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면,
어느 길로 가든 당신은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충분히 오래 걷기만 한다면.
-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이 그랬듯이 또다시 권위와 전통에 기대는 건 어리석다. 운명은 어느덧 선택이 되었다. 세상은 날로 복잡해지고 그로 인한 불확실성의 증가는 우리의 목을 옥죄고 있다.

‘완벽함’의 반대는 ‘엉성함’이 아니라 ‘그럭저럭 괜찮음’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의 완벽함’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정답이 없는 문제들이 삶을 아름답게 해 준다. 실행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내가 가장 원하는 것으로 결정했음에도 바라지 않던 결과가 나왔다면, 그건 실수가 아니라 그저 선택일 뿐이다. 결과가 맘에 들지 않으면 빨리 포기하면 된다. 인생은 어차피 지도 없이 하는 여행이며 애당초 ‘옳은 결정’이란 없었으니까. 과학의 영역을 최대한 넓히되 때로 과학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게 겸손의 미덕이다. 우리 삶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하고 맛보고 음미해야 할 미스터리다."

답이 없는 문제 중 많은 것들이 우리의 심장을 벌렁대게 하거나 가슴을 아리게 만들 수 있다. 저 멀리 떨어진 미래라는 나라에 도착해 보기 전에는 어느 길이 최선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미래라는 나라는 오직 도착해 본 후에만 온전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하다. 불안하니 결정을 미룬다.

어떻게 해야 한 발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특히나 이성적인 결정을 내리고 싶다면? 손쉬운 전략은 이전에 겪어 보았고 해법을 아는 다른 어려운 문제들의 경우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다

모든 것은 대가가 있다고 배웠다. 뭐든 하나를 챙기려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인생의 중대 결정들에 관한 한, 저런 원칙들이 오히려 우리가 길을 잃게 만들 수도 있다고 믿게 되었다.

답이 없는 문제들은 측정을 거부한다. 당신에게는 효과가 있었던 방법이 나에게는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어제는 맞았던 방법이 내일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답이 없는 문제들은 다스려지지도, 길들지도 않으며 그때그때 저절로 생겨나고, 유기적이고, 복잡하다. 정해진 합리적 방법을 따라가면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답이 있는 문제들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답이 없는 이 어려운 문제들에 대처하는 한 가지 방법은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측정하려고 노력하고, 측정할 수 없는 것은 최선을 다해 계량화해 보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이게 좀 더 나아 보이기도 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효과도 있다. 정답을 향해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옳은 방향으로 한 걸음 더 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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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 유적•유물/승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민속 무용으로, 대표적인 무형 문화재다. 이름에 드러나듯 스님이 추는 춤 정도로 생각하는데 따져보면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 불교 예식에 승무가 포함돼 있지도 않을뿐더러 민간에서 오랫동안 전승된 춤 예술이기때문이다.
승무의 연원을 문헌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부처가 설법할 때 연꽃을 들자가섭존자가 그 뜻을 홀로 깨닫고 빙긋이 웃었다고 하는 ‘염화미소‘의 화두를 기원으로 보기도 하고, 황진이가 지족사를 유혹하기 위해 만든 춤에서 비롯됐다는 주장도 있다. 이 밖에 파계승이 번뇌를 잊기 위해 북을 두드린 데서 연원했다는설, 수도하는 승려가 스승의 모습을 흉내 내는 데서 기원했다는 설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정확한 연원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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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총총 시리즈
황선우.김혼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여둘톡의 황선우 작가와 ‘아무튼, 술’의 김혼비 두 작가가 1년에 걸쳐 주고 받은 편지로 만든 에세이다.
아니, 이 분들 종합예술인들 아니신가? 글쓰기는 말할 것도 없고, 축구, 수영, 탁구 등 운동이면 운동, 입담까지…팔방미인으로도 대체가능하시겠다.
결론은 웃다, 먹먹하다보니 단숨에 읽어 버렸다.
최선을 다 하고 싶지만 현재의 난 저승사자도 두 손 들고 갈 저 세상 텐션이라는 거;; 죽진 않겠군 ㅎㅎ

