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터라이프 심리 상담에 포함되는 인생 기술은 많이들 "어른 노릇"이라고 일컫는 것과 관련이 있다. 과거에 이런 능력과 지식은 이성애 중심적인 성역할 고정관념에 얽혀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청소, 집안일, 양육, 요리가 자신이 할 일이라고 배웠다. 남자아이들은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 주로 직장에서 배우는 능력이 자기가 할 일이라고 배웠다.(감사하게도) 지금 사회가 쿼터라이퍼에게 기대하는 것들은 굉장히 다르지만, 사회 문화적 지원은 여전히 미미하다. 과거에는 자식과 같은 성별인 부모, 가족, 또래를 통해 전해지던 실용적인 지식은 이제 같은 방식으로 공유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학교에 가고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장려받지만, 학교교육은 일상생활이나 생존과는 관계없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기본적인 생활 기술과 관련된 정보가 심각할 정도로 부족하다.

실용적인 기술도 특정한 방식으로 접근하면 심리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삶 속의 스트레스를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의미형의 경우, 복잡한 생활 기술을 간단하게 연마해냄으로써 막대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우리 두 사람의 목표는 그레이스가 "철드는 것", "정신 차리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모욕적인 말로 쿼터라이퍼를 다그쳐 세상에 나아가도록 등을 떠밀겠다는 것인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실이 오직 세금과 스트레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현실로 뛰어들겠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레이스 같은 의미형이 안정성을 구축할 때는 자기만의 성장과 변화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돈 관리와 일상적인 과제를 향한 자신의 태도를 개선하면 무엇이 나아질 수 있는지 이해한 그레이스는 전처럼 그런 일에 피로감을 느끼지 않았다. 삶에 수반되는 어려운 과제들은 독립이라는 더 큰 목표의 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항상 주변 사람들을 보며 그들에게 성장할 능력이 있고 좋은 삶을 살 능력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제는 자신에게도 그들과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튼튼한 체계를 쌓으며 살아온 안정형에게, 삶을 구축하는 작업은 의외로 그간 쌓은 것을 허물면서 시작될 수 있다. 삶의 의미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기존의 안전한 기반을 허무는 것이다.

안정형에게 기존의 삶을 허물고 진정한 삶을 구축하는 작업은 복잡한 법이다. 이 작업은 타인의 기대(나 타인의 기대라고 짐작하는 것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흥미를 향해 이동하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목표 지점이 명확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자기 몸과 영혼을 끊임없이 점검하면서, 정기적으로 경청 작업으로 돌아와 지침을 얻고 실행에 전념해야 한다. 이 작업은 자기 자신을믿는다는 급진적인 행위다.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때도, 안정적인 일상에 위협이 될 때도 자신의 영혼이 옳다고 믿는 것이다.

쿼터라이프를 거치면서 식이장애를 진단받는 경우도 드문 일은 아니지만, 무질서한 식이 습관은 만연한 수준이다. 돈이 부족하든, 좋은 음식에 접근하기 힘든 상황이든, 요리를 배운 적이 없든, 영양소가 부족한 가공 포장 식품을 선호하는 유행 때문이든, 그런 유행의 대안으로 대두된 순수하고 건강한 음식만 고집하는 집착 때문이든, 이런 다양한 이유로 인해 쿼터라이퍼 대다수는 음식과 식사에서 문제를 겪고 있다.

코너를 자살 충동으로 밀어 넣은 약이 보험에서 승인하고 비용을 지급한 것이라는 사실은 짚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코너가 종종 상담실에 들고 오는 에너지 드링크는 그의 또래를 주요 고객층으로 겨냥한다. 반면 혈당을 조절하고, 비타민과pH의 균형을 맞추고, 몸과 정신의 기능에 도움이 되는 음식은 접근하기가 더욱 어렵고, 쿼터라이퍼를 주 고객층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빨리 먹을 수 없다. 바로 이것이 현대 쿼터라이프 심리의 거대한 아이러니이자 위험이다. 도움이 되는 것은 사회에서 장려하지 않고, 비용이 지나치게 높으며, 효과적인 광고도 없다. 주류 심리학의 지원을 받지도 못한다. 주류 심리학은 진단과 약물에만 손을 뻗을 뿐 기본적인 영양, 적절한 운동, 정기적인 수면의 중요성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상담에서 코너는 어딘가 달랐다. 훨씬 좋아진 모습을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돌연 삶을 재건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결심한 모습이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도움을 제공해줄 새로운 체계와 습관을 구축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새로운 일상의 패턴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은 비밀스럽게 시작되었다. 그간 나는 우리의 상담이 코너에게 얼마나 닿고 있는지 알고 싶어 끙끙대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연결이 되기는 했던 것이다. 코너는 자신에게 무엇이 좋지 않았는지 가려내고 변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더는 필요하지 않은 오래된 장난감이나 서류를 치우듯 조금씩 대학 농구팀과 언론정보학 전공과 아데랄을 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에게 살고 싶은 삶을 제공하지 못한 과거의 체계와 영향력을 완전히 허물었다. 이제는 조금씩 행복감이 느껴지는 삶을 구축해나갈 차례였다.

