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명문장/상인에 관하여

중국 사람들은 가난하면 상인이 되는데 참으로 현명한 생각이다. 그래서 그사람의 풍류와 명예는 그대로 인정된다. 유생들은 직접 책방에 가서 책을 산다. 재상들도 가끔은 융복사 근처 시장에 직접 가서 골동품을 사기도 한다. 나는 지체 높은 사람이 융복사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것을 직접 목격한 일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신분으로 시장에 출입하면 모두들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일이 아니다. 청나라의 이런 풍속은 어제 오늘에 비롯된 것이 아니다. 벌써 명, 송 시대부터 내려온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겉치레만 알고 고개를 저으며 꺼려하는 일이 너무 많다. 사대부는 놀고먹을 뿐 하는 일이라곤 없다. 아무리 가난해도 사대부가 들에서 농사를 지으면 알아주는 자가 없다. 사대부는 짧은 바지에 대나무로 만든 갓을 쓰고 시장에서 물건을 판매해서는 안 된다. 또 자와 먹통, 칼과 끌 등을 가지고 남의 집에서 품팔이를 해서도 안 된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그를 부끄러워하고 우습게 여기며, 그의 혼인길마저 끊어놓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집에 돈 한 푼이 없어도 높다란 갓에 넓은 소매가 달린 옷으로 치장하고 어슬렁거리며 큰소리만 치는 것이다.
-박제가,<북학의>중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1750년~1805년)가 쓴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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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들의 세상

한번씩 떠올리는 얼굴이 있다. 승욱은 초등학교 동창이다. 뇌성마비를 앓고 있다. 우리는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집 방향이 비슷해 종종 하교를 도와주곤 했다. 딱히 도울 것도 없었다. 그저 그 애의 속도에 맞춰 발을 늦추는 일이 전부였다

어머니의 지치고 피곤한 얼굴이 부지불식간에 떠오를 때면 지금도 한번씩 잠을 설친다. 승욱의 어머니는 승욱에게 친구가 생겼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끝내 승욱의 친구가 되어 주지 못했다.

노들야학 교사이자 저자인 홍은전 씨는 비장애인이다. 그는 자신을 ‘9’라고 칭한다. "10명 중에 1명은 장애인이다.(……) 1들이 말하는 세상은 야만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자라온 세상은 한번도 1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의 가혹한 세상살이를 알면 알수록 나는 내가 1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했다. 그 차이가 있는 한 저들에게 일어난 일은 결코 나에게로 넘어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안전한 9였다."
‘저들에게 일어난 일은 결코 나에게로 넘어오지 않을 것이므로’라는 문장 앞에서 나는 다시 승욱을 떠올린다. 자신을 ‘9’라고 고백한 저자의 마음에 나를 겹쳐 본다. 장애인 관련 분야는 ‘더는 새로운 기사가 나올 게 없는’ 레드오션이다. 아무리 장애를 ‘체험’하고 또 해도 결국 9의 자리에서 9의 시선으로 쓰게 될. 연민이나 동정에 호소하거나 애써 희망적인 이야기를 찾아 그나마 ‘팔리는(읽히는)’ 기사를 쓰면 다행이다. 쉬운 길이다. 그래서 많은 기자들이 검증된 그 길을 가거나, 그냥 대충 잊고 지낸다. 세상에는 정말 너무 많은 문제가 있고, 1의 세상은 어차피 잘 보이지 않으니까.

정직한 기록만이 역사가 될 자격이 있다. 그들이 비틀거리며 20년간 걸어온 길이 다름 아닌 한국 장애인 운동사다. 홍은전은 담담히 장애인 운동의 실패를 시인한다. 다만 "연대는 분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릎이 꺾일 것 같은 순간 힘없이 뒷걸음질치고 고개 돌렸던 우리 자신을 보듬는 힘"이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하면서.

