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지금도 ‘남의 주방’에서 일한다. 제 한 몸이 가진 것의 전부인 사람에게 건강 문제는 생계에 앞설 수 없는 부차적 문제가 된다. 따지고 보면 엄마는 늘 어딘가 아팠다. 불이나 기름에 데거나, 대형 솥을 반복적으로 옮기는 동안 생기는 근육통을 달고 살았다. 그런 상처는 연고와 밴드와 파스 따위로 임시 처방하면 그만이었다. 엄마의 몸에 오래 기대 살았던 나는 해외 출장이나 여행 갈 때면 그 지역의 유명하다는 파스 제품을 종류와 크기별로 사다 나르곤 했다.
수술 일정을 잡고 나오던 어느 날, 엄마가 물었다. 정말 아이를 낳지 않을 거냐고. 지겹도록 듣고 답했던 질문 앞에서 나는 입을 닫았다. 엄마가 체념한 듯 혼잣말을 했다. "너는 딸도 없고 불쌍하다." 그날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나는 엄마의 그 말이 아주 좋다고. 그건 엄마가 나로 인해 불행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무엇보다 짝꿍은 ‘다음 과제’를 완수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학에 가고, 졸업하면 취업하고, 취업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당위’와 ‘정상’에 대한 압력을 거스르고 자기 의지로 살고 싶어 했다. 그는 지금의 기쁨과 당장의 만족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이다.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그 기쁨과 만족 안에 내가 포함되었다. 결혼 전 자녀 계획에 관해 대화할 때 그의 전제 조건은 하나였다. "나는 원하지 않지만,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는 임신과 출산에 있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전무함을 알고 있었고,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인 만큼 내 의지와 생각이 결정의 전부여야 한다고 말했다
나의 ‘비합리’와 ‘비이성’으로 둘 다 고통받던 즈음, 우리는 일정 기간을 정하고 임신을 우연에 맡겨 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1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자주 조바심이 났다. 아이가 생겨도 문제, 안 생겨도 문제였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에 자주 휘청였다. 통상 피임을 하지 않은 부부가 1년 이내 임신이 되지 않는 걸 난임이라고 한다. 아이를 ‘안’ 갖는 것과 ‘못’ 갖는 것은 달랐다. 키울 자신도 없으면서, 막상 아이를 키울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니 손 안의 사탕을 뺏긴 느낌이었다.
때로 그 말이 몹시 서운하고 외로웠다. 나 역시 일찌감치 아이를 내 인생에 포함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해 왔다. 아이를 통해 미래를 사는 게 두려웠다. 내가 어쩔 수 없이 끌어안고 살아온 가난을 내 세대에서 끊어 낼 방법은 비출산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이가 살아야 할 미래를 예상할 때마다 몸을 떨었고, 내가 자라면서 경험한 고통을 그때마다 새롭게 곱씹었다.
취재하며 친구가 된 사람이 있다. 그도 우리처럼 아이가 없었다. 그와 만난 자리에서 나는 오랫동안 그의 ‘사적인 삶’에 관해 궁금했던 것을 조심스레 물었다. 술잔이 오가고, 그와 나 사이에 떡볶이가 끓고 있었다. 질문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아이는 일부러 갖지 않으셨나요?" 그는 주저 없이 답했다. "안 생겼다는 게 정확하죠. 같이 사는 친구랑 얘기를 해 봤어요. ‘의학적인 조치를 취해서라도 아이를 갖고 싶은가.’ 근데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고요." 나는 출산과 비출산 사이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내가 가진 정답이 무엇이든 이유와 입장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 내가 분명히 느끼는 슬픔과 상실은 충분히 설명이 안 됐다. 그래서 ‘당연히’ 중간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내 삶도 좀 더 가뿐해졌다. ‘그렇게까지는’ 원하지 않는다. 내 마음 역시 거기에 좀 더 가까웠으니까. 그제야 나는 현재 주어진 삶의 조건에 보다 집중하게 됐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복잡한 마음의 결을 나눌 필요를 느꼈다.
