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씩 떠올리는 얼굴이 있다. 승욱은 초등학교 동창이다. 뇌성마비를 앓고 있다. 우리는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집 방향이 비슷해 종종 하교를 도와주곤 했다. 딱히 도울 것도 없었다. 그저 그 애의 속도에 맞춰 발을 늦추는 일이 전부였다
어머니의 지치고 피곤한 얼굴이 부지불식간에 떠오를 때면 지금도 한번씩 잠을 설친다. 승욱의 어머니는 승욱에게 친구가 생겼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끝내 승욱의 친구가 되어 주지 못했다.
노들야학 교사이자 저자인 홍은전 씨는 비장애인이다. 그는 자신을 ‘9’라고 칭한다. "10명 중에 1명은 장애인이다.(……) 1들이 말하는 세상은 야만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자라온 세상은 한번도 1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의 가혹한 세상살이를 알면 알수록 나는 내가 1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했다. 그 차이가 있는 한 저들에게 일어난 일은 결코 나에게로 넘어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안전한 9였다." ‘저들에게 일어난 일은 결코 나에게로 넘어오지 않을 것이므로’라는 문장 앞에서 나는 다시 승욱을 떠올린다. 자신을 ‘9’라고 고백한 저자의 마음에 나를 겹쳐 본다. 장애인 관련 분야는 ‘더는 새로운 기사가 나올 게 없는’ 레드오션이다. 아무리 장애를 ‘체험’하고 또 해도 결국 9의 자리에서 9의 시선으로 쓰게 될. 연민이나 동정에 호소하거나 애써 희망적인 이야기를 찾아 그나마 ‘팔리는(읽히는)’ 기사를 쓰면 다행이다. 쉬운 길이다. 그래서 많은 기자들이 검증된 그 길을 가거나, 그냥 대충 잊고 지낸다. 세상에는 정말 너무 많은 문제가 있고, 1의 세상은 어차피 잘 보이지 않으니까.
정직한 기록만이 역사가 될 자격이 있다. 그들이 비틀거리며 20년간 걸어온 길이 다름 아닌 한국 장애인 운동사다. 홍은전은 담담히 장애인 운동의 실패를 시인한다. 다만 "연대는 분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릎이 꺾일 것 같은 순간 힘없이 뒷걸음질치고 고개 돌렸던 우리 자신을 보듬는 힘"이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하면서.
다시 초등학교 6학년 교실로 돌아가도 나는 승욱을 외면할지 모른다. 나는 그때 내가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하는지 몰라서 연대에 ‘실패’했다. 솔직히 말하자. 어쩌면 알면서도 실패할 것이다. ‘당당한 병신’ 곁에 수많은 ‘9’들이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하는지 여전히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때마다 《노란들판의 꿈》을 펼쳐 들고 박경석 교장의 외침을 읽을 것이다. 누군가 목숨 걸고 투쟁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전해야 한다. 이 ‘당연한’ 문장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이 죽어, 몸으로 쌓아 올린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신문도 재밌지만 주간지는 더 재밌었다. 어떤 월요일에는 밥 대신 가판에서 주간지를 산 적도 있었다. 가난한 대학생에게 주간지는 꽤 자주 ‘사치품’이었다. 덜컥 정기 구독을 신청해 두곤 구독료가 하염없이 밀리던 어느 날, <시사IN> 지면에서 인턴 기자 모집 광고를 봤다. 자기소개서 첫 줄을 이렇게 썼다. "인턴 활동비 받으면 밀린 구독료 내겠습니다." 나중에야 알았다. 당시 미납금을 독촉할 여력이 없었던 이 신생 언론사는 ‘돈 내겠다’는 자기소개서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단언한다. 언젠가는 종이 매체가 사라질 거라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다짐한다. 그 시대의 안과 밖을 잘 쓸고 닦다가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초 단위로 기사가 쏟아지는 시대에 나는 뒷북이나 다름없어 보일 때도 있는 주간지의 느린 박자가 좋았다. 사수는 단독 기사의 의미를 몇 번이고 다시 짚어 줬다. 제일 처음 쓰는 것도 의미 있지만, 마지막까지 쓰는 것도 단독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당연한 말이지만 뉴스를 만드는 데는 돈과 노동과 시간이 필요하다. 언론이 중요하다고,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유료로 구독하는 사람은 한 줌이다. ‘좋은 기사’를 쓰면 반응하는 독자(시장)가 있다는 믿음은 기자에게도 없다. 언론도 문제지만 독자도 이 망가진 시스템의 일부라는 의미다. 같은 기사지만 종이로, 웹으로, 영상으로 보는 일은 모두 다른 경험이다. 디지털 시장은 아직까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이것저것 해 보거나 못 하거나를 반복한다. 해 보고 싶은 건 많지만 돈이 없을 때가 많다. 이곳저곳에서 취재 비용을 펀딩 받을 수도 있지만, 인건비는커녕 제작비도 못 맞출 때가 많다. 그럼에도 나를 갈고 주변을 갈아 가면서 한다. 좋은 뉴스와 좋은 매체가 필요하다고 간절하게 생각하니까.
서글픔과 피곤함이 ‘기어이’ 다정과 평화를 닮아 가는 일은 타인과 세상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통과하는 동안 이뤄지는 것이다. 모르겠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알고 싶다’는 마음이 될 때 우리는 연결된다. 우리를 그렇게 연결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꽤 자주 활자라서 나는 계속 언론사에서 일하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저널리즘이라니 우리끼리만 아는 ‘나쁜 농담’ 같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속절없이 그런 것에 마음을 홀리곤 한다. 그리고 여전히 그 힘을 믿고 싶다.
무언가를 보이게 하는 것(주목받게 하는 것), 혹은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일이다. 이런 판이라면 아무리 유튜브가 레드오션이라고 해도 내가 끼어들 여지가 아주 없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별을 넘어서고 차이를 가로지르는 이야기를,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정치 대신 정치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내 안에 자랐다.
어떤 정당을, 정치인을, 그리하여 정치를 욕하고 손가락질하기란 때로 매우 쉽고 간편하다. 그사이 민주주의는 위협받고 일상은 무람없이 공격당한다. 정치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한 동시에 참 지루한 일이다. 그 ‘좁은 길’을 내는 것이야말로 독립언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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