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향을 떠나던 날 외조부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고 말았다.
"얘야! 언제든 돌아오너라!"
흩어졌던 기억들이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했다. 버드나무 아래 서 계시던 외조부의 그림자가 눈앞에 일렁였다.

외조부는 명문가의 자손이라는 자부심과 유교적 관습이 뼛속 깊이 새겨진 옹골진 선비였다. 굶어죽어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할 분인데 어찌어찌 외손녀인 나를 떠맡게 되었다. 당연히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유년기의 내가 외조부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고,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있었다.
"이 변변치 못한 것."
외조부는 내가 반찬 투정을 하거나 신을 뒤집어 벗어놓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호랑이 눈을 뜨고 야단을 치셨다.

그러나 외조부가 나를 미워하신 것만은 아니었다. 샛강에 빠져 죽다 살아난 날도, 열병에 걸려 먹은 것을 게워내고 앓아누운 날도 외조부는 밤늦게까지 잠 못 이루고 방문 앞을 오가셨다. 병을 털어내고 밥상에 앉으면 외조부는 또 혀 차는 소리로 퉁바리를 놓으셨다. "이 변변치 못한 것."
그러면서도 굴비 살을 발라 밥 위에 얹어주셨고,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학교 행사에 모두 참석해주셨다. 다른 사촌들과 날짜가 겹쳐도 예외 없이 내게 와주셨다.

열여섯 살의 화창한 여름날. 나는 쪼그라든 외조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용서를 빌었다. 외조부 말씀대로 변변치 못하게도 눈이 멀어가고 있다고, 정말 방아깨비만도 못한 손녀가 되어버렸다고 아뢰었다. 노쇠한 심신 때문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생때같은 혈육의 캄캄한 현실 때문이었을까. 외조부는 슬픔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목놓아 우셨다. 이윽고 고향을 떠나 도시의 장애인학교로 떠나는 날이었다. 외조부는 버스 타는 걸 보겠다며 굳이 신작로까지 따라 나오셨다. 버스가 내 앞에 멈춰 서자 외조부는 내 팔을 잡으며 말씀하셨다.
"얘야! 언제든 돌아오너라!"
나는 차마 외조부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외조부는 내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다 핑계였다. 마른 쭉정이처럼 쇠약해진 조부를 나는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다. 나의 외조부는 호랑이 눈을 치켜뜨고 벼락같이 호통을 치며 본향 집을 지키셔야 했다. 그래야만 내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청명, 말 그대로 맑고 푸른 봄날에 나는 귀향길에 올랐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 입구로 향했다. 길은 넓어지고 싸리문 담장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공기의 질감이, 발끝의 감각이 고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공터가 되어버린 본향 집터 앞을 오래도록 서성였다.
외조부가 없는 고향은 낯선 언어로 듣는 익숙한 노래처럼 어색하고 괴기스러웠다. 외조부가 지키지 않는 고향은 더는 본향이라 할 수 없었다. 순간 깨달았다. 인간의 귀소본능이란 태어난 장소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람에게 돌아가고 싶어하는 그리움이라는 것을.
외조부 앞에 포와 술을 올리고 무릎을 꿇었다. 빈손으로 돌아온 방아깨비만도 못한 외손녀는 용서를 비는 대신 열 살 계집아이로 돌아가 낮잠이 드신 외조부께 다라니경을 암송해드린다. 외조부는 찔레꽃 향기가 되어 내 손등을 도닥여주신다.