《엄마됨을 후회함》은 《아이 없는 완전한 삶》의 ‘짝꿍 책’이라 할 만하다. 책은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다양한 사회 계층 여성들을 만나 이들이 엄마가 된 경로를 추적한다. 그리고 여성을 ‘엄마가 되는 길’로 몰고 있는 사회를 여성의 목소리로 폭로한다. 《엄마됨을 후회함》의 저자 오나 도나스는 말한다. "고통당하지 않고자 기꺼이 논쟁에 휘말리는 여성과 엄마들은 언젠가, 어떻게든, 무언가를 바꾸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그럴 만하다." 중요한 건 이 문장을 기억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여성에 의해 태어났다. 하지만 여성은 엄마로 태어나지 않았다.
한 사람이 다음 사람을 이 세계에 데리고 오는 일
그날도 피곤에 절어 겨우 집에 도착했다. 가방을 푸는 동안 책상 위에 얌전히 놓인 임신테스트기가 눈에 들어왔다. 약국 가는 걸 자꾸 까먹는다고, 갈 시간도 없다며 지나가는 말로 툴툴대던 걸 그가 기억한 결과였다.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우리’의 문제라는 걸 확인하는 경험은 언제나 든든하고 유쾌하다. 그러니까 저이와 함께라면 임신·출산·육아가 아주 나쁜 일만은 아닐 거라고 착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고, 실제 상황과 별개로 그 순간은 무척 소중해진다. 그래서였다. 간만에 깔깔대며 웃었다.
임신 중지와 임신 유지 사이에는 ‘선택’과 ‘생명’이라는 단어가 다 대표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고민과 결단이 존재한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죄’로 다뤄 온 문화에서 성장해 온 사람에게는 특히 그렇다. 임신 사실보다 유산 사실을 먼저 알았던 날이 떠올랐다. 의사는 전체 임신에서 자연 유산 비율이 20% 정도 된다며 나에게만 일어난 불행이 아니라고 위로했다. 정작 내가 그 ‘불행’을 무척이나 안도했다는 걸 의사는 끝내 알지 못했다.
그 일을 겪으며 나는 예상치 못했던 죄책감에 시달렸다. 죄책감이라니 가당치 않아서, 오래 괴로웠다. 고작 ‘세포’를 보내고 눈치 없이 긴 애도를 건너는 동안 기존 사회의 통념에서 내가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사람인지 실감했다. 생명은 설명이 필요 없는 너무나 강력한 프레임이다. 이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얼마간의 망설임 앞에 반드시 서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각자가 구성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전제를 끌어안고 산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에서 시작하지만 여성의 몸에서 끝나지 않는다. "재생산은 어느 사회에서든 단지 구성원을 수적으로 충원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으며,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 가치 등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결국, 재생산권이야말로 ‘낙태죄’를 둘러싼 문제의 본질이다. 평등하게 성적 관계를 맺을 권리, 출산 여부를 결정할 권리, 자녀를 건강하게 양육할 권리 등을 포괄하고 있는 재생산권을 보장할 때만이 생명권 역시 온전히 보장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낙태를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충돌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그동안 국가가 통제해 왔던 재생산권을 되돌려 받는다는 의미로 논쟁을 가져와야 한다.
문제는 ‘앞으로’다. "낙태가 ‘합법’이 되는 것과 임신 중단이 여성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여지는 것 사이의 거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또 다른 투쟁이 필요하다." 사회경제적 사유로도 임신 중지를 가능하게 한다거나, 주수를 제한하는 방법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계속해서 여성을 처벌하고 차별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낙태죄 폐지 운동은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없애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을 새로 만들고, 기존의 법을 여성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과정을 동반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거머쥔 승리의 경험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 앞으로의 싸움은 고되겠지만 이 ‘출발선’을 여성들이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걸 지금은 마음껏 축하하고 싶다. 대체 입법은 2022년 10월 현재도 이뤄지지 않은 채 논쟁의 영역에 남아 있다. 입법 공백은 인터넷 검색과 자본이 메운 채로.