통합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고,
새로 맺은 결실을 축하할 수 있을까?

심리적 성장이 한 권의 책처럼 명쾌하고 직선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자신을 창조하는 작업은 지극히 어려울 때가 많으며 복잡하고 순환적이다. 극복했다고 생각한 패턴으로 후퇴하기를 반복하고, 전에 깨달았던 것을 다시 깨닫고는 한다. 그래서 성장의 네 기둥이기둥이지 단계가 아닌 것이다. 분리, 경청, 구축, 이 세 가지 작업은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이루어지기에 진동, 혹은 직조처럼 느껴질 수 있다.

구축에 너무 깊이 파고들다가는 무엇이든 바꾸어버리고 싶은 집착이 생길 수 있는데, 이럴 때는 다시 자신의 내면을 경청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여러 기둥 사이에 거미줄처럼 아름답고 새로운 패턴이 형성된다. 분리, 경청, 구축, 이 세 가지 작업이 ‘통합’되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

분리하고, 경청하고, 구축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 후에 그 모든 결과를 통합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마치 축복과도 같다.

지금껏 견뎌야 했던 방황과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굉장한 것이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쿼터라이퍼에게, 나는자기 삶을 사랑할 수 있다고, 기쁨을 즐기고 선한 것을 믿는 능력은 과거의 치열한 노력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통합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는 취약함과 친밀함, 창의력, 성공이 두려워질 때 그 두려움을 직면하는 행위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와 다른 존재로 거듭날 용기, 마음이 동하는 새로운 길을 믿어볼 용기,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선택할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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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학문•철학/중앙정보부

국가정보원의 전신으로, 5.16 군사쿠데타 이후 김종필의 주도로 만들어진 정보기관이다. 전두환 정권기에는 안전기획부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중앙정보부는 창설 초기부터 각종 의혹에 휩싸였다. ‘4대 의혹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는 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 파칭코 사건을 말하는데 중앙정보부가 증권 회사를 설립하고 주가를 조작한 사건, 광진구에 위락 시설인 워커힐을 세우면서 자금을 유용한 사건, 일본에서 불법 수입한 자동차로 폭리를 취한 사건, 불법 도박 기기를 밀수하여 이득을 보려 했던 사건들이다. 정치자금을 모으기 위해 벌인 일로 추정하지만 김종필이 옷을 벗는 선에서 무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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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축


살면서 무엇을 만들고,
갈고닦고, 쌓아야 할까?

성장의 세 번째 기둥은 ‘구축’이다. 영어, 독일어, 산스크리트어에서 "구축하다, 쌓다, 갈고닦다"를 뜻하는 동사는 "있다, 되다, 일어나다"라는 뜻의 단어를 어원으로 한다. 삶을 ‘구축하는’ 행위는 자기 자신이 ‘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경청에 열린 마음이 필요했던 것처럼, 구축에는 노력, 일관성, 의지가 필요하다.

한 사람의 삶을 구축한다는 것은 노력과 사랑과 헌신을 통해의식적으로 존재를 가꾸어간다는 뜻이다. 자기만의 삶이라는 작품을 창조하려면 크고 작은 노력이, 체계와 질서가 필요하고 때로는 막대한 신념과 신뢰도 필요하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구축하려면 일관성과 집중력이 필요하고, 피로가 쌓이거나 내적 한계에 부딪혀도 밀고 나가야 한다. 때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 불신과 더 나은 삶은 가능하지 않다는 회의감을 상쇄하기 위해 장기적인 과제에 매달려야 하고,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해야 한다. 삶과 미래 구축을 위한 작업은 단조롭고 어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고 한 사람을 새로이 거듭나게 해줄 수 있다.

모험과 위험 감수는 쿼터라이프의 핵심적인 부분이지만, 삶을 구축하기 위한 내적?외적 작업은 전형적인 모험 이야기보다는 반복적인 과제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구축하기 위해 세심하게 공들이고, 피로해도 한 걸음씩 나아감으로써 쿼터라이퍼는 새로운 한계를 설정하고, 새로운 능력을 배우고, 그 과정에서 회복력을 얻는다. 그 모든 것을 통해 한 사람의 정체성과 성격이 빚어지고 형성되며, 자긍심이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지금까지 대니는 자신의 신체적 욕구에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은 소망에 귀 기울이는 법을 연습했다. 이제는 미래를 구축하고 싶다는 마음이 절실했다. 무언가를 이뤄내고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싶었다. 경청이 자기 자신과 비언어적 실마리에 깊이 파고들어야 하는 일이라면, 구축은 조금 더 실제적인 작업이었다.

