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농담처럼 몸을 다 풀어놨더니 다시 굳게 생겼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뜬금없이 아홉수 타령을 해댔다. 자신이 아홉수를 호되게 치르고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쓸데없는 관념들을 그저 핑계라고 생각했다. 아홉수도 그중 하나였다. 나도 모르게 서른이 되면 뭐가 잘 풀릴 것 같냐고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 운명이 빙산 같다고 생각했다. 바다를 홀로 떠돌다 결국 녹아 없어져버리는 빙산처럼 나의 삶도 시간을 부유하다 무의미하게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 자괴감이 밀물처럼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밤새도록 뒤척이다가 잠들기를 포기하고 오래된 영화를 보았다.

나는 그동안 실패가 두려워 장애를 핑계삼아 하고 싶은 일들을 포기해왔다. 잃어버린 것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다르게 살려 노력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일로 만들기 위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 용기를 낸다. 탱고 수업은 내게 첫 도전의 시작이었고 내 가슴에 열정을 심어주었다.

그녀는 자타공인 성공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명문대학을 졸업해 금융회사에 연구원으로 임원까지 역임했다. 마흔이 넘어 기다리던 아이도 임신했다.
"나는 천사를 얻었고 세상은 지옥이 되었어요."
아이는 선천적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장애는 아이가 안고 있던 불치병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열여섯 살. 아이는 몸만 자랐을 뿐 신생아나 다름없었다.
"우리 아이는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하는 병이에요. 그 사실을 아는 장애 학부모들은 내게 좋겠다고 말해요. 적어도 내게는 끝이 있으니까요."
나는 장애 자녀를 남겨두고 가야 하는 부모와 장애아를 먼저 보내고 남겨진 부모 중 누구의 마음이 더 아프고 슬플지를 떠올렸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그 슬픔의 농도를 생각하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30년이 지났다. 내 첫번째 친구는 나를 기억이나 할까?
서러움에 터뜨린 눈물처럼 굵은 장맛비가 내리는 날이다.

나는 출생신고를 두 달 늦게 했다. 엄마에게 이유를 물었는데 처음에는 내가 몸이 약해 그랬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나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은 달랐다. 출산 당시 생활고에 시달렸던 엄마는 나를 보육원에 맡기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엄마는 하루만 더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싶었다. 다음날 또 하루만 더.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보육원에 보낼 생각이 점차 사그라졌다. 그렇게 60일이 지났다. 나는 엄마의 눈물을 먹고 자랐다.

내 어머니도 가슴이 내려앉을 것처럼 사랑에 빠져버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를 지켜냈다. 그리고 장애를 판정받은 날, 엄마는 너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고 가슴을 쥐어짜며 통곡했다.
하지만 그해 가을의 내 생일날, 나는 엄마에게 낳아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엄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나를 낳고 나서 60일간의 이야기를 했다. 바구니 속에 핏덩이를 넣고 보육원 앞에 내려놨다가 두 걸음을 떼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바구니를 들어올렸다 내려놓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었노라고.
"너를 지켜내서 다행이야!"
엄마가 내 등을 쓸며 말했다.
그녀도 자신의 아기를 바라볼 때마다 생각할 것이다.
"너를 낳아서 참 다행이야."

나는 축하받은 졸업식의 경험이 없다. 초등학교 졸업식은 병원에 장기 입원하고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졸업 앨범은 소포로 받았다. 열어보지도 않았다. 그까짓 졸업식이야 앞으로도 몇 번이나 있을 테니 아쉬울 것 없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졸업식은 차마 참석하지 못했다. 중학교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둔 도서관의 야외 벤치에 앉아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졸업식 진행과정을 가만히 들었다. 유난히 추운 2월이었다. 두 뺨이 따끔거리게 시렸다. 손끝이 꽁꽁 얼었는데 나는 끝까지 혼자만의 졸업식을 견뎌냈다.
친구들은 원하는 고등학교로 진학할 것이었다. 흥분과 기대, 아쉬움이 교차하는 현장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새 학기에 나는 장애인학교로 입학하기로 결정되었다. 어제까지 같은 방향을 보고 달렸던 친구들 틈에서 나만 빠져나와 이제까지 상상해본 적 없는 길을 홀로 걸어가야 했다. 소외감과 외로움이 옷깃 안을 파고들어왔다. 뼛속까지 시리게 추웠다.