"너 그거 생각나네? 학교 다닐 때 네가 안마원에서 아르바이트 갔다가 초콜릿을 받아왔는데 우리 딸 갖다주라고 나한테 줬잖아. 난 그걸 날름 받아다 내 새끼 가져다줬는데 집에 와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너무 철딱서니가 없던 거 있지. 너도 열아홉 어린애였는데 내 새끼 준다고 그걸 받아왔으니! 한편으로는 창피하고 또 한편으로는 네가 그리 안됐더라! 난 네가 애 어른인 게 싫다."
나도 언니도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나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서로의 마음이 들려왔다. 우리는 연민으로 연결된 모녀지간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만두를 빚는 언니의 등에다 물었다.
"언니는 후회 같은 거 없어?"
"있었지! 근데 지금은 없어. 일이 벌어졌는데 후회는 해서 뭐 하겠네. 모두 내가 선택한 건데. 난 고맙게 생각하기로 했다.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도, 눈 먼 마누라 안 버리고 살아주는 남편도, 돌아가신 시어머니도 다 고맙다."
문득 언니가 많이 늙었구나 싶었다. 형부의 벌이가 시원치 않아, 언니는 마사지 교육을 받고 취업해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친정어머니와 아픈 오빠까지 봉양하고 언니 손으로 상을 치렀다. 내년이면 언니도 환갑이다.
"내 눈에 박사, 너는 늘 열여덟으로 보인다. 어린데도 돈 벌어 집에 빚 갚아줘야 한다고 동동거리던, 우리 학교 아이들이 근처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맞고 오면 빗자루 들고 황소처럼 뛰어나가던 어른 같던 아이. 난 네가 나한테는 어리광도 피우고 떼도 썼으면 좋겠다."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눈물 스위치가 툭 하고 켜질 것만 같아 객쩍은 농담도 할 수가 없었다. 바오쯔가 다 쪄졌는지 언니가 뚜껑을 열어 김을 날렸다. 찜솥에서 바오쯔를 꺼낸 언니가 입으로 호호 불어 식힌 뒤 내게 가져왔다. 나는 뜨거운 바오쯔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뜨겁다, 식혀서 천천히 먹어라!"
결국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르 흘렀다.
"뱉어라, 뱉어! 울 정도로 그렇게 뜨겁네?"
언니가 내 입 앞에 손을 가져다댔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 다시 한번 크게 베어 물었다. 소에서 나온 육즙이 입가로 흘렀다. 나는 손으로 입가를 훔쳐가며 맛있게 바오쯔를 먹었다.
"울 정도의 맛이네?"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환히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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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형편이니 그가 오면 직원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썼다. 마사지할 때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었다. 필요한 대화 이외에 말을 건네서는 안 되었다. 왼쪽 어깨 능형근을 30분 이상 풀어야 하며, 마지막 10분 동안은 두피 지압을 원했다. 마사지가 끝날 때쯤이면 그는 깊게 잠이 들었다. 그러면 마사지사들은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나와 시술실 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아주었다.

그가 노쇼 손님이 자주 있냐고 물었다. 나는 캄캄한 두 눈을 껌뻑대며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사지사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러하다고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마사지에 집중하려 했는데 그가 또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예약금을 미리 받아놓아야 한다며 신용 없는 사람들은 ‘금융 치료’가 정답이라 조언했다.
나는 남자가 대신 화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하겠다 대답하고, 몸이 아직 긴장 상태니 호흡을 길게 내뱉으며 이완시켜보라고 주문했다. 그가 내 말에 따라 몸을 늘어뜨렸다. 나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경직된 근육에 지압을 하고 굳은 관절을 스트레칭했다. 잠든 줄 알았던 그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취한 사람의 넋두리처럼 나약한 마음을 꺼내 보였다.

남자를 시술실로 안내했다. 그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에 접수 직원이 내게 다가와 오늘따라 남자의 인상이 더 험악해 보인다고 속삭였다. 밤이라도 새고 왔는지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어 사람 잡아먹게 생겼다고 겁을 주었다. 나도 모르게 목덜미를 문지르며 시술실로 들어섰다.

예약 스케줄에 그 남자의 이름이 있다 하면 그날은 직원 모두가 긴장 상태로 비상근무에 들어간다. 그는 사자 갈기처럼 어깨까지 자란 풍성한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숍에 들어선다. 희끗희끗한 수염은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으며 항상 인상을 찌푸려 고약한 성격임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깡마른 몸이지만 목청은 어찌나 쩌렁한지 소리라도 지를 때면 창문이 깨져나갈 것 같이 우렁찼다.