왼쪽 팔에 간단한 신상 명세가 출력된 종이가 채워졌다. 장일호, F/36세, A(RH+). 닳지도 젖지도 않는 유포지 위에 새겨진 글자를 나는 자주 멍하게 바라봤다. 흔하고 쉬운 암이라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애썼다. 쉽지는 않았다. 모든 게 처음 하는 경험이고 하나같이 어려웠다. 하루에도 환자 수십 명을 봐야 하는 의료진들은 종종 그 사실을 잊었다. 각종 검사 전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 무성의하게, 동의 없이 몸에 붙여지는 식별 스티커를 볼 때면 마음 어딘가 작게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사라지고 ‘환자’만 남았다. 수술이 끝났지만 병은 끝나지 않았다. 여덟 차례에 걸친 항암과 방사선, 수년에 걸친 약물 치료가 기다리고 있었다. 생이 그다지 살 만한 것이 아님을 지난 1년 사이 나는 매일 새롭게 배웠다.
건강검진에서 암 의심 소견이 나온 직후, 모든 치료 과정은 당연하고 신속하게 결정됐다. 마치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을 것처럼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거쳤지만, 다른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질문 있느냐"라는 의사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울거나 소리 지르고 싶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자꾸만 고꾸라졌다.
수술이 가장 쉬웠다고 기억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항암을 시작한 이후 속눈썹이 없는 눈은 자주 염증을 앓았다. 염증으로 찌걱거리는 눈 때문에 무엇 하나 집중하기 어려웠다. 피부는 거무죽죽하거나 허물 벗었다. 병원에서는 소독약 냄새 때문에 물마저 제대로 마시지 못했고 입맛은 좀체 돌아오지 않았다. 3주 사이에 7㎏이 빠지는 일도 예사였다. 부종과 가려움으로 손발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손끝은 물 닿으면 칼에 베인 것처럼 아팠고, 발끝은 아무리 수면양말을 신어도 얼얼했다. 왜 손발톱 뽑기가 고문의 일종이었는지 깨달았다. 거의 다 빠지고도 일부 살점에 붙어 덜렁거리는 손발톱은 고작 옷 단추를 꿰거나 신발을 신는 단순한 일로도 고통을 줬다. 마약성 진통제도, 수면제도 듣지 않는 밤에는 그저 줄줄 우는 수밖에 없었다. 의사에게 들고 간 고통은 처방전으로 돌아왔다. 항암 부작용은 또 다른 약으로 덮었다. 카드 돌려막기 하듯 약 돌려막기를 했다. 정말 이 방법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통증이 익숙해지면서 다루는 법도 알게 됐다. 어느 정도 아프고 나면 괜찮아질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견뎌졌다. 하지만 씻고, 먹고, 싸는 기초적인 일상이 누군가의 돌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아픈 몸은 내 자존감을 끊임없이 시험했다. 고통보다는 무력감이 컸다. 수술, 항암, 방사선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표준 치료’를 다 끝내고 약물 치료를 하고 있는 요즘도 여전히 컨디션은 제멋대로 날뛴다. 특히 체온 조절이 잘 되지 않아서 땀을 비 오듯 흘리거나 갑자기 오한에 시달린다. 치료 부작용 중 하나인 조기 완경의 대표적 증상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빠진 손발톱과 머리카락이 기어이 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몸이 보이는 ‘생의 의지’에 조금 감탄했다.
