋아하는 건 역시 조금 슬프고 쓸쓸하다고 여긴다. 그런 삶이지만 고양이와 누울 수 있는 하루 몇 시간 덕분에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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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장소/목포

전라남도 서남단에 있는 시. 남해의 많은 도시가 그렇듯 목포 역시 이순신과의 연관이 깊다. 정유재란 때 목포 앞바다 고하도에서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유달산이 유명한데, 유달산 노적봉도 이순신이 군량미를 쌓아둔 것처럼 활용하여 적군을 물리치는 데 기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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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은 감정을 떠안고 살아서, 상담실에 오자마자 순식간에 허물어지고는 한다.

그레이스와 스테이시는 전형적인 의미형과 안정형의 조합 같았다. 상대를 통해 균형을 찾고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싶어서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을 것이다. 스테이시는 삶의 체계와 외부 세계의 법칙을 잘 알고 있으니 그레이스에게 그런 면에서 모범을 보여주었을 테고, 그레이스는 풍부한 정서와 창의적인 성향이 있으니 스테이시는 감탄하고 때로는 질투했을 터였다. 하지만 쿼터라이프 시기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이런 무의식적인 교환 관계는 각자 성장하면서, 혹은 성장하려 애쓰면서 손상을 입을 수 있다.

나는 첫 번째 상담에서는 공식적인 ‘정보 섭취’를 지양하는 편이다. 정보를 모으는 것보다 관계 형성에 중점을 둔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혹시 위험한 상태는 아닌지 알아두기 위해 몇 가지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레이스의 심리적 건강을 확인하려는 목적으로 식사는 잘 하고 있는지, 잠은 잘 자는지, 혹시 약물을 복용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레이스는 음, 하고 생각에 잠겼다. 꼭 나와 어디까지 공유할지 머릿속에서 자기 자신과 논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리화나랑 담배를 자주 피우긴 하는데, 그게 전부예요."
"얼마나 피우는데 자주 피운다고 해요?"
"음, 보통 일하러 가기 전 한낮에 피우고, 다녀와서 밤에도 피워요. 잠자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잠이 잘 안 와요?"
"네. 어렸을 때부터 잠을 잘 잔 적이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쭉?"
"네, 정말이에요. 엄마도 그러던데요. 아기 때부터 잠을 통 안 잤다고요."
"왜 그런지 알아요?"
"악몽 때문에요…." 그레이스는 또 얼굴을 찌푸렸다. "항상 악몽을 꿔요. 어린 시절부터."
어렸을 때부터 줄곧 악몽을 꿨다니, 그런 삶이 얼마나 힘들지 나는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보아하니 그레이스는 두려움 없이 잠들기 위해 마리화나를 사용하는 것 같았다. 나는 훗날을 위해 이 사실을 유념해두었다.

나는 금세 눈치챘다. 그레이스는 다양한 감정에 불편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울다가도1분 만에 웃음을 터뜨리고 자신의 감정을 돌아볼 줄 알았다.

어린 시절에 그레이스는 보수적인 사회 속의 퀴어이자 항상 가난 근처를 맴도는 가족의 딸이었고, 삶은 쉽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혼까지 겹쳤다.

몇 차례 상담을 진행해보니 그레이스가 굉장히 외향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레이스는 친구들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함께 어울리는 친구 모임은 규모가 큰 데다가 줄곧 새로운 일원이 들어왔다. 그레이스는 친구들과 즐겁게 웃으며 놀거나 함께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고,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정서적으로 지지해주었다. 그레이스가 포틀랜드에서 살고 있는 삶은 어렸을 때 즐기지 못한 충만한 사랑과 즐거움을 기반으로 했다. 그런 공동체를 찾아낸 것은 훌륭한 일이었다. 그레이스와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한 다른 여성은 안정형이 되어 막대한 업무와 책임에 자신을 파묻어버리기도 했다. 실제로 어린 시절의 그레이스는 열다섯 살에 처음으로 일자리를 구해 줄곧 생활비가 쪼들리는 어머니를 도와주면서 가정의 안정에 한몫했으나, 자신이 "책임과 스트레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의미형은 외부의 기대보다는 자기 내면에 집중한다. 만약 의미형이 바깥세상에 집중하고 있다면, 자기 삶의 안정보다는 타인의 고통과 부정의에 민감할 가능성이 높다. 본능적으로 세상의 거대함을 의식하기에, 문화적?사회적 기대 같은 것은 무의미하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의미형은 돈이나 계획 같은 것을 ‘허구적’이고 ‘인공적’이라고 인식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자신이 야행성이라고 느끼는 의미형도 있다. 밤에는 외부의 기대가 거의 느껴지지 않고, 바깥세상에 나가야 하는 압박이 없으니 더 편안해하는 것이다. 그레이스가 이런 경우였다.