[“가마~~~ 있으므 마, 한개도 안 듭다.”
제가 나고 자란 경상도 남부 지역 사투리로 ‘가만히 있으면 하나도 안 덥다’는 뜻이에요. ‘가만히’의 뒷발음을 닫아 마무리하지 않고 길게 끄는 표현, 그리고 ‘한개도’의 앞에 가파르게 찍히는 악센트가 강조를 표현합니다. ‘마’는 분위기를 거드는 부사인데요, 단독으로는 ‘그냥’, 뒤의 부정어인 ‘한개도’와 결합해서는 ‘전혀’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네요.]
- 본문 26p 수평 자세로 가마 누워 보는 세상, 김혼비
난 경상도와는 관련이 거의 없는지라 그 지역 언어는 단어와 억양의 조합만으로도 당췌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겠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신기방기다.
저렇게 친절히 설명해주니 마치 귀에 들리는 것도 같다. 아하하

[번-번-번-번- 타들어가다가 올여름에 ‘아웃’이 되어 나가떨어지고서야 받아들였어요. 번아웃이 맞구나. 사흘이면 끝낼 일을 열흘 걸릴 때부터 이미 그랬구나. 이게 뭐라고 받아들이기 힘들었을까요.]
- 본문 55p 번-번-번- 타들어가는 날들, 황선우
사실 요즘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단어가 생소하지 않을만큼 들려오긴 하지만 번-번-번에서 번아웃의 파장이 느껴지시는가?
더러 멘탈이 강한 사람들은 무슨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으나 이미 겪어본 사람들은 충분히 동감하리라 생각된다.
사는 게 야구경기도 아니고 아웃과 인이 따로 있나.. 사는 건 한 번 뿐인 반면에 야구는 새 경기를 뛸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쩜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55p
번아웃은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번아웃이 일 효율을 깡그리 앗아가는 통에 한 번 붙든 일이 끝나질 않아 마음놓고 놀거나 쉴 시간까지 사라지는 게 가장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휴식과 저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다리마저 불태워 없애버리는 게 번아웃이더군요.

60p
짐작이라 말하는 건 그때 나에게 벌어지는 일이 뭔지 당시에는 스스로 잘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험들은 한창 그 가운데 있을 때는 진행중이라는 게 보이지 않다가 지나가고 나서야 그 시간이 뭐였는지, 그때 내가 어땠는지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64p
좀 이상한 말이지만 오래 지속하기 위해선 언제든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65p
부디 적극적으로 더 많은 일을 거절하는 데 성공하기를, 잘 먹고 잘 자는 생활을 쟁취해내기를, 그래서 마침내 더 많은 쉼을 사수하기를 바랍니다. 언제든 멈출 수 있어야 더 오래 좋은 글들을 쓸 수 있을 테니까요.

82p
부디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들을 곁에 두고 단단히 붙드시길 바랍니다.

99p
우리는 아주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아주 많은 슬픔과 분노를 겪어낸 뒤겠지요. 많은 기억을 잊어버리고 또 어떤 기억은 선명한 채로, 그럼에도 자주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9p
상가를 나설 때마다 늘 마주하게 되는 진실도 마음에 다시 새겨봅니다.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죽음을 품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 것. 가슴 한켠에 저마다 깊은 슬픔을 묻고 사는 존재라는 것도.

124p
세상에는 덩크처럼 ‘애초부터’ 불가능한 게 훨씬 더 많다는 차가운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144p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좋고, 어진 사람이 되는 것도 좋지만, 저는 정말이지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물론 『논어』에서 공자님은 ‘지’나 ‘인’이 ‘용’에 우선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고, 저 역시 일견 동감하는 바이지만, 그래도 공자님이 21세기 한국에서 임산부로 환생한다면 생각이 바뀌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사, 오늘의 편지를 마무리하며 소리 높여 외쳐봅니다. 우리에게는 군자비추, 공자에게는 임신강추.