어제 그는 비행기로 15시간 떨어진 다른 나라에 있었다. 갑자기 잡힌 출장으로 밤을 새워도 업무는 줄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귀국하면 바로 마사지를 받으며 몇 시간은 죽은 듯 자겠다’는 의지로 스케줄을 견뎠다고 했다.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보다 마사지 숍을 더 그리워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이 순간은 고된 삶을 보상받는 시간이라 했다. 사자처럼 사납고 강한 사내라 생각했었는데 그에게도 나약해질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약간은 그와 친밀해진 기분이었다. 서서히 수마가 그를 끌어당겼다. 졸린 목소리로 그가 힘겹게 말했다.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에게 듣는 감사 인사가 퍽 감동적이었다.
그의 고른 숨소리가 시술실 안에 퍼져나갔다. 나는 담요를 살짝 덮어주고 남아 있는 시간 동안 두피를 지압했다. 그가 깊게 잠이 들었다.

나는 직업 교육을 받고 바로 취업했다. 시각장애인인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군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마사지사라는 직업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의무였다. 서비스 업종의 특성상 마음이 다치는 일도 있었다. 나는 내 직업이 내세우기 좋은 번듯한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창피했다. 그러다 고객들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찡그린 얼굴로 들어왔다가 웃는 얼굴로 돌아가는 이들을 보며 내 직업에 조금씩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사람의 몸을 만지는 일이 더이상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되지 않았다. 마음을 고쳐먹고 고객들을 대하자 일이 즐거워졌다. 나는 누군가에게 고된 삶을 견뎌내게 할 의지다. 살아갈 힘을 주는 사람이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마사지를 마치고 소리 없이 시술실을 나와 문을 닫아주었다. 앞으로 몇 시간, 사자는 정신없이 잘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힘을 내 하루를 살아가겠지.
나도 다시 힘을 냈다. 그러고는 다음 시술실의 문을 열었다.

‘극복’이라는 말처럼 오만한 단어가 있을까? 장애를 극복하고, 가난을 극복하고, 불합리한 사회를 극복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영원히 내 장애를 극복하지 못할 거라고. 나는 단지 자주 내 장애를 잊고 산다. 잊어야지만 살 수가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빨리 체념한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다.

온 나라에 여행 붐이 일었다. 한두 번 비행기를 타고 낯선 나라들을 경험하자 나도 여행의 즐거움에 빠졌다. 내게는 시간도 돈도 있었다. 문제는 홀로 나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장애는 이런 것이다.

진정한 배려란 뭘까.
나로서는 항공기 승무원의 응대가 무척 인상 깊었다. 내게 따듯한 타월을 건네거나 혹은 필요한 게 있는지를 물을 때 그녀는 항상 내 손등에 자기 손을 살며시 올려놓고 말을 했다. 특별히 상냥한 목소리를 하거나 말을 길게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손의 언어를 통해 나는 그녀의 진심을 건네받은 느낌이었다.
가이드 손에게서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 우리에게 말할 때 그는 당사자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진정한 여행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 한 여행의 기록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나만의 길에서 나만의 추억을 만들어가는 과정. 그것이 여행 아닐까?
가이드 손의 마지막 인사가 생각난다.
"여러분이 무사히 타이완을 떠날 때까지 난 이곳에 있을 거예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내게 전화 줘요."
공항 직원에게 우리를 인계하며 그가 말했다. 천천히 걸어 출국장에 들어갔다. 가이드 손의 시선이 오래도록 등에 와닿았다. 감정이 울컥 복받쳤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수화물을 찾고 택시를 탔다. 가이드 손에게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응답 메시지를 보냈다.
내 장애인 동료는 앞도 못 보는데 바다든 산이든 집이든 장소가 무슨 소용이 있냐며 여행의 무의미함을 이야기했다. 나는 아는 만큼 넓어지고 느껴본 만큼 인생이 풍요로워진다고, 꼭 제대로 된 자신만의 여행을 경험해보라고 그에게 권했다.
타이베이로의 출발, 그것은 왜 우리끼리는 안 되냐는 반항심에서 시작된 여행이었다. 글에 남기지는 않았지만 더 많은 거절과 더 많은 모욕과 조롱이 우리를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나는 다음 여행을 준비한다. 행복은 바라는 대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노력과 의지로 맺는 열매 같은 것이라는 걸 나는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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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술이 취한다. 걸어 나오는데 그이가 지었다는 늙은 관광호텔이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서 있다. 미지근한 시간이 또 이 지방 도시를 채우고 있다.

