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장소/명동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코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한 극한 정오다.
-이상, <날개> 중

이 글에서의 ‘미쓰코시‘는 미쓰코시백화점, 오늘날 명동 신세계백화점을 말한다. 이상은 당대 유명한 모던보이였다고 한다. 그는 돈이 없어도 명동 거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낭만을 누렸다.
일제 강점기 때 명동은 대표적인 일본인 거주지로 ‘메이지마치‘라 불렸다. 근처 충무로 역시 일본인 거주지였는데 ‘혼마치‘라고 불렀다. 지금도 그렇지만 명동과 충무로, 을지로 일대는 일제 강점기부터 상업이 번창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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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인물/최남선

최남선은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최초의 신체시를 썼고, 이광수와 함께 1910년대 2인 문단 시대를 이끌었다. 더불어 조선광문회를 만들어 고전을 간행했고,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쓰기도 했다. 문학, 언론, 역사 연구에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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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사건/만민공동회

독립협회가 러시아의 이권 침탈에 대응하여 일으킨 대중 집회. 1896년 미국에서돌아온 서재필과 정동파 관료(친미· 반일 관료)들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만들어진다. 초기 독립협회는 개혁적이고 반일적인 관료들의 모임이었다. 고종의 후원을받아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간행하고, 과거 청나라 사신을 맞는 영은문과 청나라 사신이 숙소로 썼던 모화관을 해체하고 독립문과 독립관을 만들었다. 또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고 있던 고종의 환궁을 강력히 요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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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명문장/여자 광복군

우리 여성의 임무가 어찌 집안에서 아해(아이)나 양육하고 밥이나 해주고 길쌈이나 하는 것이겠음니까? (...) 광복군은 남자의 전유물이 않이오. (...) 우리는 우리 혁명을 위하여 또는 광복군의 전도를 위하여 우리 여성 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하여 이 위대한 광복군 사업에 용감히 참가합시다. 그리고 총과 폭탄을 들고 전선에 뛰어 나아가서 우리 여성의 피를 압록 두만강 연안에 홀리며 이 선혈 위에 민족의 자유화가 피고 여성의 평등 열매를 맺게 합시다.

여자 광복군 오광심이 광복군 기관지 <광복>에 밝힌 입대 동기다. 오광심은 일종의 이중혁명론을 주장했다. 1차적으로 일제를 몰아내는 민족 혁명을 취한 후, 2차적으로는 남녀가 절대적으로 평등한 새로운 사회 혁명을 이룩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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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학문•철학/공녀

공녀는 주로 13세에서 16세까지의 처녀를 대상으로 했는데 이를 위해 금혼딩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를 피하고자 조혼 문화가 발생했다고 보기도 한다.
원나라로 끌려간 여성들의 처지는 다양했다. 노비가 되거나 군인의 아내가 되기도 했고 간혹 고관대작의 첩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몽골 황실에 들어가서 시녀나 후궁이 되는 경우도 간혹 있었는데 예외적으로 원나라 순제의 황후가 된 이가 있었으니 그녀가 기황후였다. 기황후 덕분에 그녀의 집안은 고려의 권세가로 거듭난다. 부친 기자오는 영안왕으로 책봉됐고 고려 국왕은 매해 기황후 집안에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특히 기황후의 오빠 기철은 충혜왕을 몰아내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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