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장소/금강산

한상억 작사, 최영섭 작곡의 가곡 <그리운 금강산>은 한국인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가곡으로, 1960년대 초반 한국 전쟁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노래라고 한다. 아름다운 금강산을 그리워하는 노래인데 가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의 강렬한 반공주의, 북진 통일적인 기상이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은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로 많이 불리고 조수미 같은 세계적인 성악가의 관심으로 해외에 알려지기도 했다.

‘금강‘이라는 이름은 <화엄경>에서 연원하는데, 그만큼 금강산은 절이 많고 불교 유적과 유물이 넘치는 곳이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아버지와 작별하고 이곳에 들어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조선 시대 때는 세조가 이 산에 다녀갔다고 하고, 성종 때는 사신 격으로 온 일본의 승려가 금강산에 방문하고 싶다고 해 신하들 간의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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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일은 흘러가도록 두세요
Grandma Moses
그랜드마 모지스

창밖 후식밸리의 풍경
Hoosick Valley (From the Window), 1946

지극히 보통의 삶을 살던 그녀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 건 놀랍게도 76세부터다. 관절염 때문에 자수 놓기가 어려워지자, 그녀는 누군가는 쉬어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나이에 붓을 들었다.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거치지 않았기에 데생이나 채색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농장 마을 풍경과 이웃과의 소박한 일상을 담은 그림들은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창밖 후식밸리의 풍경은 하늘하늘한 커튼 사이로 봄이 찾아온 미국의 시골 마을, 후식밸리의 풍경을 담고 있다. 평면 지도처럼 펼쳐지는 마을 풍경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진다.

"인생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지요.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입니다."

그랜마 모지스

고통은 영원하지 않으니까요
Edvard Munch
애드바르 뭉크

태양
The Sun, 1911

지금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뭉크의 삶이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던 예술가가 드물기 때문이다. 뭉크는 몇 년에 한 번씩 가족을 잃는 비극을 평생에 걸쳐 겪었고, 불안에 대한 공포와 환청으로 고립된 삶을 살아갔다. 그 와중에도 그는 불안한 현대인들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작품을 여럿 남겼다. 뭉크는 누구보다도 자기 내면의 불안들과 마주할 용기를 지닌 화가였다

그의 대표작 절규는 오슬로의 에케베르그 언덕에 있는 다리 위를 걸으며 그가 느꼈던 바를 그린 것이다. 곧게 뻗은 다리에 서 있는 무심한 두 남자, 차가운 색에 둘러싸인 작은 배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뭉크 내면의 힘겨움을 보여준다.1911년 그의 나이 50세에 발표한 태양은 뭉크 생애 가장 밝고 힘찬 그림이다.

"두려움과 질병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에드바르 뭉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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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인물/명성왕후

명성황후(1851년~1895년)는 고종의 아내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면서 황후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정치사에 주도적인 인물로 부상한다.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면,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직접 통치를 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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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사건/청산리대첩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은 무장 독립 투쟁사에서 가장 큰 승리로 기록된다. 3.1운동 이후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기, 간도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원 등에힘입어 이루어낸 값진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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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는 안정과 의미가 모두 깃든 삶이 어떤 것인지, 그 깨달음에 조금 더 가까워져 있었다.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이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부모나 또래와 자신을 분리하는 법을 고민하고 자기만의 관점과 정체성을 밝혀내야 할 터였다. 의대 진학이 코너의 꿈이라면, 자기 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건강한 습관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코너의 핵심 과제는 모든 것을 통합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었다. 잠시 깜빡하더라도 곧바로 자기 인식과 자기 돌봄으로 돌아와야 했다. 부모나 파트너와 공들여 소통하고, 자신이 진정한 기쁨을 추구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했다. 그런 것이 두려워 보여도, 그로 인해 가족과 불화가 생기거나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해도 그래야만 했다.

