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현실에서는 마지막 기회, 한 번의 기회를 더 줄 수 있는데, 왜 가고 나면 할 수 없는 건지… 인류의 생성과 진화가 잘못 되었어. 그 나약한 인간들을 어떡하라고…
"사람이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지만 사랑하던 마음과 사랑받던 마음은 가져간다"고 하지…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노인처럼 안 아픈 곳이 없었지만, 옆을 돌아보니 나보다 슬픈 아내가 차마 아픈 내색도 하지 못하고 걱정스런 눈길로 숨죽여 울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번개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아! 내 곁엔 나보다 더 슬픈 아내가 있었구나. 참척의 슬픔을 당하고도 소리 내어 크게 울지도 못한 아내가 점점 망가지며 폐인이 되어가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구나. 그래, 이제는 아내의 남편으로 살자. 그래야 못난 아들놈도 하늘에서 편히 눈 감을 수 있겠지. 천하에 몹쓸 나쁜 놈!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조금만 참고 견디지. 평생 부모가 당할 고통과 슬픔은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혼자만 훌쩍 떠나버린 괘씸한 아들놈보다는 곁에있는 마누라부터 보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으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습니다.
저는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예순 줄에 접어들어서야 영어공부에 입문했습니다. 영어 때문에 기죽고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온 지난 날들을 생각하며 회화만큼은 악착스레 공부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 하는 공부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회화책을 펴놓으면 책속에 아들 얼굴이 달덩이처럼 떠올라 수해를 일으킬 만큼 눈물이 쏟아졌고, 내 욕심 때문에 아들을 망쳤다는 후회가 가슴을후벼 팠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보고 싶습니다. 나를 죽이고 내 아들을 자살로 몰아간 영어를 완전정복하고 싶습니다. 살아서는 다시 볼 수 없고 눈물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리운 아들이 숨 쉬었던 뉴욕으로의 흔적 여행을 해보기 위해서…….
극복이란 말보다 견디는 내성을 키우는 맷집이 쌓여간다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합니다. 프루스트 산문에는 "욕망은 모든 것을 꽃 피우고, 소유는 모든 것을 시들게 한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가 희망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살아야 될 이유를 목마르게 찾아 헤맸고 지금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중 하나가 억지인지는 몰라도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내세에서는 가능하다는 바람입니다.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삶을 가치있게 만들고 죽음을 극복하는 계기가 되는 기적 같은 일이니까요.
아버지인 저는"얼마나 아프니?"다독이며 달랬어야 했는데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안 아플 거야"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사내아이를 강인하게 키우는 방법이고 약한 아버지의 마음을 노출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요.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많이 아프지, 내새끼?" 하면서 쓰다듬고 안아주고 싶지만… 그놈의 타임머신은 언제 개발된답니까.
그렇게 나를 변화시키며 남아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만들고 무엇이든 두렵지 않게 만든 것이 아들의 소중한 선물이라고생각합니다.
딸은 마지막으로 눈물 한 줄기를 흘리더니 결국 하늘나라로 떠났다. 화장터에서 한 줌 재로 돌아온 딸.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가버리다니. 더 흘려야 할 눈물도 말라버리고 하늘마저 원망스러워 그대로 주저앉아 넋을 놓아버렸다.
그런 녀석이 갑자기 그런 시도를 하다니. 유서 한 장 없이, 아무런 말도 없이……. 그러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까?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럴 때 부모라는 사람이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딸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몸서리치며 통곡의 날들을 보냈다.
자살은 한 개인의 삶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삶까지 같이 무너지니, 생각을 한 번만 더해 멈춰야 한다고. 죽을 것 같은 고통도 영원한 것은 없으며 언젠가는 지나가는데, 죽음으로 삶을 마치면 그 고통이 없어지리라 생각해도 그 고통은 남아 있는 가족들을 더욱 괴롭게 하니 자살은 하지 말라고 간곡히 피눈물로 말한다. 그러니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고 살아야 한다고!
이제는 상처받은 사람들에게도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어야 한다. 슬퍼한다고만 해서 가버린 사람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 삶도 잘 살아야 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므로 죄책감, 자책감, 책임감에서도 빠져나와야 한다. 유가족 권리장전에 나와 있는 것처럼, 나는 희망을 느낄 권리와 새롭게 시작할 권리가 있다. 나를 떠난 가족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권리가 있기에 나를 떠난 가족이 이제 삶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살고 죽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그리워하며 짐을 안고 평생을 살아야 한다.
세상에 울면 안 되는 사람은 없다.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흔한 일이다. 나이가 어려서 덜 아픈 게 아니고 견뎌낼 이유가 있어서 덜 아플 수 없는, 그냥 ‘아픈 것’이었다.
느닷없는 죽음은 남겨진 이들에겐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안겨준다. 자살은 유가족에게 죄책감이라는 굴레를 씌운다. 계속 조금만 더 잘해줄걸… 이해해줄걸… 이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자살을 선택한 이유조차 알지 못해 힘든 유가족들은 사회의 따가운 시선까지도 달게 받아야 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마음껏 애도조차 할 수 없다. 충분히 애도해야 다시 숨을 쉬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데, 그래야 자살의 대물림을 끊어낼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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