의미형은 고대 그리스에서 ‘카이로스’라고 부르던 비선형적인 시간이나 시간 감각이 없는 상태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나는 그레이스가 상담 시간에 늦는 법이 없어서 놀랐는데, 알고 보니 그레이스는 절대 늦지 않으려고 거의30분이나 일찍 와서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으나 상담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늦지 않으려고 특별히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중요한 점은 상담이 일관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된 덕에 그레이스가 더 쉽게 나를 신뢰하고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상담을 했으며, 대기실에 가면 항상 차 한 잔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정해져 있었다. 그 덕에 그레이스는 매주 의지할 수 있는 안정의 틀을 얻을 수 있었다. 상담은 지켜야 할 일정이기도 했지만 일종의 의식이었다. 그레이스의 의미가 확장할 수 있도록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는 일관적인 행위였고, 그레이스를 숨 막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쏟아부을 수 있게 만드는체계였다. 이는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해나갈 작업에 관한 암시였다.

그레이스는 삶의 체계가 절실했다. 체계가 없으니 친구에게도 직장 동료에게도 자신을 끝없이 내주기만 해서, 결국에는 자신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는 물웅덩이 같은 마구잡이의 존재라고 느끼고 말았다. 그레이스는 주변 사람의 기분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아주 멀리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 공감력이 있었다.

하지만 금세 녹초가 되었다. 지나치게 외향적인 생활을 이어가다가, 극단적이고 병적인 내향성으로 과도하게 보상했다. 몇 주 동안 끝없이 타인을 보살피다가, 며칠, 몇 주 동안 휴대폰도 확인하지 않고 스테이시를 제외한 그 누구도 만나지 않으면서 지나친 자극을 차단한 채로 사실상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레이스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몰랐고, 자신을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몰랐기 때문에 줄곧 양극단을 오가곤 했다.

그레이스는 스테이시가 훌륭하게 해낸 것처럼 삶의 틀을 구축해야 했다. 의미를 잡아줄 체계, 포도주를 담아줄 술잔이 필요했다. 더 명확하게 자신의 경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내면에 있는 모든 의미를 담아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레이스를 비롯한 의미형이 쿼터라이프에 진입하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보호벽을 쌓지 못해 제각각의 어려움을 겪는다. 체계를 개발하는 작업을 힘겨워하거나, 삶의 체계에 집착하는 건 ‘영혼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그레이스는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정해서 삶의 안정성을 다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혼자서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어 관계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레이스의 상담 목적은 삶의 균형에 집중한 자기 내면의 발달이어야 했고, "정신 차리라"든지 "철들라"는 등의 조롱 섞인 문화적 서사에 순응하라는 암시는 피해야 했다.

그레이스는 성인으로서 존중받고 자유를 누리고 싶었으나 자기 자신을 잃기는 싫었다. 어린 시절 동안 극심한 스트레스와 고립을 겪었지만, 마침내 자신의 가치와 부합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욕구가 "배가 불렀다"라거나 "비현실적이다"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레이스에게 아직 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뻤다.
그레이스의 삶에 더 탄탄한 기반과 안정성을 다지는 것이 지속 가능한 성인기를 구축하기 위한 주요 작업이 될 것이었다.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할 계획이었고, 그중에는 그간 그레이스가 얼마나 많은 아픔을 이겨냈는지 알아보는 트라우마 기반의 치료도 포함되어 있었다. 힘든 작업이 되겠지만, 단순히 ‘철들기’ 혹은 ‘정신 차리기’가 목표는 아니었다. 그레이스는 술잔이 필요했으나 그 대가로 포도주를 버릴 수는 없었다.