153p
정신이 신체를 지배하는가, 신체가 정신을 지배하는가에 대한 오랜 논란이 있죠. 제가 볼 때는 아무래도 더 아픈 쪽이 덜 아픈 쪽을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153p
아픈 뒤로 뭔가가 달라진 것 같아요. 한의사 선생님의 말대로라면 몸에 생긴 ‘꺾임’이 매사에 어떤 과속방지턱 같은 걸 만들어놓은 것 같습니다. 일할 때 속도가 잘 나지 않고, 집안일을 조금 하고 나면 금세 눕고 싶고, 운동할 때 일정 심박수 이상으로는 격렬해지지 않아요.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하기도 합니다. 좀처럼 아프지 않으면서 타인에게도 굳세기만 할 것을 요구하는 강인함과는 다르게, 이런 꺾임을 여러 번 반복해본 사람이 갖게 되는 내면의 단단함도 있지 않을까요? 내가 아프지 않을 때도 언제든 아플 수 있음을 알고, 어딘가 아픈 사람이 존재함을 알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잘 알아채고 도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같이 위와 장이 튼튼한 사람에게는 꽤나 어려운 일이지만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임신을 해보지 않아도 임신이 힘든 일이라는 걸 아는 것이, 사람다움일 테니까요.

162p
이렇게 어떤 마음과 마음을 장난스레 이어붙여 세상이 가끔씩 툭툭 던지는 유쾌한 농담들이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이왕이면 선하고 어진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꿈을 계속 꾸게 만들어요. 그래서 누가 오해받기 쉬운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왜 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술은 언제나 저를 조금 허술하게 만드는데, 허술한 사람에게 세상이 좀더 농담을 잘 던져서 그렇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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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총총 시리즈
황선우.김혼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선우씨의 말을 되새겨보는 장수님의 얼굴에서 근심에 눌려 있던 부분이 점차 구김 없이 펴지다가 환해지는 것을 보면서 이쪽에서 나온 힘이 저쪽으로 흘러가 어떤 생기 띤 변화를 가져오는 정직한 회로를 지켜보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얼마 전 크리스마스 새 단장을 한 친구네 사무실에서 스위치를 켜면 크리스마스트리에 휘감긴 전구들에 동시에 불이 반짝 들어오는 것을 보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워서 몇 번 더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며 신기해하는 기쁨과도 닮았어요. 크리스마스 같은 모임이었습니다.

어느 사회적 모임에서 만나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보다는 주로 특정 주제가 있거나 일과 관련한 전문적인 이야기를 나누어온 사람이 사실은 누군가의 딸이고, 그 관계망 안에서 남이 모를 무거운 짐들을 홀로 짊어지고 사는 존재이며, 꺾이기 쉬운 무방비한 인간이라는 것을 상가만큼 여실히 깨닫게 해주는 장소는 없는 것 같아요.

큰 웃음 끝에 흔이 "10대, 20대에도 듣지 못한 말을 40대에 듣는 것을 보면 요즘 내가 진짜 못나고 못 미덥고 나약해 뵈나보다"라고 씁쓸해하길래, 네가 아니라 세상이 못 미더워진 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다단계니, 사이비종교니, 보이스피싱이니, 사기 수법이 워낙 고도로 발달하고 다양해지니 무언가를 덥석 믿기에는 너무 많은 걸 걸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고요.(

상가를 나설 때마다 늘 마주하게 되는 진실도 마음에 다시 새겨봅니다.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죽음을 품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 것. 가슴 한켠에 저마다 깊은 슬픔을 묻고 사는 존재라는 것도.

"몇 년 다니면 그렇게 잘 칠 수 있어요?"
"응, 탁구는 10년은 배워야 해. 그래야 좀 쳤다고 할 수 있어."
팔다리를 우아하게 펼치며 눈에 안 보일 정도로 빠른 공을 쳐내는 선배님들에게 처음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는 상징적인 숫자로서의 ‘10년’을 말하는 줄 알았어요.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 뚜렷한 시간의 단위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이 속도로는, 정말 말 그대로 10년 걸릴 수도 있겠다고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흔님에게 화환을 보내준 것, 정말 고마워요. 이상하게 나까지 위로받은 것 같아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어지네요. 혼비씨의 한 해에도 그런 다정함이 종종 함께하기를, 그리고 흔님 어머님께는 가방 속에 목탁을 넣어 다니는 수상한 친구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덩크처럼 ‘애초부터’ 불가능한 게 훨씬 더 많다는 차가운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중년이 되어 다시 만화 『슬램덩크』를 완독하니, 진짜 포기를 모르는 게 아니라 실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그런 말로나마 스스로를 일으켜세운다는 게 보이더군요.