코너는 날 잘 알았기에 그 짤막한 대답 안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파악했다. 그간 나는 코너의 고통과 혼란이 정상적인 것이며 그가 겪고 있는 심리적 증상이 병적인 것이 아니라고 알려주었고, 자신을 돌보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며, 삶의 전환과 변화는 생각만큼 말끔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생애 주기 동안 이런 식의 인격 형성이 이루어지기 마련이지만, 우리 사회는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옛 자아의 죽음은 고통스러울지라도 "잘못"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었다. 고통은 끔찍할지언정 "나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코너에게는 그저 "성공적"이고 "생산적"인 삶이 아닌 행복한 삶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다. 어쩌면 코너에게 가장 중요한 교훈은 몸이 불행하고, 산만하고, 불편하고, 지루해하면, 몸에 귀를 기울이고 "왜?"라고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일지도 몰랐다. 감정을 전부 꾹꾹 누른 채 할 일을 하려고 애쓰거나, 상황을 개선해줄 약물을 찾거나,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환경이나 관계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새로운 삶을 앞둔 쿼터라이퍼가 자신의 진실을 예리하게 포착해내서 깜짝 놀란 적이 정말 많았다. 이러한 지혜와 새로운 발상은 자연스러운 발달의 양상이지만, 통합 과정을 통해 새로운 돌파구가 생기기도 한다. 내담자가 정확하게 깨달음의 순간을 감지하고, 자기만의 새로운 통찰과 능력을 고유한 미감이나 새로운 기술, 고전 철학과 접목함으로써 미처 예상하지 못한 기쁨이 깃든 삶을 실현하는 것을 목격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놀라고 만다.

맨 처음 대기실에서 만난 코너와 지금 코너의 이미지를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면 둘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코너의 삶이 계속 변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의 작업,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을 통합해내는 작업은 결론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었다. 코너는 행복했고,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를 얻은 상태였다. 그것은 굉장한 성취였고 찬란한 새 출발이었다. 코너와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나는 그가 진심으로 자랑스러웠다.

두 개로 나뉘었던 자아가 다시 통합된 것이다. 미라는 이 결실을 절절하게 실감했으나, 때때로 내면의 경험은 설명하기 힘들었다. 자신이쪼개졌다고 느끼다가온전하다고 느끼는 것은 마치 두통이나 구역질이 없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끊임없이 신경을 갉아먹는 불편한 통증이 있던 자리에 조용한 평온이 자리 잡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불편함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 다른 자아와의 통합을 갈망해보지 않은 사람에는 설명하기 힘든 경험이다. "성공"이 외부적이지 않아 쉽게 관찰할 수 없을 때 특히 그렇다.

어떻게 보면 삶의 안정성도 상담 전보다 약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미라는 마음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안정성을 느꼈다. 이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고, 자신의 다양한 부분들을 연결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일부를 쫓아 보내고 외면할 필요가 없었다. 전보다 더 강했고, 자신의 목적을 더 명확히 인식했으며, 한 자아가 다른 자아를 공격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그런 내면의 안정성에서 깊은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자기 삶이 버겁지도 않았고,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이 닥칠까 봐 두렵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점점 더 명확하게 알아가고 있었다.

미라가 중요하게 생각하던 가치가 변화했다. 아니, 새로 드러났다. 미라는 자신이 바라는 삶이 지금껏 노력했던 삶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방면에서 미라가 원하는 삶은 어머니가 딸에게 빌어주던 삶과 달랐다. 하지만 미라는 자기 삶에 임박했던 붕괴, 아니면 위기 같은 것이 실제로 발생하기 전에 삶을 전면적으로 바꿔냈다. 미라 부부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급격한 변화를 견뎌냈다는 사실이 내게는 종종 인상적이고 조금 놀랍기도 했다. 남편은 미라에게 어머니의 죽음 후에 해결하지 못한 상실의 슬픔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고, 그 슬픔을 해결할 수 있도록 여유를 주고 싶었다. 남편도 같은 직업이라, 미라가 굉장히 유능할지언정 변호사 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니는 나와 맺은 탄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통해 쑥쑥 자라났다. 상담사와 내담자의 관계는 대부분의 심리 상담에서 핵심적인 요소다. 편안함과 애착, 동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니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자 상황은 훨씬 좋아졌다. 대니는 자신의 한계와 욕구를 잘 아는 사람과 안전하고, 헌신적이고, 판단 없는 관계를 즐기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적당히 자신의 영역을 지키며 서로를 사랑할 줄 알았다. 대니는 성적으로도 완전히 새로운 탐험을 시작했다. 과거의 대니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기 몸에 수치심을 느끼거나 존중하는 여성을 억제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자신의 정서와 성적인 힘을 탐구할 수 있는 안전한 경험이었다. 이 새로운 관계 속에서 대니는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욕망을 포용할 수 있었고, 자기만의 취약성과 두려움을 공유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처음 대니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완전히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실제로 물에 빠져서 공황 상태라고 해도 비약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대니가 묘사하는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다. 물에서도 안전함을 느끼는, 다시 육지로 돌아갈 수 있는 상태.

