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입술만 깨물던 엄마가 결심한 듯 내 손을 꽉 부여잡았다. 정작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나를 홀로 밖에 세워 뒀다. 아무렴, 나는 ‘심심하다’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였다. 글자라면 무엇이든 읽었다. 식당 유리에 코를 대고 메뉴판을 보려 애썼다. 유리에서는 은은하게 돼지갈비구이 냄새가 났다. 고개를 조아리는 엄마가 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밀린 월급 30만 원을 달라고 하는 중이었다. 눈치 없이 배가 고팠다. 엄마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양념치킨을 사 줄 것이다. 자식 입에 들어갈 치킨 값을 계산할 때면 어딘가 당당해지곤 했던 엄마 얼굴을 떠올렸다.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아예 몸을 돌려 전봇대에 나붙은 전단지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숙식 제공, 100만 원, 아가씨 같은 글자가 또렷했다.
그날 이후였다. 하굣길마다 신발주머니를 빙글빙글 돌리며 언제쯤 아가씨가 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나는 100만 원만큼의 미래를 꿈꿨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보다 더 큰 돈은 내 상상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 미래에는 엄마가 30만 원 때문에 작아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았다. 지금도 여전히 꿈에 나오는 장면들이 있다. 초록색 슬립을 걸친 여자가 남자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골목으로 끌려간다. 비쩍 마른 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맨발은 검다. 그런 장면을 숨도 못 쉬고 목격한 날은 또 생각했다. ‘아가씨는 되지 말아야겠구나.’
언제쯤 아가씨가 될 수 있을까 골몰하던 10대와 이미 아가씨였던 10대가 고작 육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가진 손톱만큼의 운 덕분에 나는 그곳에 닿지 않았다.
런던에서 서울까지 약 8,000km를 건너 내 앞에 도착한 《가난 사파리》를 넘기는 동안 나는 다른 문화권에 살며 다른 언어를 쓰는 저자와 내가 경험한 가난이 너무 가깝고 때로 겹친다는 ‘당연한’ 사실에 자꾸 몸서리를 쳤다. 우리가 해 왔던 분노의 다짐과 잦은 실패와 달라지는 신념이 비슷한 뿌리를 지녔다는 게 신기했다. 대런 맥가비의 말마따나 "가난은 정치적 논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세계적 현상"이기 때문일 테다.
어린 시절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는 ‘가족’이 전부였다. 나의 엄마는 사남매의 둘째딸이다. 엄마와 엄마 형제들이 낳은 자녀는 나를 포함해 아홉 명이다. 그중 전문대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아이는 셋뿐이었다. 정규직 역시 세 명뿐이며, 나머지 여섯 명은 불안정 비정규 노동을 전전한다. 1980~1990년대생인 우리는 대학 진학률 80%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나는 세 명에 속하고 나의 남동생은 여섯 명에 속한다. 가까이는 우리의 차이를 숙제처럼 끌어안고 살았다. 내가 만나는 세상의 접점이 넓어질수록 숙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상업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의 가정환경과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의 가정환경은 극과 극이어서 때로 어지러웠다.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난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다. 이 멀미 나는 격차들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다. 기자라는 직업은 그 숙제를 얼마간 해결해 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 ‘지식인’ 세계에 진입했을 때 나는 그들과 되도록 최대한 비슷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게 가난을 이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 벗어나고 싶은 것이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새로운 세계에서 좌불안석하면서도 나는 안도했다. 물론 나는 지금도 가난으로 인해 어딘가 부서지고 망가진 내면이 언젠가는 사고를 치고 말 것이라고 긍긍한다.
상업고를 나온 사람이 드물고, 기초수급을 오랫동안 받았던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회사에서 내가 지나온 가난은 ‘자원’이었다. 다른 시각을 가졌으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나는 내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기까지는 내 어린 시절이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기 시작하기까지는 내 인생이, 또는 실로 내가 어떤 식으로든 흥미롭다거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난은 이 사회의 많은 문제가 시작되는 저수지였다. 가난과 관련된 아이템은 흔하고 넘쳤다. 그래서 의미 없을 때가 많았다. 오만함과 절박함과 희망이 범벅된 진창에서 구르는 동안 ‘글’ 따위는 몇 번이고 무참히 패배했다.
생각지 못한 지출이 반복되며 내 삶도 일부분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외면했던 가난의 그림자는 이런 식으로 내 발목을 잡곤 했다. 내가 잘못하며 살지 않아도 책임을 져야 했다. 부채가 있었다. 우리 두 사람 중 나만 고등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던 건 그 애가 공부를 못한 까닭도 있지만, 그 이유로 그 애가 돈을 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집안 생계를 책임진 덕분에 나는 내 앞가림만 하며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누나, 나는 잘해 보려고 했던 일인데 매번 이런 식이야." 나는 그 말에 아직도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세상은 모르는 그 애의 최선을 나는 안다. 다만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비정규 노동의 틈새를 전전해 온 30대 중반의 남성은 ‘작은 성공’조차 쉽지 않았을 뿐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뭔가를 하려 할 때 대단히 많은 벽에 부딪친다"는 점은 가난이 가진 질긴 속성이다. 온라인 도박 사이트는 드물게 장벽이 없는 공간이었다. 가끔이긴 하지만 성취감을 줬다. 청소년기에는 게임이 그 역할을 했었다. 나는 내 동생의 노동을 딛고 공부할 수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동생 삶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글만 바쁘게 쓰고 있다는 자괴가 몰려왔다. 세상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아서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동생이 2012년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나는 주변이 모두 당혹해할 정도로 오래 통곡했다. 2.9kg의 조그만 아이를 처음 안고서 터뜨린 울음을 한동안 나조차 해석하지 못했다. 그건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깨달았다. 나는 그 아이가 살아갈 많은 날이 안쓰러웠다. 앞으로 ‘당할’ 일들이 떠올라 고통스러웠고, 무서웠고, 서러웠다. 이 아이가 자라는 동안 경험해야 할 모든 일들이 먼저 경험한 내게 무게로 다가와 나를 짓눌렀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아이 부모의 가난이었다. 나는 우리의 가난을 늘 대수롭지 않아 했지만, 그건 사실 가난이 삶의 많은 것을 결정하는 대수로운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핏덩이’는 내가 가난 때문에 늘 상처받는 사람이라는 걸 상기시켰다.
나는 한때 바랐듯이 정치권력이나 체제가 바뀌기를 ‘순진하게’ 기대했다. 이제는 그저 일정 부분 망가진 울퉁불퉁한 길을 일단 걸어가 본다. 내면의 힘을 발견하고 기르는 편에 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려 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힘은 누군가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빈곤은 이런 방식으로 산업화되었다) 나에게도 있다는 걸, ‘가난한’ 우리도 이 세계의 일부이고 책임 있는 구성원이자 시민이라는 걸 믿으면서
실패는 안팎으로 계속됐다. 다정한 적 없던 가족과 친척은 때로 남보다 멀고, 이제는 각자의 짐을 지며 살고 있지만 애경사로 드물게 만나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네가 사는 세계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말을 꼭 한번씩은 듣곤 한다. 내가 그 ‘다른 세계’에서 얼마나 자주 이방인이 되는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자꾸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서 상대가 의도치 않았던 냉소와 비난을 읽는다. 때로는 왜 나를 구분하느냐고 반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난은 돈의 많고 적음으로만 구별되지 않는다. 문화와 교양과 취향으로도 드러난다. 나는 그 말에서 내가 빠져나온 세계를 본다. 그리하여 안온한 세계에서 구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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