날씨는 지랄 맞게 추웠다. 난로에서 먼 자리는 4교시가 되도록 손이 곱아서 연필 글씨를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아침에 이미 몸이 얼어서 등교했다. 등굣길에는 하필 바람이 매서운 하천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왜 볼을 감싸는 모자 하나 장갑 하나 변변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 칼바람이 소맷부리를 파고들었고, 볼은 얼얼해서 감각이 없었다. 그때 언 살이 자주 터져서 약국에서 ‘글리세린’을 사다가 발랐다.
학교는 멀고도 멀어서 거의 한 시간을 걸었다. 서울에서 그렇게 먼 등굣길이 있을 수 있냐고 누가 그럴까 봐 스마트폰으로 현재 거리를 재보니 4킬로미터가 넘는다. 아이 걸음에 한 시간을 꼬박 걸을 수밖에. 내가 지금도 참 잘 걷는데 그때 단련된 걸음이 아닌가 싶다. 하기야 나중에 들으니 시골에서 20리 산길을 걸어 통학하던 친구들도 있었다. 살려고, 배우려고 다 기를 쓰던 시대였다. 아버지가 150원, 300원 하던 육성회비만 내주면 얼마든지 다닐 수 있었다.

하루쯤은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그러다가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면 기억이 가물가물해진다. 의식도 몽롱해진다. 이틀인가 굶고는 어머니가 부엌을 샅샅이 뒤져서 마른 강낭콩을 찾았다. 소금 넣고 삶았는데, 주린 창자가 다 설사로 내보내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강낭콩을 싫어한다. 부잣집에서 먹던, 기름기 도는 하얀 쌀밥에 넣은 까만 콩만 좋아한다.

인생은 낯선 여행지의 식당 메뉴 같은 거라고 했다. 메뉴판에 적힌 것과 달리 뭐가 나올지 모른다고. 우리는 보통 ‘꼬였다’고 했다. 인생 꼬였네. 군대 생활 꼬였네. 회사 생활 꼬였네. 꼬인 줄을 풀다 보면 어느새 삶은 풀 수 없는 실타래 같은 거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감자탕을 한 그릇 시켜놓고 소주를 마셨다. 그 꼬인 인생들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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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둠을 훑어보았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하늘을 수놓는 수백 송이의 불꽃이 궁금했다. 그러나 지금 저 불꽃을 볼 수 없다 해서 아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불꽃은 더 찬란하고 빛나기 때문이었다.
창을 닫고 반듯이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불꽃을 보았다. 땅에서 시작된 빛무리가 하늘에 올라 산산이 흩어지며 하얗고 노란 빛이 되어 쏟아졌다. 빛은 금방 사그라졌지만 내 가슴에 반짝이는 수를 놓았다.

나는 오랜만에 너를 생각했다.
너와 나는 궤도에서 벗어난 이탈자였다. 열여섯 너에게서는 고된 하루의 냄새가 났다. 너는 일찍이 아버지의 역할을 떠맡아야 했다. 하루종일 양파를 까고,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다녀야 했다. 당연히 학교에 다닐 시간이 없었다. 너는 평범에서 벗어난 이탈자였다. 나도 그랬다.

차는 가다 서기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멈춰 섰다. 차창 밖으로는 쓔우욱 쾅쾅쾅! 요란한 폭죽소리가 끝도 없이 울려퍼졌다. 나는 기억 속의 또다른 불꽃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때 드르륵, 안방 문이 열리더니 잠옷 차림의 엄마가 내게로 왔다. 엄마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내 앞에 쪼그려앉더니 노련한 형사처럼 추궁하기 시작했다. 나는 남은 불꽃을 엄마 앞에 대령하면서 이렇게 요란한 소리를 낼 줄 몰랐다고, 납작 엎드렸다. 엄마는 건네받은 불꽃을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불꽃으로 내 머리통을 한번 툭 친 후 불꽃 세 가닥을 한꺼번에 모아쥐고는 불을 붙였다. 그때 본 일렁이는 불빛 너머의 엄마 얼굴은 아마 방금 전 내 표정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엄마와 나는 타오르는 불꽃을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벼락이 하늘을 세 번 두들겼다. 또다시 개들이 일제히 짖어댔다. 세상 모든 개가 다 죽기 살기로 짖는 것 같았다. 차들의 비상경보가 앵앵 울어댔다. 마을 사람들이 러닝 차림으로 뛰쳐나왔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펌프질했다. 엄마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댔다. 나도 입을 틀어막고 낄낄거렸다. 엄마는 제 몫을 다하고 꺼진 심지들을 내게 건네면서 불량배처럼 말했다.
"진~짜! 재밌다. 불꽃 더 없냐?"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옆집 할머니가 담 너머로 우리 마당을 건너다보았다. 엄마는 태연히 할머니를 상대했다.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르는 남동생이 졸린 눈을 비비며 나왔다가 우리를 보고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사고뭉치 모녀 때문에 남부끄러워 못 살겠어."