나는 엄마가 들고 있던 부적을 가로채 박박 찢었다. 엄마가 화들짝 놀라 바닥에 뿌려진 종이쪼가리를 두 손으로 쓸어모았다. 그러고 나를 무섭게 노려봤다. 눈빛이 반 미친 사람 같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 정신 나간 년!"
엄마의 주먹이 내 머리통을 쥐어박아댔다. 나는 날아오는 엄마의 팔을 턱 잡았다.
"이거 못 놔! 이 기집애야!"
엄마가 악다구니를 쓰며 몸부림쳤다.
"정신 나간 건 엄마겠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면서, 나한테 어떻게 이래!"
"야! 병신 학교 졸업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 그게 자랑거리냐고?"
내게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엄마가 갑자기 자리에 풀썩 쓰러지듯 앉아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나는 따지고 싶었다. 그럼 내가 뭘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그래, 병신 학교잖아! 그러니 엄마가 더 왔어야지! 나한텐 첫 졸업식이었어. 가족 아무도 오지 않은 건 나뿐이었다고. 오늘 난 고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럼 기대도 없었을 거 아니야!"
엄마를 향해 악을 썼다. 엄마는 컥컥 소리 내어 울었다. 할 말이 없으면 엄마는 더 크게 소리를 내며 울었다.
"창피했어!"
엄마의 고백을 듣고 나는 피가 반쯤 빠져나가버린 것처럼 허탈해졌다.
‘나는 부모에게 창피한 존재구나!’
"내 자식이 장애인이 된 것도, 그곳에 내가 가는 것도 다 부끄럽고 외면하고 싶었어!"
엄마의 고백이 내 마음을 갈래갈래 찢어놨다.
나는 부모에게 부끄러운 자식이 되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솔직히 그때부터 마음속 깊은 곳에 엄마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엄마를 사랑했고 연민했지만 증오하기도 했다. 엄마의 애정을 갈구했고 그걸 드러내고 싶은 날도 있었지만, 그러면 내 자신만 비참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위태롭게 관계가 유지되던 사이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꽃을 선물했다. 흰 국화가 영정 앞에 가득 쌓였다. 국화는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했던 내 죄책감이었다.

나의 새로운 장래희망은 한 떨기의 꽃이다. 비극을 양분으로 가장 단단한 뿌리를 뻗고, 비바람에도 결코 휘어지지 않는 단단한 줄기를 하늘로 향해야지. 그리고 세상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품은 꽃송이가 되어 기뻐하는 이의 품에, 슬퍼하는 이의 가슴에 안겨 함께 흔들려야지.
그 혹은 그녀가 내 향기를 맡고 잠시라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내 비극의 끝은 사건의 지평선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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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코로나바이러스가 한창일 때의 일이다.
온 세계를 잠식한 바이러스는 일주일 간 도시를 멈춰 세웠다. 식료품 판매점을 제외한 모든 다중 이용시설이 문을 닫았다. 외출 자제 명령이 내려졌고,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에는 층간소음 주의 방송이 수시로 흘러나왔다. 밖은 고요한데, 실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초인종이 울렸다. 수미씨가 방문하는 날이었다. 수미씨와 내가 활동지원사로 인연을 맺은 지 어느덧 4년째 되던 시기였다. 그녀는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사람이다. 그녀와 나의 관계는 빛과 그림자 같다.

나는 정오의 태양이 싫었다. 태양이 가장 높을 때 내 그림자는 가장 초라하게 쪼그라들기 때문이었다. 나는 수미씨가 좋다. 그러나 자주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녀 옆에 서 있다가는 내 삐뚤어진 마음이 더 도드라지게 튀어나와버리고, 나는 그런 내 자신을 혐오하고 만다.

수미씨를 돌려보내고 샤워를 길게 했다. 에어컨을 켜고 인공지능 스피커로 파도소리를 재생시켰다. 창 앞에 의자를 가져다두고 진한 커피를 마셨다. 습관처럼 창밖을 내다본다. 내게는 밤과 낮의 경계가 없다. 단지 시간으로 밤과 낮을 구분할 뿐이다. 나를 좋은 사람이라 했던 어떤 선배는 밤에는 밤의 냄새, 낮에는 낮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나는 비웃었다. 냄새는 시간에 따라 바뀌는 게 아니라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다리를 끌어안고 몸을 동글게 말았다.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나는 마모된 몽돌이다. 까맣고 동그란 몽돌. 바다는 나를 끌어당겼다가 멀찍이 밀어놓기를 반복한다. 누구에게나 불행을 견디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불행을 참아내고 있다.