수술과 입원을 마친 후 돌아온 집에서 나는 보험회사 제출용으로 뗀 조직검사 결과지를 해석하기 위해 애썼다. 사전을 이용해 단어 자체는 번역할 수 있었지만 의미를 해석할 수는 없었다. "수술이 잘됐다"라든지 앞으로 어떤 치료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결과론적 이야기가 아닌, 더 자세한 상태를 알고 싶었다. 결과지를 붙잡고 밤을 꼬박 새운 다음 날, 결국 의사 친구에게 연락했다. 그는 한 줄 한 줄 짚어 가며 내 몸 상태를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듣는 내내 어쩐지 부끄러웠다. 한편으로는 왜 이게 ‘치료 과정’의 일환일 수 없는지 생각했다. 환우회 카페에는 조직검사 결과지를 해석해 달라며 찍어 올리는 이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개인 의료 정보가 노출되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알고자 하는 마음들이었다. 좋은 질문은 ‘앎’에서 나온다. 의료 지식이 없는 보통 사람의 질문은 구체적이기 어렵다. 매뉴얼처럼 "질문 있나요?"를 외는 의사의 말에서 환자는 ‘묻지 말라’는 뉘앙스를 읽는다. "저 괜찮나요?"가 최선의 질문이 된다. ‘아는 의사’를 찾거나 인터넷에 개인 의료 정보를 올리지 않고도, 치료의 일환으로 쉽고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는 없는 걸까. 없었다. 한국의 대형 병원에는 그 무엇보다 시간이, 없다. 의료진은 친절했지만 너무 바빴거나 바빠 보였고, 나는 그 앞에서 어쩐지 자주 주눅 들었다. 드디어 질문이 생겼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질문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임에도 그랬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를 쓴 양창모는 의사이기 이전에 ‘손님’이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는 환자를 살리는 일cure만큼이나 돌보는 일care에 절박함을 느낀다. 진료실에만 머물렀다면 얻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환자를 ‘증상’이 아닌 ‘사람’으로 대할 수 있었던 건 수없이 환자 집 문턱을 넘나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곳에서 살고 무엇을 하는지와 같은 삶의 맥락은 진료실에 들어온 순간 모두 사라진다. 모든 것이 마술처럼 사라지고 오직 한 가지, 증상만 남는다. 이것이 의사가 경험하는 첫 번째 마술이다. 하지만 왕진을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단 거기에는 ‘한 사람’이 자신의 방에 앉아 있다. 그 모습이 의사에게 주는 정서적인 변화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는 자기 삶의 맥락 속에 앉아 있으므로 나는 그를 ‘한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양창모는 왕진을 통해 환자의 자리에 자신을 놓아 보는 경험을 한다. 환자가 다 말하지 못한 사정과 상황을 헤아리는 법을 배운다. 진료실을 지키며 "주지 않아도 될 약을 처방하거나 해 줘야 할 얘기를 빼먹은 분들"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마음속으로 처방전을 끊임없이 수정"하던 그는 결국 병원이라는 ‘하드웨어’ 바깥으로 삐져나온다. "‘없어서’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구체적인 얼굴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냉기가 사라지지 않은 봄 산에 올라가 나물을 캐 온 할아버지의 손에서 돈이 대신하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배웠다. 시계가 세 개나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시간 맞는 시계가 없었던 집에서는 언어가 되지 못한 사정을 읽었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일상이 있다는 걸 헤아렸다. 그 과정에서 ‘증상의 뿌리’가 사회임을 마주한다. 그는 ‘내가 아프다’는 것이 곧 ‘우리가 아프다’는 일임을 알게 된다. 전문가에게 부족한 것이 "자기 지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의 지식을 바라보는 태도"임을 깨닫는다.
