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선 씨가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버석거리는 발을 손에 쥐어 본다. 외할머니가 자신의 ‘큰 발’을 남세스러워했다는 게 문득 떠올랐다. 그래 봤자 250mm였다. 발을 부러 힘껏 주물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초점 없는 눈이 손녀를 보는 둥 마는 둥했다. 외할머니에게서 한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당신이 1938년생 범띠 여자라 팔자가 드세서 자식을 죽였다고, 집에서 기르는 짐승마저 당신을 잘 따르지 않는다며 조그맣게 한숨 쉬던 어느 날의 얼굴이 기억났던 건 왜일까.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경험하고, 전쟁 통에 아이를 낳고 또 잃고, 그 와중에 내 어머니를 길러 낸 몸이 병원 침대 위에서 저물고 있다.
가족들은 각자의 이유로 할머니가 ‘숨만 붙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온몸을 저려 했다.
나는 무력했다. 나는 의학의 실패를 목격하면서도 환자 보호자 중 한 사람으로서 의학의 기적을 바랐다.
나는 외할머니의 우선순위와 욕구를 모른다. 가족 중 누구도 아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하루 두 번 20분씩, 한 번에 두 사람씩만 입장하도록 허락되는 면회 시간을 가족들은 분과 초 단위로 쪼개 썼다. 내 순서가 돌아왔을 때 외할머니가 멀건 죽이 지겹다고 의사 표시를 해 줘서 고마웠다. 정작 밥알을 씹어 삼키는 일은 어려워했다. 나는 준비해 간 요거트를 대신 내밀었다. 외할머니는 200밀리미터짜리 한 병을 천천히 빨대로 마셨다. ‘살고 싶구나, 할머니.’ 문득 연명 치료 중단을 떠올렸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당신은 내 눈물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빈 요거트 병을 소리 없이 내밀 뿐이었다.
할 수 있는 게 없는 보호자는 병원 복도에서 멍하니 앉아 외할머니 집을 구석구석 떠올렸다. 지난여름 나와 짝꿍은 외할머니 텃밭에서 각종 채소를 땄다. 일생 의지했던 밭은 당신의 나이와 함께 쪼그라들었다. 어느 해인가 자루째 오던 옥수수와 박스째 오던 감자가 멈췄고, 어느 해부터는 김장김치가 오지 않았다. 모두 할머니가 손수 가꾸던 땅에서 출발해야 했던 것들이다. 돌아가시기 직전 해에는 노인 걸음으로 꼭 스무 걸음만큼의 밭뙈기만 겨우 일구고 있었다. 우리는 그 밭에서 제멋대로 자란 노각·고추·파·애호박·가지 따위를 한두 개씩 챙겼다. 호박인지 오이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채소도 얻었다. "네가 지금 딴 게 토종오이야. 피난 짐에 챙겼던 씨앗을 여태 심는다." 나는 그 말을 김옥선 씨의 삶이, 역사가, 시간이 그 안에 모조리 들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어쩌면 이제 다시는 그 못난 오이를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사무치게 떠올렸다.
외할머니는 나와 헤어질 때면 슈퍼에서 과자를 사곤 했다. 검은 비닐 안에 든 봉지과자는 하나같이 부피가 컸다. 어떤 날은 내가 멘 가방만 했다. 나는 "짐만 된다"며 타박했다. "내가 애야?"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SNS에 올리며 외할머니에게 사랑받는 손녀딸이라는 걸 자랑도 했다. 정작 그 마음을 당신에게는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당신이 누군가 버린 유모차를 얻어 보행 보조기를 대신해 쓴다는 걸 알게 된 날도 떠올랐다. 나는 당장 인터넷으로 보행 보조기를 주문했다. 잘 받았다고, 고맙다고 전화한 당신에게 "할머니가 거지야?"라는 말을 굳이 더했다. 미운 말이 얹혀서 잠을 설쳤다. 다음 날 휴가를 내고 강원도행 버스를 탔다. "할머니, 내가 사 준 핸드폰도 보행 보조기도 막 써. 막 험하게 많이 쓰란 말이야. 그래야 내가 또 사 줄 수 있지." 그러겠다고 약속한 당신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내가 선물한 보행 보조기를 ‘애지중지’ 모셔만 뒀다.
당신은 평생 강원도 밖을 벗어나지 않았거나 혹은 못했다. 당신이 가 보지 못했던 지역을 출장가거나 여행할 때면 나는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과일을 택배로 부쳤다. 그럴 때면 외할머니는 굳이 노인정까지 내려갔다. 내게 전화를 걸어 당신 할 말만 하고 끊기 위해서였다. "아유, 너는 왜 이렇게 시키지도 않은 걸. 돈 벌어 가지고 할머니한테 다 쓰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래, 전화세 많이 나온다, 끊어." 그 속 보이는 ‘자랑’이 웃기면서도 듣기 좋아서 나는 매번 과일을 샀다.
새해에는 신분증에 스티커를 한 줄 더 추가했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원하지 않습니다.’ 혹시나 내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위급 상황에 처했을 경우 연명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짝꿍과 나는 이 주제로 여러 번 대화를 나눴고, 서로의 생각을 지지하며 공감한다.
나는 때때로 오늘을 잘 살기 위해서 죽음을 생각한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는 말에 깊이 동의한다. 죽음은 공평하다. 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필연인 죽음은 늙은 결과가 아니라 살아온 것의 결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든 날은 좀 더 씩씩한 하루를 보내게 된다. 외할머니는 어땠을까. 외할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고민해 본 적 있을까. 우리는 왜 이 주제를 한번도 나누지 못했을까.
외할머니에게 아직 묻고 싶은 것이 많다. 그러니 한라봉이 남아 있고 보행 보조기를 ‘모셔 놓은’ 당신 집으로, 당신이 돌아오면 좋겠다. 나는 당신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속에서 완화 치료 전문가인 수전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물었던 질문이다. "제가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당신이 생명 유지를 위해 얼마만큼 견뎌 낼 용의가 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상태면 사는 게 괴롭지 않을지 알아야만 해요." 그래서 당신 대답에 따라, 당신 뜻대로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우리에게 허락된다면 좋겠다. "결국은 이기게 되어 있는 죽음"을 주제로 우리가 오래 대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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