어느 날 수미씨가 내게 언제 가장 행복한지를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불행을 잊고 있을 때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수미씨는 장애가 불행의 원인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눈이 먼 게 불행한 게 아니라 이 상태로 영원히 살아가야 한다는 게 진짜 불행이라고 말했다.
곧 바이러스는 진정될 것이다. 세상은 예전의 일상으로 차츰 복귀해나갈 거다. 내 기준으로 팬데믹은 진짜 불행이 아니다. 그것에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앞뒤로 흔들던 몸을 좌우로 흔든다. 몽돌은 수심 깊이 가라앉는다.
나는 갑자기 행복해졌다. 정지된 도시 속 건물의 소음이 내 불행을 달래주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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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차오르기도 전에 누군가 내게 말했다. 원무과로 가서 병원비를 수납하라고, 그래야 다음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고.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돈이 없다면 부모 송장조차 찾지 못한다는 현실에 온몸이 싸늘히 굳어졌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숱한 선택이 기다렸다. 화장장에 예약을 잡아야 하고, 친척들에게 연락해야 하고, 수의며 관을 정하고, 꽃을 주문하고, 음식을 맞춰야 했다. 슬퍼해야 할 사흘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장지에서 돌아와보니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본향 집을 정리하는 데 한 달이 걸렸다. 그사이 잔존 시력이 모두 사라졌다. 익숙한 길도 지팡이 없이는 혼자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정신없이 일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죽은 엄마 앞에서 나는 결심했다. 나와 내 가족이 더이상 돈 때문에 절망에 빠지지 않게 하겠다고.

지독하다는 소리가 내 등뒤에 이름표처럼 붙었다. 성실한 노동과 절제는 늘어나는 숫자로 정직히 보답해주었다. 1년짜리 적금을 타는 날에도, 3년을 부은 적금 만기 날에도 내가 나에게 주는 보상은 붕어빵 천 원어치였다.
힘에 부쳐 쓰러진 날도 있었다. 언제부턴가 왼쪽 얼굴의 감각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던 통증은 점차 마비 증상처럼 나타났다. 동네 병원에 들러 검사를 했는데 이상을 찾지 못했다. 증상이 있는데 원인이 없을 리 없었다. 대형 병원에 진료 예약을 하고 한의원에 들렀다. 할아버지 한의사는 뇌졸중 초기 증상일 수 있으니 요양하며 약을 먹어보라고 권했다. 그렇게 일을 쉬자 금세 증상이 없어졌다. 갑자기 시간이 많아지자 별별 생각이 다 났다.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처지가 비관스러워지자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엄마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깬 후에도 나는 한동안 꺽꺽 소리를 내며 흐느껴 울었다. 얼마를 울었을까. 그렇게 원 없이 울고 난 뒤 나는 가슴에 늘 묵직하게 얹혀 있던 무언가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렇게 엄마와 완벽하게 이별했다.
아마 그 꿈은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가벼워졌고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다.

가을밤이면 나는 그날 밤을 떠올린다. 창으로 쏟아져드는 가을바람의 냄새를, 엄마와의 늦은 밤 드라이브를. 그것은 오래된 영화처럼 멈춰선 시간의 그리움이다.

품에 안고 있던 작고 보드라운 기억은 며칠간 나를 행복하게 했다. 처음으로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이 들자 또다시 10년 전 경로당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애타게 자식의 이름을 부르던 어미의 울부짖음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세월이 이토록 흘렀는데도 자식 잃은 부모의 절규는 고통스러울 만큼 절절했다.
비로소 나는 인정했다. 내가 부모가 되기를 거부했던 것은 내 장애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아마 부모의 자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리라.

동네를 벗어나자 들은 온통 초록빛이다. 머리 위 태양이 빛의 채찍으로 세상을 때려눕힌다. 잠깐 사이 등으로 땀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눈앞의 세상이 별스럽지 않지만 아름답다. 멀리 햇빛을 반사해 반짝이는 비닐하우스가 망막에 자극을 주는지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곧 잃어버릴 세상이어서 모든 게 소중하고 아름다웠다.
자전거를 멈추고 길가에 핀 망촛대와 달맞이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시력이 매일 조금씩 사라져간다. 당장은 느껴지지 않지만 1년 전에 비해 시야가 좁아들었다는 것은 느껴진다. 슬픈 생각을 그만 털어버리고 다시 자전거에 올라 힘껏 페달을 밟았다.