"답이 없다 말하는 순간 답은 사라진다. 나는 무관하다 말하는 순간 답은 없어진다." 그래서 양창모는 ‘하나의 답’이 되기로 했다. 제도는 언제나 사후적이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내는 변화는 거저 오지 않는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애써 일궈 가야 한다. "질문들의 대부분은 정답이 없다. 정답을 찾아가는 최선의 과정이 있을 뿐"이라 양창모는 구멍 난 의료 시스템을 메우고, 넓히고, 나아간다. 시스템을 탓하는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찾고 안 되는 이유는 고치고 개선하면서, 부족하지만 할 수 있는 꼭 그만큼을 해낸다. 그의 말마따나 "새로운 세상이란 장소가 아니라 행동"이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는 그 행동 위에서 써 내려간 기록인 동시에 초대장이다. 국가보다 중요한 ‘단 하나의 이웃’이 서로에게 되어 주자고, 그렇게 "연대의 그물망"을 함께 짜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행간마다 빼곡하다.
그는 모든 의사가 ‘양창모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강권하지 않는다. 다만 다르게 사는 모습으로 필요를 증명한다. 그리하여 독자는 가능하다면 양창모의 삶의 기록이 ‘양창모들’을 만들 수 있길 바라게 된다.
노인이 되는 건 그의 말마따나 "운이 좋아야" 하는 일이라, 요즘 나의 장래희망은 ‘할머니 되기’다. 나는 어쩔 도리 없이 현대 의학을 신뢰한다. 하지만 현대 의학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기를 또한 바란다. "병은 삶을 바꾸는 질문"이 되어야 하는가, 혹은 될 수 있는가. 나는 절반만 동의한다. 병은 내 삶을 흔들어 대고 일정 부분 바꿨지만, ‘나라는 사람’ 그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병의 원인을 내가 살아온 삶을 반성하는 일로 갈음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내가 살아온 삶을 바꾸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아픈 몸을 대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가 바로 그런 다정한 세계라고 믿는다.
10년을 일하면 한 달을 유급으로 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연차도 다 소진해 본 적 없었다. 안식월 요건을 채우고도 쓸 수 있다는 생각조차 안 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일이 좋아서 그랬다. 좋았다기보다 불안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잘하고 싶어서 안달했다는 것도. 그 모든 것은 ‘좋아한다’ 안에 뒤죽박죽 담겨 있는 감정이기도 했다
건강검진 결과 유방암이 의심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놀라지 않았다. 처음 들었던 감정은 안도였다.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 찾아왔다.
암의 존재를 알았을 때 나는 암 덕분에 내가 앞으로 쓰게 될 글이 넓고 깊어질 가능성을 떠올렸다. ‘의료화’된 사회의 최전선에서 질병 경험이 한 개인을 어떻게 바꾸는지, 또 암 경험자가 어떤 낙인과 차별을 경험할지 등을 글이 아니라 몸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그러자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조금은 기대되기도 했다.
투병을 결정하고 알게 된 가장 괴로운 일 중 하나는 내가 아프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었다. 나는 가능하면 병과 관련된 많은 일을 혼자 감당하려고 했다. 코로나19는 좋은 핑계였다. 그럼에도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이 놀랍도록 많았다. 병원 대기실에서 예상치 못한 얼굴을 만나는가 하면, 한동안은 거의 매일 택배와 봉투를 받았다. 아픈 몸으로 사는 일은 어쩌면 긴 장례를 치르는 일 아닐까. 은유 선생님 덕분에 나는 내게 벌어지는 일들을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픔은 너무도 혼자의 일인데 투병은 다행히 모두의 일"이라는 것을.
안식월을 다짐한 건 수술 이후 지난하게 이어지던 항암과 방사선 치료가 끝난 몇 달 뒤였다. 제주에 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꽃집 찾기였다. 다이소에서 2000원짜리 작은 병을 사서 꽃집에 들고 갔다. 병에 맞춰서 꽃을 꽂아 달라고 부탁했다. 아침에 눈뜨면 상한 가지를 솎아 내고 물을 갈아 주었다. ‘찰나’와 ‘무용함’을 생각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제주에서 지낼 집은 카페공드리 사장 부부가 미리 알아봐 줬다. 머무는 동안 드는 각종 비용은 회사 선배들이 앞다퉈 댔다. 그러고 보면 내가 회사에서 배운 가장 큰 것은 기사나 취재가 아니었다. 선배들은 선배가 베푼 것은 선배에게 갚으려 하지 말고 후배에게 갚으라고 당부하곤 했다. 나는 선배들을 통해 마음은 정확하게 셈해 갚는 게 아니라 흐르는 것임을 배웠다. 고마워하되 미안해하지 않고, 받은 마음을 아직 서툰 타인을 위해 내어 주는 법도 함께 익혔다.