모로코에 있는 창작촌 같은 곳에 살면서, 온종일 지중해 해변에서 빈둥거리거나, 연필을 씹으며 시구를 고민하느라 엷은 갈색 피부가 더 짙게 그을린 듯한 모습이었다. 대니는 종종 자기 머릿속에서 길을 잃은 채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만 했다. 철학적이고 낭만적인 생각에 몰두했고, 혼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상담을 시작한 것도 벌써 몇 달 전이었다. 대니는 첫 상담부터 많은 것을 공유했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조울증이 있다는 것, 다양한 이유로 연애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 혼란스러운 신체적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 항상 피곤하다는 것 등등. 대니는 정말이지 피곤하다고 했다. 자신의 피로감과 소화불량에 관해, 해답을 찾기 위한 여정에 관해 길고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대니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사실은, 자신의 인생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체 증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서적인 문제가 얽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대니는 성별 이분법적 사고와 사회가 남성에게 기대하는 유독한 남성성에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바라는 것만큼 남성적이지 않은 자기 모습 때문에 주기적으로 침울해지고는 했다.

대니에게는 그 어떤 것도 칼로 자른 듯 명확하지 않았고, 우리가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성별 정체성이 화두가 되고는 했다. 인종 정체성도 마찬가지였다. 대니는 인종에 있어서도 여러 집단 사이에 끼인 듯, 불확실함에 얽매여 있는 듯 느꼈다. 대니는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혈통을 타고났지만 피부색이 밝았고, 신속하게 타인의 인종을 구분해내고 싶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했다.

대니가 자기 몸에 역겨움을 느낄 때 그 원인이 인종인 경우는 드물었고, 항상 자신의 부족한 남성성이 실망스러워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때로는 그가 느끼는 피로감과 관련이 있었지만, 그저 몸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였다. 대니가 자기 몸을 혐오하는 이유는 몸을 먹여야 하고 씻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일, 철학적인 고민이나 예술 작업에 매진해야 하는데 말이다. 대니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침대맡에 올해 말까지 읽으려고 계획해둔 책이 두 줄로 쌓여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대니는 자기 몸이 요구하는 것은 전부 방해 요소처럼 느껴져 신경질이 났다.

수많은 쿼터라이퍼가 자기 몸에, 자기 몸과의 관계에 깊은 의아함을 품고 산다. 자신의 생물학적 성별과 성별 고정관념에 온전히 동의하지 못하는 대니 같은 사람들에게 더 확연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자기 몸을 증오하는 이유는 더 근본적일 수도 있다. 그 이유가 성별이나 혼란스러운 인종 정체성 때문이든, 섹스와 친밀감을 향한 두려움이나 불편함 때문이든, 만성적인 질병이나 장애, 트라우마 이력, 음식과 식이 문제, 몸에 ‘갇혀’ 있다는 실존적 감각 때문이든, 쿼터라이프 시기에는 살아 있고 몸이 있다는 삶의 조건과 화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쿼터라이프는 자기 몸을 의식하고 사랑하면서 몸과 관계를 다져나가는 시기다. ‘결점’이 있거나 정확한 기능과 보호에 ‘실패’한 몸을 용서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몸의 크기나 형태, 색깔이 이상하다면서, 장애가 있고 완전하지 않다면서 조금씩 유해한 가르침을 주입해온 가부장제와 백인 우월주의적 가치관을 차단해내야 할 수도 있다. 자기 몸에 결점이 있다는 생각은 셀 수 없이 많은 심리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 지극히 소수의 인간이 만들어냈음에도 영구히 지속해온 유독한 가치 체계 때문이다.

나는 대니가 간편한 처치 하나로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그러기를 장려하지도 않았다. 이는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과정이자 문화와 가족의 기대를 통해 내면화한 모든 것을 직면하는 장기적인 과정이었다. 대니는 남성성에 관해 고민하고, 신체적 증상을 해결하고, 자신의 인종 정체성이 미국에서 어떤 의미인지 탐구하는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대니에게 더욱 중요한 선택이 있다고 생각했다. "죽느냐 사느냐" 사이에서 갈등한 것으로 유명한 쿼터라이퍼 햄릿과 마찬가지로, 대니는 자기 내면의 중심에 있는 감정, 살아있다는 사실을 향한 모순적 감정을 직면해야 했다.

