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다가도 슬픔이 묵직하게 방문하면 마음 둘 곳을 몰라 서성인다. 가능하면 몰려오는 감정을 피하지 않고 맞선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굉장한 재능 중 하나다. 꼭 그만큼 삶이 넓고 깊어진다. 싫어하는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늘려 가면서 살고 싶다.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이 늘어날 때마다 싫어하는 것들이 나를 침범해 올 때 숨거나 도망갈 수 있는 요새를 짓는 기분이 든다.
내 마음에는 할머니 무덤도 있고, 아빠 무덤도 있고, 종현의 무덤도 있다. 살아 있는 일은 마음에 그렇게 몇 번이고 무덤을 만드는 일임을, 슬픔은 그 모든 일을 대표하는 감정이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인사하고 돌아서는 내 등을 뾰족한 것이 지그시 눌러 왔다. 두꺼운 점퍼를 입었지만 느낄 수 있는 날카로움이었다. 아저씨는 나긋한 목소리로 그것이 칼임을 알렸다. 본관 건물 뒤쪽으로 나를 몰았다.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했다. 바지와 속옷이 차례로 벗겨지는 동안 나는 오줌을 지렸다. 나지막한 소리로 욕하는 그에게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너무 무서우면 목소리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동시에 찾아왔던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토막 쳐진 기억 속에서도 지금까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이 수치심은 오랜 시간 내게 벌어진 일을 해석하는 데 방해가 됐다.
발도 키도 크는데, 몸무게만큼은 좀체 늘지 않았다. 2차 성징은 더디게 왔다. 차라리 남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남자가 아닐까 상상했다. 생리를 하지 않는 건 그때의 경험 때문일까 싶었다
‘지나간다’는 말 안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이 웅크리고 있는지. 몇 번쯤 죽음을 결심했다. 고등학교 2학년 봄방학을 앞두고 생리가 시작됐을 때, 나는 그걸 작은 신호로 받아들였다. 나는 망가지지 않았다고, 나도 정상 범주 안에 속해 있다고 안도했다.
계절이 거듭되는 동안 반복되던 악몽도 잦아들었다. 살아남았으므로 살아 보기로 했다. 이왕이면 ‘잘’ 살고 싶었다. 뒤늦게 진학한 대학에서 만난 페미니즘은 문자 그대로 복음이었다. 별생각 없이 신청한 페미니즘 교양 수업 하나가 삶의 지축을 바닥부터 흔들었다. 교수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 보고 나온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교수는 과거 부천 성고문 사건 속 ‘권 양’이었다. 내 눈앞에 권인숙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 있었다. 자신의 삶이 빠뜨린 함정에서 걸어 나와 마침내 살아남은 사람.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 서 있었으므로, 나는 처음으로 과거가 나를 반드시 망가뜨리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 뒤에도 내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부인과 도망이 필요했다. 여성으로 사는 일은 일상의 크고 작은 성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페미니즘 덕분에 삶에서 아주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다. 페미니즘은 내게 입이 되어 주고,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생존자’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을 때 몇 번이고 발음하며 입 안에서 굴려 봤다.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니 감격스러웠다. 내가 경험한 폭력을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어느 것도 사소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를 둘러싼 풍경도 달라졌다. 나는 혼자가 아니고, 내가 당한 일은 내 잘못이 아니며, 나는 이 고통을 ‘자원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고통과 더불어 살아갈지, 어디에 서서 고통을 바라보아야 할지에 따라 고통은 다르게 해석된다."
말하고 난 후에야 ‘다음’을 꿈꿀 수 있었다. 다음으로 가고 싶었다.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의 자리로 온전히 이동하고 싶었다. 말하는 동안은, 글로 적는 동안은 그럴 수 있었다. 11살 어린이를 성폭행하고 암매장한 사건으로 떠들썩하던 2006년이었다. 그즈음 나는 용서라는 단어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있어요’라고 일기장에 적고 또 적었다. 그건 내가 다시 쓰는 역사였다. 그 안에서 과거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이 됐다. 비참을 기어코 안도할 수 있었다. 내게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큰 숙제였다. 나는 그 해석을 몇 번이고 고쳐 썼다. 증오를 연민으로 바꾸기 위해 애썼다. 그래야 내가 살 것 같았다. 평생 그 기억에 갇혀 살 수는 없었다. 계속 도망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사는 일’은 별개였다. 먼지 쌓인 묵은 기억은 편히 쉬지 못했다. 몸이 기억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성폭력 관련 기사를 가능하면 피해 다녔다. 혹시나 내가 관련 사건을 취재하게 될까 봐 어디선가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내려앉곤 했다.