"見義不爲 無勇也 견의불위 무용야: 의로움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좋고, 어진 사람이 되는 것도 좋지만, 저는 정말이지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물론 『논어』에서 공자님은 ‘지’나 ‘인’이 ‘용’에 우선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고, 저 역시 일견 동감하는 바이지만, 그래도 공자님이 21세기 한국에서 임산부로 환생한다면 생각이 바뀌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사, 오늘의 편지를 마무리하며 소리 높여 외쳐봅니다. 우리에게는 군자비추, 공자에게는 임신강추.

『논어』의 주된 내용은 정치는 이렇게 해야 한다, 군자는 저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자님은 아주 금욕적인 사람이라 제 가치관과 부딪쳐 반발심이 드는 부분도 있습니다. "君子 食無求飽 居無求安 군자 식무구포 거무구안: 군자는 먹는 것에 대해 배부름을 추구하지 않고, 거처하는 데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아니, 기본적인 식사와 거주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다면 군자가 되어서 다 무슨 소용이죠?
제가 깜짝 놀라 분개하며 이 내용을 전했더니 김하나 작가가 이렇게 답하더군요.
"군자 너무 별론데? 그거 하지 말자, 군자비추."
그뒤로 군자비추君子非推는 우리집의 유행 사자성어가 되었습니다. 특히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거나 한껏 게으름을 부리면서 행복해할 때는 군자가 아닌 일개 소인이라 다행스럽습니다.

정신이 신체를 지배하는가, 신체가 정신을 지배하는가에 대한 오랜 논란이 있죠. 제가 볼 때는 아무래도 더 아픈 쪽이 덜 아픈 쪽을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제 위와 장은 그동안 얼마나 큰 안락 속에서 탐욕을 부려왔는지조차 몰랐던 커다란 무지에 대한 벌을 받았나봅니다.

아픈 뒤로 뭔가가 달라진 것 같아요. 한의사 선생님의 말대로라면 몸에 생긴 ‘꺾임’이 매사에 어떤 과속방지턱 같은 걸 만들어놓은 것 같습니다. 일할 때 속도가 잘 나지 않고, 집안일을 조금 하고 나면 금세 눕고 싶고, 운동할 때 일정 심박수 이상으로는 격렬해지지 않아요.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하기도 합니다. 좀처럼 아프지 않으면서 타인에게도 굳세기만 할 것을 요구하는 강인함과는 다르게, 이런 꺾임을 여러 번 반복해본 사람이 갖게 되는 내면의 단단함도 있지 않을까요? 내가 아프지 않을 때도 언제든 아플 수 있음을 알고, 어딘가 아픈 사람이 존재함을 알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잘 알아채고 도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같이 위와 장이 튼튼한 사람에게는 꽤나 어려운 일이지만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임신을 해보지 않아도 임신이 힘든 일이라는 걸 아는 것이, 사람다움일 테니까요.

천만다행으로, 극도의 긴장상태에 몰리면 일부 극도의 내향인들에게서 생존본능처럼 발현되는 ‘긴장성 외향인 돌변증’ 덕에 평소보다도 높은 텐션으로 무사히 잘 끝냈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떤 마음과 마음을 장난스레 이어붙여 세상이 가끔씩 툭툭 던지는 유쾌한 농담들이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이왕이면 선하고 어진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꿈을 계속 꾸게 만들어요. 그래서 누가 오해받기 쉬운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왜 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술은 언제나 저를 조금 허술하게 만드는데, 허술한 사람에게 세상이 좀더 농담을 잘 던져서 그렇다고요.