수많은 의미형은 스스로 원하는 삶을 구축하려면 때로는 거의 종교에 헌신하듯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 ‘시시하다’거나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삶의 안전성을 강화해줄 장기적 노력에 헌신해야 한다. 의미형은 ‘각고의 노력’을, 마침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즐기기도 하지만, 자신이 ‘돈에 넘어갔다’거나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걱정은 의미형이 사로잡혀 있는 저변의 두려움과 이어져 있다. 그건 바로, 삶에 오롯이 헌신하기 시작하는 순간 영혼 없고 개성 없는 일벌 같은 존재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의미형에게 삶을 구축하는 작업은 망망대해에서 목적지 없이 둥둥 떠다니다가 섬을 하나 발견하는 것과 비슷하다. 혼란, 우울, 압도감만 존재했던 과거를 뒤로한 채 안전한 공간에서 몸을 말리고 안정적인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쿼터라이퍼는 자신이 제대로 밀어붙이지 않을 때 그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외부에 헤쳐나가야 할 장애물이 있는 만큼 내면에도 보이지 않는 허들이 있어 그것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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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문화/운동권

대학생 운동권의 등장은 1980년대 상황과 관련이 있다.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민주화를 열망하는 정치인, 재야 지도자들이 등장했고1970년대 후반에 대학가에서 언더서클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0.26 사태를 통해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민주화가 당연시되는 분위기였으나 곧장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그리고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급격히 바뀐다. 일명 ‘서울의 봄‘이 무너진 것이다. 특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잔혹한 진압은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입혔다. 대학생이된 후 학내 비밀 상영회를 통해 비디오테이프로 ‘광주 학살‘을 직접 목격한 학생들이 가두 투쟁에 나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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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평범한 가난

한동안 입술만 깨물던 엄마가 결심한 듯 내 손을 꽉 부여잡았다. 정작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나를 홀로 밖에 세워 뒀다. 아무렴, 나는 ‘심심하다’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였다. 글자라면 무엇이든 읽었다. 식당 유리에 코를 대고 메뉴판을 보려 애썼다. 유리에서는 은은하게 돼지갈비구이 냄새가 났다. 고개를 조아리는 엄마가 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밀린 월급 30만 원을 달라고 하는 중이었다.
눈치 없이 배가 고팠다. 엄마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양념치킨을 사 줄 것이다. 자식 입에 들어갈 치킨 값을 계산할 때면 어딘가 당당해지곤 했던 엄마 얼굴을 떠올렸다.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아예 몸을 돌려 전봇대에 나붙은 전단지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숙식 제공, 100만 원, 아가씨 같은 글자가 또렷했다.

그날 이후였다. 하굣길마다 신발주머니를 빙글빙글 돌리며 언제쯤 아가씨가 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나는 100만 원만큼의 미래를 꿈꿨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보다 더 큰 돈은 내 상상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 미래에는 엄마가 30만 원 때문에 작아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았다. 지금도 여전히 꿈에 나오는 장면들이 있다. 초록색 슬립을 걸친 여자가 남자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골목으로 끌려간다. 비쩍 마른 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맨발은 검다. 그런 장면을 숨도 못 쉬고 목격한 날은 또 생각했다. ‘아가씨는 되지 말아야겠구나.’

언제쯤 아가씨가 될 수 있을까 골몰하던 10대와 이미 아가씨였던 10대가 고작 육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가진 손톱만큼의 운 덕분에 나는 그곳에 닿지 않았다.

런던에서 서울까지 약 8,000km를 건너 내 앞에 도착한 《가난 사파리》를 넘기는 동안 나는 다른 문화권에 살며 다른 언어를 쓰는 저자와 내가 경험한 가난이 너무 가깝고 때로 겹친다는 ‘당연한’ 사실에 자꾸 몸서리를 쳤다. 우리가 해 왔던 분노의 다짐과 잦은 실패와 달라지는 신념이 비슷한 뿌리를 지녔다는 게 신기했다. 대런 맥가비의 말마따나 "가난은 정치적 논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세계적 현상"이기 때문일 테다.

