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적으로 완전히 건강하고 완벽하지만 몸에 작은 상처가 있거나 아니면 통증이 있는 경우에는 몸 전체의 건강보다는 상처 부위의 통증에만 관심이 쓰이기 때문에 삶에게 느낄 수 있는 전반적인 편안한 기분이 사라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이 우리의 의도대로 잘 진행되더라도 한 가지가 마음먹은 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아무리 작은 일이더라도 계속 그것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계속 그 일만 생각하게 되고, 뜻대로 진행되는 다른 일은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럴 경우 손상되는 것은 우리의 의지이다. 하나는 신체적으로 객관화된 의지이고, 다른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객관화된 것이다. 두 가지 경우 우리의 의지의 만족은 항상 부정적인 영향만 미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기껏해야 성찰의 단계에서 의식된다. 반면에 의지의 억제는 긍정적이고 그렇기에 적극적이다. 모든 즐거움은 단지 이 억제의 제거, 그것에서 해방하는 데 있기 때문에 수명이 짧다.
그렇다, 행복론은 그 이름 자체가 완곡한 표현일 뿐이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덜 불행하게 사는 것, 즉 참을 정도만큼 산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인생은 실제로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견디고 끝내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렇다, 삶의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노년에는 위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커다란 고통 없이 인생을 보내는 것이 가장 행복한 운명을 가진 것이지, 가장 큰 기쁨이나 엄청난 즐거움을 누린 것이 아닌 것이다. 최고의 기쁨을 누린 것으로 인생의 행복을 측정하려는 사람은 잘못된 기준을 선택한 것이다. 쾌락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인생의 기쁨을 좇다가 자신이 배반당한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재앙을 피한다.
어떤 사람이 행복의 관점에서 그 상태를 평가하고자 한다면 무엇이 그를 행복하게 하는지 묻지 말고, 무엇이 그를 슬프게 하는지 물어야 한다. 사소한 일에 민감하려면 행복한 상태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불행한 상태이면 그러한 사소한 것들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다른 일반적인 건물이 바탕이 넓을수록 견고한 것과 달리 우리의 행복이라는 건물은 반대다. 그러므로 스스로 가진 모든 종류의 수단에 균형을 맞추어 요구 수준을 적정하게 낮추는 것이 커다란 불행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미래를 위한 계획과 걱정에만 몰두하거나 과거에 대한 그리움에 빠지는 대신 현재만이 유일하게 실재하는 것이고,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만이 진실된 것이고 실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성취된 시간이며, 우리의 존재는 전적으로 그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를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직접적인 고통이나 불쾌감 없이 견딜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을 즐겨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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