다시 초등학교 6학년 교실로 돌아가도 나는 승욱을 외면할지 모른다. 나는 그때 내가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하는지 몰라서 연대에 ‘실패’했다. 솔직히 말하자. 어쩌면 알면서도 실패할 것이다. ‘당당한 병신’ 곁에 수많은 ‘9’들이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하는지 여전히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때마다 《노란들판의 꿈》을 펼쳐 들고 박경석 교장의 외침을 읽을 것이다. 누군가 목숨 걸고 투쟁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전해야 한다. 이 ‘당연한’ 문장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이 죽어, 몸으로 쌓아 올린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묘지에서 하는 운동회

신문도 재밌지만 주간지는 더 재밌었다. 어떤 월요일에는 밥 대신 가판에서 주간지를 산 적도 있었다. 가난한 대학생에게 주간지는 꽤 자주 ‘사치품’이었다. 덜컥 정기 구독을 신청해 두곤 구독료가 하염없이 밀리던 어느 날, <시사IN> 지면에서 인턴 기자 모집 광고를 봤다. 자기소개서 첫 줄을 이렇게 썼다. "인턴 활동비 받으면 밀린 구독료 내겠습니다." 나중에야 알았다. 당시 미납금을 독촉할 여력이 없었던 이 신생 언론사는 ‘돈 내겠다’는 자기소개서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단언한다. 언젠가는 종이 매체가 사라질 거라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다짐한다. 그 시대의 안과 밖을 잘 쓸고 닦다가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초 단위로 기사가 쏟아지는 시대에 나는 뒷북이나 다름없어 보일 때도 있는 주간지의 느린 박자가 좋았다. 사수는 단독 기사의 의미를 몇 번이고 다시 짚어 줬다. 제일 처음 쓰는 것도 의미 있지만, 마지막까지 쓰는 것도 단독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당연한 말이지만 뉴스를 만드는 데는 돈과 노동과 시간이 필요하다. 언론이 중요하다고,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유료로 구독하는 사람은 한 줌이다. ‘좋은 기사’를 쓰면 반응하는 독자(시장)가 있다는 믿음은 기자에게도 없다. 언론도 문제지만 독자도 이 망가진 시스템의 일부라는 의미다. 같은 기사지만 종이로, 웹으로, 영상으로 보는 일은 모두 다른 경험이다. 디지털 시장은 아직까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이것저것 해 보거나 못 하거나를 반복한다. 해 보고 싶은 건 많지만 돈이 없을 때가 많다. 이곳저곳에서 취재 비용을 펀딩 받을 수도 있지만, 인건비는커녕 제작비도 못 맞출 때가 많다. 그럼에도 나를 갈고 주변을 갈아 가면서 한다. 좋은 뉴스와 좋은 매체가 필요하다고 간절하게 생각하니까.

서글픔과 피곤함이 ‘기어이’ 다정과 평화를 닮아 가는 일은 타인과 세상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통과하는 동안 이뤄지는 것이다. 모르겠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알고 싶다’는 마음이 될 때 우리는 연결된다. 우리를 그렇게 연결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꽤 자주 활자라서 나는 계속 언론사에서 일하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저널리즘이라니 우리끼리만 아는 ‘나쁜 농담’ 같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속절없이 그런 것에 마음을 홀리곤 한다. 그리고 여전히 그 힘을 믿고 싶다.

무언가를 보이게 하는 것(주목받게 하는 것), 혹은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일이다. 이런 판이라면 아무리 유튜브가 레드오션이라고 해도 내가 끼어들 여지가 아주 없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별을 넘어서고 차이를 가로지르는 이야기를,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정치 대신 정치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내 안에 자랐다.

어떤 정당을, 정치인을, 그리하여 정치를 욕하고 손가락질하기란 때로 매우 쉽고 간편하다. 그사이 민주주의는 위협받고 일상은 무람없이 공격당한다. 정치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한 동시에 참 지루한 일이다. 그 ‘좁은 길’을 내는 것이야말로 독립언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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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학문•철학/수중 고고학