대니는 문예창작 과정을 시작하러 떠날 때까지 줄곧 상담을 계속했다. 그때쯤에는 거의4년 동안 상담을 진행한 후였다. 지속적인 조언으로 이루어지는 상담사와 내담자의 관계는 흔한 것이지만, "빠른 처방"을 좋아하는 사회와 보험사는 그런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학교 때문에 이사했을 때 대니는 더 이상 살아남는 것에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삶이 성가신 상처 같다고, 그냥 없애버리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우울과 불안이 일상을 휩쓸 때도 분명 있었다. 기후변화 같은 수많은 사회문제와 삶을 힘들어하는 친구들 때문에 걱정스러웠다. 체력 유지와 자기 돌봄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였다. 하지만 마음속에 굳건한 안정감이 있었다. 자기 삶에 안전함과 수수께끼를 위한 자리가 있다고 느꼈다. 앞으로도 힘든 일과 실망스러운 일은 계속 생길 것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세상이 제공하는 것들을 전부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행복해할 수 있었다.

그레이스는 이제 스물여섯 살이었다.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었지만, 이미 많은 변화를 이루었다. 돈 관리법에 집중하기 시작하고 몇 주 뒤에 동네에 있는 꽃집에 새로 일자리를 얻었다. 직업에 더욱 진지하게 임하고 싶다는 욕망을 탐구하면서 수입을 늘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꽃집의 일자리는 서빙보다 시급이 딱2달러 높을 뿐이었지만 그레이스에게는 굉장한 변화였고, 일도 관심사와 더 가까웠다. 동료들도 좋았고, 온종일 식물 옆에 있는 것도 좋았다. 그레이스의 생활은 훨씬 안정적이고 활력이 넘쳤으며 더욱 의미가 깊어졌다.

그레이스의 미래 계획이 온전히 드러나고 있었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다는 믿음, 홀로 오롯이 자립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관계와 연애를 통해 자신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한계를 조금씩 재설정하고 있었다. 한 사람에게 딱 붙어서 의존하지도 않았고, 마치 인간 혈액은행처럼 원한다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에너지와 집중력과 조언을 베풀면 친구들에게 모든 것을 내주지도 않았다. 그레이스는 자기 몸과 감정이 전하는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하기 시작했다. 거절하는 것이 두려워서 항상 타인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대신,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세심하게 알아채는 법을 배웠다. 거절하는 법을 배웠다. 통달하지는 못했으나 어쨌든 연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실제로 필요한 혼자만의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충분하면 세상에 압도당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힐 일도 없다는 것을, 그레이스는 점점 깨닫고 있었다. 최근 그레이스는 더 정돈된 듯한 모습이었고, 전처럼 숨을 몰아쉬거나 무너질 듯한 분위기를 내뿜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레이스가 쏟은 노력이 깊이 고민해서 구성하고 가꾼 정원처럼 활짝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지금까지 배운 것을 통합하면서 필요 없는 것을 배출했다. 과거의 트라우마는 조금씩 미래를 위한 비료로 거듭나고 있었다.

길을 잃었을 때는
완전히 다른 미래에 온 마음을 바쳐야 한다

이런 책이 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 한 가지는 독자들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영역을 확장해주는 것이다. 해피엔딩으로 끝맺을 수 없다면, 더 나은 방향을 가리켜야 한다. 길을 잃었거나 고통스러울 때는 과거와 완전히 다른 미래가 가능하다는 믿음에 온 마음을 바쳐야 한다. 그리고 고통을 벗어날 방법이, 더 나은 앞날로 향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믿으려면 변화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목표는, 내 바람은 이런 것이다. 그들이 과거로부터 분리하고, 자신의 진심을 경청하고, 삶을 구축하고, 안정과 의미를 통합하려고 치열하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어낸 성장과 도구를 도움 삼아 내면과 외부의 태풍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성장의 기둥, 집중해야 할 과제로 돌아오고 다시 돌아와 방향감각을 얻고 균형 감각을 튼튼하게 다지는 것이다.
그러나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 세상에는 희망적인 결말로 끝나는 이야기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이 묶인’ 쿼터라이퍼가 겪는 많은 문제의 핵심에는 온갖 형태와 크기의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어디를 가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쿼터라이퍼가 있다. 트라우마가 없다고 해도, 평생 좌뇌 학습만 강조하는 학교에서 경쟁으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데다가, 주기적인 수준을 넘어 온종일 전자 기기를 손에 쥐고 있으면, 사람은 자기 신체뿐만 아니라 내면세계와 상상력으로부터 단절될 수 있다. 쿼터라이퍼는 이토록 과도하게 선형적이고 논리적인2차원의 세계에서 자기 자신과 멀어진다.