어린 시절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는 ‘가족’이 전부였다. 나의 엄마는 사남매의 둘째딸이다. 엄마와 엄마 형제들이 낳은 자녀는 나를 포함해 아홉 명이다. 그중 전문대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아이는 셋뿐이었다. 정규직 역시 세 명뿐이며, 나머지 여섯 명은 불안정 비정규 노동을 전전한다. 1980~1990년대생인 우리는 대학 진학률 80%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나는 세 명에 속하고 나의 남동생은 여섯 명에 속한다. 가까이는 우리의 차이를 숙제처럼 끌어안고 살았다. 내가 만나는 세상의 접점이 넓어질수록 숙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상업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의 가정환경과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의 가정환경은 극과 극이어서 때로 어지러웠다.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난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다. 이 멀미 나는 격차들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다. 기자라는 직업은 그 숙제를 얼마간 해결해 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 ‘지식인’ 세계에 진입했을 때 나는 그들과 되도록 최대한 비슷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게 가난을 이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 벗어나고 싶은 것이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새로운 세계에서 좌불안석하면서도 나는 안도했다. 물론 나는 지금도 가난으로 인해 어딘가 부서지고 망가진 내면이 언젠가는 사고를 치고 말 것이라고 긍긍한다.

상업고를 나온 사람이 드물고, 기초수급을 오랫동안 받았던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회사에서 내가 지나온 가난은 ‘자원’이었다. 다른 시각을 가졌으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나는 내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기까지는 내 어린 시절이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기 시작하기까지는 내 인생이, 또는 실로 내가 어떤 식으로든 흥미롭다거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난은 이 사회의 많은 문제가 시작되는 저수지였다. 가난과 관련된 아이템은 흔하고 넘쳤다. 그래서 의미 없을 때가 많았다. 오만함과 절박함과 희망이 범벅된 진창에서 구르는 동안 ‘글’ 따위는 몇 번이고 무참히 패배했다.

생각지 못한 지출이 반복되며 내 삶도 일부분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외면했던 가난의 그림자는 이런 식으로 내 발목을 잡곤 했다. 내가 잘못하며 살지 않아도 책임을 져야 했다. 부채가 있었다. 우리 두 사람 중 나만 고등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던 건 그 애가 공부를 못한 까닭도 있지만, 그 이유로 그 애가 돈을 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집안 생계를 책임진 덕분에 나는 내 앞가림만 하며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누나, 나는 잘해 보려고 했던 일인데 매번 이런 식이야."
나는 그 말에 아직도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세상은 모르는 그 애의 최선을 나는 안다. 다만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비정규 노동의 틈새를 전전해 온 30대 중반의 남성은 ‘작은 성공’조차 쉽지 않았을 뿐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뭔가를 하려 할 때 대단히 많은 벽에 부딪친다"는 점은 가난이 가진 질긴 속성이다. 온라인 도박 사이트는 드물게 장벽이 없는 공간이었다. 가끔이긴 하지만 성취감을 줬다. 청소년기에는 게임이 그 역할을 했었다. 나는 내 동생의 노동을 딛고 공부할 수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동생 삶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글만 바쁘게 쓰고 있다는 자괴가 몰려왔다. 세상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아서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동생이 2012년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나는 주변이 모두 당혹해할 정도로 오래 통곡했다. 2.9kg의 조그만 아이를 처음 안고서 터뜨린 울음을 한동안 나조차 해석하지 못했다. 그건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깨달았다. 나는 그 아이가 살아갈 많은 날이 안쓰러웠다. 앞으로 ‘당할’ 일들이 떠올라 고통스러웠고, 무서웠고, 서러웠다. 이 아이가 자라는 동안 경험해야 할 모든 일들이 먼저 경험한 내게 무게로 다가와 나를 짓눌렀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아이 부모의 가난이었다. 나는 우리의 가난을 늘 대수롭지 않아 했지만, 그건 사실 가난이 삶의 많은 것을 결정하는 대수로운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핏덩이’는 내가 가난 때문에 늘 상처받는 사람이라는 걸 상기시켰다.

나는 한때 바랐듯이 정치권력이나 체제가 바뀌기를 ‘순진하게’ 기대했다. 이제는 그저 일정 부분 망가진 울퉁불퉁한 길을 일단 걸어가 본다. 내면의 힘을 발견하고 기르는 편에 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려 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힘은 누군가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빈곤은 이런 방식으로 산업화되었다) 나에게도 있다는 걸, ‘가난한’ 우리도 이 세계의 일부이고 책임 있는 구성원이자 시민이라는 걸 믿으면서

실패는 안팎으로 계속됐다. 다정한 적 없던 가족과 친척은 때로 남보다 멀고, 이제는 각자의 짐을 지며 살고 있지만 애경사로 드물게 만나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네가 사는 세계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말을 꼭 한번씩은 듣곤 한다. 내가 그 ‘다른 세계’에서 얼마나 자주 이방인이 되는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자꾸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서 상대가 의도치 않았던 냉소와 비난을 읽는다. 때로는 왜 나를 구분하느냐고 반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난은 돈의 많고 적음으로만 구별되지 않는다. 문화와 교양과 취향으로도 드러난다. 나는 그 말에서 내가 빠져나온 세계를 본다. 그리하여 안온한 세계에서 구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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