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가족보다 예의를 지키는 남

설 명절이 지나고 첫 기획회의에서는 여지없이 ‘가족’이 취재 아이템의 하나로 올라왔다. 두 아이의 엄마인 동기는 힘든 명절 연휴를 보낸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명절로 대표되는 ‘구시대’가 안녕을 고할지도 모르겠다는 희망 한편에 여전히 고집 센 전통이 존재한다. 1984년생인 선배의 엄마는 시어머니에게 ‘맞으면서’ 시집살이를 했다고 했다. 불과 40여 년 전 얘기다. 도무지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한국에 노예제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여, 고개를 들어 당신의 ‘어머니’를 보라.
우리 시대 며느리들이야 더 이상 맞고는 안 살지만, 차라리 맞으면 문제 제기하기 편하겠다 싶은 순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막상 결혼하고 보니 ‘미세먼지’ 같은 불편과 불쾌는 좀체 언어화하기 쉽지 않았다. 인스타그램 웹툰으로 먼저 연재됐던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가 큰 화제를 모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나 역시 같이 살고 있는 짝꿍과 갈등했던 가장 큰 이슈가 ‘시댁’ 문제였다. 가해자는 딱히 없는데 나는 기분이 정말 너무 나쁜, 애매하고 묘한 상황에 놓일 적을 지날 때마다 무참했다. 악을 쓰고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아닐 줄 알았다. ‘그런’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대단히 착각했다. "어쨌든 그게 가부장제야. 당신 눈에는 안 보여도 내 눈에는 보여.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아주 많아."

나는 어머니와 헤어진 직후 줄담배를 피우며 짝꿍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네 엄마’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어쨌든 그 후 1년은 이상한 시어머니와 이상한 며느리가 서로 가족이 되느라 애쓴 시간이었다. 아무리 싸워도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말로 하기엔 너무 하찮은 자잘한 분노가 수시로 올라왔다. 하지만 모든 게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연민이 생겼다. 내가 며느리가 처음이듯이, 어머니도 시어머니 역할이 처음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처음 만난 날 그랬듯, 나는 이 관계에서 최대한 나의 감정과 상태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다. 짝꿍의 도움이 컸다. 그는 시어머니-며느리 관계에서 무조건 내가 약자라는 걸 ‘결과적으로’ 이해했고 지지하며 온전히 내 편에 섰다. 무엇보다 우리는 ‘효도는 셀프’라는 점을 확실히 했다. 며느리나 사위로서 할 일의 목록에 효도를 넣지 않으면 서운함이나 다툼의 여지가 정말이지 아주 많이 줄어든다. 우리가 예의를 지켜야 하는 ‘남’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어머니와 나는 이제 서로에게 적정 거리가 있음을 이해하고 꽤 잘 지킨다. 심지어 나는 어머니를 알아갈수록 좋아하게 됐다. 물론 여전히 시어머니로서는 물음표가 있지만, 여자로서 연대하는 마음이 있다.

수신지 작가는 《노땡큐: 며느라기 코멘터리》에서 《며느라기》를 읽은 가족과 인터뷰를 했다. 수신지 작가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나는 네 나이를 겪어 봤으니까 내가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완벽하게는 이해하기 어려울지라도, 그 반대보다는 쉬울 거야. 그러니까 윗세대가 이해하려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
‘나의 시어머니’도 그 이해의 첫발을 뗐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좋은 시댁을, 좋은 남편을 만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걸 ‘운’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싸워서 얻어 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싸울 수 있었던 건 동료 여성들 덕분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결혼’이 ‘착취’의 동의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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