나는 일이 끝난 뒤 김 선배에게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나만의 별과 불꽃을 꺼내볼 수 있었노라고. 내 안에 살아 있는 별과 불꽃들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고 여전히 아름답고 생생하게 잘 있더라고, 말해야겠다.

열다섯 살의 내가 가장 두려웠던 사실은 앞으로 세상을 못 볼 거라는 선고보다 당장 이 사실을 어떻게 엄마에게 말해야 할지였다. 며칠을 끙끙 앓다가 엄마에게 몽땅 털어놓았을 때 엄마는 질 나쁜 농담을 들은 것처럼 믿지 않으려 했다. 엄마를 대동해 다른 병원에 가서 처음부터 검사를 다시 했다. 결과는 같았다. 엄마는 나보다 더 절망에 빠졌다. 내 담담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뭐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이 철딱서니야! 너 이제 장님 된다잖아!"
엄마가 굳이 확인해주지 않아도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미래였다. 나는 애써 담담한 척 연기를 했을 뿐이었다.
‘내가 괴로워하면 엄마가 더 슬퍼할까봐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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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이처럼 친밀한 살인자 - 강압적 통제는 어떻게 관계를 지배하는가
허민숙 지음 / 김영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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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의 법은 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가?!
2025년 미래를 이끌어갈 여성지도자상을 수상하신 허민숙 입법조사관님의 첫 단독 저서인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허민숙 입법조사관님은 그알의 엔딩요정이시고 난 그알이니까.
책 제목이 글쎄 “이처럼 친밀한 살인자”랜다!
친밀한 살인자라…소름이 돋는다. 내가 이렇게 소름이 돋는데 실제 피해자들의 고통은 감히 이루 말할 수도 없겠지!
그녀는 이 책을 경찰의 필독서라 했고, 자녀를 둔 부모님들도 읽으시길 권했으며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원했다.


난 소위 말하는 ‘그알이’다. 어디 그 뿐인가.
그것이 알고싶다, 용감한 형사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궁금한 이야기Y, 히든 아이 등등.. 매주 본방을 사수하지는 못하지만 유투브를 통해 찾아 보는 편이다.
사실 이런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두 귀에 들리는 말이 의심스러우리만큼 무섭고 화가 난다.
게다가 몇 십년 전부터 등골이 오싹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고 심지어 현재도 진행형이라니! 그것도 엄청 많이.
그 어떤 이유로도 사람 목숨을 함부로 해서는 안될 일이지!
사람이 사람을 해치면 가석방없는 무기징역으로 평생 감옥에서 못 나오게 해야해!!


-182p
국가가 완벽히 실패했다. 위험 신호를 알아차리지도 못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현장에서 가장 민첩해야 할 경찰은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책임을 미루고 있고, 법원은 가해자 우호적인 결정에 특화되어 있고, 국회는 실상을 잘 파악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다.

-183p
어떠한 글과 말, 그리고 어떠한 입법이나 판결을 통해서도 피해자를 다시 살릴 수는 없다. 간절한 소망과 깊은 애통함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과거를 외면하거나 지워버리려 하지 않고, 수많은 상처의 흔적을 세밀히 복기하려는 이유는, 유사한 죽음을 막아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친밀한살인자 #허민숙 #입법조사관 #그것이알고싶다 #그알 #짧은그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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