마음이 괴로웠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눈물이 났다.
나는 늙은 부모를 부양할 수 있을까?
부모가 평생 자식을 책임져야 한다면 얼마나 숨이 막힐까?
나는 엄마한테 미안해서 울었다.
할머니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평생을 자식에게 저당 잡혀 살다가 이제야 자유로운 몸이 되었건만, 자녀들은 효도라는 명목으로 겨우 찾은 자유를 빼앗으려 한다. 그녀는 죽어서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나를 향해 환히 웃던 노인의 얼굴이 또렷이 생각났다.

사나흘 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노인의 집으로 향했다. 목적이 있는 방문은 아니었다. 그냥 한번쯤 가보고 싶었다. 할머니의 집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공터가 돼버린 황량한 공간 앞에서 나는 노인이 정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한참을 공터 앞에 서 있다 돌아왔다. 나는 한동안 그때의 감정을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정체를 깨달았다. 시력을 잃고, 엄마를 잃고, 사랑하는 이를 잃고, 고향을 잃고서야 알았다.
그건 죽은 자를 위한 연민이었고, 산 자가 짊어지고 갈 공허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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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향을 떠나던 날 외조부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고 말았다.
"얘야! 언제든 돌아오너라!"
흩어졌던 기억들이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했다. 버드나무 아래 서 계시던 외조부의 그림자가 눈앞에 일렁였다.

외조부는 명문가의 자손이라는 자부심과 유교적 관습이 뼛속 깊이 새겨진 옹골진 선비였다. 굶어죽어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할 분인데 어찌어찌 외손녀인 나를 떠맡게 되었다. 당연히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유년기의 내가 외조부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고,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있었다.
"이 변변치 못한 것."
외조부는 내가 반찬 투정을 하거나 신을 뒤집어 벗어놓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호랑이 눈을 뜨고 야단을 치셨다.

그러나 외조부가 나를 미워하신 것만은 아니었다. 샛강에 빠져 죽다 살아난 날도, 열병에 걸려 먹은 것을 게워내고 앓아누운 날도 외조부는 밤늦게까지 잠 못 이루고 방문 앞을 오가셨다. 병을 털어내고 밥상에 앉으면 외조부는 또 혀 차는 소리로 퉁바리를 놓으셨다. "이 변변치 못한 것."
그러면서도 굴비 살을 발라 밥 위에 얹어주셨고,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학교 행사에 모두 참석해주셨다. 다른 사촌들과 날짜가 겹쳐도 예외 없이 내게 와주셨다.

열여섯 살의 화창한 여름날. 나는 쪼그라든 외조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용서를 빌었다. 외조부 말씀대로 변변치 못하게도 눈이 멀어가고 있다고, 정말 방아깨비만도 못한 손녀가 되어버렸다고 아뢰었다. 노쇠한 심신 때문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생때같은 혈육의 캄캄한 현실 때문이었을까. 외조부는 슬픔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목놓아 우셨다. 이윽고 고향을 떠나 도시의 장애인학교로 떠나는 날이었다. 외조부는 버스 타는 걸 보겠다며 굳이 신작로까지 따라 나오셨다. 버스가 내 앞에 멈춰 서자 외조부는 내 팔을 잡으며 말씀하셨다.
"얘야! 언제든 돌아오너라!"
나는 차마 외조부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외조부는 내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다 핑계였다. 마른 쭉정이처럼 쇠약해진 조부를 나는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다. 나의 외조부는 호랑이 눈을 치켜뜨고 벼락같이 호통을 치며 본향 집을 지키셔야 했다. 그래야만 내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청명, 말 그대로 맑고 푸른 봄날에 나는 귀향길에 올랐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 입구로 향했다. 길은 넓어지고 싸리문 담장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공기의 질감이, 발끝의 감각이 고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공터가 되어버린 본향 집터 앞을 오래도록 서성였다.
외조부가 없는 고향은 낯선 언어로 듣는 익숙한 노래처럼 어색하고 괴기스러웠다. 외조부가 지키지 않는 고향은 더는 본향이라 할 수 없었다. 순간 깨달았다. 인간의 귀소본능이란 태어난 장소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람에게 돌아가고 싶어하는 그리움이라는 것을.
외조부 앞에 포와 술을 올리고 무릎을 꿇었다. 빈손으로 돌아온 방아깨비만도 못한 외손녀는 용서를 비는 대신 열 살 계집아이로 돌아가 낮잠이 드신 외조부께 다라니경을 암송해드린다. 외조부는 찔레꽃 향기가 되어 내 손등을 도닥여주신다.