육상 고고학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바다나 강을 탐사하는 고고학을 말한다. 보통고고학은 지층을 파고 들어가서 유물과 유적을 발굴한다. 하지만 기술 발전에 힘입어 해저 탐사선이 만들어지는 등 수중 고고학도 큰 발전을 이루고 있다. 지진으로 사라진 도시 헤라클 리온이 알레산드리아 연안으로부터 3km 떨어진 아부키르만에서 발견된 사례가 수중고고학의 대표적인 성과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고 고대부터 중국, 왜와 활발한 교류가 펼쳐진 지역이다. 해상 교역뿐 아니라 조운 제도 등으로 연근 해안에서 수많은 배가 다녔기 때문에 수중 고고학이 큰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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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가족보다 예의를 지키는 남

설 명절이 지나고 첫 기획회의에서는 여지없이 ‘가족’이 취재 아이템의 하나로 올라왔다. 두 아이의 엄마인 동기는 힘든 명절 연휴를 보낸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명절로 대표되는 ‘구시대’가 안녕을 고할지도 모르겠다는 희망 한편에 여전히 고집 센 전통이 존재한다. 1984년생인 선배의 엄마는 시어머니에게 ‘맞으면서’ 시집살이를 했다고 했다. 불과 40여 년 전 얘기다. 도무지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한국에 노예제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여, 고개를 들어 당신의 ‘어머니’를 보라.
우리 시대 며느리들이야 더 이상 맞고는 안 살지만, 차라리 맞으면 문제 제기하기 편하겠다 싶은 순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막상 결혼하고 보니 ‘미세먼지’ 같은 불편과 불쾌는 좀체 언어화하기 쉽지 않았다. 인스타그램 웹툰으로 먼저 연재됐던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가 큰 화제를 모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나 역시 같이 살고 있는 짝꿍과 갈등했던 가장 큰 이슈가 ‘시댁’ 문제였다. 가해자는 딱히 없는데 나는 기분이 정말 너무 나쁜, 애매하고 묘한 상황에 놓일 적을 지날 때마다 무참했다. 악을 쓰고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아닐 줄 알았다. ‘그런’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대단히 착각했다. "어쨌든 그게 가부장제야. 당신 눈에는 안 보여도 내 눈에는 보여.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아주 많아."

나는 어머니와 헤어진 직후 줄담배를 피우며 짝꿍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네 엄마’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어쨌든 그 후 1년은 이상한 시어머니와 이상한 며느리가 서로 가족이 되느라 애쓴 시간이었다. 아무리 싸워도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말로 하기엔 너무 하찮은 자잘한 분노가 수시로 올라왔다. 하지만 모든 게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연민이 생겼다. 내가 며느리가 처음이듯이, 어머니도 시어머니 역할이 처음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처음 만난 날 그랬듯, 나는 이 관계에서 최대한 나의 감정과 상태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다. 짝꿍의 도움이 컸다. 그는 시어머니-며느리 관계에서 무조건 내가 약자라는 걸 ‘결과적으로’ 이해했고 지지하며 온전히 내 편에 섰다. 무엇보다 우리는 ‘효도는 셀프’라는 점을 확실히 했다. 며느리나 사위로서 할 일의 목록에 효도를 넣지 않으면 서운함이나 다툼의 여지가 정말이지 아주 많이 줄어든다. 우리가 예의를 지켜야 하는 ‘남’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어머니와 나는 이제 서로에게 적정 거리가 있음을 이해하고 꽤 잘 지킨다. 심지어 나는 어머니를 알아갈수록 좋아하게 됐다. 물론 여전히 시어머니로서는 물음표가 있지만, 여자로서 연대하는 마음이 있다.

수신지 작가는 《노땡큐: 며느라기 코멘터리》에서 《며느라기》를 읽은 가족과 인터뷰를 했다. 수신지 작가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나는 네 나이를 겪어 봤으니까 내가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완벽하게는 이해하기 어려울지라도, 그 반대보다는 쉬울 거야. 그러니까 윗세대가 이해하려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
‘나의 시어머니’도 그 이해의 첫발을 뗐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좋은 시댁을, 좋은 남편을 만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걸 ‘운’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싸워서 얻어 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싸울 수 있었던 건 동료 여성들 덕분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결혼’이 ‘착취’의 동의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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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문화/정주영

현대그룹 창시자로, 삼성그룹 이병철과 더불어 한국 기업사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대통령 후보로도 출마했고, 1998년에는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키며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자네. 해봤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유명한 어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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