제주는 지천에 무덤이 있다. 밭 한가운데, 길가에, 집 옆에. 삶의 자리마다 죽음을 끌어안고 있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늘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나는 그 모습이 몹시 보기 좋았다. 적어도 제주에서 죽음은 추상이 아니었다. 버젓이 물리적 형태를 갖고 일상에 있었다. 죽음을 삶에서 격리시키지 않았다.
내가 편집자로 처음 기획하고 만든 책인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시사인북, 2021)는 제주에서 보낸 그런 시간 덕분에 묶을 수 있었다.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를 통해 나는 ‘존엄한 죽음’ ‘좋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감추고 있는 현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 죽음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사건임을, 우리 모두가 연루된 일임을 드러내 질문하고 싶었다. 한 사람이 사회에서 병들고 아프며 죽어 가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많은 사람이 관여한다. 삶을 이야기하다 보면 질병이, 질병을 이야기하다 보면 돌봄이, 죽음과 섞여 들었다. 우리는 왜 아프면 ‘깨끗하게 죽어 버리는’ 미래를 상상할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애써 모른 척하면서. 존엄사를 허용하는 국가들은 사회복지가 잘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존엄사가 존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복지가 존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나의 죽음을 운에만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의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 죽음을 둘러싼 각자의 내밀한 경험이 더 많은 보편의 이야기로 나눠질 때 삶도 조금은 덜 잔인해진다.
‘운이 좋다면’ 살아 있을 때 장례식을 열고 싶다. 내 장례의 상주가 되고 싶다. 당신들 덕분에 살아서 좋았다고 눈을 마주치며 인사하고 싶다. 장례식에 오는 사람들은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어야만 입장할 수 있게 할 예정이다. 조문객들이 가져오는 사진은 모두 내 영정사진으로, 장례 기간 동안 벽에 전시해 두면 근사할 것 같다. 돌아가는 길에 가져갈 제철 꽃을 준비하는 것도 장례 계획의 일부다. 시간과 자연을 목적 없이 걸어 다닌 그해 여름, 나는 꽃이 주는 무용한 기쁨과 찰나의 순간이 삶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됐다. 가능하면 그 순간과 순간들을 정성껏 보내고 싶다.
개인적인 고백을 덧붙이자면 40대는 ‘옳은 말’을 의심하고 싫증 내는 때이기도 하다. 그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너무 자주 들은’ ‘다 아는 말’이라 여기기 쉬워서다. 그러나 그 ‘다 아는 말’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이 들어 있는지. 그리고 그 삶 하나하나는 얼마나 구체적이고 육체적인지. 우리가 지레 빤한 말이라 치부한 그 말이 누군가에는 목숨 줄이고, 실존의 테두리임을 다시 깨닫는다. 그 선이 비단 타인뿐 아니라 나도 지켜 주는 선이었음을 깊이 수긍하면서.
더불어 이 책은 사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다 아는 말’이란 없으며, 그런 ‘앎’은 앎이 아니라고, 그러니 이웃뿐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새 말이 지나가는 길을 함께 터 주고 넓혀야 한다고 일러 준다. 가끔은 그 일을 ‘독서’라 불러도 좋다고 조용히 끄덕이면서. 그 발화가 고맙다. 한두 번이 아닌 누군가의 일생에 걸친 발화라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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