"너 그거 생각나네? 학교 다닐 때 네가 안마원에서 아르바이트 갔다가 초콜릿을 받아왔는데 우리 딸 갖다주라고 나한테 줬잖아. 난 그걸 날름 받아다 내 새끼 가져다줬는데 집에 와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너무 철딱서니가 없던 거 있지. 너도 열아홉 어린애였는데 내 새끼 준다고 그걸 받아왔으니! 한편으로는 창피하고 또 한편으로는 네가 그리 안됐더라! 난 네가 애 어른인 게 싫다."
나도 언니도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나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서로의 마음이 들려왔다. 우리는 연민으로 연결된 모녀지간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만두를 빚는 언니의 등에다 물었다.
"언니는 후회 같은 거 없어?"
"있었지! 근데 지금은 없어. 일이 벌어졌는데 후회는 해서 뭐 하겠네. 모두 내가 선택한 건데. 난 고맙게 생각하기로 했다.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도, 눈 먼 마누라 안 버리고 살아주는 남편도, 돌아가신 시어머니도 다 고맙다."
문득 언니가 많이 늙었구나 싶었다. 형부의 벌이가 시원치 않아, 언니는 마사지 교육을 받고 취업해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친정어머니와 아픈 오빠까지 봉양하고 언니 손으로 상을 치렀다. 내년이면 언니도 환갑이다.
"내 눈에 박사, 너는 늘 열여덟으로 보인다. 어린데도 돈 벌어 집에 빚 갚아줘야 한다고 동동거리던, 우리 학교 아이들이 근처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맞고 오면 빗자루 들고 황소처럼 뛰어나가던 어른 같던 아이. 난 네가 나한테는 어리광도 피우고 떼도 썼으면 좋겠다."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눈물 스위치가 툭 하고 켜질 것만 같아 객쩍은 농담도 할 수가 없었다. 바오쯔가 다 쪄졌는지 언니가 뚜껑을 열어 김을 날렸다. 찜솥에서 바오쯔를 꺼낸 언니가 입으로 호호 불어 식힌 뒤 내게 가져왔다. 나는 뜨거운 바오쯔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뜨겁다, 식혀서 천천히 먹어라!"
결국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르 흘렀다.
"뱉어라, 뱉어! 울 정도로 그렇게 뜨겁네?"
언니가 내 입 앞에 손을 가져다댔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 다시 한번 크게 베어 물었다. 소에서 나온 육즙이 입가로 흘렀다. 나는 손으로 입가를 훔쳐가며 맛있게 바오쯔를 먹었다.
"울 정도의 맛이네?"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환히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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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형편이니 그가 오면 직원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썼다. 마사지할 때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었다. 필요한 대화 이외에 말을 건네서는 안 되었다. 왼쪽 어깨 능형근을 30분 이상 풀어야 하며, 마지막 10분 동안은 두피 지압을 원했다. 마사지가 끝날 때쯤이면 그는 깊게 잠이 들었다. 그러면 마사지사들은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나와 시술실 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아주었다.

그가 노쇼 손님이 자주 있냐고 물었다. 나는 캄캄한 두 눈을 껌뻑대며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사지사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러하다고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마사지에 집중하려 했는데 그가 또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예약금을 미리 받아놓아야 한다며 신용 없는 사람들은 ‘금융 치료’가 정답이라 조언했다.
나는 남자가 대신 화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하겠다 대답하고, 몸이 아직 긴장 상태니 호흡을 길게 내뱉으며 이완시켜보라고 주문했다. 그가 내 말에 따라 몸을 늘어뜨렸다. 나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경직된 근육에 지압을 하고 굳은 관절을 스트레칭했다. 잠든 줄 알았던 그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취한 사람의 넋두리처럼 나약한 마음을 꺼내 보였다.

남자를 시술실로 안내했다. 그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에 접수 직원이 내게 다가와 오늘따라 남자의 인상이 더 험악해 보인다고 속삭였다. 밤이라도 새고 왔는지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어 사람 잡아먹게 생겼다고 겁을 주었다. 나도 모르게 목덜미를 문지르며 시술실로 들어섰다.

예약 스케줄에 그 남자의 이름이 있다 하면 그날은 직원 모두가 긴장 상태로 비상근무에 들어간다. 그는 사자 갈기처럼 어깨까지 자란 풍성한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숍에 들어선다. 희끗희끗한 수염은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으며 항상 인상을 찌푸려 고약한 성격임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깡마른 몸이지만 목청은 어찌나 쩌렁한지 소리라도 지를 때면 창문이 깨져나갈 것 같이 우렁찼다.