내가 미래의 정신과 의료와 쿼터라이프 심리 상담에 품고 있는 가장 큰 희망 중 하나는 몸과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하는 돌봄이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더 많은 트라우마 전문 의료인이 필요하지만, 그 비용을 충당할 자원도 있어야 한다. 쿼터라이퍼가 일정 기간 비용 없이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삶을 위협하고 성장을 방해하는 증상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돌봄 센터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트라우마에 기반하는 심리 상담을 진행하고 있지만, 내담자에게 쉽게 추천해줄 치료 센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란 적이 정말 많다.

심리 상담가로서 겪는 심각한 어려움 중 하나는 사회적 부정의와 불평등의 결과를 상담실에서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게는 내담자를 위해, 혹은 상담실의 문턱도 밟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경제 같은 거대한 것을 바꿀 기회도 능력도 없다. 내가 상담가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그럴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쿼터라이프의 심리에 집중하는 것이 내 직업이지만, 머릿속에 언제나, 정말이지 언제나 자리하고 있는 생각이 있다. 이 시기에 관심 두지 않는 것은 사회정의에 반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공동체와 세계 곳곳의 수많은 쿼터라이퍼는 자신의 통제에서 멀리 벗어난 구조적 문제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변화를 추구한들 자유롭고 충만한 삶을 살 기회를 누리지 못한다.

나 역시 초기 성인기를 무시하는 문화적 경향에 영향받은 적이 있었다. 나 역시 내 호기심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한때 내가 오롯이 몰두했던 "더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라고 애원하는 수많은 내면의 악마와 싸워야 했다. 하지만 사그라지지 않는 직감이 있었다. 이 낯설고 과소평가된 심리학의 영역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나를 붙잡은 채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고, 내가 온몸으로 이 호기심을 받아들이기까지 약해지지도 나를 놔주지도 않았다.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쿼터라이프 발달에 관해 이야기할 때 실제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성숙한 시민, 공동체의 일원, 배우자이자 부모의 발달이라는 사실이었다. 양을 치듯 인간의 발달에 관해 논하면서, 사회가 건강한 성인을 길러낼 책임이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안일하게 구는 것이다.

화두가 경제적 기회든(독립적인 삶을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다) 신체적 자유와 안전이든, 오늘날 쿼터라이프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문제는 많은 사람의 성장을 방해할뿐더러 다른 집단에게도 삶의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나는 힘들어하는 쿼터라이퍼에게 진정한 안내와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사회를 꿈꾼다. 모퉁이마다 총이 있는 사회, 위기가 터질 때마다 감옥 문을 열고 슬퍼할 때마다 약물을 제공하는 사회는 싫다. 청소년기에서 중년기를 연결하는 금박 미끄럼틀 같은 것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벌써 내 제안에 쏟아질 환멸 섞인 비판이 눈에 선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몸이 있다는 뜻이다. 몸이 있다는 것은 분투하고 성장하고 분투하고 성장하기를 반복한다는 뜻이다. 이런 본질적인 반복은 인간의 생득권이다. 우리의 소명은 변화하며 살아가는 법,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서 창조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역사 속의 수많은 신학자, 철학자, 심리학자가 표현한 것처럼, 나는 인생의 복잡함이나 고통조차도 그 자체로 발달과 성숙에, 삶의 깊은 의미를 얻는 데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제임스 볼드윈은 이렇게 썼다. "고통을 겪지 못하는 자는 절대 성장하지도, 절대 자신이 누군지 알아내지도 못한다." 하지만 볼드윈이 일생을 바쳐 주장한 것처럼, 주류 사회는 모든 시민을 돌보기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일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정말이지 쿼터라이프는이토록 어려울 필요가 없다.

쿼터라이프의 여정은 모든 시대에 존재했으나 단 한 번도 쉬운 적이 없었다. 어쩌면 불행히도, 쿼터라이프의 생존과 성장을 보장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은 간단하고 명확하지 않다. 그저 각자 자기만의 여정을 떠날 뿐이다. 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고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야 할 개인적인 의무가 있고, 그러면서 개인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사회는 이 여정을 무수한 방식으로 지원할 수도 있고, 방해하거나 공격할 수도 있다. 우리는 더 잘할 수 있다. 수없이 많은 쿼터라이퍼의 여정이 지금보다 더 수월해질 수 있다. 더 많은 사랑과 공감, 안전, 실질적인 지원으로 채워질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쿼터라이프라는 심오하고 심리적인 여정을 걷는 데 필요한 기반을 얻을 수 있기를, 그렇게 자기만의 고유한 삶과 자기만의 진실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체계와 목적의식이, 안정과 의미가 결합된 삶의 경험을 찾아낼 수 있기를, 나는 그저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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