나는 의미형이 안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몸으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대니에게 필요한 것은 줄에 매인 소처럼 내키지 않는데도 시간과 시대에 질질 끌려다니는 기분으로 사는 대신, 삶에 참여하겠다는 의식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대니의 성장은 오직 그만이 누를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스위치를 눌러야 시작될 수 있다. 대니는 자기 몸 안에서 살아있기로결심해야만 하는 것이다. 온전한 삶을 이뤄내려면 자신의 두 발로 삶에 오롯이 뛰어들어야 한다.

의미형과 작업할 때는 삶에 참여함으로써 성장과 치유를 향한 노력이 시작되는 경우가 잦다.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기반이 된다. 두 발로 삶에 뛰어들 수 있도록 응원하는 행위는 "원래 삶은 고통이야, 정신 차려!" 같은 말로 다그치는 것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모순적인 감정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고통이 없어지지는 않아. 생에는 언제나 고통이 있고 우리 시대의 삶은 복잡하고 불확실하지만, 이곳에도 기쁨과 아름다움이 있어."

내가 제시하는 목표는 자신이 태어난 세상에, 시대에, 삶에참여하는 것이다. 삶의 힘겨움을 전부 겪어내고 살아내겠다는결심 없이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내면의 성장 스위치가 켜지지 않는다.

몸으로서 살겠다는 결심, 실체가 있는 몸 안에서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면 의미형은 자신에게 부족했던 의지와 헌신을 발휘하고 진정한 삶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살겠다고 선택함으로써, 지금이라는 역사 속특정한 순간을, 자신이 부여받은특정한 몸과 가족 등 다양한 조건을 전부 받아들일 수가 있다. 이러한 특정한 조건들에,지금 이 삶을 사는 일에 헌신하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 때가 많다. 의미형은 생각도 거대하고 감정도 거대해서, 무한한 우주의 일부가 되기를 꿈꾸거나 역사 속 다른 시대에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면 지금 이곳에 속하는 몸으로서의 삶은 답답하고, 제한적이고, 고통으로 가득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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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인물/박헌영

박헌영(1900년~1955년)은 공산주의 지도자로, 일제 강점기에 화요회, 경성콤그룹 등을 이끌며 조선공산당운동을 주도했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공산당, 남조선노동당의 지도자로 활약한 후 북한에서 부수상을 역임하면서 한국 전쟁을 주도했다.
박헌영은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서회주의운동에 투신했는데, 이동휘가 민족운동의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수용하려 했다면 박헌영 등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자체를 수용해 독립운동사의 새 장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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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지금 죽지 마

김옥선 씨가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버석거리는 발을 손에 쥐어 본다. 외할머니가 자신의 ‘큰 발’을 남세스러워했다는 게 문득 떠올랐다. 그래 봤자 250mm였다. 발을 부러 힘껏 주물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초점 없는 눈이 손녀를 보는 둥 마는 둥했다. 외할머니에게서 한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당신이 1938년생 범띠 여자라 팔자가 드세서 자식을 죽였다고, 집에서 기르는 짐승마저 당신을 잘 따르지 않는다며 조그맣게 한숨 쉬던 어느 날의 얼굴이 기억났던 건 왜일까.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경험하고, 전쟁 통에 아이를 낳고 또 잃고, 그 와중에 내 어머니를 길러 낸 몸이 병원 침대 위에서 저물고 있다.

가족들은 각자의 이유로 할머니가 ‘숨만 붙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온몸을 저려 했다.

나는 무력했다. 나는 의학의 실패를 목격하면서도 환자 보호자 중 한 사람으로서 의학의 기적을 바랐다.

나는 외할머니의 우선순위와 욕구를 모른다. 가족 중 누구도 아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하루 두 번 20분씩, 한 번에 두 사람씩만 입장하도록 허락되는 면회 시간을 가족들은 분과 초 단위로 쪼개 썼다. 내 순서가 돌아왔을 때 외할머니가 멀건 죽이 지겹다고 의사 표시를 해 줘서 고마웠다. 정작 밥알을 씹어 삼키는 일은 어려워했다. 나는 준비해 간 요거트를 대신 내밀었다. 외할머니는 200밀리미터짜리 한 병을 천천히 빨대로 마셨다. ‘살고 싶구나, 할머니.’ 문득 연명 치료 중단을 떠올렸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당신은 내 눈물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빈 요거트 병을 소리 없이 내밀 뿐이었다.