양력보다 음력이 한 해에 11일 정도 짧기 때문에 점점 차이가 벌어지는데, 계절이 어긋나버리는 걸 막기 위해 간간이 윤달을 넣는다고 합니다. 덤달이라고도 부르는 이때는 평소와 다른 여벌의 시간이라 무슨 일을 해도 탈이 생기거나 부정을 타지 않는다고 해요. 그래서 수의를 만들거나 산소를 이장하는 등의 일을 몰아서 치르는 거죠. 재미있는 개념 아닌가요? 19년마다 7번의 윤달을 넣는다고 하는데, 뭔가 정확하게 여닫는 거대한 시간의 문을 슬쩍 열어두고 숨차게 쫓아오던 지각생들을 받아주는 신화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잔디와 제사가 해야 할 일, 의무의 영역이라면 꽃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 잉여의 영역입니다. 다정함이란 어쩌면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마음을 쓰는 일이겠지요. 혼비씨가 지하철 앞에 선 사람의 안색을 살피고, 그분이 소리쳐 혼비씨를 깨워주는 풍경처럼 말이죠. 이런 종류의 다정함이 하루에 하나씩 곁에 쌓인다면 저는 천국이나 알프스, 아이비리그를 그리며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평소에도 24절기 챙기는 일을 좋아합니다. 절기는 태양이 걷는 스물네 보의 발걸음이고, 그에 맞춰 정처 없이 흐르는 시간에 스물네 개의 매듭을 묶는 것이어서, 함께 걷는 것을 좋아하고 매듭짓는 것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무척 매력적인 개념이에요. 물론 절기의 의미를 되새기기에 좋은 최적의 장소를 찾아 최상의 음식으로 누가 봐도 그럴듯하게 챙기지는 못합니다

경칩에 뭐라도 하겠다고 밤 11시에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개구리처럼 뛰어다니는 중년들이라니 뭔가 애잔하지 않습니까……

저 역시 항상 보고 싶은 전시나 듣고 싶은 강의가 한가득이면서도, 여유 시간이 생기면 결국 집에 눌러앉아 책을 읽는 가장 편리하고 게으른 선택을 하고 맙니다.

무엇보다 게을러서 책 읽는 취미가 저절로 생긴 것 같아요. 책은 그냥 손만 뻗으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니까요.

시간이 사람에게 하는 일이 그사이 어김없이 우리에게도 일어났다. 풍경 사이로 끊임없이 일상의 피로를,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늙음과 죽음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흘려보내는 것 말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태풍을 안고서 잔잔하게 살아가듯 그 모두를 품고도 되도록 명랑한 소식을 전하려 애썼지만 실패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덜 검열하고 덜 재촉했던 건 모니터 저편에서 기다릴 수신인의 존재 덕분이었다.

내가 이렇게 열 통의 편지를 쓰다니 놀라운 일이다.(몇몇 친구들은 "이야, 너한테 편지를 받으려면 계약을 해야 하는 거구나?"라고 마구 놀렸는데 맙소사, 나는 정말 자본주의의 쓰레기다……)

‘당연히 최선을 다하겠지만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하지는 않는 것’을 실현하는 여러 방법이 있을 텐데, 그중 ‘함께 나눠서 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꼭 물리적인 몫의 나눔이 아니더라도 함께 꾸준히 일상을, 웃음을, 마음을 나누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앞으로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번아웃은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번아웃이 일 효율을 깡그리 앗아가는 통에 한 번 붙든 일이 끝나질 않아 마음놓고 놀거나 쉴 시간까지 사라지는 게 가장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휴식과 저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다리마저 불태워 없애버리는 게 번아웃이더군요.

누군가는 속이 빈 나무를 두드리는 데 집중하며, 또다른 누군가는 속이 빈 플라스틱 공을 쫓아다니는 데 몰두하며 자신만의 번뇌를 다스리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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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 장소/불국사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주는 장소인 불국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불국사의 극치는 돌에 있다. 인공석과 자연석을 어우러지게 배치했고, 아치를 비롯하여 곳곳에 돌을 활용한 다양한 건축학적 발상이 배어 있다. 대웅전 경내에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한국 예술의 걸작이다. 보통 석가탑이라부르는 불국사 삼층석탑은 안정감과 상승감이 완벽에 가까운 조화를 보인다. 다보탑은 《법화경》에 등장하는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상상의 탑을 형상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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