어제 그는 비행기로 15시간 떨어진 다른 나라에 있었다. 갑자기 잡힌 출장으로 밤을 새워도 업무는 줄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귀국하면 바로 마사지를 받으며 몇 시간은 죽은 듯 자겠다’는 의지로 스케줄을 견뎠다고 했다.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보다 마사지 숍을 더 그리워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이 순간은 고된 삶을 보상받는 시간이라 했다. 사자처럼 사납고 강한 사내라 생각했었는데 그에게도 나약해질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약간은 그와 친밀해진 기분이었다. 서서히 수마가 그를 끌어당겼다. 졸린 목소리로 그가 힘겹게 말했다.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에게 듣는 감사 인사가 퍽 감동적이었다.
그의 고른 숨소리가 시술실 안에 퍼져나갔다. 나는 담요를 살짝 덮어주고 남아 있는 시간 동안 두피를 지압했다. 그가 깊게 잠이 들었다.

나는 직업 교육을 받고 바로 취업했다. 시각장애인인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군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마사지사라는 직업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의무였다. 서비스 업종의 특성상 마음이 다치는 일도 있었다. 나는 내 직업이 내세우기 좋은 번듯한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창피했다. 그러다 고객들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찡그린 얼굴로 들어왔다가 웃는 얼굴로 돌아가는 이들을 보며 내 직업에 조금씩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사람의 몸을 만지는 일이 더이상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되지 않았다. 마음을 고쳐먹고 고객들을 대하자 일이 즐거워졌다. 나는 누군가에게 고된 삶을 견뎌내게 할 의지다. 살아갈 힘을 주는 사람이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마사지를 마치고 소리 없이 시술실을 나와 문을 닫아주었다. 앞으로 몇 시간, 사자는 정신없이 잘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힘을 내 하루를 살아가겠지.
나도 다시 힘을 냈다. 그러고는 다음 시술실의 문을 열었다.

‘극복’이라는 말처럼 오만한 단어가 있을까? 장애를 극복하고, 가난을 극복하고, 불합리한 사회를 극복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영원히 내 장애를 극복하지 못할 거라고. 나는 단지 자주 내 장애를 잊고 산다. 잊어야지만 살 수가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빨리 체념한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다.

온 나라에 여행 붐이 일었다. 한두 번 비행기를 타고 낯선 나라들을 경험하자 나도 여행의 즐거움에 빠졌다. 내게는 시간도 돈도 있었다. 문제는 홀로 나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장애는 이런 것이다.

진정한 배려란 뭘까.
나로서는 항공기 승무원의 응대가 무척 인상 깊었다. 내게 따듯한 타월을 건네거나 혹은 필요한 게 있는지를 물을 때 그녀는 항상 내 손등에 자기 손을 살며시 올려놓고 말을 했다. 특별히 상냥한 목소리를 하거나 말을 길게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손의 언어를 통해 나는 그녀의 진심을 건네받은 느낌이었다.
가이드 손에게서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 우리에게 말할 때 그는 당사자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진정한 여행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 한 여행의 기록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나만의 길에서 나만의 추억을 만들어가는 과정. 그것이 여행 아닐까?
가이드 손의 마지막 인사가 생각난다.
"여러분이 무사히 타이완을 떠날 때까지 난 이곳에 있을 거예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내게 전화 줘요."
공항 직원에게 우리를 인계하며 그가 말했다. 천천히 걸어 출국장에 들어갔다. 가이드 손의 시선이 오래도록 등에 와닿았다. 감정이 울컥 복받쳤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수화물을 찾고 택시를 탔다. 가이드 손에게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응답 메시지를 보냈다.
내 장애인 동료는 앞도 못 보는데 바다든 산이든 집이든 장소가 무슨 소용이 있냐며 여행의 무의미함을 이야기했다. 나는 아는 만큼 넓어지고 느껴본 만큼 인생이 풍요로워진다고, 꼭 제대로 된 자신만의 여행을 경험해보라고 그에게 권했다.
타이베이로의 출발, 그것은 왜 우리끼리는 안 되냐는 반항심에서 시작된 여행이었다. 글에 남기지는 않았지만 더 많은 거절과 더 많은 모욕과 조롱이 우리를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나는 다음 여행을 준비한다. 행복은 바라는 대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노력과 의지로 맺는 열매 같은 것이라는 걸 나는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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