할 수 있는 게 없는 보호자는 병원 복도에서 멍하니 앉아 외할머니 집을 구석구석 떠올렸다. 지난여름 나와 짝꿍은 외할머니 텃밭에서 각종 채소를 땄다. 일생 의지했던 밭은 당신의 나이와 함께 쪼그라들었다. 어느 해인가 자루째 오던 옥수수와 박스째 오던 감자가 멈췄고, 어느 해부터는 김장김치가 오지 않았다. 모두 할머니가 손수 가꾸던 땅에서 출발해야 했던 것들이다. 돌아가시기 직전 해에는 노인 걸음으로 꼭 스무 걸음만큼의 밭뙈기만 겨우 일구고 있었다. 우리는 그 밭에서 제멋대로 자란 노각·고추·파·애호박·가지 따위를 한두 개씩 챙겼다. 호박인지 오이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채소도 얻었다. "네가 지금 딴 게 토종오이야. 피난 짐에 챙겼던 씨앗을 여태 심는다." 나는 그 말을 김옥선 씨의 삶이, 역사가, 시간이 그 안에 모조리 들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어쩌면 이제 다시는 그 못난 오이를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사무치게 떠올렸다.

외할머니는 나와 헤어질 때면 슈퍼에서 과자를 사곤 했다. 검은 비닐 안에 든 봉지과자는 하나같이 부피가 컸다. 어떤 날은 내가 멘 가방만 했다. 나는 "짐만 된다"며 타박했다. "내가 애야?"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SNS에 올리며 외할머니에게 사랑받는 손녀딸이라는 걸 자랑도 했다. 정작 그 마음을 당신에게는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당신이 누군가 버린 유모차를 얻어 보행 보조기를 대신해 쓴다는 걸 알게 된 날도 떠올랐다. 나는 당장 인터넷으로 보행 보조기를 주문했다. 잘 받았다고, 고맙다고 전화한 당신에게 "할머니가 거지야?"라는 말을 굳이 더했다. 미운 말이 얹혀서 잠을 설쳤다. 다음 날 휴가를 내고 강원도행 버스를 탔다. "할머니, 내가 사 준 핸드폰도 보행 보조기도 막 써. 막 험하게 많이 쓰란 말이야. 그래야 내가 또 사 줄 수 있지." 그러겠다고 약속한 당신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내가 선물한 보행 보조기를 ‘애지중지’ 모셔만 뒀다.

당신은 평생 강원도 밖을 벗어나지 않았거나 혹은 못했다. 당신이 가 보지 못했던 지역을 출장가거나 여행할 때면 나는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과일을 택배로 부쳤다. 그럴 때면 외할머니는 굳이 노인정까지 내려갔다. 내게 전화를 걸어 당신 할 말만 하고 끊기 위해서였다. "아유, 너는 왜 이렇게 시키지도 않은 걸. 돈 벌어 가지고 할머니한테 다 쓰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래, 전화세 많이 나온다, 끊어." 그 속 보이는 ‘자랑’이 웃기면서도 듣기 좋아서 나는 매번 과일을 샀다.

새해에는 신분증에 스티커를 한 줄 더 추가했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원하지 않습니다.’ 혹시나 내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위급 상황에 처했을 경우 연명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짝꿍과 나는 이 주제로 여러 번 대화를 나눴고, 서로의 생각을 지지하며 공감한다.

나는 때때로 오늘을 잘 살기 위해서 죽음을 생각한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는 말에 깊이 동의한다. 죽음은 공평하다. 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필연인 죽음은 늙은 결과가 아니라 살아온 것의 결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든 날은 좀 더 씩씩한 하루를 보내게 된다. 외할머니는 어땠을까. 외할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고민해 본 적 있을까. 우리는 왜 이 주제를 한번도 나누지 못했을까.

외할머니에게 아직 묻고 싶은 것이 많다. 그러니 한라봉이 남아 있고 보행 보조기를 ‘모셔 놓은’ 당신 집으로, 당신이 돌아오면 좋겠다. 나는 당신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속에서 완화 치료 전문가인 수전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물었던 질문이다. "제가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당신이 생명 유지를 위해 얼마만큼 견뎌 낼 용의가 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상태면 사는 게 괴롭지 않을지 알아야만 해요." 그래서 당신 대답에 따라, 당신 뜻대로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우리에게 허락된다면 좋겠다. "결국은 이기게 되어 있는 죽음"을 주제로 우리가 오래 대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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