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은 평소와 다르게 대단히 흥분했다. 하지만 곧 진정하고 미소를 짓더니 강한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그의 말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던 나의 소년 시절의 비밀을 정확히 맞췄다. 데미안이 말한 신과 악마, 공인된 신의 세계와 금지된 악마의 세계는 내 생각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두 개의 세계, 밝은 세계와 어둠의 세계에 관한 것 말이다. 내 자신의 문제가 곧 모든 인간의 문제고, 모든 삶과 생각의 근원이 되는 문제라는 인식이 갑자기 나를 뒤덮었다. 나의 개인적인 삶과 생각이 위대한 사유의 강에 포함되어 있음을 느끼자 나는 두려우면서도 경건한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깨달음이 나의 존재를 증명해주고 가벼운 행복감을 주었지만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 통찰에는 가혹하고도 떫은맛이 있었다. 내 유년 시절이 끝났고,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담겼기 때문이다.

이 모습이 진짜 데미안이구나! 나와 같이 걷고 대화하던 데미안은 절반에 불과했어. 가끔나와 호흡을 맞춰서 호응해주는 역할을 맡아 연기를 한 반쪽짜리였던 거야. 진짜 데미안은 이렇게, 태곳적의 생명체처럼, 차가운 대리석처럼, 아름답지만 냉혹한 죽었으나 기막히게 멋진 생명력으로 가득한 존재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시절의 나는 일종의 정신착란 상태였다. 우리 집의 정돈된 평화 가운데서 나는 겁먹고 고통받으며 유령처럼 지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생활할 수도 없었고, 잠깐이라도 내 자신을 잊고 지내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자주 화를 내며 이유를 물었지만, 나는 차갑게 마음을 닫았다.

내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기도 했다. 내 삶이 엄청난 혼란에 빠져 있었으니까. 얼마 전까지 나는 밝고 깨끗한 세계에 속했다. 나는 일종의 아벨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른 세계‘
로 깊숙이 박혀 들어가, 저 아래로 떨어져 가라앉고 있었다. 나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어떻게 일이 이 지경까지 와버렸을까? 그때 한 가지 기억이 떠올라 숨이 턱 막혔다. 이 불행한 상황이 시작되었던 그 고통의 밤, 나는 한순간 아버지와 그의 ‘빛과 지혜의 세계‘를 단칼에 꿰뚫어 보며 경멸했다. 그래, 그때의 나는 분명 표식을 가진 카인이었는데, 수치심보다 우월감을 느꼈다. 나는 내가 죄를 짓고 불행하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보다 더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의 내가 이처럼 분명하게 사고했던 건 아니지만, 그속에 이 모든 일이 들어 있었다. 나는 온갖 걱정, 감정의 분출들로 괴로웠지만, 동시에 묘하게 뿌듯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험과 죄악에 얽혀든 나를 기다리는 것은 적의 협박과 위협, 공포와 치욕뿐이었다. 모자와 양산, 오래된 고급 사암이 깔린 마룻바닥, 마루 장식장 위에 걸린 커다란그림, 안방에서 들려오는 누나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그 어느때보다 더 사랑스럽고 소중했다. 그러나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내게 위로가 아니라, 오로지 질책일 뿐이었다. 나는 그 밝고 고요한 세계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나는 내 구두에 더러움을 묻혀 왔다. 발깔개에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더러운 발. 나는 우리 집의 세계에 전혀 알 수 없는 그림자를 몰고 왔다. 지금까지 수많은 비밀과 불안을 가졌다 해도 오늘 내가 가져온 것에 비하면 모두 장난이나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운명이 뒤쫓아와 내게 손을 뻗쳤다. 운명의 손아귀에서 어머니도 나를 구할 수 없고, 어머니가 내가 처한 상황을 알아서도 안 되었다. 내 죄가 도둑질이든 거짓말이든 (나는 신의 이름을 걸어 거짓맹세를 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였다. 나의 죄는 내가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그 사실 자체였다. 그 애를 왜 따라갔을까? 왜 아버지 말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크로머를 따랐을까? 왜 그 따위 도둑질 이야기를 억지로 꾸며 내고 영웅이 된 것 마냥 으스댔을까? 악마가 나를 꽉 움켜쥐었다. 적이 등 뒤까지 바짝 쫓아왔다.

이제까지의 체험들 중 가장 중요하고 영원할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권위가 최초로 찢긴 자국이니까. 유년기를 지탱하는 하지만 자기 자신이 되려면 반드시 무너뜨려야만 하는 기둥들에 생긴 최초의 균열이니까. 운명의 핵심적인 길은 이런 보이지않는 체험들이 그려 간다. 찢김과 균열은 계속 생긴다. 아물고 잊혀진다지만, 마음속 가장 후미진 은밀한 곳에서는 여전히 피흘리며 살아가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제로 살아 숨 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요즘은 그 의미가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다. 대자연에 단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을 무더기로 쏘아 죽이기도 하니까. 만일 우리가 귀하고 유일무이한 목숨들이 아니라면, 총알 하나면 세상에서 간단히 제거해버릴 수 있는 존재들에 불과하다면, 이 이야기는 써 내려갈 이유가 전혀 없다.

정말 이상한 점은 두 세계의 경계가 서로 맞닿아 있다는 것,
두 세계가 너무나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우리 집 가정부 리나는 저녁 기도 때 거실 문가에 앉아 깨끗이 씻은 두 손을 단정하게 매만진 앞치마 위에 올려놓고 맑은 목소리로 우리와 함께 찬송가를 불렀는데, 그럴 때 리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 밝고 진실한 세계에 속했다. 하지만 부엌이나 헛간에서 내게 머리 없는 난쟁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푸줏간에서 이웃 여자들과 싸울 때면,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고 비밀에 싸여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모두가 그랬고, 특히 내가 그랬다. 분명나는 밝고 진실한 세계에 속했지만(나는 내 부모님의 자식이었으니까!)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이는 곳마다 다른 세계가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흐음, 고세는 조금 전 봤던 광경을 떠올렸다. 아직 아르바이트에 익숙하지 않아 긴장한 낌새는 있었지만, 딱히 시바에게 유별난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게 보통 아니야?"
그러자 고제키가 하늘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보통이라... 보통이라는 말, 왠지 이상한 것 같아. 보통이 뭔지, 사람마다 다르잖아.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건 의외로 쉽지 않아."
야스오가 말했다. 주변을 한번 둘러봐. 좋아하는 일에 푹 빠져 사는 사람들은 사실, 놀라울 정도로 적어. 우선 기회를 얻는 것부터가 어렵지.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과 상황에 놓이는 것도 좀처럼 쉽지 않고 재능도 어느 정도는 필요해. 안 되겠다, 더 이상은 못 해, 하고 좌절하면 거기서 끝이니까.

처음으로 들은 고제키의 고백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렴풋하게 보이던 것이 비로소 선명해진 느낌이랄까.
그리고 반성했다. 고제키를 그저 어른스럽게만 보고 있었는데, 자신과 다를 바 없이 혼란스러워하고 힘들어했던 것이다. 알고 있다며 묻지 않는 것은 오히려 고민만 쌓이게 할 뿐이다. 어디에선가 토해 낼 수 있게 도와줬어야 했다. 자신은 고제키에게 무엇이든 상담해 왔으니,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수 있었을 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