가해자 이름을 가리면 구분조차 어려운, 판에 박힌 듯한 크고 작은 성폭력 피해 사례를 기어코 직시해 겹쳐 보고 모아 보며 알게 됐다.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살아 있는’ 일이다. 고통의 원인은 내가 아니라 사회다. 수치심은 비밀 안에 싸여 있을 때에나 존재한다. 성폭력 생존자를 위한 가이드북 《아주 특별한 용기》의 저자들 역시 ‘침묵 깨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많은 생존자들은 다른 생존자들이 보여 주는 용기를 보면서 동기 부여가 된다.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친구에게 드러내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책을 쓰고, 가해자(혹은 기관)를 고소할 때 그녀는 다른 생존자들에게 침묵을 깨라고 자극하는 중이다. 많은 여성들이 다른 생존자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치유를 결심하게 된다." 성범죄 특성상 가해자가 피해자의 수치심과 침묵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해가 가시화되면 추가 피해를 막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도 타인을 살리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를 포함해 많은 여성이 그 깨달음의 폐허 위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지치지 않고 증언을 이어 가고 있다.
존재가 있어야 부정도 할 수 있다는 말, ‘아니’라는 이름 안에 담긴 분명한 존재감은 우리의 삶을 바꿨다. 그해 여름, 불쑥 내 삶에 연루된 고양이 ‘아니’는 여러모로 내 삶을 흔들었다.
이렇게까지 무언가를 강렬히 그리고 속속들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존재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를 기르는 일은 전전긍긍을 동반한다. 그것이 고양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약하고 작은 존재인 아니와 함께 살면서 어린 사람과 함께 사는 타인의 기쁨과 보람과 고단함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사랑은 피곤을 동반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일임을 배웠다.
나 역시 아니를 통해 ‘현재’를 산다. 무엇보다 내가 구한 줄 알았던 고양이는 나를 구했다. 불현듯 암 환자가 되었을 때 특히 그랬다. 지독하게 이어지는 치료에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나는 간신히 아니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니의 남은 시간을 세어 보곤 했다.
우리는 기적 같은 ‘완치’라는 단어를 좋아하지만, 암은 완치되지 않는다. 비관할 일이 아닌 의학적 사실일 뿐이다. 다만 진단 이후 5년 이상 생존한 환자는 병증이 호전되는 기간을 의미하는 관해기remission에 접어드는 것으로 본다. 5년 이상 살면 무엇이 좋은가. 골몰하는 사이 아니가 내게 다가와 제 머리를 콩콩 들이밀며 부볐다. 고양이의 ‘헤드 번팅’은 집사에게 자신의 페로몬을 묻히는 것으로, 집사를 자기 영역이라고 선언하는 애정 표현이다. 내가 병과 함께 5년을 버티면 우리 고양이는 아홉 살이 된다. 오래 사는 고양이는 스무 살까지도 살 수 있다고 하니, 아마도 자기 생의 절반쯤 되는 나이가 되는 셈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날이면 나는 가라앉는 몸과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 애쓸 수 있었다. 아니를 마지막까지 내 손으로 책임지고 싶다는 생각은 부족한 ‘생의 의지’를 앞질렀고, 끝내 나를 구했다.
따로 자던 고양이가 이불 속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터 가을이다. 사람이 없는 집에도 고양이는 있기 때문에 한여름에는 에어컨이, 한겨울에는 보일러가 쉬지 않고 돌아간다. 나는 더는 전기료 5400원을 내던 가구원이 아니다. 무엇보다 고양이 몸에서 가장 추워 보이는 귀가 따끈따끈하면 마음이 누긋해진다. 나는 잠든 고양이의 귀 끝을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특히 고양이 귀 끝 주름을 만질 때면 초보 집사 시절이 떠올라 매번 웃는다. 고양이 귀 끝은 마치 찢어진 것처럼 보인다. 초보 집사였던 나는 매끈하지 않은 고양이 귀가 찢어진 거라고 생각하고 울면서 병원에 간 적이 있다. 인간이 있든 말든 침대 위로 올라와 가로로 길게 누워 버리는 고양이를 볼 때면 ‘역시 잘 키웠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고양이가 이렇게 제멋대로인 것이 안심이 된다.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제대로 한 일은 없는 긴 하루들의 반복 속에서 나는 자주 일을 좋아하는 건 역시 조금 슬프고 쓸쓸하다고 여긴다. 그런 삶이지만 고양이와 누울 수 있는 하루 몇 시간 덕분에 버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